◇대분기/케네스 포메란츠 지음/김규태 등 옮김·김형종 감수/686쪽·3만8000원/에코리브르
‘일찍이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 캘리포니아학파 학자인 저자, 서구의 정통적 발전론 반박
유럽과 경제 수준 비슷하던 중국, 19세기 들어 인구 압박으로 위기… 중국엔 노천 석탄 풍부하고 신대륙 발견으로 식량·자원 보충
19세기 중반 중국 광저우의 공장(위 사진)과 1822년 영국 카운티 더럼의 히턴 탄광을 그린 그림. 책은 18세기까지 중국에 비해 경제적 우위를 갖지 못했던 영국이 채굴 비용이 싼 노천 탄광을 활용하면서 19세기부터 앞서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GettyImages 멀티비츠 제공
서구를 기준으로 중동(미들 이스트)과 극동(파 이스트)이라는 명칭은 있지만 반대로 ‘중서’(미들 웨스트)와 ‘극서’(파 웨스트)라는 지리 관념은 없다. 서구, 동양은 지리적 지칭이지만 사실상 우열 관계를 함축한다.
유럽은 ‘대항해 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친 뒤 한때 동아시아 일부를 포함한 세계 각지를 식민 지배했다. 왜 유럽이 승리했고 동양은 ‘먹잇감’이 되었나. ‘대(大)분기’, 즉 번영의 승패가 크게 갈라진 건 언제이고 무엇 때문일까.
유럽의 시각이 반영된 정통적 주장은 서구가 여러 면에서 일찍부터 내부에 우월한 조건을 갖고 있었고, 번영은 필연이었다고 설명한다. 유럽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동양보다 높았고, 시장경제와 사유재산권을 확립했으며, 노동자의 임금이 비교적 높아 기계에 투자할 요인이 있었고, 대규모 자본을 조달하는 제도를 만들어 냈고, 헬레니즘 전통을 르네상스로 이어받아 과학혁명을 했고, 민주정치를 확립해 상업을 억눌렀던 동양과는 달랐다는 등의 주장이다.
2000년 출간되자마자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은 이 책은 이 같은 주장을 반박한다. 유럽의 번영은 우연에 가깝고, 내부 요인보다 외부의 자원 확보 덕이며, ‘대분기’는 기존 학설보다 훨씬 늦은 19세기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시카고대 교수로 경제사 분야의 수정주의를 대표하는 캘리포니아학파의 주요 학자인 저자는 1750년경 영국과 중국의 주요 지역은 경제 수준에 별다른 격차가 없었다고 설명한다. 농촌의 생산력과 공업, 시장의 효율성, 사람들의 열량 섭취량, 기대수명 등에서 우열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1인당 연료 공급량은 중국이 유럽보다 많았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서 동아시아는 인구 압력을 견뎌 내지 못해 생태적 위기를 맞았다. 인구가 급증하자 숲이 파괴됐고 토양이 침식됐다. 양쯔 강 삼각주 지역은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곳이었지만 자원 부족을 화석 에너지원 사용으로 해결하기에는 석탄 매장량이 적었고, 채굴 비용도 비쌌다.
반면 영국은 달랐다. 같은 위기에 처했지만 값싸게 캘 수 있는 노천 탄광이 널려 있었다. 이런 자연조건은 필연이 아니라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영국은 신대륙에서 식량과 자원을 수급해 생태적 압박을 이겨 냈다. 중국은 그와 같은 배후지를 만들지 못했다.
책은 서유럽과 중국, 영국과 중국의 양쯔 강 삼각주 지역을 비교한다. 발전 정도가 다양한 유럽 전체와 중국이라는 국가 하나, 유럽의 국가 하나와 동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했던 특정 지역을 비교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18세기 중국 강남 지방은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보다 인구가 많았고, 경제적 기능은 유럽에서의 영국 역할과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한다.
‘16∼18세기 아시아가 유럽 못지않은 경제 발전 과정에 있었다’는 이 책의 요지는 일단 기분 좋다. 그러나 서구의 ‘내재적 발전론’(유럽 중심주의)을 비판하며 아시아의 ‘자본주의 맹아’를 주장하는 듯한 저자의 연구는 여전히 서구적 발전론의 틀 안에 있다. 경제사 연구자로서는 당연한 것일 수 있겠다.
내용이 방대하고 다소 복잡해 책장이 넘어가는 데 오래 걸리지만 세계적 주목을 받은 저작을 공들여 읽는 일에는 그만한 쾌감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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