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민경]삼촌팬을 위한 변명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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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금요일 저녁 모임 제안에 몇 사람이 머뭇머뭇하는 게 느껴졌다. 모 대기업 부장이 “그러죠. 재방송 보면 되니까”라고 하자 여기저기서 “나도 프로듀스101 본다”며 시끌벅적하다.

‘프로듀스101’은 46개 연예기획사 소속 연습생들과 개인 연습생 등 14∼29세 ‘소녀’ 101명이 모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대중의 투표를 통해 최종 11명의 ‘국가대표 걸그룹’을 뽑는, 현재 진행 중인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그렇다면 대기업 간부, 임원으로 밤낮없이 바쁘다는 이들이 바로 공개방송에서 굵은 목소리로 소녀들의 이름을 외치는 그 ‘삼촌팬’들이었나? 1위에서 11위까지 걸들의 프로필은 말할 것도 없고 방출된 출연자들의 사연까지 꿰는 걸 보면 친조카 뒷바라지하는 삼촌 이상이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기획사와 연습생, 걸그룹, 경쟁 프로그램이 가진 문제점을 반복한다. ‘0원 출연료 계약서’가 공개됐고, 주류 남성의 시선을 여성들에게 내면화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출연자를 선이나 악으로 캐릭터화하는 악마의 편집이 또 논란이 되고, 너무 비슷한 프로그램이 일본에서 나왔다는 걸 웬만한 시청자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이 같은 지적들은 묻힌다. 시청률이 모든 비판을 압도했기 때문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뻔뻔하거나 대담한 것이 틀림없는 이 방송사가 예상했을지 모르겠지만 ‘프로듀스101’이 중년 남성들의 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101명의 소녀 중에 내가 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삼촌팬을 위한 변명쯤 되겠다. 삼촌팬은 소녀들을 관음증으로 소비하는 게 아니라, 모든 순간이 선택(주제가가 ‘픽 미 업’이다) 아니면 방출, 생존 아니면 죽음인 소녀들에게서, 문득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금수저’라고 불리는 유명 기획사의 연습생들이 있고, ‘흙수저’ 개인 연습생들이 있다. 천부적 자질의 ‘로또’ 소녀가 있고 팀의 전력만 깎아먹는 ‘고문관’도 있다.

이제 연습생,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국민투표에서 선택받으려면 방송 분량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려’ 걸그룹 지망생이 몸치에, 음정이 틀리고, 신데렐라의 사악한 언니처럼 보인다 해도 튀고 볼 일이다. 그래야 야단맞고, 노력하고, 후회하는 모습이 좋은 ‘상품’이 된다. 인기곡보다 방송사에서 ‘미는’ 곡을 고르는 ‘정치적’ 계산도 필요하다. 실력이 뛰어난 팀에 묻어가기와 꼴찌들 사이에서 돋보이기, 어느 쪽이 소녀 혹은 당신에게 유리한가. 리더의 명분이란 거짓말이며, 리더란 그 자신이 끝내 이기는 자임을 이 프로그램은 보여준다. 여기 낙엽만 굴러가도 깔깔대는 소녀들의 청춘은 없다. 눈물도 전략인 잔혹소녀극이 있을 뿐.

고백하건대, 그동안 소녀들의 노골적인 춤이 불편했던 나는 ‘프로듀스101’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소녀들은 ‘학예회 삘이 나지 않게’ 몸을 내밀고 손을 몇 번 다리와 가슴에 대고 시선을 몇 도 올리라는 ‘공장’ 매뉴얼을 따랐던 거였다. 섹시, 애교, 다 사치다. 이제는 소녀들의 90도 인사와 ‘뽑아주세요’라는 말이 환청이 된다.

세상에 제일 쓸데없는 일이 걸그룹 걱정. 삼촌팬은 소녀들을 보며 얼마 전 방출된 김 과장, 밤샘은커녕 점심식사 전까지 서류 한 장 읽기도 힘들어진 자신을 떠올린다. 그러니 중년의 삼촌팬이 금요일 밤의 술자리도 마다하고, 혼자 TV 앞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시거든, 그저 모른 척해 주시길.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holden@donga.com
#삼촌팬#프로듀스101#연습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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