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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광화문 글판-힘든 시대엔 희망, 지친 마음엔 쉼표

입력 2010-10-06 03:00업데이트 2010-10-06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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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엔 격언 투 글귀 유지, 1998년부터 감성적 시구로유종호 씨 등 선정위원 구성, 시민응모 등 놓고 토론 뒤 결정
서울 세종로사거리 교보생명 본사 사옥에 걸려 있는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 2010년 가을 편. 괴테의 명언을 인용해 각색한 것이다. 사진 제공 교보문고


■ 교보 ‘광화문 글판’ 20년… 글귀 원문-제작 과정 등 소개한 책 출간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

지금 교보생명 서울 광화문 본사 외벽에는 이런 글귀가 걸려 있다. ‘광화문 글판’이라는 이름으로 계절마다 새 글귀를 내걸어온 교보가 올가을에 선보인 문안이다. 바쁜 현대인에게 ‘쉼표’와도 같이 숨 돌릴 여유를 주는 광화문 글판이 20년을 맞았다. 교보문고는 1991년부터 글판을 수놓은 글귀 54편, 각 글귀의 원문, 글판 제작의 역사와 뒷이야기 등을 모아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라는 책을 펴냈다.


‘근하신년’류의 홍보성 문구가 지금 같은 글판 형태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91년이다.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 활력 다시 찾자’는 글귀였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글귀를 내놓자’는 교보생명 창업자 고(故) 신용호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그 뒤로 ‘훌륭한 결과는 훌륭한 시작에서 생긴다’ 같은 격언 투의 글귀가 유지되다 1998년 봄 고은 시인의 시에서 발췌한 ‘떠나라 낯선 곳으로/그대 하루하루의/낡은 반복으로부터’를 시작으로 감성적인 시구가 글판을 장식했다.

‘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2006년 봄,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대추가 저절로/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천둥 몇 개, 벼락 몇 개’(2009년 가을, 장석주 ‘대추 한 알’), ‘바람에게도 길은 있다/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느니/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2003년 가을, 천상병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봄이 속삭인다/꽃 피라 희망하라 사랑하라/삶을 두려워하지 말라’(2007년 봄, 헤르만 헤세 ‘봄의 말’), ‘사랑이여, 건배하자/추락하는 모든 것들과/꽃 피는 모든 것들을 위해 건배’(2008년 봄, 파블로 네루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글판에 얽힌 에피소드도 많다. 1998년 초 청와대에서 일하던 한 공무원은 ‘떠나라 낯선 곳으로…’라는 글귀에 자극을 받아 공무원을 그만두고 평소 하고 싶었던 사업을 시작했다. 2004년에는 갓 제대한 청년이 미래를 고민하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며 피었나니’라는 글귀에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생활을 하게 됐다고 교보 측에 알려왔다.

책은 누가 어떻게 글귀를 정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준다. 2000년 12월부터는 교수 시인 소설가 등으로 광화문 글판 문안 선정위원회가 구성됐다. 교보생명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응모작과 각자의 추천작을 놓고 토론을 거쳐 최종작을 결정한다. 시민들의 응모작은 분기마다 300∼400편에 이른다.

2000∼2004년 선정위원을 지낸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는 “광화문 글판은 시대 상황과 긴밀히 소통했다”고 밝혔다. 유 교수는 경기가 좋지 않았던 2001년 겨울에 이성부 시인의 ‘봄’에서 글귀를 선정한 사실을 예로 들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봄.’

이제 광화문 글판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떤 글귀가 등장할지 시민들 사이에 궁금증을 낳을 정도로 광화문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책 서문에서 시인들은 각기 광화문 글판이 갖는 의미를 풀이했다.

“광화문 글판은 서울의 푸른 하늘이다. 메마른 일상을 적시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고 20년이 넘게 광화문 거리에 굽이치는 푸른 강물이다.”(김용택 시인)

“저 짧은 시구들이 실패하고 낙망한 마음들을 두루 품고, 시름과 걱정은 어루만져 덜어주고, 아물지 않는 상처와 영혼의 흠결들을 덮어주겠다 싶었다. 때로는 불 꺼진 재처럼 시린 가슴마다 기쁨과 열정의 불을 지펴 주기도 하겠구나 싶었다.”(장석주 시인)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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