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 몸담았지만 이젠 소설 쪽에 힘 쏟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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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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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씨, 웅대한 서사 ‘고래’서 스케일 확 줄인 신작 내


오랜만에 반가운 작가가 돌아왔다. 2004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장편 ‘고래’로 소설에 대한 기존 관념에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렸던 소설가 천명관 씨(46)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고래’의 낯선 서사와 장대한 스케일은 소설의 강렬한 이미지만큼이나 그의 이름을 문단에 각인시켰다. 하지만 2007년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펴낸 뒤 단편 발표 한 번 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의 소식과 차기작을 궁금해하는 이가 많았음은 물론이다.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신작 장편 ‘고령화 가족’을 들고 온 그를 만났다.

천 씨는 유쾌한 목소리를 가진 달변가였다. “계간지 등에 단편을 꾸준히 발표해야 이 작가가 뭘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단편을 안 쓸 뿐이지 계속 뭔가 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러면서도 그는 “사실은 단편 청탁이 없기도 했다”며 씩 웃어 보였다.

그는 등단하기 전 영화판에서 공력을 다진 시나리오 작가였다. 영화 ‘총잡이’ ‘북경반점’ 각본을 썼다. 문예창작과 출신의 문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 문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영화계로 뛰어들었던 그의 이력은 단연 눈에 띈다. 이 작품도 2년 전부터 구상했지만 연극 ‘참치’ 연출 등 잠시 ‘딴짓’을 하다 보니 더디게 진행됐다고 한다.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작품은 3대에 걸친 유장한 서사를 선보였던 ‘고래’와는 결이 사뭇 다르다. 작가의 말대로 ‘아주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 데뷔 영화가 흥행에 참패하며 빈털터리가 된 40대 후반의 영화감독. 그가 다시 노모의 집으로 들어가 백수 형, 이혼 당한 여동생과 함께 살며 겪는 가족 내의 소극을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새삼 가족서사를 들고 온 이유에 대해 작가는 “계속 ‘고래’ 같은 소설만 쓸 수는 없으니까”라고 농담했다.

특히 ‘충무로의 낭인’인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러 면에서 작가 자신의 삶의 궤적이 투영된 듯하다. 천 씨는 영화제작사에서 근무하거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 일을 거들며 30대를 보냈다. 최종 목표는 감독이었다. “직접 쓴 시나리오를 들고 투자자를 찾아다니기도 여러 번, 제작이 결정됐다 엎어지기도 했고 캐스팅에 문제가 생겨 좌초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충무로를 떠도는 낭인들이 주변에 너무 많으니 그런 삶을 누구보다 잘 알죠.” 그는 “가족서사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화려한 성공, 물질적인 가치만 추구했던 한 사람이 평범한 삶의 의미를 발견해 가는 성장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소설 끝 후기에서 그는 “동료 소설가인 박민규와 김언수, 그리고 백영옥 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고 썼다. 문단 밖에서 등장한 이 작가가 단편청탁 시스템 같은 문단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연합하게 된 “비슷한 성향의 작가들”이다. 나이는 1990년대 활동한 작가들과 엇비슷하지만, 쓰는 작품은 2000년대 이후 작가들과 맥이 닿는 어색하게 ‘끼인’ 이들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소설을 줄곧 쓰면서도 소설가라는 호칭을 어색하게 여겼고, 문단에서 주목받았지만 문단과는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에게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그는 “아직 낯설지만 이제는 소설가란 정체성을 가져 보려 한다”고 말했다.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구상하는 차기작의 초고 작업도 시작했다. ‘고래’처럼 광대하지만 그보다는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고령화 가족’은 여러 면에서 그의 새로운 출발점 같아 보인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시작됐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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