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한자표기 ‘仙仁’ 감안 땐 기록상 최초의 선비는 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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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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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지성사’ 펴낸 한영우 교수

화랑 등 무사집단으로 진화
고려때부터 武보다 文중시
조선시대 들어 유학자 지칭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조선시대 유학자를 흔히 사대부(士大夫)라고 부른다. 그래서 ‘선비’라고 하면 가장 먼저 조선시대 유학자를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한영우 이화학술원 석좌교수(사진)는 이 같은 통념에 반박하면서 여러 기록을 토대로 선비의 연원을 고조선으로 끌어올렸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부터 선비는 우리 고유의 언어로서 존재했으며 고조선에서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선비문화는 외래사상과 융합되면서 발전했다는 해석이다. 한 교수는 이런 해석을 담아 최근 ‘한국선비지성사’(지식산업사)를 펴냈다.

한 교수는 “고대인들은 순수 우리말인 선비를 한자로 표현하면서 선인(仙人) 또는 선인(先人)으로 썼는데 삼국사기에 단군을 선인으로 지칭한 대목이 있다”고 말했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집(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이라는 구절이다. 한 교수는 “왕검은 단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구절에 따르면 단군은 우리나라 최초의 선인, 즉 ‘선비’가 되는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선비는 국가에서 양성한 무사적인 청소년집단으로 진화했다. 한 교수는 “신라의 국선이나 화랑, 고구려의 선인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이와 관련 있는 중국의 기록을 제시했다. 고구려의 선비를 중국의 삼국지와 당서(唐書)에는 선인(先人)으로,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에서는 선인(仙人)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한자가 서로 다른 것은 중국인의 관점에서 음역하면서 생긴 혼란이라고 한 교수는 설명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고려시대 들어 문(文)이 강조되면서 무예를 중시하던 삼국시대의 선비문화가 약해졌고, 조선시대 때 선비정신은 성리학과 융합해 한 단계 진화하면서 문사(文士)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선비를 조선시대 유학자로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융합하려는 선비정신은 개화기에도 이어졌다. 한 교수는 ‘도덕적 가치는 우리 것을 지키고 기술문화는 서양 것을 받아들인다’라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과 구본신참(舊本新參)을 표방한 광무개혁을 예로 들었다.

한 교수의 저술은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의 선비문화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단재 신채호의 생각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한 교수는 “이 책의 내용을 반박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면서 “선비를 유교와 함께 들어온 외래 개념으로 생각하는 통념에 맞서서 선비가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가 꼽는 선비정신의 핵심은 홍익인간, 공익정신, 민본 등이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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