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녀의 반란? 경림씨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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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7일 07시 00분


딱 맞는 옷 걸친 듯…범상찮은 자연스러움
치마 말아쥐며 신음 “어흐흐”…딱! 박경림
네모 얼굴에 자신감…트레이시는 혹 당신?

1962년 미국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헤어스프레이의 여주인공 트레이시로 열연 중인 박경림(왼쪽)과 링크 역의 정동화.
1962년 미국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헤어스프레이의 여주인공 트레이시로 열연 중인 박경림(왼쪽)과 링크 역의 정동화.
‘공연을 보기 전엔 샌드위치’라는 CF가 있는 것도 아닌데(있다면 꽤 성공하지 않을까) 어쩐 일인지 공연을 앞두고는 샌드위치를 먹게 된다.

그런 사연으로 양 손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나눠 들고 뮤지컬 헤어스프레이를 보기 위해 서초구 한전아트센터를 찾게 됐다.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공기가 차가워져 크리스마스 냄새가 났다. 공연장 로비 앞에는 ‘경림 언니 파이팅-소녀시대 수영’이라 적힌 화환이 세워져 있다.

공연 30분전. 매표소의 줄이 눈에 띄게 길어진다. 잔뜩 부풀린 가발에 리본을 달고, 깜찍한 메이크업을 한 여성관객들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트레이시(헤어스프레이의 여주인공)의 코스프레인가 싶을 정도다.

오늘의 캐스팅은 박경림(트레이시), 문천식(트레이시 엄마), 정동화(링크), 오진영(엠버), 김자경(페니) 등등. 그러니까, 오늘은 박경림이다.

헤어스프레이는 1962년 미국 볼티모어가 배경이다. 뚱뚱하고 못 생긴 여고생 트레이시가 TV쇼에 나가게 되고, 인종차별 투쟁 끝에 흑인친구들과 전국 생방송에서 공연한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1막은 한없이 신나면서 발랄하고, 2막은 조금 진중해진다.

전체적으로 젊은 여성 취향이 짙다. 세상의 모든 젊은 여성이 핑크 애호가는 아니겠지만, 의상과 무대에서 온통 핑크색이 물결친다. 패리스 힐튼이 보았다면(이미 보았겠지만) 무척 좋아하지 않았을까.

박경림의 트레이시는 뭐랄까. 기교보다는 자연스러움. 하이페츠보다는 요제프 시게티의 바흐를 듣는다고 해야 할지. 그냥 그런 듯하면서도 비범하다. 기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뭔가를 담고 있다.

솔직히 공연을 보면서 박경림을 잊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굿모닝 볼티모어’를 부를 때만 해도 두 개로 보이던(물론 트레이시와 박경림이다) 피사체가 시간이 흐르면서 초점이 딱 맞았던 것이다. 관객의 호응도 그랬다.

처음엔 박경림이 등장했다는 것만으로 쏟아지던 함성이 점차 그의 연기와 춤, 노래로 옮겨갔다. 이것은 꽤 미묘한데 배우가 뭔가를 하기 전에 함성이 나오느냐, 뭔가를 하고 나서 나오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오디션에서 탈락한 트레이시가 TV쇼에 극적으로 뛰어들던 순간과 ‘엄친남’ 링크가 은근한 눈빛으로 ‘우린 운명이야’를 불러주자 치마를 말아 쥐며 ‘어흐흐’ 신음하던 장면은 박경림의 명장면으로 꼽을 만했다.

배우 박경림을 에워싼 조연, 앙상블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정동화(최근 ‘나쁜자석’으로 연극 나들이를 했다)의 노래와 춤은 갈수록 날이 선다는 느낌. 페니의 김자경은 여전히 런닝머신 위를 달리는 듯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개그맨 출신 문천식의 뚱뚱한 중년여인 변신에도 한 표.

고등학교 시절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방송에 발을 들여놓게 된 박경림의 인생 자체가 트레이시의 전형이다. 작달만한 키, 크고 각진 얼굴에 꽉 막힌 목소리지만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을 지녔다는 점도 그대로다.

박경림의 트레이시 연기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비밀이 여기에 있다. 과연 묻고 싶다.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연기를 하십니까?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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