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발레를 알 것 같은데…”

  • 입력 2009년 4월 27일 02시 58분


‘39세 발레리노’ 황재원 씨 마지막 주역무대

26일 오후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유니버설발레단의 발레 ‘라 바야데르’ 공연이 끝나자 박수와 함께 여러 차례 커튼콜이 이어졌다. 커튼콜이 끝날 무렵 무대 옆에서 중앙으로 은색 리본들이 휘날렸다. 이날 공연에서 주연 솔로로 출연해 힘 있는 독무를 선보인 황재원 씨(39·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를 위한 축하 행사였다. 이날 공연은 그가 주역으로 오른 마지막 무대였다. 여러 이유로 무대에 오를 기회는 있겠지만 발레리노로는 ‘환갑’이나 다름없는 나이를 감안하면 사실상 은퇴 무대인 셈이다.

실내에 불이 켜지고 관객들이 빠져나갈 무렵, 무대에서는 20분간 황 씨의 고별 무대를 기념하는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꽃다발 증정과 함께 후배 발레리노 10여 명이 “브라보, 브라보”를 외치며 황 씨를 허공으로 헹가래 쳤다.

문훈숙 단장은 감사패를 주면서 “재원 씨가 고교 때 발레 ‘심청’의 엑스트라로 출연해 처음 만났다”며 “세월이 흘러 우리 발레단의 대들보 역할을 하던 발레리노가 주역에서 물러난다니 아쉬우면서도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문 단장을 비롯해 강예나 황혜민 이현준 엄재용 씨 등 후배 무용수들을 비롯해 40여 명이 참석했다. 발레단에서 그는 ‘황금 손’의 발레리노로 불렸다. 농구공을 한 손에 잡을 만큼 큰 손을 가진 그는 발레리나를 가장 편하게 안는 최고의 파트너이자 자신보다 발레리나를 돋보이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1993년 세종대 무용학과를 졸업하며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한 황 씨의 발레 인생은 비교적 순탄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던’ 첫 데뷔 무대 ‘지젤’의 알브레이트 역을 시작으로 ‘심청’ ‘호두까기 인형’ ‘돈키호테’ ‘로미오와 줄리엣’ 등에서 주역을 도맡았다. 국내외 무대에 오른 횟수만 808회. 하지만 은퇴를 앞둔 요즘 발레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토대를 닦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크다고 한다.

“무대 위 발레리노는 남들이 보기엔 화려하지만 그 몸짓에는 내면의 괴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요즘엔 병역 문제 때문에 재능 있는 후배들이 하나 둘 발레를 포기하는 걸 보면 안타깝고…. 운동선수들은 연봉이라도 많이 받지만 우리는 어디 그런가요.”

올해 말까지인 유니버설발레단과의 계약이 끝나면 그는 “발레리나가 아닌 후배 발레리노를 받쳐주는 지도자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평소 말수가 적은 황 씨의 짧은 말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1991년 고교 2학년 때 발레를 시작한 뒤 큰 부상 없이 하고 싶었던 걸 다 해봤습니다. 매번 그렇듯 오늘 무대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만 이제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물러나야 한다니, 오늘 이 무대에 더 애착이 가네요.”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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