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유모차의 무엇이 그를 유혹했을까

  • 입력 2008년 4월 19일 02시 58분


◇유모차를 사랑한 남자/조프 롤스 지음·박윤정 옮김/348쪽·1만3800원·미래인

캐나다 시골마을 출신인 론과 재닛 라이머는 1964년 결혼했다. 행복한 신혼, 쌍둥이를 기대했던 부부는 1965년 정말 건강한 사내 쌍둥이를 출산한다. 브루스와 브라이언.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꿈꿨던 그들에게 불과 8개월 뒤 시련이 닥친다.

오줌을 눌 때 힘겨워하는 쌍둥이. 의사는 포경수술만 하면 해결된다고 했다. 하지만 어쭙잖은 진단이 화근이었다. 수술을 마무리할 때 쓰는 전기 기구를 잘못 다뤄 브루스의 음경이 뿌리까지 타버린다. 소식을 들은 당대 명의인 미국 존스홉킨스대 존 머니 박사는 브루스를 여자아이로 키울 것을 제안한다. 전무후무한 일란성 쌍둥이의 성별 바꾸기가 벌어졌고 브루스는 브렌다가 된다.

‘유모차를…’은 이상한 책이다. 핸드백과 유모차에 집착한 성도착증환자 등 TV프로그램 ‘믿거나 말거나’에나 나올 법한 16가지 사건을 다룬다. 그렇다고 흥미 위주의 잡동사니는 아니다. 심리학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 물음을 던진다.

얼핏 믿기 어려운 황당한 사례를 심리과학에서 다루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과학이라면 좀 더 보편적인 사례를 다뤄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영국 사우샘프턴대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의 생각은 확고하다.

“사례연구는 인간 심리의 특정한 문제는 물론이고 일반적인 문제들도 조명해준다. 너무 특이해서 다른 방식으론 어떻게 해도 연구할 수 없던 행동이나 경험을 관찰해주고, 이전에는 있을 법한 것으로 생각지 않았던 행동들까지 탐구하게 해준다.…사례연구는 개인을 더욱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으며,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라이머 쌍둥이’ 일화도 그중 하나다. 브렌다로 키워진 브루스는 논란에 그치지 않았던 문제를 가늠해볼 절호의 기회였다. 즉, 인간은 성 정체성을 타고나는가, 중립적인 성으로 태어나는가. 이런 실험은 과학자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브루스는 자신의 성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열다섯 살에 진실을 알고는 다시 남성으로 돌아간다. 성 정체성은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저자는 과학적 잣대로 사건을 다루면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는다. 사례연구는 연구자의 해석에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는 단점을 지녔다. 저자는 오히려 그것이 장점이 된다고 봤다. “연구자가 대상과 따뜻한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다면 직접적인 설명으로 상세한 내용을 전달하기란 상당 부분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원히 현재를 살았던’ 헨리 이야기를 보자. 1953년 뇌 전문 외과의사 빌 스코빌은 헨리의 간질을 치료하려 전두엽 절제술을 벌인다. 그후 헨리는 병은 나았지만 기억을 ‘저장’하지 못한다.

이 사례를 통해 현대 의학은 뇌의 해마 융기가 기억을 보관하고 관련 기억을 연관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음을 밝혀낸다.

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헨리의 이후의 삶을 좇는다. 잔디를 깎다가도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까먹곤 하지만 유쾌한 성정의 헨리는 열심히 살았다. 비록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매번 처음 듣는 양 슬피 울지만.

“기억이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언어도 가족도, 의미 있는 삶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순간으로 머물게 된다.…하지만 어느 면에서 헨리의 기억상실은 축복으로 볼 수도 있다. 기억상실 덕분에 자신이 얼마나 의미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비극적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역설적으로 이 책은 황당한 사례를 다루고 있기에 재밌다. 물론 이 중엔 ‘아베롱의 야생 소년’처럼 꽤 알려진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해박한 과학지식과 인문학적인 관심으로 뻔한 사건도 다시 생각하게끔 만드는 능력을 보여준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비슷한 듯 다르고, 다시 보면 또 다르다. 원제 ‘Classic case studies in psychology’(2005년).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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