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가는 책의향기]인문학책에서 삶의 지혜 구해봐

  • 입력 2007년 2월 24일 03시 00분


From: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To: 40대에 돌입한 남동생 기현에게

어제 초등학생, 유치원생 천사 같은 두 아이를 데리고 세배하러 온 너에게서 ‘쓸쓸하다’는 말을 들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작은 아파트를 장만하고 직장에서 중간관리자가 되고 월급이 올라가고! 정신없이 달리는 중에 어느덧 마흔이 돼 버렸다고 토로하는 너의 슬쩍 벗겨진 이마, 아이 뺨을 만지며 과연 이 길로 달리는 게 옳은가 묻는 헛웃음, 그런 너를 바라보고 있자니 누나 마음에도 별의별 상념이 생겨났다. 강보에 싸여 잠결에 웃던 너, 초등학교에 입학해 손수건을 앞가슴에 달고 다니던 모습이 선한데 벌써 중년의 입구에 들어서다니!

돌아갈 때 네게 책을 몇 권 들려 준다는 걸 잊었다. 아니 밥벌이의 긴장과 중압에 휘둘린 네 뒷어깨를 보고 난 후 내가 나름대로 챙겨 본 책들이다. 먼저 천명관의 소설 ‘고래’다. 구체적인 정보를 주는 실용서 말고는 소설 따위를 읽을 시간은 도무지 낼 수가 없다고 했지. “상급자가 되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한 줄 알아, 누나?” 하며 웃었지. 그렇다. 세상에 만만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럴수록 고래를 읽기를 권한다.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 구성과 문법을 완전히 뒤집는다. 신화 같기도 하고 원시 굿판 같기도 하다. 장쾌하고 무시무시하고 재미있고 우습고 허무하고 슬프다. 고래에는 몸무게 120kg에, 뱀 한 마리를 표정 변화 없이 생으로 씹어 먹는 듣도 보도 못한 여주인공이 나온다. 꼬깃꼬깃하고 옹졸한 일상을 제 몸에서 통렬하게 떼어 버리게 만드는 힘이 문장 안에 넘친다. 이 소설 안에는 각종 법칙이 범람한다. 자연의 법칙, 유전의 법칙, 사랑의 법칙, 아랫것들의 법칙, 생식의 법칙, 이념과 거지와 흥행의 법칙이 네가 당면한 문제들의 해답을 넌지시 제시해 줄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반복되는 일상을 새롭고 신선한 세계 안으로 이끌고 들어가 준다는 것만 해도 유용할 게 확실하다.

다음은 ‘장정일의 공부’다. 장정일은 “젊었을 땐 아웃사이더로 떠돌면서 ‘싫다!’고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나이 들면 사회의 구조와 배면(背面)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진지하게 말할 줄 아는 작가다. 나는 이 책으로 비로소 한국의 근대와 민족주의를 되짚어 볼 기회를 얻었고 성선설과 성악설의 본질을 난생 처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면서 지금껏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수박 겉핥기였는지를 얼굴 화끈하게 깨달았다. 이 책의 미덕은 궁금해서라도 관련된 책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점이다. 읽고 싶은 책을 한 아름 사들고 귀가하는 기쁨을 너도 아마 맛보게 될 것이다. 그게 ‘공부’의 힘이다.

다음은 10년 전에 나왔지만 읽을 때마다 탄복하며 새로운 밑줄을 긋게 만드는 김영민 이왕주의 ‘소설속의 철학’이다. 부피가 얇은 책이지만 절대로 가볍지 않다. 일단 재미있고 이단(ㅎㅎ) 유익하다. 철학과 문학이 화기애애하게 만나 우리가 한 번쯤 부닥칠 수밖에 없었던 의문들을 조명하고 어루만져 준다. 그 책 이후로 나는 두 사람의 책이라면 무엇이든 다 사들이는 열기를 보였음을 고백한다.

끝으로 김형경의 ‘천개의 공감’을 꾸려 넣는다. 이 책은 ‘모든 인간은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한 내면을 가진 불안하고 부족한 존재’며 ‘그러므로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에게 일깨워줄 것이다. 책은 자신의 내면을 탐사하고 싶은 사람에게 망원경과 현미경이 동시에 달린 특수 안경이 될 수도 있지. 다 읽고 전화하면 서너 권 더 보내 주마. 책을 읽으며 오는 봄과 스치는 시간들을 음미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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