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한국만화, 파릇파릇 희망이… 위기가 기회

  • 입력 2006년 11월 1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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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의 앞날은 밝은가, 어두운가. 만화인들도 이 질문에 각각 다른 대답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누구나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원대연  기자
한국 만화의 앞날은 밝은가, 어두운가. 만화인들도 이 질문에 각각 다른 대답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누구나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원대연 기자
《“지금의 한국 만화는 ‘도넛’입니다.”

만화가 박무직 씨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뜬금없는 소리다.

최근 만화시장의 흐름에 대해 물었는데 도넛이라니.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다.

요즘 한국에서 만화는 대중문화의 초대형 블루칩이다. ‘궁’ ‘타짜’ 등 인기 만화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져 빅히트를 기록했다. ‘먼나라 이웃나라’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는 10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문화관광부는 2004년 한국 만화시장의 규모가 이미 5000억 원을 넘었다고 추산했다. 이만하면 만화의 시대다. 만화왕국 일본이 부럽지 않다.

박 작가는 르네상스의 달콤함을 도넛으로 본 걸까.》

“외형은 커졌죠. 온라인과 학습만화 덕분입니다. 1000만 권요? 요즘 순수창작만화는 1만 권이면 대박입니다. 대성공이라는 ‘신의 물방울’도 편당 7만 권 정도 팔렸을 뿐이지요. 심지어 신인작가 원고료는 15년 전보다 오히려 떨어졌답니다. 지금의 한국만화는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조만간 일본으로 작업실을 옮긴다. 한국 만화 시장에 한계를 느낀 뒤 일본으로 진출한 작가는 박 작가 말고도 많다. 슬픈 한류다.

한국 만화의 장래는 어둡기만 한 걸까. 1980, 90년대의 슈퍼스타 작가인 이현세 한국만화가협회장은 “그래도 만화의 미래는 밝다”고 단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만화는 누구나 좋아하지 않나.”

2006년 만화계 사람들은 한국 만화의 앞날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만화가, 만화평론가, 만화출판사 기자가 진솔하게 털어놓는 일선 현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앙꼬’가 없어도 도넛은 맛 있을 수 있다.

○ 한국만화는 일본만화와 다르다

양영순 만화가 “만화계가 큰 변화를 겪은 건 틀림없습니다. 인터넷의 힘이죠. 제가 데뷔한 1997년엔 신인작가의 등용문이 엄청 좁았어요. 이현세 선생 같은 분도 단행본 발간에 3개월 넘게 걸리던 시절입니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훨씬 많은 독자가 만화를 접할 수 있죠. 2001년 내놓은 ‘아색기가’는 1년 만에 조회수 1억 건을 넘었습니다. ‘순정만화’의 강풀 같은 스타작가도 인터넷이 키웠고요. 수준이 높아진 독자를 따라갈 콘텐츠가 문제지만 꾸준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용철 부천만화정보센터 학예팀장 “분명 만화시장은 커졌습니다. 드라마 영화 연극 등 대중문화의 제1소스잖아요. 일본 만화지만 ‘신의 물방울’은 젊은층의 와인 붐을 일으키는 영향력도 발휘했죠. 물론 만화가들은 ‘최대의 위기’라며 힘들어하지만 학습만화의 성공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성을 갖추면 얼마든지 위기를 이겨낼 수 있어요.”

김동주 서울문화사 만화담당기자 “순수창작만화의 어려움은 작가들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불황으로 전체 시장이 위축됐거든요. 현재 출판사들은 일본 만화에 90% 의존합니다. 일본 만화로 돈 벌어 한국 만화에 투자하는 거죠. 문제는 국내 작가를 포용할 힘이 점점 약해진다는 겁니다. 인터넷의 만화 웹진 등을 통해 활로를 찾고 있지만 쉽지 않습니다.”

작가와 전문가들 만화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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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1990년대만 해도 만화는 도제수업, 총판, 대본소라는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지고 유통됐습니다. 작가는 문하생을 거느려 생산력이 높았고, 만화 총판이 만화잡지와 단행본 등의 유통을 담당했지요. 그리고 만화방이라 불린 대본소가 만화를 공급했습니다. 이 시스템이 90년대 말 세 가지 변수, 즉 대여점 청소년보호법 인터넷으로 급변했어요. 실직한 화이트칼라들이 앞 다퉈 대여점을 열면서 대본소가 망합니다. 청소년보호법은 기지개를 펴던 성인만화 장르에 타격을 줘 다양한 소재 접근을 막았고요. 여기에 인터넷이 등장해 대여점 문화까지 삼키자 공급 라인이 끊긴 출판사들은 구조조정을 단행합니다. 만화가 책으로 소비되는 길이 막힌 거죠.”

김 기자 “한때 전국 3만 개가 넘던 대여점이 지금은 약 6000개에 불과합니다. 대여점 시스템으로는 출판사가 버틸 수 없습니다. 일본처럼 만화를 직접 사 보는 문화가 생겨야 하는데…. 하지만 독자가 사 보기엔 일본 만화만큼의 매력이 없어요. K리그가 영국의 프리미어리그보다 관중이 적은 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출판사도 노력해야 하지만 만화가들도 다양한 장르 구축에 힘써야 합니다.”

이 팀장 “일본과 많이 비교하는데 한동안 일본을 모델로 삼은 건 오히려 악재였습니다. 일본 사회가 만화에 쏟은 에너지는 엄청납니다. 역사나 시장 규모의 수준이 달라요. 그런 건 생각 안 하고 무조건 일본을 따라 하려다 한계에 부닥친 겁니다. 한국은 한국만의 고유한 만화 정서가 있어요. 일본의 인기만화가 반드시 한국에서도 히트하는 건 아닙니다. 강풀을 보세요. 솔직히 그림은 약하지만 스토리가 한국인 정서에 공감을 일으켜 성공했잖아요.”

○ 치열함과 전문성으로 무장해야

양 작가 “만화의 콘텐츠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데 공감합니다. 한국도 재능 있는 작가가 많아요. 하지만 작가들 스스로 출판만화시장이 위기라며 먼저 움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에도 만화계는 춥고 배고픈 곳이었어요. 허영만 선생은 초창기에 애니메이션 밑그림을 그리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절대 책 만화를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돈이 안 되면 덤비지 않는 자세부터 바꿔야 합니다. 순수하게 좋아서, 그리고 미쳐서 일해야 독자들도 알아줄 거예요.”

박 교수 “자기희생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문하생 구조에선 특히나 그랬죠. 그때의 치열함은 이어갔으면 해요. 일본 만화의 장점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결정적 차이는 취재와 자료조사에 있다고 봅니다. 국가정보원 만화를 그리고 싶으면 국정원을 취재해야 합니다. 충실한 현실감이 깃들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려요. 취재를 안 하니 소재가 조폭 학원 판타지 등으로 좁아졌지요. 물론 취재 여건은 자본이 뒷받침돼야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 인터넷만이 아니라 통신업계나 영화와도 계속적으로 연계를 확대해야 합니다.”

이 팀장 “좋은 기획의 만화는 분명히 독자도 알아봅니다. 시장 환경 탓에 어려움을 겪는 건 사실이지만 주목할만한 작품도 나오고 있습니다. 오영진 작가의 ‘남쪽 손님 빗장 열기’처럼 만화계의 주류에선 벗어났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들이 있거든요. 훌륭한 작품은 만화산업의 구조를 바꾸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박 교수 “제대로 된 ‘만화 장사꾼’이 나와야 합니다. 좋은 만화가를 발굴하고 투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화의 전체 환경은 결국 출판사에 달렸거든요. 영화를 보세요. 과감한 투자로 이만큼 성장한 거 아닙니까. 만화는 영화보다 더 큰 잠재력을 가졌습니다.”

김 기자 “출판사가 각성해야 할 부분이 많은 건 인정합니다. 홍보나 마케팅도 강화해야겠지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버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인터넷이 만화에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 공로도 크지만 만화를 무단 복제하고 불법 유포해 출판계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웬만한 만화는 음성적으로 다 볼 수 있으니 누가 사서 보겠습니까.”

박 교수 “지금은 단속기술도 발전해 어느 정도 걸러지지 않나요. 법적으로 준엄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김 기자 “한계가 있습니다. 친고죄라 출판사가 일일이 찾아내 고발해야 하거든요. 그걸 출판사에 맡기는 건 문제라고 봅니다. 정부가 최근 만화계에 지원을 많이 하지만 법적인 부분도 도와줘야 합니다. 다 같이 나서야 시장이 살아납니다.”

○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본다

이 팀장 “위기이긴 하지만 만화가 성장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만화를 하나의 문화나 산업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변화가 큰 재산입니다. 인터넷 등을 통해 신진 만화가가 꾸준히 유입되는 것도 반가운 현상이지요. 기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시장에서 뭔가 일어날 듯한 조짐이 뚜렷합니다.”

양 작가 “지금 만화는 희망이냐 절망이냐가 문제는 아닙니다. 꾸준히 활동하면 주위에서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작가는 스스로 문화를 창조한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작업해야 이현세 선생이나 허영만 선생처럼 걸출한 스타도 등장할 수 있어요. 현재의 작가 중에서 보자면 인터넷과 영화, 출판만화를 아우르는 강풀은 크게 일을 낼 겁니다.”

김 기자 “아직은 영화나 드라마의 원재료 정도로 취급하는 편향성이 있지만 만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확실히 바뀌었습니다. 대접이 달라진 걸 몸으로 체감합니다. 학습만화든 뭐든 부모가 자녀에게 만화를 사 주는 것도 큰 발전이죠. 만화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세대가 나오고 있다는 건 인프라 구축이 성공적이라는 뜻입니다. 만화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순수 창작만화도 안착될 거라 믿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 출판사와 작가 등 관계자 모두가 더욱 유기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박 교수 “사회적 인식이 개선됐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 든든한 것은 수준 높은 콘텐츠를 양산할 인재들이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내 대학에서 만화가 자리를 잡은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차세대 예비 작가들의 활동도 활발합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영화를 보세요. 한국 영화의 전성기라지만 최고의 영화무대인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국내 감독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화는 최고의 만화시장인 일본에서 ‘신암행어사’처럼 성공한 케이스가 여럿 나왔습니다. 학습만화라도 만화가 1000만 부나 팔리는 시장이 우리에겐 있어요. 인재와 시장의 결합만 잘 이뤄지면 만화는 한국의 대중문화를 이끄는 중추가 될 수 있습니다.”

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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