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30년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사망

  • 입력 2005년 12월 1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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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한니발+링컨=?”

도를 넘은 우상화는 위대한 인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위의 도식이 지나치지 않은 인물이었다. 아니, 세 영웅을 각각 능가한다고 해도 터무니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는 링컨보다 46년 앞서 노예해방을 이뤄냈고 알프스 산맥을 넘은 한니발처럼 안데스 산맥을 넘어 페루의 스페인군을 물리쳤다.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에 졌지만 그는 결국 승리를 이뤄냈다. 베네수엘라 독립운동에 실패한 뒤 아이티에서 다시 베네수엘라로 출발할 때 그가 가진 것은 이순신 장군의 12척보다 적은 7척의 배와 250명의 군사뿐이었다.

‘해방자(El Liberator)’로 모든 남미인의 추앙을 받는 시몬 볼리바르. 그는 1783년 스페인 식민 지배하의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났다. 백인 귀족이라는 선택받은 신분이었지만 당시 남미에는 본국에서 파견된 백인과 식민지에서 태어난 ‘열등한’ 백인 사이에 차별이 엄존했다.

사부 시몬 로드리게스에게서 장 자크 루소의 계몽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1811년 베네수엘라 임시정부를 세우는 작업에 투신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네 차례나 망명과 귀국을 거듭한 끝에 1819년 뉴그라나다(콜롬비아)를, 1821년 베네수엘라를, 1822년 키토(에콰도르)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세 지역을 통합해 ‘대콜롬비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1824년에는 페루를, 1825년에는 볼리비아를 해방시켰다. 오늘날 무려 다섯 개 나라의 국부(國父)로 숭앙되는 이유다.

그는 탁월한 정치사상가이자 예언자이기도 했다. 그는 해방된 남미가 조각날 가능성을 항상 염려했다. 뻗어 나가는 미국의 국력을 감안할 때 남미의 분열은 결국 미국에 대한 종속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뻔히 내다보이는 분열을 결국은 막을 수 없었던 데 그가 가진 비극성이 있었다.

각 지역의 분리 독립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반란세력을 제압하지 못한 그는 결국 1830년에 대콜롬비아 공화국 대통령 직을 내놓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해 12월 17일 그의 병사(病死)는 너무도 이르고 갑작스러웠다. 실의가 컸던 탓일 것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남미 각국의 광장과 기념물에 남아 있다. 볼리비아는 국호(國號)로, 베네수엘라는 ‘볼리바르’라는 통화 명칭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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