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아이만 있는 가정]<下>고통받는 아이들

  • 입력 2005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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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가명·12)이는 초등학교 6학년생이다. 아직 ‘고사리 손’이지만 밥도 잘하고 설거지도 알아서 한다. 가끔 용돈이 생기면 계란요리를 해 아빠와 중학생인 오빠에게 ‘특식’도 대접한다. 2년 전 집을 나갔던 엄마가 돌아왔다가 올해 초 다시 가출했다. 한동안 아빠와 오빠 모르게 울다 잤지만 이제는 울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명랑 소녀’로 통한다. 하지만 하연이는 이제 남은 가족과도 헤어져야 한다. 아빠가 일 때문에 집을 떠나면서 충남 금산군에 있는 할머니 집으로 보내지게 된 것. “세상 모든 일이 견딜 만해요.” 하연이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말을 했다. 하지만 눈가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은 감출 수 없었다.》

싱글 대디가 꾸리는 부자(父子) 가정의 자녀들이 처한 상황은 모자(母子) 가정의 자녀들과는 사뭇 다르다.

집안에서는 어린 나이에도 웬만한 가사노동을 떠맡아야 한다. 엄마의 ‘부재’로 정서불안에 시달리거나 방황하는 사례도 많다. 심한 경우에는 아버지에 의한 ‘아동 학대’에 신음하고 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3년 전 아내가 집을 나갔다는 박모(40) 씨는 요즘 중학생 아들 때문에 걱정이 많다. 학교생활도 잘하고 적극적이던 아들이 갑자기 말수가 적어지고 내성적으로 변한 것. 학교에서 돌아오면 대문 밖을 나가려 하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도 눈 맞춤을 외면한다.

“엄마의 가출 때문인 것 같아요. 엄마의 가출 이후 아들이 스트레스로 인한 희귀병(자반증)까지 얻었습니다.” 박 씨는 긴 한숨을 쉬었다.

1998년부터 편부 가정 지원 프로그램을 개발해 온 전남대 가정관리학과 김경신(金慶信·50) 교수는 “여러 논문에 따르면 부자 가정에서 아이들이 우울증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며 “싱글 대디 가정에서 ‘모(母) 역할 결핍’이 아이의 정서적 이상 현상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학교나 사회의 배려는 크게 부족하다.

4년 전 아내와 사별한 박모(39) 씨는 얼마 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울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딸 때문에 가슴이 메었다.

학교에서 숙제를 내줬는데 ‘엄마 찾아 3만 리’를 읽고 독후감을 써 오라는 것이었다.

박 씨는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도 가족 소개 시간에 어려움을 겪었다”며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학교에서 세심한 배려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 강북구 미아동 송중초등학교 황미섭(黃美燮·37·여) 교사는 “요즘은 많으면 한 반에 7, 8명이 ‘한 부모 자녀’인데도 이들에 대한 지도법이 교사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겨져 있다”며 “교과과정에 가족과 관련된 내용도 적지 않은 만큼 정부 차원의 연구와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처받는 아이들’=재혼을 하지 못하는 싱글 대디 가운데 알코올 의존증, 성격 파탄 등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많은 부자 가정의 자녀들이 아동 학대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확인한 아동 학대는 모두 3891건. 이 가운데 가장 많은 1285건이 싱글 대디에 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싱글 대디 가정에서는 영양 결핍에 시달리는 아이도 적지 않다.

태환(가명·15)이는 3년 전 어머니가 가출한 데다 공사판을 전전하는 아버지도 어쩌다 집에 들어와 점심은 학교에서 주는 도시락으로 해결하지만 저녁은 매일 자장면이나 볶음밥만 먹는다. 다른 것을 먹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게 나눠 준 식권을 정부에서 지정해 준 중국집에서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태환이는 “할머니가 앓아누우신 후로 집에서 밥을 먹지 못했다”며 “정부에서 식당을 여러 곳 지정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골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맡겨진 아이들이 늘면서 이른바 ‘조손(祖孫) 가정’이 사회문제화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강원 지역의 한 초등학교 교장은 “많은 곳은 전교생의 20%가 조손 가정 자녀”라며 “경제적 능력이 없고 지병을 앓고 있는 조부모가 많은 데다 이들이 오후에는 일을 하러 나가기 때문에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변의 무관심과 편견은 아이들의 탈선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황은숙(黃恩淑) 한국한부모연구소 소장은 “아이들은 밥보다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며 “싱글 대디 가정의 자녀들이 탈선하는 데는 우리 사회의 편견도 큰 몫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엄마 없는 아이’로 따돌림당하면서 비행청소년이 되는 사례가 많다는 것.

황 소장은 “이혼에 대한 올바른 교육은 물론 싱글 대디의 경우 헤어진 어머니와 자녀를 정기적으로 만나게 하면 자녀의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최창순 기자 cschoi@donga.com

▼정부대책은 걸음마 단계…‘한 부모 가정’ 교류프로그램 확대해야▼

“세상과 벽을 쌓고 살지만 저와 비슷한 처지의 싱글 대디와 많은 대화를 하고 싶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을 만날 여건이 돼 있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정부가 ‘한 부모 가정’을 연결해 주는 정책을 마련해 줬으면 합니다.”

3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중학생 아들과 살고 있는 싱글 대디 조준호(가명·45) 씨의 간절한 바람이다.

서울 노원구의 한 복지사는 “싱글 대디는 재정적인 지원보다 아픔과 고통을 덜 수 있는 사회프로그램이 더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한 부모 가정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2002년 모자보호법을 모부자보호법으로 개정해 싱글 대디 및 싱글 맘 가정에 저소득층과 동일한 지원을 하고 있다.

올해 6월 현재 모부자보호법에 의해 아동양육비와 고교생 학비를 지원받는 저소득층은 12만4000가구. 이 중 싱글 대디 가정은 2만3000여 가구다.

하지만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한 부모 가정이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전국적으로 모자보호시설은 40곳, 자립시설은 4곳. 반면 부자보호시설은 전무한 상태이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싱글 대디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해 올해 인천에 부자보호시설 1곳을 신축해 시범 실시한 뒤 전국으로 확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대구 안심종합사회복지관은 2000년부터 싱글 대디 가족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자녀교육과 양육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여름캠프, 장애인시설 봉사 활동 등을 진행해 부자 간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것.

숙명여대 김영란(金鈴蘭·사회학) 교수는 “싱글 맘 가정보다 싱글 대디 가정에서 자녀가 탈선하는 경우가 더 많다”며 “특히 정부의 빈곤층 청소년 대책은 취업 위주여서 한 부모 가정 자녀가 다양하게 진로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복지관과 연결해 한 부모 가정 자녀의 방과 후 교실을 확대하고 컴퓨터 등 정보화 교육과 예체능 학습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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