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아홉 가지 이야기’…샐린저 아홉색깔이야기

  • 입력 2005년 2월 4일 16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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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이야기/J D 샐린저 지음 최승자 옮김/360쪽·1만1000원·문학동네

홀든 콜필드는 미국 작가 샐린저(86)의 명작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이다. 콜필드는 ‘세계의 저속함과 환멸, 이 두 가지 부덕(不德)의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겨우겨우 중심을 잡으며,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샐린저의 단편집 ‘아홉 가지 이야기’는 콜필드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반가워 할 책이다. 샐린저가 중단편 35편 중 9편을 엄선해 실은 이 책은 원래 1953년에 발표됐다.

9편 중 우선 권하고 싶은 작품은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정신적 상처를 받았던 작가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소설을 쓰는 참전군인 X 하사가 우연히 만난 열세 살 소녀 에스메는 당돌한 소녀다. “아저씨는 미국인치고는 꽤 지적인 편인 것 같아요.” “아저씨도 날 지독하게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묻곤 한다. 그리고는 “아저씨의 모든 재능을 그대로 지닌 채 귀환하길 바란다”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진다.

종전 직후, 환멸과 무기력에 빠진 X 하사에게 부친 지 1년 지난 에스메의 편지가 전달된다. “전쟁, 그리고 줄잡아 말해 우스꽝스러운 생존 방법의 조속한 근절을 가져다 주기를 바랄 뿐”이라는 글이 X 하사에게 희망을 품게 한다. X 하사는 전쟁 와중에 두 가지 부덕, 세계의 저속함과 환멸을 만나지만 어린 에스메의 순수를 통해 자신을 수습한다. 순수의 이 같은 힘을 드러내는 구도는 샐린저 소설의 한 원형을 이룬다.

에스메와 같은 당돌함과 영민함을 보고 싶은 독자에게는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 천재의 이야기를 다룬 ‘테디’나 ‘에스키모와의 전쟁 직전’ ‘웃는 남자’ ‘작은 보트에서’ 등의 작품을 권하고 싶다. 저속함이나 환멸을 읽어보고 싶다면 대학 동창인 두 여인의 술자리 이야기인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나 사랑이 낳는 집착을 다룬 ‘예쁜 입과 초록빛 나의 눈동자’가 있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도 샐린저는 시종 유머를 잃지 않는다.

‘유머를 모르는 자에게는 진정한 진지함도 없다’던 베르그송의 말이 떠오른다. 적절한 유머는 작품의 진정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독자들을 유인한다. 샐린저는 이에 대해 단연 최고랄 수 있다.

또 한 가지, 단편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샐린저에게 유명세를 안겨 주었으며 팬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소설이다. 이미 국내에 나온 샐린저의 소설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의 주인공 시모어가 다시 나온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바나나피시’는 먹이가 숨은 구멍에 고개를 들이밀고 탐식을 하다가 결국 몸이 빠져나올 수 없어서 죽는 물고기다. 왜 이 물고기가 제목으로 들어갔을까? 궁금한 독자들은 빠뜨리지 말고 읽으시라. 단편이 주는 긴박감과 생략의 여운을 기대하는 독자들 역시.

조강석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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