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박정희시대, 역사의 비극

  • 입력 2005년 1월 26일 18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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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작고한 사학자 이기백(李基白) 교수의 절필 ‘한국사의 진실을 찾아서’를 보면 일제하 대학 시절에 애독한 책으로 레오폴트 랑케의 ‘강국론’과 프리드리히 마이네케의 ‘역사주의의 입장’을 들고 있다. 나도 6·25전쟁 중 대학에 입학해 그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일이 있어 마음이 설♬다.

랑케 이후 독일 역사학의 최고봉으로 평가 받는 마이네케는 1948년 공산주의의 교화장으로 전락한 동베를린의 훔볼트대학을 뛰쳐나와 베를린자유대학을 창립해 86세의 고령에 초대 총장에 추대됐다. 그에 앞서 1946년 이 노사학자는 그가 체험한 ‘독일의 파국’을 소책자로 엮어 내놓아 종전 직후의 세계 독서계를 강타했다.

작금 우리 주변에선 일제강점기며 박정희 시대 등 과거사 문제가 새삼 제기되고 있다. 그런 배경 속에서 나는 인도를 여행하는 중에 행낭 속에 챙겨 간 마이네케의 ‘독일의 파국’을 틈틈이 읽고 큰 감동을 맛보았다. 무엇보다도 “모든 역사는 곧 비극”이라는 말이 내 마음을 때렸다. 그렇다. 일제강점기는 물론이요 박정희 시대도 우리에겐 비극이었다.

▼反근대적으로 이룬 근대화▼

1984년, 나는 10·26사태 5주기를 맞아 글에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박정희 시대에 대해 일종의 ‘분열증적(schizophrenic) 평가’를 하고 있다고 적은 일이 있다. 박정희 시대란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기엔 너무나 큰 긍정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건 한국의 농촌이 수천 년의 빈곤에서 벗어난 연대, 한국의 경제가 국내 자본의 축적도 없이 두 차례의 에너지 위기를 이겨 내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 일본에 이어 ‘제3의 경제기적’을 이룩한 연대,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성취한 연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 시대란 긍정적으로만 보기엔 너무나 큰 어둠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건 당대에 유례가 드문 1인 장기 집권의 연대, 4·19혁명의 피로 얻은 민주주의를 역퇴전(逆退轉)시킨 연대, 시민의 기본권이 중세기적 위축을 강요당한 연대이기도 했다.

요컨대 박정희 시대란 ‘조국 근대화’의 대역사를 전근대적, 아니 반근대적 수법으로 강행한 연대였다. 목적과 수단의 괴리, 또는 업적과 방법의 모순이란 이 같은 이율배반은 특히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특징짓는 기조가 아닌가 여겨진다. 민족 외적 세력에 의한 민족의 해방, 비근대적 수단에 의한 근대화의 추진, 비민주적(주사파적) 이념 세력이 전위가 된 민주화의 쟁취 등.

이처럼 한국 현대사에서 목적과 수단의 모순이 빚어내는 비극을 마이네케는 ‘역사에서의 가치와 무가치의 악마적인 긴밀한 결합’이라는 역설 속에서 역사 일반의 비극적인 본질로 풀이하고 있다. 모든 역사에는 선과 악, 긍정적인 원리와 부정적인 원리, 혹은 신(神)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이 뒤섞여 있다. 역사의 주역, 한 시대의 지도자도 고매한 원리와 저속한 원리의 혼합물이며 한편으론 건설하고, 다른 한편으론 파괴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이 ‘권력’의 본질적 속성이며 그런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비로소 지도자는 한 시대를 이끌 수 있다.

▼권력의 善惡 양면성 인식을▼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에서 가치와 무가치, 선과 악,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사이의 살아 있는 상관관계를 인식함으로써 어느 한쪽에 탐닉해서 다른 한쪽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적 인식은 사려 깊은 역사가들의 몫이요, 당리당략에 좌우되는 정치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못 된다. 하물며 가치와 무가치가 혼재하는 한 시대를 전면 긍정했다가 전면 부정하고 어제 예배하던 것을 오늘 화형에 처하는 등 극단을 오가는 감정적인 판단으로 여론, 특히 젊은이들을 오도하는 선동정치가 판을 쳐서는 나라의 앞날이 크게 우려된다.

나치스(Nationalsocialism의 약자) 탄생의 근원적 요인을 마이네케는 19세기 독일의 산업화와 민주화가 촉발한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잘못된 결합에서 찾고 있다. 그게 이미 지나간, 먼 곳의 얘기라고만 할 수 있을까.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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