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권재현]이순신, 그 불멸의 패배

  • 입력 2005년 1월 10일 12시 24분


코멘트
《이정: 썩을 대로 썩은 것이 세상이고 조정이라 하지 않았으냐!

순신: 고치면 됩니다. 형님이라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정: 나 하나 깨끗하다 하여 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듯싶으냐? 어림없는 일! 세상을 잊고 은둔하는 삶이 차라리….

순신: 그건 현실도피일 뿐입니다. 비겁하게 도망치면 뭐가 남습니까? 썩었으면 고치고, 곪았으면 도려내야지요. 그것이 세상을 개탄하며 세월만 죽이는 것보다 백배 낫습니다.

이정: 네 이놈!

순신: 의를 세우고 그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장부의 길이라 배웠습니다. 사내에게 그만한 꿈도 없다면 무엇을 바라 한평생을 산단 말입니까?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 순신 형(요신)의 과거응시를 막는 아버지 이정과 순신의 대화. 》

다시 새해가 됐습니다. 다시 희망을 이야기해야합니다. 그래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꺼낼까. 무려 5권이나 되는 방대한 저서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인용할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책은 50페이지밖에 못 읽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뜸들여왔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장면 한 대목을 골랐습니다.

이순신은 왜 그저 영웅이 아니라 성웅이라고 불립니까. 두 말할 나위 없이 바람 앞에 촛불 같던 조국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을지문덕이나 김유신에게도 해당합니다. 그러면 그의 최후가 비극적이기 때문일까요. 최영이나 임경업의 최후가 더 비극적이지 않던가요. 선공사후(先公私後)의 강직함 때문에? 김유신도 임지를 옮겨가는 도중 집 앞을 지나치면서 말위에서 우물물 한 모금 마시고 떠난 인물입니다.

그가 불멸의 경지에 이른 것은 바로 ‘난중일기’라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의 반영입니다. 불멸의 존재로 남고자 하는 열망이 글을 쓰게 합니다. 대학시절 김탁환의 소설 ‘불멸’을 읽으며 깨쳤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만고의 충신으로 남고, 원균은 질투에 사로잡힌 못난이로 기억되는 이유는 원균에게는 ‘난중일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멸’이 이순신을 폄하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출세하기 위해 자신의 공을 다소 과장하기도 하고, 원균에게 묘한 라이벌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묘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묘사야말로 이순신을 신화 속에 박제된 존재를 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바꿔줬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순신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세속의 성공을 꿈꾸고 또 자신의 비범함을 인정받고자 했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역사에 자신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를 의식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10년 후 TV드라마로 보는 ‘불멸의 이순신’은 또 다른 점에서 저를 매혹시킵니다. 그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인생살이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세상을 손가락질하지 않고 살아간 남자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배어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부분은 드라마 전반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모티프입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중간에 몇 편을 놓치고 본다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순신의 생애라는 너무도 익숙한 스토리에 담겨있는 이 모티프드의 다양한 변주를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의 역적의 손자입니다. 그래서 출사길이 사실상 막혔습니다. 그런 세상과 평생을 싸우면서 상처투성이가 된 아버지는 세상을 등지고 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순신의 형 요신이 몰래 과거응시를 준비하자 책을 불태우며 ‘아직도 세상에 대해 헛된 기대를 품고 있느냐’고 질타합니다. 그때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던 이순신은 나서서 말합니다. “되던 안되던 부딪혀보지도 않는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없다”고.

세상은 사람들에게 두개의 선택지만 주는 것 같습니다. 타협하라 아니면 떠나라. '한계령'의 가사처럼 세상은 자꾸 내려가라, 내려가라 지친 내 어깨를 떠밀고, 저 역시 이놈의 더러운 세상을 등지고 백이·숙제나 죽림7현처럼 살고 싶은 맘이 간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강요하는 이런 흑백논리를 따르게 되면 결국 우리는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순신은 그런 인생살이에서 늘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살아남아 이놈의 세상에 무언가 의미있는 것,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것을 뿌리거나 아니면 세상의 영욕과 씨름하다가 이름없는 홍진(紅塵)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순신은 그 최후조차 자신이 만든 게임의 법칙을 따랐습니다. 조선을 구한 영웅으로서 자신의 운명이 예정된 삶, 그가 반역할지 모른다는 선조의 의심의 희생양으로 역적으로 죽느냐 아니면 진짜 역모로 새로운 왕조를 창조하느냐는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전장에서 죽음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등지는 것이나 세상의 영욕과 타협하다 티끌로 사라지는 것은 모두 허무주의입니다. 이순신은 그 허무주의와 싸웠습니다. 허무주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은 손쉽지만 그 허무주의와 싸우는 것은 어렵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지 뭐"하고 침을 뱉는 것이나 "세상이 원래 그런 것 아냐"라고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나 다를 게 무엇입니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진흙탕을 뒹굴면서도 세상의 링 안에 남아 있어야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패배를 하더라도 결코 링 밖을 떠나선 안 됩니다. 이순신처럼 '불멸의 패배'를 꿈꿔야합니다.

문제는 목적이 언제나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피투성이로 남아 악을 써대지만 결국 자신이 왜 거기에 남아있는지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았습니다. 젊었을 때의 이상을 버리고 괴물이 돼버리는 그런 사람들을. 세월은 세상만큼 만만치 않은 강적인 것입니다.

나이 한 살을 더 먹으면서 그런 두려움은 더욱 커져갑니다. 쉽게 희망을 이야기 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순신을 생각하고, 그가 아버지의 준엄한 호통에 맞서는 이 장면을 떠올립니다. 요즘 자꾸 아들 녀석 얼굴을 쳐다보는 이유도 거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도 세상과 세월이 두렵니?"

P.S.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불멸’에서 불멸을 꿈꾸는 인간욕망의 허망함을 꼬집었습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일기처럼 정제되지 않은 내밀한 기록이 사후에 공개될 경우의 낭패감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죽으면 모든 기록을 남김없이 태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불멸에 대한 욕망 역시 통속적인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불멸의 패배’를 꿈꾸는 것만큼은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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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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