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제연구소, 박헌영 9권짜리 전집 펴내

  • 입력 2004년 7월 18일 17시 37분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사상가, 이정 박헌영(而丁 朴憲永·1900∼1956). 그에 대한 기록을 모두 모은 전집(전 9권·역사비평)이 출간됐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1993년부터 시작된 작업이 11년 만에 끝난 것이다.

박헌영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세 차례나 옥고를 치렀고, 그 중간에는 도피와 지하활동을 하느라 저작(著作) 자체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남한에서는 ‘민족 배반자’로, 북한에서는 ‘미제의 간첩’으로 낙인찍힌 존재였기에 그나마 남은 자료의 수집도 쉽지 않았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윤해동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등이 중심이 돼 흩어진 자료들을 찾아 나섰다. 국내 신문 잡지 관련기사, 일본 경찰 및 정보기관의 관련 문서, 6·25전쟁 기간 미군이 확보한 ‘노획 자료’, 러시아의 코민테른 자료와 모스크바에 생존해 있는 박헌영의 딸 박비비안나의 소장자료, 북한의 박헌영 심문과 판결내용이 들어 있는 ‘결정집’ 등을 망라했다.

이를 바탕으로 1∼3권은 박헌영의 심문답변서를 포함한 직접 저작물, 4∼7권은 박헌영에 대한 간접사료, 8권은 가족과 주변인물의 증언을 수록했다. 마지막 9권은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가 3월 단행본으로 출간한 연보(‘이정 박헌영 일대기’)와 화보를 묶었다.

한글문서는 맞춤법에 상관없이 원문 그대로 실었고, 한문·영어·러시아어에 능통했던 박헌영 자신의 기록을 포함한 외국어 자료는 번역해서 실었다. 각 자료에는 자세한 해제를 붙였다.

이 중 ‘세계와 조선’(1946년), ‘동학농민난과 그 교훈’(1947년) 등 박헌영의 저작 2권, 일제 경찰과 검찰의 심문자료, 1945년 이승만과의 두 차례에 걸친 회담 자료, 일제강점기 주한 소련 부영사의 부인이었던 샤브시나의 증언 등은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새로운 자료다.

인간 박헌영에 접근할 수 있는 새 자료도 많다. 1919년 경성고보를 졸업한 직후 직접 번역한 두 편의 영시(英詩)는 그의 영어실력을 가늠하게 한다. 1930∼31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시절 영문으로 기록한 노트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은 강의 내용뿐 아니라 개인적 코멘트도 담겨 있어 당대 한국 사회주의자의 인식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원경 스님은 “아버지는 1955년 12월 숙청 때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다음해 7월 19일 김일성 수상의 지시로 야산으로 끌려가 당시 내무상이던 방학세의 권총에 즉결처분 되셨다”고 전했다. 스님은 자신이 주지로 있는 만기사(경기 평택시)에서 아버지 기일인 19일 이 책을 바치는 천도재를 올린다며 “부디 이고등락(離苦騰樂·고통을 잊고 편한 마음으로 하늘로 떠나감)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중석 교수는 “그동안 금기시하거나 혹은 신비화했던 박헌영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1차 자료가 마련된 것”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박헌영을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48년 전 7월 19일 총살당한 박헌영(위). ‘이정 박헌영 전집’ 발간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이 16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왼쪽부터 김백일 역사비평 대표,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원경 스님, 윤해동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박주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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