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0년 '나비박사' 석주명선생 별세

  • 입력 2003년 10월 5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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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나비에 미친 사람이 둘 있으니, 한 사람은 평생 나비 그림을 그려온 조선조 선비화가 남계우(南啓宇)요, 또 한 사람은 ‘나비 박사’ 석주명(石宙明)이다.”

1950년 10월 6일. 일제 치하 주인 잃은 산하를 떠돌던 조선의 나비들에게 ‘이름(학명)과 주소(분포도)’를 찾아주는 데 일생을 헌신했던 석주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불과 42세였다.

석주명은 나비에 씐 사람이었다. 그는 각국의 나비 이름을 무슨 주문처럼 읊고 다녔다고 한다. 초(일본), 후례(중국), 엘베테(몽골), 파포추카(러시아), 슈멧텔링(독일), 버터플라이(영국)….

그는 한반도 전역을 훑으며 75만마리의 나비를 채집했다. 희귀종을 쫓아 흑산도까지 배를 타기도 했다. 애기세줄나비 작은멋쟁이나비 청띠제비나비 황알란팔랑나비 각시멧노랑나비 수노랑나비…. 250종에 이르는 우리의 나비들이 그의 손을 거쳐 거듭났다.

석주명이 나비와 함께한 세월은 역사의 격동기였다.

그가 태어난 1908년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나비 연구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1929년 말 전국은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들끓고 있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그는 나비의 꿈만을 꾸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시대의 격랑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비명에 간 마지막 순간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전쟁통에도 피란을 가지 않고 박물관의 나비 표본을 지켰던 그는 막상 서울이 수복된 뒤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 총격을 받고 숨지고 만다. 그는 총구를 겨누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는 시구(詩句) 속의 흰나비처럼, “뭔가를 이루려거든 세월 속에 씨앗을 뿌려라”는 자신의 평생 좌우명처럼 석주명은 외길 인생을 살다 그렇게 훨훨 날아갔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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