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과선물][공연]동춘서커스로 열리는 5월

  • 입력 2003년 4월 30일 17시 18분


코멘트
《‘뚝딱뚝딱’ 공터에는 순식간에 커다란 천막이 쳐졌다. ‘지지직…’ 고물 확성기에서는 왁자지껄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골목마다 요즘 젊은이 표현으론 ‘천박한’ 디자인의 포스터가 나붙었다. 즐길 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 서커스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남녀노소, 온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 큰 잔치였다.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의 몸짓에 폭소가 터졌고, 말로만 듣던 이국(異國)의 낯선 동물이 마냥 신기했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던 아슬아슬한 묘기도…. 그때 멍석 바닥을 가득 채웠던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게에 백발의 어머니를 앉혀 구경 온 장년의 아저씨도, 푸르스름한 빡빡머리로 어머니 뒤를 종종 따랐던 아이도 이제는 모두 변했을 거다. 세월이 흘렀고, 그때 그 사람들도 함께 흘렀다. 하지만 서커스는 남아있다. 또 육순 아들이 팔순 노부모를 모시고 찾는 가족 사랑의 따뜻함도 여전히 서커스 공연장에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곡예단 ‘동춘 서커스단’을 찾아 그 시절, 화려한 추억과 새로운 희망, 가족오락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을 알아봤다.》

#서커스는 ‘그래도’ 살아있다

“왔어요, 왔어. 70년 전통의 서커스단이 여러분 곁에 왔습니다.”

지난달 23일 오후 경기 부천시 원미구 상동 영상문화단지. 안내 방송을 좇아 들어서자 서커스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푸른색 천막 1채가 나타났다. 컨테이너 매표소 곁에 한때 이 곡예단의 상징이던 코끼리 ‘제니’의 빛바랜 박제가 서 있었다.

동춘서커스의 다양한 곡예들이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요즘 이 서커스는 동춘곡예단과 중국 곡예단이 합동 공연을 하고 있다.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1927년 문을 연 이 곡예단은 한때 국내 최대 동물원인 창경원 다음으로 많은 ‘동물 식구’를 거느린 잘 나가던 유랑극단. 사자, 호랑이, 기린, 코끼리, 원숭이 등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동물이 곡예단의 인기에 큰 몫을 했다. 지금은 인건비조차 빠듯해 원숭이 몇 마리만이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까지 순회공연을 갈 정도로 대단한 흥행을 자랑했던 영화(榮華)는 흘러갔다. 하지만 주말 공연마다 회당 1000여명 정도의 관객이 옛 향수에 젖어 찾고 있어 명맥을 잇고 있다.

#추억을 돌려 드립니다

“노부모를 업고 서커스 공연장을 찾는 자식들이 아직도 많아요. 지게에서 리어카로, 경운기에서 자동차로 교통수단만 바뀌었을 뿐이지.”

40여년 동안 이 곡예단에 몸을 담고 있는 박세환 단장은 “초등학생 손자부터 70대 할아버지까지 3대가 찾을 수 있는 게 서커스 공연”이라고 말했다.

공연이 시작되자 백발의 노부부, 어린아이 손을 이끌고 들어온 부부, 손자들을 데리고 온 할머니 등 50여명의 관객이 객석을 채웠다.

외줄 위에서 자전거를 타고, 접시 6개를 막대로 돌리면서 자유자재로 눕거나 무동을 타는 곡예에 몰입하는 것에는 어두컴컴하고 한기(寒氣)마저 느껴지는 허술한 공연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좁은 천막을 꽉 채우기에는 역부족인 음향시설, 어설픈 조명, 지린내 가득한 화장실도 개의치 않았다. 관객들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공연에 점점 빠져들었고 아슬아슬한 묘기에 탄성을 터뜨렸다. 이날 함께 공연한 중국 산둥성 잡기단 곡예사들도 세계적 수준의 중국 서커스를 선보여 흥을 돋웠다.

아내와 함께 공연장을 찾은 김광수씨(66·경기 부천시 원미구 상동)는 “20대 시절 서커스 공연을 본 기억이 아직도 선해 서커스 공연이 열리면 꼭 보러온다”며 “아들 부부와 손자를 데리고 공연장을 다시 찾겠다”고 말했다.

#젊은 감각, 테크노 서커스

“쿵쾅, 쿵쾅….”

가슴을 두드리는 강한 테크노 음악이 울려 퍼지자 저글링 묘기의 달인 박광한씨(26)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씨는 공중곡예의 명수인 ‘꽃님이’와 함께 이 곡예단의 간판스타. 박씨는 현란한 테크노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면서 6개의 링을 양손으로 주고받는 묘기를 선보였다. 여섯 살 때부터 저글링을 배운 박씨는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공연에 테크노 리듬을 ‘덧칠’했다. 박씨의 공연 시간에는 70대 노인들도 테크노 리듬에 몸을 맡길 정도. 박수가 시원치 않으면 공연을 중단하고 박수를 더 보내달라고 너스레를 떨어 관객의 폭소를 자아냈다.

아이 2명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공연장을 찾은 안호연씨(35·경기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는 “서커스 공연을 직접 와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젊은 사람도 공연에 푹 빠질 정도로 흥이 났다”며 “부모님에게 ‘서커스 공연 선물’을 드려야겠다”고 말했다.

#한국 서커스 흥행의 법칙

“서커스는 아무나 합니까? 한국 사람은 재미없으면 천하를 줘도 안 봅니다. 또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기후를 모르고 덤볐다가는 손해 보기 딱 좋죠.”

박 단장은 동춘서커스의 끈질긴 생명력은 70년 이상의 공연 경험에서 나온다고 했다.

“몇 년 전 여름 독일 서커스단이 방한해 지방 공연에 나선 적이 있어요. 시골의 넓은 들판에 천막을 치고 공연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태풍이 불어와 천막이 20리 밖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흥행은 아무나 합니까.”

박 단장이 들려주는 서커스 흥행 노하우는 이렇다. 농번기인 봄철 농촌 지역 공연은 ‘밥값’도 채우기 어렵다. 더운 여름에는 도심 한가운데 아파트 단지에서 공연을 벌이는 게 상책(上策). 열대야가 있는 날이면 더위를 피해 집 밖으로 나선 사람들이 많아 어김없이 ‘대박’이 터지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낮이 짧고 추운 산간 지역을 되도록 피하는 것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노하우.

서커스 공연의 대목은 명절과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몰려 있는 5월. 어린이날에는 하루에 5000∼6000명 정도의 관객이 몰릴 정도로 성황이다. 그렇지만 오라는 데는 많아도 짭짤한 수익이 나는 공연 섭외요청이 적은 게 고민이란다.

“단원 대부분이 한국 대중문화의 뿌리인 서커스를 지키겠다는 심정으로 곡예단에 남아 있어요. 한국 서커스에 대한 자존심 때문에 20년 전부터 공연이 재미없으면 입장료를 되돌려준다는 '요금 리콜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한국 서커스의 맥을 잇겠다는 박 단장의 말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작은 희망과 한국 서커스의 미래

“중국, 북한의 서커스는 TV에서 방송해주고 높은 분들도 꼭 가서 보고 옵니다. 중국이나 북한보다 전통이 더 오래된 한국 서커스 공연은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박 단장은 한국 서커스의 미래가 아직도 어둡다고 했다. 80년대 8개였던 서커스단은 컬러TV, 비디오 등에 밀려 지금은 1개로 줄었다. 이곳저곳 떠돌며 운영비를 근근이 맞추고 있지만 국가 지원이 없으면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른다고 했다.

“고아원하고 자매결연이라도 해야 할까 봅니다. 단원들의 자녀를 빼고는 서커스를 배우려는 아이들이 없어요.”

관객이 준 것도 문제지만 한국 서커스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이 없다는 게 더욱 큰 문제라고 했다. 돈이 없어 곡예사를 육성할 형편도 못된다. 그 탓에 중국 기예단 등을 초청해 함께 공연하며 인력 부족을 해결하고 있다.

박 단장은 “최근 몇 년 사이는 그나마 조금씩 나아지는 느낌”이라며 “2005년을 목표로 서커스 상설극장을 세우는 게 희망입니다”고 말했다. 동춘 서커스단은 20일까지 부천 영상문화단지 내에서 공연을 펼친다. 2시간 공연에 입장료 5000원.

부천=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박 용기자 park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