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충남 서산 대산산업단지 내 한 석유화학공장 앞에 ‘운휴공정구역’이라고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다. 석유화학 기업들은 그동안 중국발 공급 과잉의 여파로 나프타분해시설(NCC) 가동률을 80% 수준으로 낮춰 운영해 왔지만, 최근 중동 전쟁으로 원료 수급이 어려워지자 가동을 완전 중단하는 곳이 늘고 있다. 서산=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중국발 공급과잉에 떠밀려 구조조정을 진행하던 한국의 석유화학 산업이 미국·이란 전쟁의 충격까지 받아 생사의 기로에 섰다. 기업 간 합병 등을 통해 가동률을 낮춰 온 국내 석유화학 공장들이 이제는 원유, 나프타 등 원재료 부족으로 아예 공장을 멈춰 세워야 하는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대표 석유화학단지 중 하나인 충남 서산의 대산산단에는 가동 중단을 의미하는 ‘운휴’ 팻말이 내걸린 공장들이 다수라고 한다. 중동에서 들여오던 ‘석유화학의 쌀’ 나프타 공급이 끊긴 탓이다. 원유를 싣고 온 선박이 쉴 새 없이 접안하던 전남 여수국가산단의 부두도 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영향으로 텅 비었다고 한다. 석화업체에서 원료를 공급받던 중소 협력사들까지 속속 문을 닫으면서 석유화학 산단의 주변 상권도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중동산 원유에서 나프타를 뽑던 공장의 가동률이 낮아지면서 지난달 국내 나프타 생산자물가는 작년 동월 대비 59.5%나 급등했다. 플라스틱과 비닐의 원료인 에틸렌은 29.9%, 페인트 등을 만들 때 쓰이는 자일렌도 40.4% 올랐다. 인상된 가격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고스란히 반영돼 국민 실생활을 압박할 것이다.
중동 전쟁으로 인한 이번 쇼크는 석유화학·정유 산업이 왜 국가경제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간산업’인지 확인시켜 주고 있다. 원유를 들여와 항공유, 휘발유 등을 만들어 팔던 한국 정유공장의 가동률이 떨어지자 항공유의 70%를 한국에서 공급받던 미국, 한국산 휘발유를 사가던 호주와 뉴질랜드, 한국산 경유를 수입하는 일본에도 비상이 걸렸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국 석유화학, 정유 산업이 위축되는 걸 오래 방치한 나라들이다.
문제는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이 외부 충격으로 가속화되면서 아예 회복이 불가능한 정도까지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전쟁이 끝난 뒤 자국 정부의 보조를 받는 중국 기업들이 다시 덤핑 공세에 나설 경우 우리 석유화학산업은 부활의 동력을 잃고, 관련 제품을 중국에 의존하게 되는 우려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정부는 과잉경쟁 해소를 위한 구조조정 방침은 견지하되, 전쟁 때문에 의도치 않게 국내 석유화학 생태계가 붕괴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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