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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6월 20일 16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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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업체들은 해마다 립스틱 주력색상 20여개를 결정하지만 극단적인 핏빛(선홍색), 꽃분홍색, 보라색, 벽돌색은 제외한다. 그러나 유럽은 물론 아시아권의 일본 홍콩에서는 이 색들이 단연 인기다. 색채연구가들은 ‘그동안 한국인들은 ‘제대로 된 원색의 레드’ 대신 화이트나 블루, 펄, 베이지가 상당 부분 가미된 ‘혼성 레드’ 상품을 안심하고 구입해 온 것 같다“고 말한다. 학계에서는 명도가 가장 낮은 ‘카드뮴 레드’부터 가장 높은 ‘카르메신 레드’까지 빨간색만 105가지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레드’의 정체성을 살펴보자.
과거 한국에서 붉은 색은 특별한 사람, 특별한 상황에서 사용돼 왔다. 세종대왕의 초상화에 붉은 옷에 금색 수를 놓은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 레드는 왕족의 옷 색상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도 선동정치수단 이전의 ‘좋은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중국인은 빨간색이 행운을 가져온다고 믿어 아이들에게 빨간 옷을 입혔다. 온대기후가 그리운 러시아에서 레드는 ‘아름다운, 멋진, 좋은, 가치있는’ 등의 의미를 가졌다. 공산혁명 전에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은 있었고, 러시아인들은 그것을 ‘아름다운 광장’으로 해석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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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바 헬러는 저서 ‘색의 유혹’에서 “빨간색은 기본적으로 환희의 색이고 귀족의 색이고 사치의 색이다. 흥분과 선동, 부도덕과 공격성 등의 이미지는 레드의 그 다음 속성이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리지널 레드에 대한 ‘물타기’ 덕분에 붉은 색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줄었다는 분석도 있다. 붉은악마 응원단이 즐겨입는 티셔츠를 보면 하얀색으로 ‘Be the Reds’라고 쓰인 것이 많다.
흰색은 붉은색의 톤을 가장 많이 상쇄시켜 ‘질리지 않는 빛’으로 만들며, 시선을 분산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 흰색 글귀는 붉은색 바탕의 절반 정도를 채운다. 나이키에서 제작한 한국대표팀의 유니폼과 판매용 티셔츠도 파스텔톤이 많이 가미된 ‘연체리빛 핑크’로 바뀌었다. 같은 붉은 계열이지만 핏빛 붉은색이 ‘뜨거운 피의 솟구침’의 이미지와 결부돼 있다면 이 색상은 발랄한 이미지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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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대표팀의 유니폼에서는 붉은 색이 더욱 다양하게 변주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팀은 파란색과 와인색을 많이 가미했다. 이 색은 차분하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유럽의 왕족들이 즐기던 색상이다. 소매 끝이나 목선에 노란색, 황금색을 가미해 중후한 느낌도 살린다. 극단적으로 보면 뛰어도 빨리 걷는 것 같고, 거친 태클도 우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단점은 약간 지쳐보인다는 것이다. 터키나 덴마크는 탁한 벽돌색 유니폼을 입었고 폴란드는 주황색에 가까운 빨간색 옷을 입었다. 상대에게 강렬하고 무더운 이미지를 줄 수 있지만 눈이 쉽게 피곤해진다. 그래서 흰색 스트라이프를 군데군데 삽입한 것이다.
색상전문가 김민경씨는 “국내에서 ‘혼성 레드’ 연구가 활발해지겠지만 런던의 피카딜리 광장처럼 광화문에서도 새빨간 투피스 정장을 입은 70대 할머니를 볼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말하는 레드는 파란 눈과 금발에 어울리는 원색 레드가 아니라 화이트와 핑크, 블루가 가미된 레드다.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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