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일기]월드컵구장 밑에 파묻힌 추억

  • 입력 2002년 4월 11일 14시 13분


아이들을 데리고 2년 전에 떠나온 동네 상암동에 갔다. 몇 번을 지나쳐 다니긴 했어도 내가 살았던 집터를 돌아보며 밟아보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내 아이들이 자랐던 곳, 또 내 남편과 내 젊음을 바친 이곳이 월드컵 경기장이 들어서고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변하고 있었다. 쓰레기산이던 난지도에도 새롭게 단장된 열병합발전소와 스포츠공원이 깨끗하고 쾌적한 공간으로 연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가슴 아프게도 십수년씩 함께 살았던 이웃들의 흔적인 20여가구의 ‘구석말’ 입구의 집터들은 이미 사람키 몇배의 높은 도로가 생기면서 샛강과 함께 묻혀버리고 없었다. 봄이면 개나리꽃 만발하던 여우고개도 이미 큰 도로 밑에 덮여서 어디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 예전 콩나물 교실로 오전 오후반으로 공부하던 초등학교도 자취를 감추고 어느새 동화 속의 궁전 같은 모습으로 새로 지어지고 있었다. 그 속 허름한 교실과 운동장에서 우리네 아이들이 뛰놀며 싸우며 떠들썩했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풀무골에 세워진 월드컵경기장의 웅장한 모습과 산뜻하게 정리된 주변을 보니 곧 열릴 월드컵 개막식의 함성이 우리 상암동 원주민들의 속삭임과 함께 뒤섞여 들려온다.

이 세련되고 발전된 환경 저 밑바닥에 잠들어 있는 우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발길을 잡는다. 이것은 우리 세 아이들과 그 친구들의 유년과 청소년시절이 이곳에서 영글었기 때문이리라. 이젠 더 이상 옛 모습을 찾을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내 아이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 ‘추억’이란 이름으로 남으리라.

최 명 순 46·주부·경기 고양시 덕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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