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의 사진〓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가 공개한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은 그동안 계속돼온 명성황후 사진 논란과 관련,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잡지 ‘르 뚜르 듀 몽드’에 명성황후 사진을 제공한 사람은 당시 조선을 다녀갔던 아장 박사라는 점에서 사진의 신빙성을 높여준다. 아장 박사는 ‘한국여행’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사진을 싣고 사진설명에 ‘일본 과격분자에 의해 살해된 한국의 황후’라고 명시했다.
이 교수는 “시해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현장을 직접 답사한 아장 박사의 열의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설명이 정확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아장 박사가 잡지에 게재한 사진은 국내 학계에 이미 공개된 카를로 로제티(이탈리아 외교관 출신)의 명성황후 사진을 뒷 배경만 변조한 것”이라며 “일본은 1890년대초 명성황후 시해를 위해 미리 사진을 촬영한 뒤 황후 시해후 ‘궁녀의 사진’으로 탈바꿈시켜 증거를 인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발견된 사진은 빌탈 드 라게리의 저서 ‘한국, 독립할 것이냐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냐’(1898년)에 실린 명성황후 삽화의 얼굴 모습과 거의 비슷해 진짜 사진일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이 삽화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1895년을 전후해 한국에 체류했던 프랑스 언론인 드 라게리가 명성황후의 사진을 토대로 모사했다고 밝힌 것으로 지금까지 명성황후의 얼굴과 가장 근접한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로제티의 저서에 실린 사진 |
지금까지 명성황후 추정 사진으로 공개된 것은 로제티의 사진이외에 1906년 호머 헐버트, 1910년 이승만 대통령의 저서에 실린 사진 등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진짜 사진인지는 확실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 이번에 새 사진을 공개한 이 교수는 1997년 로제티의 사진을 명성황후의 사진이라 주장했으나 ‘정장차림의 궁중 여인’이라고 설명되어 있을뿐 명성황후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박에 부딪쳤다. 또 1995년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 숭모제 당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저서에 실린 사진을 표준영정으로 사용했으나 이 역시 진짜일 가능성이 낮다.
▽명성황후의 죽음과 대한제국의 태동〓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는 최근 명성황후의 죽음이 대한제국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됐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한 교수는 “국왕의 국장도 6개월을 넘지 않는게 관례임에도 1895년 10월 8일 시해된 황후의 장례식이 2년 2개월이 지난 1897년 11월 22일에서야 치러진 것은 자주와 독립에 대한 국민 여론을 환기시키고 그 추진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명성황후의 묘지 선정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왕후의 국장이 여섯 차례나 연기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 한 교수는 “고종 역시 황후의 명예회복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벌고 싶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을미사변 1주기에 즈음해 1896년 10월 23일 전장령 박인환(朴寅煥)이 올린 상소에서 “복수를 하지 않으면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주장하자 고종은 이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는 것을 한 교수는 근거로 내세웠다.
이승만 저서에 실린 사진 |
1897년대 후반 고종의 칭제(稱帝)운동이 급속도로 가시화되면서 장례는 다시 두 차례 연기됐고 명성황후 서거 2주기에 이르러서는 왕실에 대한 충성이 정점에 달했다. 마침내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이 반포됐고 더 이상 장례를 미룰 이유가 없었던 고종은 40일 후 장례를 치렀다.
한 교수는 “명성황후는 죽음으로써 살신성인(殺身成仁)했으며 이로써 명성황후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한 교수는 지난해 12월 서울대 규장각이 펴낸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 國葬都監儀軌)에서 이같은 사실을 밝혀냈으며 그 구체적 내용을 담은 저서 ‘명성황후와 대한제국’을 이달 중순 출간한다.
<김수경기자>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