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보고서'발견…"고종,사태 감지해 황후 피신시켜"

  • 입력 2001년 9월 25일 18시 38분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일 사건의 징조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황후를 살해했던 일본인들의 이름 등이 명시된 문서가 발견됐다.

박종효 전 모스크바대 교수(한러외교사)가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속 제정러시아 대외정책국에서 최근 찾아낸 이 문건은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당시 주한 러시아 대리공사였던 카를 이바노비치 웨베르가 이틀 뒤 본국에 사건 경위를 보고한 것으로 A4용지 300여 쪽 분량이다.

이 보고서에는 사건 발생 직후 고종이 발표한 성명서, 전 대한제국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과 당시 궁정경비대 부령이었던 이학균(李學均) 등 당시 궁내에 있었던 사람들의 보고서,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한 상궁과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의 증언록 등이 첨부돼 있다.

고종은 성명서에서 “조선군부의 고문으로 일했던 오카모토, 스즈키, 와타나베가 황후의 처소로 침입해 황후를 붙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종이 성명 내용을 구술하던 중 의식을 잃어 성명서는 더 이상 서술되지 못했다고 당시 통역관은 적었다.

또한 이학균은 보고서에서 “새벽 4시반 경 궁내에 소란이 일어 고종께 보고하고 ‘왕후는 어디 계시느냐’고 묻자 고종은 ‘벌써 대책을 세웠다. 왕후는 안전한 곳에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고 적어 고종이 사태의 징조를 미리 감지하고 명성황후를 대피시켰음을 짐작케 했다.

이 밖에도 황후의 죽음을 목격한 고종의 둘째 아들 처소의 상궁과, 러시아 건축기사로 당시 일본 세력의 견제를 위해 궁정에 고용됐던 세르진 사바틴의 증언록은 일본인들의 잔혹한 범행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바틴은 “새벽 5시경 궁정 서쪽에서 총소리가 들려 황후의 처소로 급히 가니 25명 가량의 일본 낭인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 중 절반 가량이 황후의 방으로 들어갔다”면서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서술했다. 그는 “일본 낭인들이 황후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궁내 신하들이 막자 칼로 팔을 베어버렸다. 황후가 상궁 옷을 입고 상궁 무리 안에 섞여 있어 누가 황후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일본 낭인들은 한 명씩 끌어내 250cm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뜨렸다. 두 명이 떨어진 뒤 황후가 복도를 따라 도망갔고 일본 낭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 몇 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적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이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주(州) 군에 비상대기령을 내렸을 정도로 당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 문서가 난수표 식 숫자암호로 작성됐으며, 웨베르 대리공사가 일본인들이 궁내에 침투한 경로를 상세하게 그린 지도도 포함돼 있어 흥미롭다.

고교 국사 교과서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 “명성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세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일본 침략자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고 간략하게 기술돼 있다.

박씨는 “러시아는 친러 성향을 보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대응방안 마련과 정확한 진상 파악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가 바로 웨베르 보고서”라면서 “지금까지 명성황후 시해 용의자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을 뿐 한번도 구체적인 이름이 거론된 적이 없었는데, 이번 보고서는 사건의 전모를 명확히 밝히는데 진일보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국제교류재단(이사장 이인호)의 지원으로 러시아에서 한러관계 문서를 10년여 동안 조사해온 박씨는 웨베르 보고서 이외에도 러시아에서 발견한 자료 수 천 건의 목록과 해제를 담은 책을 차례로 출간할 예정이다.

<김수경기자>skkim@donga.com

▼바로잡습니다▼

사진설명에서 책 이름은 '라코레' 가 아니라 '한국, 독립이냐,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냐' 이며, '명성황후의 초상화' 가 아니라 '삽화' 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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