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다석과 씨알을 그리며'…함석헌 선생 제자 김용준 교수기

  • 입력 2001년 3월 1일 18시 40분


1955년 12월 중순경이었다고 생각된다. 해질 무렵 나는 원효로 4가의 함석헌 선생님 댁으로 가고 있었다. 선생님의 탄생 2만 날을 맞이해 몇몇이 모여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로 돼 있었다.

십여 명이 선생님 댁에서 말씀을 들으며 밤을 지샜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날 밤 선생님께서는 포물선 모양의 그래프가 그려진 백지 한 장을 가지고 나오셨다. 2만 날을 맞이하시는 당신의 생애를 그래프에 담으셨다고나 할까. 어떻든 그 도표를 따라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지난날을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그 포물선형 도표 두 군데에는 수직으로 꺾이는 단애점(斷崖點)이 있었다.

첫 번째 단애점은 오산고보 시절 유영모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해였고, 두 번째의 단애점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다니실 때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선생님의 성서집회에 나가신 때였다.

2만 날을 살아오시는 동안 이 두 스승을 만남으로써 정신적으로 큰 도약을 할 수 있으셨다는 말씀이었다. 백지에 가까운 당신께 인도의 간디를 처음 말씀해 주신 분이 유 선생님이셨고, 일본에 우찌무라 간조란 무교회주의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유 선생님을 통해서였다고 하셨다. 평상시 함 선생님이 ‘선생님’이라 하시면 그것은 유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씀이었다.

1962년 늦봄, 나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함 선생님을 모시고 있었다. 5·16 군사혁명 직후 혁명은 사람이 해야지 군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준엄하게 꾸짖으신 저 유명한 글 ‘5·16을 어떻게 볼까’가 장준하의 ‘사상계’에 게재된 사건으로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으셨던 것이다.

군사 쿠데타가 터진 나라에서 이런 글이 발표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도리어 높이 평가됐다는 후문이었다. 어떻든 3개월간의 미국 시찰 뒤 워싱턴으로 돌아오신 선생님은 “군사혁명 정부는 어떻게 통치를 하고 있느냐”라는 미 국무성 관리의 질문에 “네, 잘 하고 있습니다”라고 간단히 답변하셨다. 그런 우매한 질문에 더 이상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신 듯했다.

얼마 뒤 한국 유학생회의 초청강연을 앞두고 나는 강연중에 군사혁명 정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마시라고 선생님께 청을 드렸다. 선생님은 내 청을 받아들여 태평양을 건너온 너희들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으로 일관하셨다. 그 후 워싱턴 교포사회에서 함석헌은 군사정부의 사쿠라라는 풍문이 돌았다. 선생님은 독일 인도 미얀마를 거쳐 1년 후에나 귀국하시겠다며 독일로 향하셨다.

선생님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당시 독일에 유학 중이던 제자 안병무 박사의 후일담에 의하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한국에서 온 신문을 보시다가 눈물을 글썽이시면서 “나 돌아갈래”, 조용히 한 마디 남기시고 곧바로 공항으로 향하셨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내게 보내신 많은 편지 중 “싸워야지”라는 첫 마디로 시작되는 의분에 찬 편지를 받은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 때 나는 인도쯤에서 보내실 선생님의 편지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귀국 일성으로 군사독재정권을 혹독하게 꾸짖으시며 장준하를 국회의원으로 옥중 당선시킨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오는 13일은 함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 함 선생님이 평생 스승으로 모시던 유영모 선생님의 탄생 111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를 돌아보고 은밀한 곳에 되돌아가 지금 깊음을 안다(省吾返隱, 知今深)”라는 좌우명을 나에게 주신 유영모 선생님의 추창(U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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