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히틀러에 맞선 처칠의 승부수

  • 입력 2000년 12월 29일 19시 11분


‘히틀러의 군대가 유럽대륙을 휩쓸자, 자유민주주의를 받드는 영국 국민은 처칠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단결해 완강히 저항했다. 역사 발전의 섭리를 거스른 나치 독일은 몰락이 예정되어 있었다….’

숱한 역사책과 전쟁영화는 그렇게 말해 왔다. 과연 그랬을까.

역사학자로 특히 히틀러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는 1940년 5월 24∼28일 닷새 동안에 돋보기를 들이댄 후 결론짓는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우리와 후손이 야만성이라는 암흑 아래 갇히지 않도록 만든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그 과정은 예정되지도, 순조롭지도 않았다.”

처칠이 수상에 임명된 것은 5월10일. 독일군은 폴란드 덴마크에 이어 노르웨이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닷새 뒤 네덜란드도 항복했다. 영국군 25만은 프랑스의 덩케르트 해안에서 포위됐다.

이 운명의 시간에 처칠 수상은 결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대독 강경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수상직에 올랐지만 애틀리 전 수상, 라이벌인 외무장관 핼리팩스와 매사를 협의해야 했다. 핼리팩스는 독일과의 화평교섭 체결을 주장했고, 애틀리는 양다리를 걸쳤다.

책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 사람의 전략과 전황, 시민들의 표정을 대비시키며 역사적 결정이 내려진 28일의 문을 열어젖힌다.

처칠의 승부수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애틀리 핼리팩스와의 회동에 앞서 전체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덩케르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반응이 나왔다. 장내의 25명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올리더니 차례로 다가와 등을 두드렸다.”

저자는 결코 확신으로 가득찰 수 없던 결정이 자유민주주의와 이성의 지배를 보호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히틀러는 에너지와 규율로 가득찬 새로운 문명의 기운을 대변했으며 그의 대세는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처칠은 대영제국의 연명이 아닌 더 큰 것, 즉 서구 문명의 보존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으며, 우리가 삶을 값지게 영위할 수 있는 반세기 (책이 나온 1990년까지)를 안겨주었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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