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책]내가 읽은 책 '거대한 체스판'

  • 입력 2000년 12월 26일 15시 29분


◇미국 바로알기 교과서

“여러분은 세계에서 어느 나라 군대가 가장 강하다고 생각합니까?” 강의실에서 가끔 우스갯소리로 학생들에게 던져보는 질문이다. 학생들의 표정에는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윽고 몇몇은 “미군입니다”, “프랑스군 외인부대요”라고 답한다. “귀신 잡는 한국의 방위병요.” 제법 늙어 보이는 복학생의 농담에 강의실엔 폭소가 터진다.

정답(?)을 궁금해 하는 학생들에게 “세계 최강의 군대는 우리의 전경입니다”라고 말한다. 학생들은 왜 그런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군사력의 바탕이 되는 것이 경제력이나 첨단 기술력이라고 할 때 세계 최강의 군대는 당연히 미군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풍경을 떠올리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용산 미군 사령부 앞엔 항상 한국의 전경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세계 최강의 군대를 경비하는 또 다른 부대. 그러니 그들이야말로 ‘세계 최강의 군대’가 아닌가? 비로소 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린다.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미국은 더 이상 태평양 건너에 있는 ‘딴 나라’가 아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코미디 같은 한 달이 지나고 공화당 부시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한반도 정책에 주목한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북한을 밀어부칠 것이고, 어렵사리 조성된 한반도의 화해 분위기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등등.

미국과 관련된 이런저런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읽어보는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삼인)의 내용은 한 마디로 섬뜩하다. 카터 행정부에서 안보보좌관을 지냈던 브레진스키에게 오늘날의 세계는 그저 미국의 장기판일 뿐이다. 거대한 장기판 위에서 차와 포를 어떻게 움직여야만 초강대국 미국의 지위를 영원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관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한국에 대해 서술한 대목을 잠시 보자. “남한과 맺고 있는 밀접한 관계는 미군이 일본에 대규모로 주둔하지 않고도 일본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주며… 통일 혹은 중국 영향권으로의 편입 등으로 남한의 지위가 변하면 미국의 지위 역시 크게 변할 것이고… 남한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공간’이 되었고 남한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값진 것이 되었다.” 브레진스키에게, 아니 미국에 한국은 어디까지나 중국과 일본을 주무르기 위해 반드시 ‘통제’해야 할 전략 요충지일 뿐이다.

현재에도 SOFA 개정, 노근리와 매향리 문제, 주한미군 자체의 문제 등 우리와 미국 사이에는 풀어야 할 과제들이 쌓여 있다. 우리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미국이라는 골리앗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명기 (규장각 특별연구원·‘광해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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