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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월 9일 19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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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웃음▼
“자, 이제 회의를 시작할까요?”
지난해 12월 초 제일제당주 인사팀 회의실. 부서장인 H부장이 먼저 운을 떼었지만 정적만 흘렀다. 일부 부서에서 시험적으로 해오던 ‘호칭 파괴’로 회의를 진행하려 했으나 부원들이 감히 입을 열지 못했던 것.
“그런데 한 용감한 부원이 ‘부장님’ 대신 ‘○○○님’이라고 부르고 내가 ‘예, △△△님’하고 응답하자 곧 웃음바다가 됐죠.” (H부장)
이 회사는 새 천년에 들어서면서 호칭 파괴를 전사적으로 확대했다. 상급자는 하급자를 부를 때 이름 뒤에 ‘님’이나 ‘씨’를,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이름 뒤에 무조건 ‘님’을 붙여 부른다.
양모씨(28)는 “‘부장님’‘이사님’이라는 직급 호칭은 권위적이고 거리감이 있지만 이름을 부르니 한결 친근한 느낌”이라며 상하좌우의 커뮤니케이션이 보다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영화속의 한 장면▼
“7호님, ‘J-프로젝트’는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예, 1호님. 다음 주에 2차 접촉을 하기로 했습니다.”
‘007시리즈’류 첩보영화 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아이비즈넷주의 1호인 박병진대표(36)가 7호직원 노영호씨(31)를 불러 업무 진행 상황을 체크한 것.
인터넷 비즈니스 전문업체인 이 회사 내에선 이름이나 직책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숫자에 ‘님’을 붙여 부른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미래에는 인간이 이름 대신 ‘일련번호’로 불릴 것이라고 예견한 것처럼.
노씨는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젠 지위고하를 떠나 상대방을 대하기가 편해졌다”고 말했다. 심지어 자기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잇점이라고 덧붙였다.
▼'몸짓'에서 '꽃'으로▼
인간 관계를 규정하고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첫 출발점인 호칭. 시인 김춘수는 ‘꽃’이란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이름을 부름으로써 단순한 ‘하나의 몸짓’을 ‘꽃’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름에 ‘님’을 붙이는 것은 원래 시인이나 작가를 부를 때 정도였다고 서울대 박갑수교수(국어교육학과)는 말한다. 직급과 연공서열을 강조해온 20세기 기업문화에 반발, ‘인간주의 회복’을 지향하는 21세기에 어울리는 호칭이라는 분석이다. 상호평등의 디지털 공간인 PC통신에서 네티즌들은 진작부터 상대방을 △△△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름 아닌 번호를 부르는데 대해 박교수는 “일의 효율은 늘어날지 모르나 인격이 배제된 느낌”이라고 평했다.
한양대에서 미래학을 강의하는 공성진교수는 “21세기엔 관료형 기업문화가 사라지고 개인의 정체성이 존중되는 전문가형 기업문화가 일반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보 통신 인터넷 등 첨단산업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을 자극, 보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이름만 부르는 곳이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윗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기는 유교적 정서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경쟁력과 능률을 위해 위계질서,전통적 가치를 무너뜨리는데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호갑기자> gd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