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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4월 1일 19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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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서는 차지철(車智澈)대통령경호실장과의 권력게임에서 소외당한 불만 때문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게 총구를 겨눈 ‘패륜아’라고 단죄하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부마(釜馬)항쟁의 유혈진압을 막기위해 거사를 결행한 ‘영웅’이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김부장은 “각하와 나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고 동향이고 동기생이지만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각하 한사람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었다. 차실장이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백만명이나 2백만명 정도 희생시키는 것 쯤이야 뭐가 문제냐”며 부마항쟁 강경진압을 공언한 사실을 알고 일을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김부장이 그해 12월20일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얼마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당시 육군대위였던 김부장의 셋째동생 영규(英圭·49)씨는 그러나 최근 언론인터뷰에서 “형님의 일을 평가하는 것은 가족의 손을 떠난 일”이라고 말했다.
김부장 유족의 지난 20년은 말 그대로 ‘죽음 같은 세월’이었다.
김부장의 바로 아래 동생 항규(恒圭)씨는 사건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경영하고 있던 건설업체 등 전재산을 몰수당한 뒤 절간을 떠돌다 세상을 떠났다.
부인 김영희(金英姬·70)씨는 10·26 당시 살던 서울 보문동 집을 팔고 96년 강남으로 이사했으며 외동딸(46)은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다. 수감중이던 김부장에게 “네가 예전같으면 나랏님을 죽인 셈인데 어찌 살아남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고 되뇌었던 노모 권유금(權有金·96)씨는 지금도 10월만 되면 가슴앓이를 한다.
박대통령과 함께 숨진 차지철경호실장의 노모 김대안(金大安)씨도 작년 12월 경기 하남시 영락노인복지센터에서 1백1세의 삶을 마감하고 ‘효자였던 외아들’의 곁으로 떠났다.
〈김창혁기자〉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