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자린고비의 죽음을…」,전래동화 패러디

  • 입력 1998년 6월 9일 07시 11분


소설집 ‘자린고비의 죽음을 애도함’(창작과비평사)에 실린 11편의 이야기들은 작가 윤영수(46)가 모질게 마음먹고 감행한 실험의 결과물이다. 소설이라는 틀의 경계(境界)까지 밀고 가보자는 결심….

‘전혀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허구의 집을 지어야 소설’이라는 공식을 깨고 그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들어 누구나 아는 얘기, 혹부리 영감이나 나뭇꾼과 선녀, 자린고비, 떡장수 어머니와 호랑이 이야기같은 것으로 작품을 풀어나갔다.

“주먹을 묘사할 때는 마치 그 주먹이 눈 앞에 있는 듯 그려내는 게 소설의 리얼리티라고 믿으며 두번째 창작집까지 묶어 냈습니다. 그러나 꼼꼼이 데생을 하느라고 정작 해야할 얘기를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들었어요.리얼리티에 대한 고정관념을 훌쩍 뛰어넘고 싶었지요.”

‘자린고비…’속의 이야기들은 패러디다. 나뭇꾼은 선녀였던 아내를 학대하는 폭력남편으로 그려지고(‘하늘여자’) 떡장수를 잡아먹었던 호랑이는 ‘호안희’라는 이름의 외로운 전과자 사내로 등장해 민담과는 달리 죽은 떡장수 아주머니의 아이들을 돌본다.(‘동아줄,동아줄을!’)

민담을 조금씩 뒤틀어 낯설게 하기. 익숙했던 것들을 눈 부비며 다시 보게 만드는 그의 전법(戰法)은 단순히 내용 뒤틀기에 그치지 않는다.

‘환자 한삼성씨에 대한 임상보고서’에서는 기승전결의 소설적 구조를 찾아 볼 수 없다. 수차례 결혼을 거듭했던 어머니 때문에 상처입은 정신질환자 한삼성의 내력은 ‘병력’ ‘성적(性的) 이력’ ‘예후 및 결론’등으로 간추려진 보고서 안에 녹아 있을 뿐이다.

‘동아줄, 동아줄을!’에서는 한 남자의 추락사의 진상을 주변 사람과 사물이 토해내는 15건의 증언만으로 치밀하게 모자이크해낸다.

열한가지 이야기마당을 펼치면서도 윤영수는 정작 자신의 목소리는 드러내는 법이 없다.

저잣거리의 악다구니를 한 무더기씩 녹취해 풀어놓는 듯한 서술로 당대 삶을 묘사하는 냉정함. ‘리얼리티의 고정관념을 넘어서려는’ 윤영수의 실험은 다양한 사회적 방언들을 대단히 치밀하게 재현해내는 그 묘사력 덕분에 한때의 치기로 읽히지 않는다.

“어떤 얘깃거리에든 그 나름의 이야기방식이 있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하나의 틀에 고정시키지 않으려는 생각때문에 민담패러디에 도전했지만 다음 실험은 또 다른 모습일 겁니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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