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장석남, 3년만에 시집 「젖은 눈」 펴내

  • 입력 1998년 5월 12일 07시 08분


지나는 바람이 그의 속눈썹을 살짝 만지고 달아난다. 바람 따라 그의 영혼도 아주 잠깐 비누방울처럼 두둥실 떠오른다.

그런 찰나(刹那).

바람 한줌이 속눈썹 스치고 떠나는 느낌, 멧새 앉았다 차고 오른 뒤 나뭇가지 저 혼자 바르르 진저리 치는 순간, 새벽달 깨치며 샘에서 숫물 긷는 소리, 팔베개 해준 자리에 남은 연인의 머리카락 자국, 마른 빨래를 개는 화가의 큰 손에 잠시 머물렀던 햇빛 한줌….

시인 장석남(33)의 눈은 늘 그런 것들에 가 닿는다. 3년만에 펴낸 새 시집 ‘젖은 눈’(솔출판사)속에는 지상에서 잠깐 빛을 발하다 사라지는 ‘생(生)의 순간’들이 아름답고 구슬프게 인화돼 있다.왜 찰나적인 것들이 그에게는 그토록 소중한 것일까.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싹이 돋아 문득/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후일 꽃이 피고 씨를 터뜨릴 때/무릎 펴고 일어나며/一生을 잘 살았다고 하면 되겠나/그중 몇은 물빛 손톱에게도 건너간/그러한 작고 간절한 一生이 여기 있었다고/있었다고 하면 되겠나…’(‘봉숭아를 심고’중)

아기들 손톱으로도 짓이겨지는 여린 봉숭아잎. 그러나 그 가냘픈 생명을 키우며 시인은 거룩한 해와 달의 목을 축여주는 성스러운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누군가의 손톱 위에 아름다운 무늬를 남기며 사라지는 간절한 일생의 모습을 배우기도 한다.‘순간적인 것’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 맞서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중심에 있는 것, 커다란 것, 힘있는 것, 변하지 않는 것들이 지배하는 듯한 세상의 법칙.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갈대 몇 부러뜨리며 지나온 흔적 이상 그 무엇이 더 있으랄 것도 없이…’(‘서풍부·西風賦’중) 생명의 고리 속으로 고요히 돌아가기를 바란다.

“세상이라는 물 위를 건너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물결은 건너가다 그저 사라질 수도 있지요. 언제든 소멸할 수 있는 물결, 그 가여운 설렘이 제게는 생의 진실이나 진정한 힘으로 보입니다.”

찰나적인 것들의 소중함을 그는 자연으로부터 배웠다. 인천 앞바다 덕적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뭍으로 나오기 전까지 바다만 보고 살았던 소년. 지금도 그는 봄이면 ‘그 섬에 참나리꽃 둥굴레꽃 뚱뚱감자꽃이 환하게 피었겠구나’ 생각하며 서쪽을 아련하게 바라보거나 도시의 거대한 빌딩 숲 사이에 외롭게 선 나무들에 몸을 기대곤 한다.

장석남이 바라보는 짧고 귀한 ‘생의 순간’은 어떤 눈에나 쉽게 보이지 않는다.

‘감꽃이 피었다 지는 사이엔/이 세상에 와서 울음 없이 하루를 다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一切가 다 설움을 건너가는 길이다’(‘감꽃’중)라는 연민의 눈빛…. 눈물로 ‘젖은 눈’의 그물에만 삶의 순간들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진다.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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