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회 동아연극상 심사평]김윤철/「남자충동」연출 탁월

  • 입력 1998년 1월 22일 19시 46분


세계연극제 세계마당극축제 베세토연극제 서울연극제 등 볼거리가 풍성했던 지난 해, 역설적이지만 한국연극은 가장 빈곤했다. 세계연극제에 초청된 한국의 최근 대표작들은 외국의 손님들을 의식한 나머지 지나친 양식화로 오히려 원 공연이 가졌던 활력을 대부분 상실했다. 그러나 이 극심한 가뭄 속에서 몇 가지 단비와 같은 업적이 있어 우리는 아직 절망하지 않는다. 지난해 한국연극의 최대 화제작은 조광화가 쓰고 연출한 ‘남자충동’이다. 극은 알파치노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장정(안석환 분)이 그릇된 가부장제적 가치관에 따라 ‘남자다운’ 폭력으로 가정을 지키려다 폭력으로 가정을 망가뜨리고 스스로도 죽음을 당하는 이야기다. 조광화의 글쓰기도 인상적이었지만 그의 연출력은 대단했다. 무대의 공간을 필요에 따라 분할하면서 정서적으로 통합하는 공간구성력, 정서의 성격에 따라서 행동의 완급과 과다 및 방향을 조절하는 음악적 상상력, 무엇보다 등장인물간의 심리적 사회적 관계변화를 동적인 회화로 번역해내는 시각적인 해석력이 뛰어났다. 연기자들의 성격 창조 역시 훌륭했다. 특히 도박으로 집을 날린 남편과 싹수 그른 자식들을 놔두고 살길을 찾아 떠나는 어머니 역의 황정민은 때로는 단호함으로, 때로는 매몰참으로, 때로는 안타까운 모정으로 복합적인 감정들을 질박하게 표현해냈다. 무엇보다 이 공연의 압권은 1996년 동아연극상 연기상 수상자인 안석환이었다. 알파치노의 차가운 분석력과 냉정함을 흠모하면서도 불 같은 성격을 억제하지 못하여 설득보다는 주먹과 칼로 문제를 해결하다 망하는 장정 안석환은 깊고 넓은 감정의 영역들을 능란하게 넘나들며 배역을 그야말로 동물적으로 육화하면서 두 시간 동안 관객들을 완전히 장악했다. 필자를 포함한 심사위원들은 이런 평가를 바탕으로 ‘남자충동’을 제작한 극단 환 퍼포먼스에 작품상을, 극을 쓰고 연출한 조광화에게 연출상을, 배우 안석환과 황정민에게 연기상을 몰아줬다. 장진이 쓰고 연출한 ‘택시드리벌’에서 개인택시기사역을 맡았던 최민식은 하루 동안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각양각색의 부류들을 유영하면서 대도시의 살풍경을 탈출하는 과정을 믿음이 가게 창조했고 다국적 공연 ‘리어왕’에서 유인촌은 언어와 감정구조가 다른 여러 문화권의 배우들과 호흡을 잘 맞추며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대산문화재단은 경제가 어려운 이 시대에 2억원을 들여 전국청소년연극제를 주최하고 지원함으로써 한국연극의 장래를 위한 씨뿌리기 사업을 시작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위와 같은 몇몇 업적에도 불구하고 1997년의 한국연극은 극심한 흉년이었다. 흉년을 흉년으로 평가하여 분발을 촉구한다는 의미에서 심사위원들은 희곡상 무대미술상 대상 부문의 수상작을 내지 않기로 동의하였다. 김윤철(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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