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유적 지킨 민초들[횡설수설/이진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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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가 중건된 시기는 일제의 민족말살 통치기였던 1932년이다. 1706년(숙종 32년) 처음 건립됐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1868년 철거됐다가 64년 만에 충남 아산시 백암리 충무공의 고택 옆에 고쳐 지은 것이다. 현충사 중건은 범민족적 유적 보존 운동의 일환이었다. 문화재청이 ‘겨레가 세운 현충사’라 하는 이유다.

▷1931년 5월 13일 동아일보 특종 보도 ‘2000원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가 발단이 됐다. 충무공 종가의 가세가 기울어 충남 아산의 충무공 묘소와 위토(位土·묘소 관리비 조달을 위한 토지)가 경매에 넘어갈 위기라는 내용이었다. 논설위원이던 위당 정인보는 사설에서 “(이는) 민족적 수치에 그치지 않는 민족적 범죄”라며 “충무공의 묘소와 위토를 보존하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책임”이라고 호소했다. 각지에서 편지와 성금이 동아일보로 답지하기 시작했다.

▷일곱 식솔을 거느린 참기름 행상부터 경북 칠곡의 대부호까지 동참했다. 평양 기독병원 간호부 40명은 점심 한 끼를 굶고 모은 성금을, 일본 고베 증전제분소 조선인들은 5일간 동맹 금연으로 모은 돈을 보탰다. ‘벙어리궤(저금통)’를 통째 보내온 어린이도 있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하던 도산 안창호 등 흥사단원 30명과 미주 멕시코 지역 한인들도 참여했다. 1년간 2만 명 400여 단체가 총 1만6021원30전(현재 가치 10억 원)을 모았다. 충무공 묘소와 위토에 걸린 빚을 갚고도 남아 현충사를 중건했다.

▷충무공 유적 보존이 대중운동으로 확대된 배경엔 국난 극복의 상징인 충무공을 숭상하던 시대상이 있다. 당시 언론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운동 차원에서 영웅들의 업적을 재조명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충무공이었다. 동아일보는 1921년 4회 분량의 ‘이조인물약전 리순신’을 소개한 데 이어 1930년엔 사학자인 환산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을, 1932년에는 당시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는 우회적인 항일운동이었던 셈이다.

▷문화재청은 현충사 중건 90주년을 맞아 충무공 유적 보존 참가자들의 편지와 성금대장 등 4254점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했다. 또 성금 기탁자들의 이름과 단체명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후손을 찾아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기탁자 명단을 다시 본다. 경남 동양제철소, 전남 나주협동상회, 간도 용정촌 송원전당포, 마산 남선권번 방취란, 경기 조선소년군 제6호대 대원 일동…. 유적 지키기를 통한 독립운동의 기록이자 참혹한 역사를 되풀이 말자는 징비록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충무공 이순신#이순신 유적#민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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