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하정민]부패 족벌 정치인이 ‘차이나머니’를 만났을 때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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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힌다 라자팍사 전 스리랑카 대통령 겸 총리(왼쪽)가 2019년 8월 동생 고타바야가 대선에서 승리하자 동생과 함께 지지자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재선 대통령을 지낸 후 동생 밑에서 이달 9일까지 총리를 지낸 그는 가문의 정치적 기반인 남부 함반토타 일대의
 개발을 위해 중국의 ‘일대일로’에 무리하게 참여해 국가 부도를 촉발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콜롬보=AP 뉴시스
마힌다 라자팍사 전 스리랑카 대통령 겸 총리(왼쪽)가 2019년 8월 동생 고타바야가 대선에서 승리하자 동생과 함께 지지자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재선 대통령을 지낸 후 동생 밑에서 이달 9일까지 총리를 지낸 그는 가문의 정치적 기반인 남부 함반토타 일대의 개발을 위해 중국의 ‘일대일로’에 무리하게 참여해 국가 부도를 촉발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콜롬보=AP 뉴시스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가 19일 최초로 국가부도를 맞았다. 그 이면에 라자팍사 일가와 중국이 있다. 2019년 11월부터 집권 중인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은 1949년 남부 함반토타 지구의 싱할라족 유력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를 포함해 9남매가 있는데 이 중 샤말(80), 마힌다(77), 고타바야, 바질(71) 등 4형제가 대통령, 총리, 장관 등을 주고받으며 부도를 촉발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2005∼2015년 재선 대통령을 지낸 마힌다는 집권 중 동생 고타바야를 국방장관에, 형 샤말을 관개부장관에 발탁했다. 마힌다는 3선에 실패했지만 2019년 고타바야가 권좌에 올랐다. 고타바야는 전직 대통령인 형 마힌다를 총리로 들이고 동생 바질을 재무장관에 앉혔다. 바질의 별명은 ‘미스터 10%’. 국책 사업을 허가할 때마다 최소 10%의 이권을 챙긴다는 뜻이다.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마힌다는 집권 직후부터 가문의 정치적 기반인 함반토타 일대 개발에 주력했다. 문제는 함반토타의 인구가 8300명에 불과하고 미국의 주(州)에 해당하는 함반토타 지구 전체의 주민도 60만 명 미만이라는 점이다. 변변한 산업도 특산품도 없는 허허벌판 어촌을 최대 도시 콜롬보항에 맞먹는 물류 허브로 키우겠다는 막무가내식 계획을 세운 후 인도, 일본 등에 투자를 요청했지만 사업성이 낮다며 퇴짜를 맞았다.

마힌다 정권은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개발도상국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해 각종 인프라를 건설해주고 그 과정에서 중국이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에 참여하겠다며 제 발로 뛰어들었다. 중국은 함반토타의 항만 개발, 철도 및 공항 건설에만 11억 달러가 넘는 돈을 들였고 이 외에도 스리랑카 곳곳에 차이나머니를 뿌렸다. 2014년 스리랑카를 찾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개발된 함반토타항에는 입항하는 배도, 찾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항만 운영으로 돈을 벌지 못하는 가운데 중국이 빌려준 돈은 이자까지 붙어 눈덩이처럼 불었다. 빌린 돈을 갚을 길이 없자 스리랑카는 2017년 함반토타항의 운영권을 99년간 중국에 넘겼다. 사실상의 영토 할양이다. 중국 건설사가 중국 노동자를 데려와 인프라를 건설하고 이들이 임금을 중국으로 송금하는 일대일로의 본질을 감안할 때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중국이 돈을 빌려준 이유 또한 함반토타, 파키스탄 과다르항, 아프리카 지부티 등을 묶어 서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를 영향력 하에 두려는 목적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200만 명의 스리랑카 국민이라고 이를 모를 리 없다. 마힌다가 집권 중 각종 축재를 통해 9000만 달러(약 1170억 원)의 부를 쌓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런데도 왜 마힌다의 동생 고타바야를 다시 대통령으로 만들어줬을까. 라자팍사 일가가 극우 민족주의, 경제성이 전무한 함반토타항 개발 같은 대중영합정치를 앞세워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린 탓이다.

다민족 다종교 국가인 스리랑카에서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불교도 싱할라족은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 말레이계 이슬람, 기독교도 등 소수파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특히 1983년부터 26년간 이어진 타밀족과의 내전을 마힌다 정권이 2009년 승리로 끝내면서 그가 ‘싱할라족과 불교도의 수호자’ 이미지를 굳힌 것이 결정적이었다.

즉 라자팍사 일가가 인종 및 종교 갈등을 부추겨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 데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진 오랜 식민지배, 내전 등으로 스리랑카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경제 발전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 와중에 일대일로에 섣불리 가담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스리랑카의 물가상승률은 34%를 넘나들고 연료, 식품 등 각종 생필품이 부족해 민생 경제가 파탄 지경이다. 국가부도 선언 3일 전인 이달 9일 마힌다가 총리에서 물러났지만 고타바야의 동반 퇴진까지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현재 스리랑카 부채 70억 달러 중 최소 20%가 중국에 진 빚이다. 일대일로와 차이나머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함반토타항 정도가 아니라 더 많은 국가 기간시설을 중국에 내줘야 할지 모른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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