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없던 금관가야 불러낸 발굴[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입력 2021-10-19 03:00수정 2021-10-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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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바람개비 모양 청동 장식(지름 12cm). 대성동 13호분에서 출토된 6점 가운데 하나다. 대성동 2호분에서도 유사한 청동 장식이 1점 출토됐다.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② 용무늬 장식 금동제 말띠꾸미개(지름 6cm). 대성동고분박물관이 2012년 발굴한 91호분에서 출토된 말갖춤 중 하나다. 용무늬가 새겨진 이 유물은 선비족 왕족인 전연(前燕)에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대성동고분박물관 제공 ③ 청동솥(높이 17.8cm). 대성동 47호분에서 출토됐다. 동복이라고 불리는 이 솥은 북방 유목민이 즐겨 사용한 용기다. 이 솥을 근거로 부여 왕족이 김해로 이주해 금관가야를 세웠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가야는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채 크고 작은 여러 나라가 분립하다가 신라에 차례로 복속됐다. 서기 4세기까지는 금관가야가, 5세기 이후에는 대가야가 가야 연맹을 이끌었다. 이 가운데 금관가야에 관한 연구는 워낙 미진해 이 나라가 언제 세워졌고 또 언제 멸망했는지조차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이 서기 42년에 왕이 됐고 532년에 구형왕(또는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했다는 소략한 기록이 있지만 그마저 발굴 성과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금관가야에 대해 얘기할 때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흔히들 금관가야에 대한 연구 수준은 대성동 고분군 발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하곤 한다. 금관가야를 신화의 영역에서 역사의 무대로 옮겨준 대성동 고분군은 어떻게 발굴되었고 또 이 발굴을 통해 어떤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을까.

○ 밭 아래 숨겨진 거대 목곽묘

금관가야 왕릉을 찾으려는 노력은 일제강점기에 본격화했다. 조선총독부는 임나일본부설(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을 증명하고자 가야 왕릉을 찾기로 하고 김해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기왕에 알려진 수로왕릉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다. 오랜 공백을 거친 다음 1980년대 후반에 다시 금관가야 왕릉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신경철 교수가 이끄는 경성대박물관 조사단은 왕릉이 있을 법한 김해의 능선 몇 곳을 선정해 파보기로 했다. 1987년과 그 이듬해, 김해평야 한가운데에 자리한 칠산동에서 발굴을 진행했는데 무덤 119기를 찾아냈지만 모두 규모가 작고 부장품도 빈약했다.

두 번째 후보지는 구지봉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성동의 야트막한 구릉이었다. 구릉 곳곳은 밭으로 경작 중이었는데 봉분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가야토기 조각만이 채집될 뿐이었다. 1990년 6월 12일, 조사원들은 조사 구역에 좁고 길쭉한 도랑을 파며 유적의 존재 여부를 확인했다.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심상치 않은 흔적들이 드러났다. 장방형 구덩이의 윤곽이 확인된 것이다. 긴 것은 길이가 8.5m, 너비가 4.8m나 됐다. 경주를 제외한 영남 각지에서 좀체 볼 수 없는 큰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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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구역 전체를 제토(除土)한 다음 확인하니 구덩이는 3개였다. 구덩이 2개가 한 목곽묘(木槨墓)의 주곽과 부곽이었고, 다른 구덩이 하나는 단독의 목곽묘였다. 두 무덤 모두 도굴 피해를 입었지만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두 무덤에서 모두 쇠로 만든 갑옷과 투구, 말갖춤, 무기와 농기구, 철소재가 쏟아졌다. 1호분에서는 순장자 인골 5구와 함께 소뼈가 확인됐다. 2호분 출토품 가운데 주목받은 것은 일본 고훈시대 무덤에서 종종 출토되는 바람개비 모양 청동 장식이었다. 조사단은 이 2기의 무덤이 4세기 말 혹은 5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했다.

발굴 소식을 비밀에 부치려 했지만 어느 틈엔가 조금씩 새어나가 발굴 현장은 학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고, 발굴이 채 끝나지 않은 7월 초 “금관가야 왕릉 첫 발굴”이라는 제목으로 발굴 성과가 여러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나라가 없어진 후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했기에 퇴락의 길을 걸었고 끝내 지표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금관가야 왕릉들에 새로운 조명이 가해지는 순간이었다.

○ 신화 뒤흔든 ‘왕족 이주설’

같은 해 9월부터 시작한 2차 발굴에서는 37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가장 주목받은 것은 29호분이었다. 이 무덤은 길이 9.6m, 너비 5.6m에 달하는 대형분이며, 가야 고분 몇 기가 이 무덤을 파괴하고 만들어진 관계로 보존 상태가 나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덤 속에는 많은 유물이 남아 있었다. 서쪽에는 항아리가 동서 6열, 남북 8열로 정연하게 놓여 있었고 동쪽에는 목관 받침으로 쓰인 91점의 쇠도끼가 깔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쇠도끼는 철소재인 동시에 시장에서 화폐처럼 쓰인 중요 물품이었다. 이 무덤 발굴의 하이라이트는 토기도 철기도 아닌 이색적 풍모의 청동 솥이었다. 동복(銅복)이라 불리는 이 솥은 유목민이 유제품을 끓이거나 의례를 거행할 때 사용한 그릇이며 만주 일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성동 고분군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만 해도 금관가야의 왕족 묘역을 찾았다는 점, 무덤의 형태와 유물의 격으로 보아 김해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했으나 동복 출토 이후에는 금관가야 왕족의 출자가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발굴 책임자인 신 교수는 동복과 함께 북방지역과 유사한 장례 습속 몇 가지를 제시하며 부여 왕족이 3세기 후반경 김해로 이주하여 금관가야를 건국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고분군에서 5세기 초 이후의 대형분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금관가야가 서기 400년 고구려-신라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한 다음 다른 곳으로 본거지를 옮겼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 여전히 논쟁 중인 학계

이 학설은 가야사 연구에 파란을 일으켰다. 그간 학계에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일정 부분 활용하면서 연구를 진행해 왔는데, 왕족 이주설은 그와 달리 금관가야의 건국을 늦추었을 뿐만 아니라 5세기 초에 금관가야가 멸망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도 이 논쟁은 지속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대성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근래에는 3세기 후반 이후 새로운 집단이 이주해 금관가야를 건국했다기보다 삼한 시기의 구야국이 금관가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차츰 많아지고 있다. 또한 금관가야의 성장 배경으로 활발한 대외 교류 혹은 교역을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관가야를 둘러싼 여러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새로운 발굴들이 이어져야 금관가야의 실체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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