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서영아]노인 한 명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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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자기역사’ 기록을”
인생 2막 준비 위해 1막 되돌아봐야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지(知)의 거장’이라 불리던 일본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가 향년 81세로 세상을 떴다. 그의 영향을 받은 동시대인으로서 조의를 표한다.

누군가의 부고를 접할 때마다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떠올리곤 한다. 부고 몇 글자로 요약될 수 없는 그 삶의 무게를 생각해보며, 육신의 소멸과 더불어 그 ‘노인’이 알고 사랑하고 체험했던 그 모든 기억과 네트워크가 사라져버렸다는 게 아쉽게만 느껴진다. 다치바나의 경우 특히나 규모가 큰 도서관이 사라진 것일 수 있겠지만, 그가 생전에 100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수많은 생각들을 기탄없이 세상과 공유했다는 점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다치바나는 2008년 릿쿄대에서 ‘자기역사(自分史) 쓰기’라는 강좌를 운영한 적이 있다. 인생 2막을 준비하는 50대 이상 시니어 세대를 대상으로 한 강좌였는데, 40여 명의 수강생이 그의 지도하에 한 학기 만에 자기역사를 써냈다고 한다. 그는 저서 ‘자기역사를 쓴다는 것’에서 “사람은 60세 정도 되면 자기역사를 쓰고 싶어 하더라”며 시니어 세대는 반드시 인생을 되돌아보고 기록하라고 권한다. 100세 시대에 인생 2막 무대를 디자인하기 위해서도 1막을 되돌아보고 ‘내 인생은 뭐였던가’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다.

아사히신문사는 2014년부터 평범한 개인의 자기역사 출판을 돕는 사업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한 가이드북이 자료편과 노트편 한 세트로 나와 있다. 자료편은 1926년부터 1년에 한 쪽씩 그해의 주요 뉴스와 트렌드, 유행을 빼곡히 정리해놓아 개인 필자의 기억을 돕는다. 예컨대 해방되던 날, 혹은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을 적시해주면 그날 자신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훨씬 잘 기억할 수 있다. 노트편에는 이렇게 자신의 자취를 더듬어 연표를 만들고 시기별, 주제별로 기록하게 했다. 이를 토대로 자기 역사 쓰기 작업이 시작된다.

아무도 읽지 않을 수 있는데, 개인 역사를 굳이 왜 쓰는가. 우선은 본인을 위해, 나아가 가족과 사회를 위해서다. 개인에게는 ‘내가 살았다’는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 가족에게는 고인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을 덜어주는 일이 된다. 어지러운 역사 속에서 20세기를 거쳐 21세기를 살아낸 분들의 기록은 그 자체가 무명인들의 ‘민중사’이기도 하다.

손때 묻은 장서 10만 권이 그득한 빌딩을 남긴 다치바나의 삶은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철학과 통한다. 막대한 기록의 소장가답게, 그는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미니멀 라이프 열풍을 일으킨 책 ‘버리는 기술’(국내에도 소개됐다)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당장 필요하지 않으면 버린다’는 식 접근이 개인과 사회의 잠재력, 즉 발전 가능성을 스스로 잘라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불필요한 것과 잉여, 비축 속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문화와 역사가 꽃피는 법인데, ‘버리기’만 강조하면 ‘소비’라는 눈앞의 쾌락에만 의존하게 된다는 얘기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오래된 것은 내치고 새것만을 추앙하는 풍조가 두드러진다. 동료들을 잘라내야 남은 자들이 배를 불리는 냉혈자본주의적 사고도 만연하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이 걸어온 길을 긍정하고 남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류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은 기록과 축적에서 나왔다. 평범한 우리 모두가 각자 도서관 하나씩이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sya@donga.com
#노인 죽음#도서관 하나#자기역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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