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 필요 없다”는 트럼프
85년 동맹 덴마크에도 “힘든 방식” 위협
북극海서 미-중-러 패권 경쟁 치열
‘거래적 동맹’보다 더한 것도 대비해야
천광암 논설주간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서부는 건맨과 무법자들의 세상이었다. ‘법’보다 ‘주먹(Lynch Law)’이 가깝던 이 시절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로 ‘콜트 싱글 액션 아미’란 게 있다. 서부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리볼버형 권총이다. 이 권총에는 공식 상표명보다 더 유명한 별칭이 있다. ‘피스메이커(Peacemaker)’다. 제조사 콜트가 만든 ‘마케팅 용어’인데, 야만과 폭력을 상징하는 물건에 ‘피스메이커’라니…. 이런 반어(反語)와 역설이 또 있을까.
어쩌면 ‘피스메이커’로 불리기를 좋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서도 비슷한 착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새해 벽두나 다름없는 지난 3일 특수부대를 투입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마치 자기 집 다락에 있는 물건 꺼내오듯, 데리고 나왔다. 우리가 알던 국제법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도 국제법이 안중에 없다는 사실을 공언했다. 8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내겐 국제법이 필요 없다”고 했다. ‘국제적 사안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하나 있다. 나 자신의 도덕성”이라고 했다.
베네수엘라 다음은 그린란드다. 트럼프 대통령은 9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그린란드 확보 문제를 놓고 “난 합의를 타결하고 싶고 그게 쉬운 방식이지만, 우리가 쉬운 방식으로 하지 않으면 힘든 방식으로 하겠다”고 했다. 그린란드를 자치령으로 두고 있는 덴마크의 처지에서는 ‘피스메이커’의 총구가 관자놀이에 와서 닿은 느낌일 것이다.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덴마크를 동정하고 있을 처지는 아니다. 공공연히 말로 옮겼느냐, 옮기지 않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내겐 국제법이 필요 없다’는 태도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전혀 다를 게 없다. ‘무법자 건맨’들의 시대에 총 한 자루 없는 ‘약자의 정의’만큼 무망하고 무의미한 것은 없다. 중국과 러시아를 등에 업고 핵보유국 행세를 하려는 북한을 상대하면서 G2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생존곡예’를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얼어붙은 빙하의 땅 그린란드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 미국이 무리를 해서라도 그린란드를 손에 넣으려는 것은 미-중-러 간 북극해 패권 다툼이 가장 큰 원인이다.
북극해는 불과 4, 5년 전까지만 해도 일체의 정치적 갈등과 군사적 긴장이 배제된 곳으로 만들자는 국제적 합의(일명 ‘북극예외주의’)가 통용되던 ‘평화의 바다’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미국의 위협과 압박에 직면한 덴마크의 국방정보국은 지난해 12월 내놓은 정보보고서에서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북극에서 러시아 중국 미국 등 강대국 간의 경쟁이 점점 더 가열되고 있다. 북극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고 있으며, 미국의 안보 및 전략적 초점이 북극으로 쏠림에 따라 이러한 흐름이 더 가속화할 것이다.”
“러시아는 10년 넘게 북극의 군사 인프라를 꾸준히 확장하고 현대화해 왔다.”
“중국의 장기적 목표는 빙하 아래 미사일 발사용 잠수함을 배치해 러시아 및 미국과 동일한 핵 보복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북극해의 이런 지정학을 염두에 둔다면 그린란드가 미국에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인 것은 맞다. 북극해와 이를 둘러싼 나라들의 해안선이 맞닿는 전체 길이를 100이라고 치면, 러시아가 53.2%를 점하는 반면 미국(알래스카)은 3.8%에 불과하다. 미국으로선 영토의 대부분이 북극권에 들어 있는 그린란드가 탐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해도 덴마크는 미국의 85년 동맹이다. 동맹을 상대로 노골적인 협박에 가까운 “힘든 방식” 운운하는 것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더구나 미국은 그린란드에 미군기지 사용권을 이미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심리적으로 필요해서” 굳이 소유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정도면 ‘거래적 동맹’은 ‘돈로주의’의 선한 쪽 얼굴에 속할 수도 있다.
한국으로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한미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한 노력을 조금도 소홀히 해선 안 되겠지만, ‘돈로주의’가 어떤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준비는 해둘 필요가 있다. 또한 북극해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우선순위에서 한반도와 북핵이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대비책도 시급히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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