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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100세 시대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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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그의 진짜 ‘인생 여행’이 시작됐다[서영아의 100세 카페]‘은퇴후 세계 여행 떠난 아부지.’ 이런 특이한 제목의 유튜브 사이트를 지인이 보내왔을 때 잠시 망설였다. 지면에 유튜버를 다룰 경우 ‘홍보해준다’는 오해를 살 수 있어서다. 하지만 전직 공무원 최수길 씨(64)의 ‘수길따라(sugilway) TV’는 조금 달라 보였다. 상업성과 거리가 있었고 퇴직후 삶을 고민하는 시니어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듯했다. 무엇보다 그가 내세우는 ‘가슴 떨릴 때 떠나라, 다리 떨리면 못 간다’는 캐치프레이즈가 강렬했다.2월초 방글라데시를 여행 중이던 그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2021년 6월 튀르키예 여행 때부터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지내고 있다. 16일 그가 사는 춘천으로 향했다.어쩌다 유튜버“퇴직하면 바로 떠나려 했는데, 코로나19 상황하고 겹쳐 움직일 수 없었죠. 튀르키예가 가장 먼저 관광객에 대한 방역을 완화했어요. 여행하며 찍은 동영상을 가족에게 보냈는데 딸이 재미있다며 유튜브에 올리자고 하더군요.”그가 40일간 찍어온 영상들은 ‘60대 아빠의 나홀로 터키여행’이란 제목으로 약 40편이 올라갔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몇년간 100명도 안되던 구독자가 하루 700~800명씩 늘었고, 15편 정도 올렸을 때 1만명을 돌파했다. -반응이 좋은 이유는 뭐라고 보세요?“코로나19 때문에 다들 해외에 못 나가니까 대리 만족이 됐던 것 같아요. 또 댓글을 보면 ‘자신이 여행하는 느낌’이란 표현이 많아요. 제가 해외에서도 주로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그분들과의 소소한 대화나 일상을 그대로 전하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같아요.”당시 튀르키예는 일상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았다. 튀르키예편 마지막회에는 이런 환경에서 40일간 생활하다 귀국한 그가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한국의 엄격한 방역 시스템에 당혹해하는 모습도 기록돼 있다. 이후 ‘은퇴 후 따듯한 태국에서 겨울나기’를 거쳐 스페인과 포르투갈, 베트남, 몽골에 다녀왔다. 필리핀에서는 어학연수를 겸해 석 달 간 체류했고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코카서스 3국(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각기 묶어서 가기도 했다. 그렇게 이번의 방글라데시까지 17개국을 돌았다.여행은 에피소드와 해프닝의 연속으로, 그가 겪는 좌충우돌이 가감없이 등장한다. 이방인에게 친절한 현지인들의 모습도 빠지지 않았다. 언어가 부족한 부분은 웃는 얼굴과 바디 랭귀지로 메웠고 때로는 아마추어 성악가를 뛰어넘는 노래실력으로 현지인들과 교감을 이어갔다. 수길따라TV는 구독자 13.4만 명, 누적 조회수 2037만회를 기록 중이다(15일 현재). 구독자의 85%가 45~65세 층이다.가난, 그리고 야학 선생님과의 인연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그는 강원도 교육청에서 40년을 근무하고 2020년 퇴직했다. 최종직함은 도 교육청 행정국장. 직전에는 원주 교육문화관 관장을 지냈다. 지방직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위직인 3급 부이사관까지 올랐다.그런데 그의 학력이 눈에 띄었다. 중고 모두 검정고시다. “무척 가난했어요. 혼자 월남했던 아버지는 1907생이셨고 저희가 자랄 무렵에는 이미 연로해 일을 못하셨어요. 남에서 만나 결혼한 어머니는 6.25때 부상으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셨죠. 저희 4남매의 정규학력은 국민학교 졸업으로 끝났어요.”신문팔이나 ‘아이스케키’ 장사 등으로 가계를 도우며 야학에서 공부했다. “7사단 군인교회에서 저녁에 중학교 과정을 가르쳐줬어요. 공부만이 아니라 인생 멘토로 형님처럼 도와줬어요. 부대에서 짬밥을 담아와 나눠주기도 하고 치약 비누 등을 주기도 했죠.” 이런 군인 중 고려대 법대생으로 군복무 중이던 차석용 전 LG생활건강 부회장(현 휴젤 대표)과의 인연이 재미있다. 차 대표는 그를 눈여겨보고 계속 관심을 보이며 격려해줬다. “춘천의 한 명문고에 장학생으로 합격해 학비는 해결됐는데 기숙사비를 낼 수가 없었어요. 한동안 비슷한 처지 친구 자취집에서 살며 학교에 다녔는데 끼니를 때울 수가 없었죠. 어느날 기숙사 식당에서 몰래 밥을 먹으려다 들켜 엄청나게 맞고 퇴학처분 당했어요. 죄명은 ‘무단도식(盜食)’이었네요.”삼청교육대 갈 뻔했던 말단 공무원1977년, 인권도 복지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 살아온 이야기는 당시 시대상황까지 겹쳐 고난의 연속이다. 한동안 제주도에 가서 일본 밀항을 꿈꾸기도 했다.“그 무렵 이미 제대해 서울로 간 차석용 선생님이 ‘서울로 와서 우리 집에서 지내며 공부하라’고 권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고집이 좀 있어요.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고는 올라와서 고졸검정고시를 치르고 입주과외를 했어요. 드디어 좀 살 만해졌는데 전두환 정부가 과외 금지 조치를 내놨죠.”그해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1980년 9월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됐지만 부정투표에 항의했다가 이듬해 5월 의원면직 당했다. “삼청교육대 갈지, 입 다물고 사표쓸지 선택하라고 하더군요. 집에 돌아가 삼청교육대 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결사반대하셨어요. 당시 집근처에 교육장이 있었는데 교육이라는 미명하게 잔혹한 폭력이 행해지는 걸 아신 거죠.”그렇게 잘린 뒤 불과 석달 뒤인 8월, 이번에는 교육행정 공무원 시험에 다시 합격했다. “1~2년 일하고 돈을 모아 대학에 가려 했는데, 결혼하고 아이들 생기고 부모님 부양하고 하느라 그냥 눌러앉게 됐네요.”그는 50세에 한양사이버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야학선생님과의 인연도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간 차 씨는 10여 년 뒤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귀국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게 그였다며. 2년전 그의 딸 결혼식에는 화환과 축의금을 보내왔다. ‘관광’ 아닌 ‘여행’을 하시라―자유여행을 가는 이유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관광을 가요. 관광이란 말 그대로 ‘보는’ 거잖아요. 가이드 안내로 다니며 보는, ‘왔노라 봤노라 찍었노라’죠. 여행은 그 나라의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나 얘기 나누고 그 나라 음식을 직접 먹어보는 체험과 교류를 하는 거죠. 여기 더해 가난한 사람 만나면 쌀 한자루라도 채워주고 떠나는 나눔이 있다면 더 좋겠죠.”―퇴직자들은 관광보다는 여행을 하시라는 거군요.“이제는 그럴만한 시간 여유가 충분히 있으니까요. 지난번 미얀마 영상에 제가 주민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장면이 있는데, 왜 돈을 나눠주냐고 뭐라 하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현장을 보지 못하셔서 그래요. 그 나라는 지금 절대빈곤이라 한 끼 먹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현장을 보면 저보다 더 그런 마음이 생기실 거예요.”미얀마에서 한 끼를 해결할 때 1000짯(약 600원) 정도가 필요하다. 그가 나눠준 돈이 1000짯 지폐였다. 그것 외에 달리 그분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고.“가난은 창피한 것이 아니예요. 숨길 일도 아니죠. 다만 어린 시절 가난이 꿈을 빼앗는다면 그건 문제예요. 지금 미얀마는 많은 이들이 끼니를 걱정하는 상황인데, 이걸 외부로 알리는 일도 수월치 않더군요. 영상을 찍는데도 엄청난 통제를 느꼈어요.”―어려운 곳들을 다니다 보니 좀 위험한 상황도 있던데요. “선진국이라는 유럽도 소매치기가 득실거리고 지저분해요. 여행은 그 나라에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소매치기 만나거나 바가지 쓰는 건 당연한 거예요. 여행은 그걸 감수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감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조지아에서는 위험한 택시를 타기도 했다. 이때는 카메라가 그의 수호장비가 된다. “돈 더 달라면 바가지 써주면 돼요. 싸우는 것보다 낫죠. ‘필요한 거 뭔데, 알았어. 더 줄게’하면서 ‘나 유튜브 하니까 사진 좀 찍자’며 그들의 사진을 찍고는 ‘이거 실시간으로 한국으로 전송된다’고 말해요. 그럼 얘네들도 웃어요. ‘이거 더 털다가 다치겠구나’고 생각하는 거죠. 자기들 얼굴이 다 나갔다고 하니까. 그렇게 지혜롭게 넘겨야죠.”소매치기 바가지 정도는 감내해야 진짜 여행 -시니어들에게 자유여행 팁을 주신다면.“갈 곳 정할 때 날씨를 잘 살펴보세요. 나이가 있는 분들은 날씨 때문에 굉장히 힘들 수 있어요. 극기 훈련하러 가는 거 아니니까요. 그 나라에 대해 사전에 공부도 하셔야죠. 일단 역사부터, 그리고 지리 교통 음식 문화 이런 식으로 해나가요. 저는 주로 인터넷으로 해요. 항공권은 한 달 전까지는 구입해야 저렴하게 살 수 있어요.”중앙아시아 3국 여행방법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아 아예 동선과 경비, 준비물, 호텔 등을 정리한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의 경우 27일간 경비 총 350만 원 정도가 들었다. “비용문제를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에 대해 영상을 올린 것도 있어요. 저는 20년 전부터 연금저축을 들고 달러 예금을 했어요. 외국가서 쓰려면 달러가 있어야 하니까요. IMF외환위기 때 1달러 2000원 근방까지 갔을 때 저는 해외여행에 나섰어요. 저로서는 1000원도 안 되게 샀던 달러니까 그 돈을 쓸 수 있었죠. 2000원에 환전해야 한다면 어떻게 나가겠어요?”―그때 원화로 바꿨다가 나중에 떨어졌을 때 다시 사면…. “그건 달러를 투자 수단으로 하는 경우고 저는 해외여행에 필요한 만큼 모은 거니까 목적에 맞게 잘 쓴 거죠. 퇴직 후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니 이제 저금이 바닥났는데 다행히 구글에서 돈을 주네요.”―구글이 수익금을 달러로 주죠. 실버버튼(구독자 10만) 이상되면 수입이 꽤 될 텐데….“여행비용 걱정이 없어진 정도예요. 현지 가서 굶는 사람들에게 쌀이나 밀가루를 사줄 여유도 가질 수 있죠. 저는 채널을 돈버는 수단으로 삼지는 않으려 해요. 예컨대 사적인 광고를 하면 굉장히 많이 돈을 벌 수 있지만 일절 응하지 않고 있어요. 여행경비만으로 충분하고 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는 게 중요하니까요. 제가 가능하면 강연를 하러 다니는 것도 비슷한 이유예요. 강연은 돈도 안되고 힘들고 시간도 많이 빼앗기지만 제 여행, 은퇴 후 삶에 대해서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은 거죠.” 지난해 9월 대구 인재개발원을 시작으로 경북인재개발원 제주평생교육원 등에서 ‘여행으로 시작하는 행복한 은퇴생활’을 주제로 강연했다. 정년퇴직을 앞둔 공무원들이나 중견 실무자들이 대상이다. “‘국뽕’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방글라데시에서 귀국한 날 ‘바퀴벌레 모기 없는 편안한 방에서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고 하셨는데 고생하고 돌아오면 이제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여행이 좋은 건 돌아갈 집과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돌아갈 나라가 없다면 난민이죠. 전 집으로 돌아갈 때 굉장히 기분 좋아요. 나를 반겨주는 가정이 있고 내가 돌아갈 국가가 있으니까. 그걸 되새기기 위해 자꾸 떠나는 건지도 몰라요.”―모자에 태극기 마크도 붙이고, 혹시 ‘국뽕’같은 거 있으신가요.“음… 당연히 있어요. 제가 처음에 1980년대에도 여행을 갔잖아요. 그때만 해도 한국 모르는 사람 많았죠. 지금은 오히려 ‘서울’이라 하면 ‘와’ 탄성을 질러요. 요즘 K문화라 하잖아요. 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도 많고 한국인이라면 더 도와주려고 하니 여행하기도 쉬워요. 국뽕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죠. 대신 예전에는 좀 실수를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국인으로서 제대로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자부심을 갖는 만큼 책임을 져야 하는 거죠.”그는 자신이 유튜브를 하는 보람으로 어느 젊은 분의 댓글을 소개했다. “그 분은 평소 미래에 대한 꿈이 없었대요. 미래가 불투명하기도 하고 나이 드는 것도 싫었는데 제 유튜브를 보고서 꿈이 생겼다는 거예요. 자기는 60세 이후의 인생은 모든 게 끝인 줄 알았는데 저를 보면서 ‘아 내가 왜 젊어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 인생을 길게 계획해야 하는지 알겠더라’고, 어떤 기대와 희망이 생겼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이럴 때 아, 내가 유튜브를 하기를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죠.”―그래서 후배들을 위해서도 시니어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니까요.“퇴직자들도 그래요. 사회에서 ‘은퇴(隱退)’라고 하잖아요. 물러나서 숨는다. 근데 직업에서 은퇴하는 거지 인생에서 은퇴하는 건 아니거든요. 제가 보기엔 내려놓기는 커녕 새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분들이 제 영상을 보면서 ‘나도 꿈을 꾸게 됐다’ ‘희망을 갖게 됐다’ ‘당신이 하는 거 보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렇게 반응해주시길 바래요.”60대,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그는 정식으로 성악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각종 대회에서 수상하는 등 빼어난 성악실력을 보인다. 두 자녀도 모두 성악을 전공해 기회있을 때마다 세명이 함께 노래하곤 한다. 현재 아들 은총(38) 씨는 보디빌더로 유튜브 ‘총총TV(구독자 12.1만)’를 운영한다. 딸 은혜(33) 씨는 춘천시립합창단원으로 일하는데 최씨의 유튜브 동영상 편집자이기도 하다. 제목이나 자막에 ‘아부지’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앞으로 계획은? “여행은 원래 70세까지 할 생각이었어요. 인생설계도 거기 맞춰서, 연금저축을 딱 70세까지 받도록 설계했어요. 그런데 요즘 같아서는 한 75세까지는 다니겠다 싶어요. 그 이후에는 국내를 다녀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또 제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강의에 치중해야 겠다는 생각도 합니다.”―어느 날 갑자기 이젠 떠나기 싫어질 가능성은 없을까요.“제가 여행을 떠나는 건 호기심과 설렘 덕이예요. 저는 아직도 이 나라 저 나라 지도를 들여다볼 때 너무 기분이 좋고, 밤에 비행기를 타고 불빛 반짝이는 낯선 도시에 내려갈 때 가슴이 두근거려요. 이 도시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이 사람들은 어떤 취미를 가졌고 무슨 음식을 먹고 살까. 그런 기대감이 끝이 없어요. 그 설렘 호기심이 있을 때까지는 계속 가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은퇴 직후는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가슴이 떨릴 때 떠나세요”춘천=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4-02-24 01:40
“유언장을 써야 나 떠난 뒤 자식들이 안 싸워요”[서영아의 100세 카페]지난달 중순 오찬을 청해온 원혜영(73) 웰다잉운동본부 공동대표는 “올해가 초고령사회의 원년이 될 것같다”는 말부터 꺼냈다. 전체 인구에서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20%를 넘어서면 초고령사회다. 당초 2026년으로 점쳐지던 한국의 초고령사회 진입 시점은 몇 년 전부터 2025년으로 당겨지더니 이제는 올해 후반이 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출산율이 떨어진 만큼 고령화가 더 빨라지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시대를 제대로 된 준비없이 맞는 현실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지난달 26일 정식 인터뷰를 청했다. 100세카페로서는 3년만에 다시 하는 인터뷰다.1000만 노인시대 원년그는 2020년 70세를 기점으로 총 7선(국회의원 5선, 부천시장 2선) 경력을 내려놓고 정계은퇴한 뒤 ‘웰다잉 전도사’로 변신했다. 그간 연명의료의향서 작성하기, 장례문화 개선, 유언장 쓰기, 장기기증, 유산기부 등의 운동을 펼쳐왔다. 국회의원 시절인 2016년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을 통과시켰고 2019년에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보장하는 법적 기반 조성을 위한 웰다잉기본법을 대표발의했다. 이 과정에서 은퇴하면 이쪽 일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지난 3년 간 성과는 어떠셨는지요.“조금씩 천천히 진행되고 있어요. 사전연명의료 의향서 서명자는 지난해 10월 200만 명을 넘겨서 어느 정도 정착단계라고 보고, 올해부터는 ‘유언장 써보기’에 힘을 기울이려 합니다. ‘유언장 쓰기’가 아니고 ‘써보기’예요. 완성된 유언장이 아니라 처음 써보는 유언장으로 시작하자는 거죠. 연명의료의향서가 내 생명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유언장은 재산에 대한 결정권을 찾는 게 됩니다.”연명의료결정법(속칭 존엄사법)은 그 무렵 일본에서 관련 취재를 하다보니 자신들이 훨씬 오래 전부터 논의만 하고 있던 것을 한국이 앞서서 도입했다고 감탄하는 평가를 들은 일이 있다. 그 주인공이 원대표인 셈이다. 그는 1월 초 웰다잉문화운동이 펴낸 ‘유언장 개론’이란 책을 내밀었다. 상속 전문인 이양원 변호사가 집필했다.“이게 교과서 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올초부터 전문변호사들이 유언 무료상담을 해주는 온라인서비스센터도 개설했어요. 미국인은 성인의 56%가 유언장을 쓰는데 한국은 1%도 되지 않아요. 최근 들어서는 상속분쟁도 급증하고 있죠.”이혼소송보다 더 많아진 상속분쟁상속분쟁은 엄청난 부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일까.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최근 10년 사이 상속재판은 늘고 이혼재판은 줄어드는 추세다(표 참조). 상속재판에서 83%는 소송물 가액이 1억 원 이하다. 돈보다 감정싸움이 더 크다는 얘기다. 재판과정에서는 부모의 편애, 성장과정에서의 불평등, 독박간병의 억울함 등 평소 묻어둔 한이 다 쏟아져나온다. 결국 가족은 다시는 안 보는 사이가 되고 만다.이혼과 재혼, 독신 등 날로 복잡해지는 가족의 형태도 본인이 교통정리 해놓지 않으면 갈등요소가 된다. 여기 더해 미리 유산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것도 보람있는 일. 평소 관심 있었던 분야에 10%건 1%건 기부한다면 자신의 삶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최근 뉴스만 봐도 상속분쟁에 빠진 LG는 유언장이 아예 없고 순복음교회의 경우 유언장의 실효성이 다퉈졌죠. 어머니가 셋째아들에게 유산을 몰아줬는데 유언장 작성 당시 법적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는 게 장남과 차남의 주장이었어요. 판결은 유언 당시 법적인 효력을 인정하는 쪽으로 났더군요. 두 경우 모두 제대로 된 유언장을 준비했더라면 갈등을 훨씬 줄였을 텐데, 그걸 못한 거죠.”친구의 황망한 죽음, 유족의 비통…“유언장 썼더라면”유언장 쓰기의 근본적 의미는 더욱 깊이가 있다.“유언장을 쓰는 건 사랑하는 가족과 벗들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는 일이예요. 지난해 제 친구가 복통으로 입원한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빈소에서 부인이 ‘말 한마디 못하고 보냈다’고 애통해하는데 이 친구가 유언장을 썼다면 어땠을까 싶더군요. 유언장에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표현돼 있었다면 부인에게 얼마나 위로가 됐을까….”―내가 세상에 무엇을 남길까를 생각하다보면 오늘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 자세를 다잡게 될 것같습니다.“내 마지막 모습을 내가 결정해둔다는 의미도 있지요. 가령 수의 대신 평상복을 입겠다거나 작은 장례식을 하고 싶다면 미리 결정해둬야 해요. 자식들 입장에서는 체면도 따져야 하고 효도 의식도 있으니 차마 그런 결정을 할 수 없거든요.”―연명의료를 거부하거나 장기기증 서약을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가족이 반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그러니 가족에게 자신의 뜻을 시간을 들여 알려두는 게 중요하죠. 마음의 준비가 되게끔 말이죠. 그게 좋은 마무리지요.”“난 복받은 인생…돈에 무관심했던 건 후회”―본인의 유언장은 쓰셨나요.“몇년 전부터 썼습니다. 다만 저는 재산이 워낙 없어요. 살고 있는 집, 국민연금, 약간의 저금이 전부라, 집을 두 아들에게 나눠주는 정도지요. 사람들은 제가 풀무원 창업자니까 뭔가 있을 거라고 오해하는데 정치 입문할 때 공동창업자에게 다 넘기고 상표권만 갖고 있다가 그것도 나중에 장학재단으로 넘겨받았어요.” 이렇게 설립된 부천교육문화재단은 1996년 설립된 뒤 28년째 수천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은퇴하고 보니 돈에 너무 무관심했던 게 좀 후회됩니다. 국민연금에 약간의 저축을 더해 월 200만 원 전후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만약의 사태는 염두에 없었어요. 예컨대 저나 아내가 중병이 걸려 종일 간병이 필요하다면? 내가 노후 돈 문제에 너무 신경을 안 썼구나 반성이 들더군요.”그는 1951년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지금도 산다. 그린벨트로 묶인 덕에 우물과 연못, 수백 평 마당을 가진 호사를 누리지만, 집을 팔 수가 없다. 고시지가로는 서울 변두리의 전세값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정계은퇴 뒤 실업자 겸 자원봉사자가 되신 건가요.“70세까지 일했으니 복받은 인생이죠. 친구들이 60세 전후해서 모두 퇴직했는데 그동안 이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서도 얼마나 외롭고 심심하고 답답했을지 미처 몰랐어요. 제가 은퇴하고 보니 아차하는 거죠. 같이 놀아주고 밥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해야 했는데 그걸 생각 못했네…라고. 사람은 다 자기가 겪어봐야 아는 거예요.”여권 중진 시절, 청와대에서 담당 찾다 포기“1000만 노인 시대인데, 그 분들이 활기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다는 느낌이예요. 1000만 노인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신인류’라고도 하죠. 은퇴 뒤에도 30년을 더 살아내야 하는 이 분들이 보람있게, 품위있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중요한데, 최고 정책결정기구에서 일하는 분들이 그런 개념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이를 위해 발의했던 웰다잉 기본법은 21대 국회에서도 통과되기 어려워보인다.그는 문재인 정부 때 시민사회수석 사회정책수석 정책실장 등 담당자(가 될 만한 후보들)를 찾아다녔다고 한다.“이 새로운 현상이 워낙 중요하고 빨리 진행되고 있으니 관심을 갖고 어디서 어떻게 다룰 것인지부터 논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다가 포기했어요. 다들 ‘내 담당이 아닌 것같다’고 하더군요. 당시 여권 중진이던 제가 그런 상황이었으니 오죽했겠어요. 위에서 관심 없다면 공무원들은 절대 움직이지 않아요.”―정부로서는 아무래도 재정부담을 의식하지 않을까요.“고령자 관련해서는 기초연금부터 의료비 지원, 간병지원에 일자리지원까지 천문학적 돈이 필요한 일이 많지요. 유일하게 재정이 들지 않는 분야가 웰다잉이예요. 오히려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지요. 고령자들이 연명의료를 하지 않으면 의료비가 줄고 작은 장례식은 가계에 보탬이 되죠. 고령자들이 기부를 많이 하면 사회의 취약한 곳에 유산이 돌아가니 도움이 되고요. 지금의 고령자 세대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오랜 빈곤의 대물림에서 벗어나 자신이 땀흘려 모은 깨끗한 돈을 후대에 물려주는 세대라고 봐요.”1000만 노인 품격 지키고 사회적 낭비 갈등 줄여야―좀더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을까요.“이제라도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워보이는 게 저출산고령화위원회인데, 저출산과 고령화는 내용상 떼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인구를 늘릴 것이냐와 현재 존재하는 1000만 노인을 어떻게 건강하고 책임있고 당당한 시민으로 살도록 도와줄 거냐는 차원이 다른 얘기죠. 법으로서는 일단 ‘웰다잉기본법’이 통과되고 시스템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행정은 보건복지부가 주무가 돼 좀더 통합적인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취재를 하다보면 고령자문제를 다루려는 노력들이 여기저기 있긴 한데 전체를 아우르는 머리 부분이 없고 단편적인 대응만 있더군요.“법이 만들어진 것만 따로따로 이뤄지는 현실이죠. 일례로 장례문화를 개선한다며 보건복지부가 만든 장례문화진흥원도 있고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안에 사전연명의료 관리기관이 있어요. 두 기관은 유사한 일을 하지만 따로 놀아요. 장례에 대한 것, 연명의료, 장기기증, 유언장 쓰기, 후견제도 이런 것들을 통합적으로 하면 시너지도 생기고 낭비도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죠.”―다시 유언장으로 돌아와서, 언제 쓰는 걸 권합니까.“정해진 때는 없지만 정년퇴직할 때 혹은 65세 법적인 고령자가 됐을 때를 계기로 하는 건 어떨지요.”친척 친지들과 만나고 시간 여유도 갖는 명절이 다가온다. 잠시 몸과 마음의 짬을 내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나는 세상과 가족에게 무엇을 남길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유언의 방식 5가지―‘유언장개론’에서유언은 법에 의한 방식으로해야 효력을 갖는다. 우리 상속법에는 유언의 방식으로 5가지를 정해놓았다.1)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 : 유언자가 그 전문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자서하고 날인해야 한다(작성이 쉽고 비밀유지에 용이하나 위조나 분실, 상속인들이 그 존재를 모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2) 녹음에 의한 유언 : 유언자가 유언의 취지, 성명과 연월일을 구술하고 증인이 유언의 정확함과 자신의 성명을 구술해야 한다(필기가 어려울 경우 적합. 위 변조 우려)3)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유언자가 증인 2명이 참여한 공증인의 면전에서 유언의 취지를 말하고 공증인이 이를 필기낭독하여 유언자와 증인이 그 정확함을 승인한 뒤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가장 안전하고 정확하지만 비용이 든다. 1억 원에 15만 원 정도)4) 비밀증서에 의한 유언유언자가 필자의 성명을 적은 증서를 엄봉날인하고 이를 2명 이상의 증인에게 제출해 자신의 유언서임을 표시한 뒤 그 봉서 표면에 제출연월일을 기재하고 유언자와 증인이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 표면에 기재된 날로부터 5일 내에 공증인 또는 법원서기에게 제출해 봉인 확정일자인을 받는다(절차 복잡하고 유언의 존재가 노출된다)5)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질병 기타 급박한 사유로 인해 위 4가지 방식을 따를 수 없을 경우 유언자가 2명 이상 증인 중 1명에게 유언 취지를 구술하고 이를 들은 자가 필기낭독하여 유언자의 증인이 그 정확함을 승인한 뒤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 7일내 검인신청(실효성 많지 않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4-02-03 01:40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카르페 디엠’, 지금을 잡아라[서영아의 100세 카페]4일 마포평생학습관 1층에 자리한 시민 전시관 마포갤러리. 올해 칠순을 맞은 이승룡 씨와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외손녀 김리원(12)양의 새봄맞이 조손(祖孫) 전시회 ‘행복을 그리다’의 현장이다.할아버지는 평소 그려온 민화 10여 점을, 김리원 양은 아크릴화, 색연필화 등 10여 점을 내걸었다. 전시회장에는 주인공들 외에도 이 씨의 부인과 큰딸 작은 딸에 동생들까지, 출근한 사람 빼고 온 가족이 모였다.“양념으로 할머니의 그림 한 점과 손자 리호(3)가 그린 ‘아기상어’도 걸었어요. 말 그대로 이 집안 조손 전원이 출동한 전시회죠. 하하.”(이승룡)손녀딸이 6학년에 올라간다거나 3살 손자가 그린 낙서인지 추상화인지 모를 그림. 각박해진 우리 사회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작고 소소한 의미들이 이곳에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값지고 소중하다. 이제 속칭 ‘7학년’이 됐다는 이승룡 씨는 이런 작은 것에 열과 성을 바치며 행복해한다. 사실 이런 작은 의미들이 쌓이고 모여서 역사가 되고 세계사가 되는 것 아닌가.한때 잘 나갔지만그는 30년간 광고회사 LG애드에서 일하다 2009년 55세로 퇴직했다. 2010년부터 모하(慕何)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1932~2015)이 사재 80억 원을 출연해 만든 재단 ‘실시학사’의 상임이사 및 사무국장을 맡아 13년간 일하다가 지난해 봄 여기서도 퇴직했다. 30년간 광고회사 물을 먹었다고 하지만 정작 광고 만드는 일에 관여한 것은 중반기 3년 정도. 나머지는 전략과 조직관리 전문가로 일했다. 2003년 병마로 쓰러졌을 때 직함은 경영전략본부장 상무였다. “입사 4년 차에 기획관리과장, 8년 차에 부장이 됐습니다. 11년 차였던 1990년 회사는 기획관리실이라는 조직을 새로 만들고 당시 없던 ‘실장’이라는 직책을 주더군요. 밑에 3개 팀이 있었어요.” 1990년대는 LG애드의 매출이 해마다 1000억 원 단위로 늘어나던 시절이었다.3개월 시한부 선고2003년 전환점이 찾아왔다. 배가 아파 동네병원부터 찾았던 것이 순식간에 유명 종합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는 사태가 됐다. 그런데 의사가 수술을 포기하고 환부를 다시 닫아버렸다.종양 근처를 동맥과 정맥이 지나가고 염증까지 있어 손을 댈 수가 없다고 했다. 그의 부인은 “3개월 내에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 대비하라”는 말을 들었다. 아직 49세. 치료법을 묻는 이 씨에게 당시 담당 의사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글리벡’ 복용을 말했다. 글리벡은 당시 백혈병 치료제로 나온 신약이었다. 이 씨가 “그럼 글리벡이 나오기 전에는 어떻게 치료했느냐”고 물으니 그 의사는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절망에 빠져 병원에 누워있는 그에게 당시 LG전자 고문이었던 이헌조 회장이 전화를 해왔다. “우리 회사 사장과 모하 회장이 어느 결혼식장에서 만났는데 회장님이 제 소식을 듣고 전화를 주신 거죠. 우연인 듯싶지만 전 이런 건 숙명이라고 믿어요. 회장님은 본인이 암 수술을 받은 일본의 의료진을 소개해줬습니다.”일본으로 건너간 이 씨 부부는 이 회장의 주치의와 그 제자 2명에게 다시 진단을 받았고 그중 40대였던 야스노 박사가 “확률은 반반이지만 열어봐야 안다”며 수술하겠다고 나섰다. 다행히 재수술은 성공했다. 그 뒤 국내 종합병원에서 20년 가까이 추적관찰을 해왔는데 지난달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는 판정이 떨어졌다.다행인 일은 또 있었다. 일본에서 두 달간 입원해 있다가 귀국한 그에게 회사는 ‘일선에서 일하기 어려울 테니 상근감사직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당시 회사는 다국적 광고그룹 WPP에 매각된 상태였는데, 사직을 생각하던 그에게는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모하 이헌조 전 회장과의 인연모하 이헌조 전 회장은 그가 1979년 LG애드의 전신인 희성산업(LG애드는 1984년 희성산업에서 독립했다)에 입사했을 때 사장이었다. 2010년 그 모하회장이 LG애드를 퇴직한 이 씨에게 연락해왔다.“재단을 설립하려는데 설립과 운영을 좀 맡아서 해다오. 처우를 아주 잘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걸어 다닐 때까지 길게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시더군요.”모하 회장은 한국의 사상적 뿌리를 실학에서 찾는 실시학사를 재단으로 설립해 사재를 투여할 생각이었다. “그날 밤 회장님께 이메일로 세 가지를 말씀드렸어요. 첫째 제가 능력은 안 되지만 회장님 뜻을 받들어 성심껏 열심히 하겠다. 둘째 혹시라도 저를 불러주는 더 좋은 처우의 자리가 나오면 그때는 놓아주십사. 셋째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회장님 답은 ‘100% 수용한다’는 것이었죠.”이 씨가 재단에서 일한 지 2년 정도 된 무렵, 지방 어느 상장회사의 감사 자리를 제안받고 고민 끝에 허락을 구하자 모하 회장은 ‘사람이 돈만 갖고 사나?’라고 물었다. 재단에서의 인생이 결코 허술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도 했다.“사람에게는 명분과 긍지가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거죠. 제 생명을 살려주신 분의 말씀을 차마 거역할 수 없어 재단에 남았습니다.” 그는 목공에도 재미를 붙였다. 작품을 만들며 관련된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연재한 것이 10년간 180점쯤 쌓이자 책 ‘이야기가 있는 목공(2020)’으로 묶어냈다. 기록과 보존에 마음을 담아그는 기록과 보존에 열심이다. 이렇게 만든 레거시를 적절한 임자에게 의탁해 더 큰 쓰임새를 기대한다.2015년 선친 이효석 씨(1929~2000)가 남긴 문건과 훈장, 증명서, 기록물 등 148점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손녀 리원 양 이름으로 기증했다. 선친은 독일주재 대사관 수석노무관,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역임했다. 기증에 앞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버지의 인생 기록’ 일부를 공개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고. 자료 중에는 꼼꼼하게 정리된 1950년대 결혼축의록, 1970년대 장례부의록 등도 있어 당대 민속사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란 평가를 받았다.“기록을 보존하는 건 집안 내력인 것 같아요. 집 안에 있던 고전 책이나 옛날 문서 같은 것은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손녀딸 이름으로 기증했습니다. 제가 회사생활 30년 동안 받은 급여 명세표, 명함 40여 장, 사령장 등은 LG그룹 역사관에 기증했어요.”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학생 시절 일어난 동아일보 백지광고사태도 그에겐 기록과 보존의 대상이었다. 당시 3개월간의 백지광고를 모두 모아 제본해서 소장하고 있었다.“신문 방송학도로서 이런 역사적인 기록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제본한 걸 이사 다니면서도 늘 침대 밑에 보관하곤 했어요. 2000년 당시 동아일보가 신문박물관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기증했지요. 나중에 들으니 그게 보관된 게 대한민국에 3질인가 밖에 없었대요.”―일부 기증을 손녀 이름으로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어차피 리원이도 후손이니까 나름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 당시에는 손녀밖에 없었고요.” 큰딸이 낳은 리원이 12살, 둘째 딸이 낳은 손자 리호는 이제 3살이 됐다.시니어들의 가슴 속 앙금60대 이상쯤 된 분들을 만나보면 뭔가 하나씩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 같은 게 있다. 그의 경우는 13년간 일해온 실시학사가 그랬다. 당초 한국 실학 연구의 태두라 불리는 성균관대 이우성 교수가 만든 공부 모임에 이헌조 전 회장이 80억 원을 출연해 재단으로 만들었다. 이 씨는 2010년부터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2015년 이 회장 사후에는 그 이사직을 이어받아 상임이사를 겸했다. 그런데 2020년 11월 새 이사장이 난데없이 ‘사무국장 정년을 60세로 하자’는 규정을 이사회에서 통과시켰다. 당시 이승룡 사무국장은 66세. “나가라, 못 나간다”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지난해 3월 퇴직했다. 현재 8명의 재단이사진 가운데 과반을 특정 인맥이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 회장이 세상을 떠나며 재단에 남겼던 대리인이 타인들에 의해 쫓겨난 셈. “다른 미련보다 모하 회장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게 될까 봐, 그게 무척이나 괴롭습니다.”“할아버지, 지금 유언하는 거예요?”―손주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글쎄요. 너무 많아서. 우리보다 좋은 환경에서 꿈을 맘껏 펼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죠. 뭐 특별히 공부를 잘하거나 좋은 대학에 가거나 그런 거 말고요.”특별히 뭔가를 말하지 않아도 자손들은 어른을 보고 배운다. 할아버지가 지속적으로 책을 만드는 것을 본 당시 3학년 리원 양이 ‘나도 책 한 권 내고 싶다’고 하자 이 씨가 돕겠다고 나섰다. 리원이가 48명의 신의 모습을 그리고 이 씨가 각 신에 얽힌 이야기를 써넣은 ‘리원이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2021년 탄생했다.“그때는 무척 기뻤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그림들이 너무 어릴 때 그린 거라서 좀 이상해요. 약간 제 흑역사가 된 것 같아요.^^”(김리원)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이던 리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할아버지 지금 유언하는 거예요?”이 씨가 가족 모임에서 자신의 집을 훗날 어떻게 활용할지 딸들에게 당부하던 중이었다.“그래. 유언 맞아. 언젠가 할아버지가 없어도 엄마랑 이모랑 이 집을 잘 활용해서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할아버지 마음을 말하는 거야라고 말해줬지요.”책, 세상에 쓰레기를 더하지 않기이 씨는 2001년 선친의 1주기를 맞아 추모문집을 엮은 것을 시작으로 15권의 책을 펴냈다. 이중 6권은 비매품이고 나머지는 POD(Publish On Demand) 방식으로 간행했다. 본인이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쓰고 그림을 넣어 PDF파일로 출판사 홈페이지에 등록하면 출판사 측이 고객의 주문을 받아 출판해주는 서비스다.“자꾸 책을 내는 행위가 제게야 의미가 있겠지만 세상에는 별로 공헌하는 바도 없고 낭비일 수 있어요. 그래도 별 부담이 없는 건 주문만큼만 책을 제작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껏 책을 내지만 ‘공해는 되지 않는다’고 자위하는 거죠.”POD방식은 작가 본인을 포함해 누구나 정가로 주문해야 하고 책값의 20%가 작가에게 인세로 돌아온다. 작가는 자기 책을 80% 가격에 사는 셈이다.―많이 팔렸나요.“간혹 팔리기도 하는지 몇 달에 한 번씩 몇천 원 또는 2, 3만 원 이렇게 인세가 들어옵니다. 하하.”“사는 동안 재미있게 살자”이제 말 그대로 연금생활자. 부인과 합쳐 200만 원 정도 된다. 실시학사 사무국장 할 때는 적지만 고정급여가 있었지만 지난해 3월 이후 받은 실업급여도 이달 끝난다.“저도 딸들도 일찍 결혼했어요. 부부 둘만 살면 되니까 큰 돈이 필요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데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이 연령대 대부분이 “생각보다 돈 쓸 일이 많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다만 자식들이 집에 돌아와서 손 벌리기 시작하면 골치 아프다고요.“자식들이 사고 치면 문제지만 우린 그런 것 없으니까요. 저는 죽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목숨 건져 다시 온 뒤 제 인생관이 ‘사는 동안 재미있게 살자’가 됐어요. 집사람도 크게 사치하지 않고 명품 가방 이런 거에 관심도 없어요. 둘이 어디 여행가고 맛있는 것 먹고, 아무튼 지금 현재를 재밌게 잘 사는 게 목표예요.”옆에서 부인이 “본래 명품을 싫어했던 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런데 좋은 물건 같은 건 남편이 죽다가 살아 돌아오니 아무 의미 없어지더라구요. 그저 조금이라도 이 시간들이 이어져 주길 바랄 뿐입니다.”(부인 박양화 씨)“이 나이가 되면 세상에 고맙지 않은 게 없습니다. 저는 인연, 숙명 같은 걸 믿는 사람입니다. 모하 회장 덕분에 다시 살아 돌아온 것,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도 모두 숙명이 아닐까. 죽고사는 것도 본인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까지는 세월이 익어갈수록 잘 늙어가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야지요.” 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4-01-06 01:40
“과거 내려놓고 일신우일신”… “노년, 배우고 일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서영아의 100세 카페]100세 카페는 2021년 1월 인터넷판으로 시작해 격주 토요판 신문과 일요일 인터넷판으로 독자들과 만나왔다. 저출산이 심각한 가운데 고령자가 급증하는 ‘정해진 미래’ 앞에서 국가와 사회, 개인의 준비는 미흡해보였다.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돈 △건강 △행복의 3가지를 꼽고 젊어서부터 미리미리 준비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연재 만 3년이 돼 가는 지금도 이 취지는 변함이 없다. 올해에는 특히 인터뷰 성격의 ‘이런 인생2막’을 많이 썼다. 한바탕 현역시절을 거친 시니어들의 다양한 2막을 통해 독자들도 아이디어를 얻고 힘을 내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저물어가는 한해, 100세 카페를 빛낸 주인공들을 돌아본다.“노년에도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외국어고 교장 퇴직 후 개인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정정호 씨(67)를 소개하며 가장 걱정했던 것은 ‘연금 받는 분이 굳이 돈을 번다’는 부정적 반응이었다. 정 씨도 같은 이유로 한 차례 만남을 사양했다가 한 달 뒤에야 인터뷰에 응했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예상대로였다. 여기 더해 생계를 위해 힘들게 일하는 다른 택시 운전사들이 느낄 위화감을 우려하거나 노년 운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정작 본인은 “충분히 예상했고 나 자신이 떳떳하니 전혀 문제없다”며 담담했다. 말 그대로 남의 눈보다 내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자세다.신문기사가 나간 토요일부터 그의 휴대전화는 불이 났다고 한다. 인천의 교원 커뮤니티부터 학생들, 학부모들까지, 심지어 어릴 적 고향 철원시까지 들썩였다고 한다. 그를 통해 ‘과거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분명 그의 블로그에는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거의 없었는데, 기사에 사용할 옛날 사진들을 찾아 보여주는 장면에서 억눌러왔던 추억과 그리움이 생생히 전달돼왔다. 그의 기사에 뜨겁게 반응하는 분들도 오랜 교직생활에서 맺어진 인연들이 많았다.정 씨는 교육자답게 기자에게도 많은 격려를 전해줬다. 인터넷판 기사가 나간 일요일 한산하던 그의 블로그에 하루 방문자가 2000명이 넘었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주고 자신에게 몰려오는 주변 반응과 격려들을 공유해줘 기사 쓰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소박하고 하찮은 일이라도 좋다100세 카페에는 노년에 새로운 일거리에 푹 빠져 있는 분이 적잖게 등장했다. 대개 현역 시절보다 소박한 일거리다.3년째 강원 춘천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박의서 전 안양대 교수(72)는 지역의 텃세를 살짝살짝 느끼면서도 시 소속 문화관광해설사 일에 열심이다. 월 100만 원 안짝으로 버는 정도지만 이 일이 없었다면 삶의 질이 달라졌을 거라고 말한다. 해설을 더 잘하기 위해 공부를 계속하고 개인적으로 책을 쓸 준비도 하고 있다.은행 임원으로 퇴직한 뒤에도 개방형 공직에서 일하던 박삼령 씨(76)는 65세에 암이 발병한 이후 삶을 백팔십도 바꿔 산림치유지도사가 됐다. 경쟁이 치열해져 일할 기회가 줄고 있지만 하루 일을 얻기 위해 자비를 들여 지방에 답사를 다닐 정도로 진심이다.10년 이상 부모님 간병을 하다가 아예 직접 요양원을 설립한 임수경 씨(62)는 본래 정보기술(IT) 전문가였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문을 연 요양원은 이제 궤도에 올라 설립 과정에서 진 막대한 빚을 조금씩 갚아나갈 수 있게 됐다. 부모님 편안하게 모실 수 있어 한시름 덜었고 고령자의 대열로 접어든 본인과 가족, 친구들을 위한 ‘갈 곳’을 장만했다는 점에서 흡족해한다. 그는 “부모님 세대는 우리가 부담하지만 우리 세대는 자녀에게 기댈 수 없다”며 ‘현타’를 안겨주기도 했다. 퇴직이라는 ‘현실’, 미리 준비해야퇴직은 잘 준비하고 맞이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이후 삶에 천양지차가 난다.정년퇴직을 향해 치밀하게 준비한 케이스로는 유통업체 부장급으로 정년퇴직한 다음 날 지식산업센터 관리소장으로 새출발한 최경묵 씨(62)가 있다. 전 직장에서는 만년 차장(퇴직 전 마지막 1년간만 부장이었다)으로 30년 가까이 일하며 자격증을 땄고 그것을 활용해 재직 중에도 경력을 쌓았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가 건물 안전관리자를 겸해주니 한 사람분 고용을 줄일 수 있었다. 그의 경우 직장에서 서러움을 겪었던지라 더 일찌감치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고 준비할 수 있었다.반대로 적당히 따뜻하게 지낸 사람일수록 비바람 치는 광야에 던져졌을 때 충격이 크다.신세계그룹에서 임원을 지냈지만 4년 전 만 50세에 퇴직해야 했던 정경아 전 상무(54)는 그 충격을 삭여 책을 두 권이나 썼다. 퇴직 2년 만인 2021년 낸 첫 책 ‘독한 언니의 직장생활백서’에서 그는 퇴직은 내색 않고 직장생활만을 다뤘는데, 그가 받은 충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퇴직 4년 차가 된 올해에야 자신의 퇴직을 정면으로 마주한 두 번째 책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를 내놓았다. 그는 요즘 동아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는 한편 유튜브와 강연 등을 통해 새로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주된 직장에서의 비자발적 퇴직연령은 평균 49.5세. 어찌보면 정년퇴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받은 케이스다. 두 사람 사이 어디쯤에 해당하는 직장인이라면 회사를 떠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새겨둬야 할 듯하다.힘의 원천은 가족 시니어들에게도 가족은 힘의 원천이 된다.초등학교 중퇴 학력을 극복하고 60세부터 경남 거제의 한의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이숙희 씨(64)에게 100세 카페 인터뷰는 세상에 자신을 커밍아웃하는 일이었다. 기사가 나간 뒤 모두의 이해와 인정을 받게 돼 여한이 없다며 기뻐했다. 11월 KBS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부군과 함께 서울 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늘 아내를 믿고 지원해주는 남편, 엄마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방향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딸까지, 가족은 이숙희 씨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빽’이다.경기 평택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조동근 씨(63)도 먹고사는 문제에 쫓겨 중학교 중퇴로 끝날 뻔했던 경우다. 신혼 초기 중학교와 고교 검정시험에 합격하고 방송통신대에 입학했지만 20대 부인에게 닥친 병마에 다시 한번 위기가 몰려왔다. 기사에서 빼먹은 에피소드 하나. 부인이 비장암으로 암병동에 장기입원했던 당시, 병원 측은 병세를 체크하기 위해 환자의 피를 엄청나게 뽑아가곤 했다. 환자식만으로는 회복이 어려울 것을 걱정한 그는 병동 계단참에서 휴대용 가스버너로 보양식을 만들어 아내에게 먹였다. 병원 측에서 제지하자 “난 저 사람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며 저항해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2, 3일 뒤 그가 다시 요리를 시작하자 병원 측도 모른 척해버렸다고. 1980년대니까 가능했던 얘기지만 그는 이런 집념으로 가정과 부인을 지켜냈다.30여 년 간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애썼던 재미작가 김석휘(74) 씨는 기사를 읽은 주변사람 덕에 미국 이민 초기 동고동락했다가 40년간 연락이 두절됐던 친구와 연결될 수 있었다. 다만 친구분이 알코올과 심장질환 탓에 인지 장애가 상당히 진행돼 소통은 어려웠다고. 그는 “나이들면서 후회되고 마음 아픈 기억들만 늘어난다”고 토로했다.공부하는 노년이 아름답다이순국 전 신호그룹 회장(81)은 출판사에서 신간 ‘다시 시작하는 인생수업’을 보내온 것이 계기가 돼 인터뷰를 청했다. 한때는 재계서열 25위를 넘볼 정도로 사업을 키웠지만 외환위기로 모든 것을 잃은 뒤 68세부터 건강을 부여잡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신체 개조를 단행하고 74세에 체육학 석사, 76세에 체육학 박사, 81세에는 의학박사(예방의학) 학위를 받으며 “뭔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신간에서 그는 홀로 죽음을 향해 노를 저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표지에 그려놓고 있다. 지금도 매일 2시간씩 근력운동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서’라고 한다.13년 째 방송통신대 학생 신분을 이어가는 김광성 씨(71)도 뒤늦게 알게 된 공부의 재미를 놓지 못하는 경우. 7년 전 재취업해 서울시내 감정평가법인의 상임고문, 그 자회사인 부동산중개법인의 대표를 맡아 현역 생활을 한다. “방송대에서 젊은이들과 만나며 감각을 유지했기에 취업도 가능했다”며 학교에 공을 돌리는 그는, “이 나이에 공부는 지식이 아닌 지혜를 얻는 과정”이라고 말한다.대구의 환경미화원 정연홍 할머니(71)는 장난처럼 ‘책을 쓰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지난해 11월 첫 책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를 내면서 꿈을 이뤘다. 갑자기 듣게 된 ‘작가’ 호칭이 쑥스럽지만 행복하다고. 글을 잘 쓰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중요한 대목을 베껴 써보기도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뭔가를 쓰고 있다.이웃과 함께, 동세대와 함께정영록 전 서울대 교수(65)는 8월 말 학교를 정년퇴직했다. 5년 전부터 전남 구례로 거처를 옮기고 뜻 맞는 사람들과 귀촌타운을 만든다는 생각을 가다듬고 있다. 기성세대의 귀촌으로 지방소멸을 막고 질 높은 노후를 살아갈 터전을 만들자는 것. 3월에 인터뷰 기사가 나간 뒤 정부나 지자체, 개인들의 연락이 많았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지역활력타운 선정 심사에도 참여했는데, 이곳저곳 후보지를 돌면서 ‘쓴소리’를 쏟아냈다고 한다.올 초 100세 카페를 장식한 김종훈(50) ‘우리동네좋은사람들’ 대표는 올해도 서울 강남구에서 ‘우리 동네와 함께 나이들기’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지역 어르신들의 주택에 낙상을 방지하기 위한 설비를 마련해주는 일에서부터 ‘살던 곳에서 나이들기(aging in place)’가 가능한 지역사회 만들기를 모색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활동을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으로 18일 공유오피스에 책상 한개 놓고 작은 사회적기업 ‘쉘위파트너스’를 출범시켰다.지난해 말 100세 카페에서 은퇴자들이 ‘갈 곳’에 대해 ‘공공에서 시설을 제공하고 민간이 운영주체가 되는 방식‘을 제안했던 백만기 위례인생학교 교장은 11월 ‘경기인생캠퍼스’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당시 기사를 본 경기도에서 그를 찾아갔고 경기도청 구청사에 장소를 만들고 운영을 그에게 위임하기로 했다는 것. 그로서는 분당, 위례에 이은 세 번째 인생학교다. 현재 25개 시범강좌가 운영중인데, 경기도는 앞으로 31개 시군에 인생학교를 보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백 씨의 평생 목표인 ‘전국에 인생학교 100개 만들기’가 현실감을 갖기 시작했다.‘느리게 나이들기’ 연구하는 젊은 의사지난해 4월 여러차례 취재했던 정희원(39)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처음 만난 날 기자가 “당신은 반드시 스타가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예언한 인물이다. 젊지만 해박했고 유창한데 겸손하고 문제의식도 좋았다. “아하하..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요, 책이나 좀 팔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하던 그의 표정이 개구장이 같았다.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그는 그 뒤로 책을 2권 더 냈고 신문에 정기칼럼을 쓰는가하면 각종 강연에 불려다니고 TV나 유튜브에도 자주 얼굴을 내민다. 취미인 호른을 열심히 연습해 ‘동아음악콩쿠르에 출전할 거’라 했는데 지난해 정말 ‘출전했고,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올해 두번째 신간인 ‘느리게 나이드는 습관(한빛라이프)’을 최근 보내왔다. 댓글에서 읽히는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기자는 100세 카페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을 열심히 읽는 편이다. 우리 시대 시니어의 초상이 그려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좋은 기운도 얻을 수 있어서다. 때로는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열심히 사는 노년을 소개하면 종종 ‘이제 됐으니 그만 쉬며 인생을 즐기시라’는 조언이 달리는데, 이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라고 본다. 30, 40대가 보람을 얻고 활력을 느끼고 싶다면 70, 80대 어르신도 보람과 활력이 필요하다.타인의 노력이나 행복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읽히거나 과도한 피해의식이 전해져오기도하는데, 그만큼 ‘내 삶이 힘들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보였다. 특히 안정적으로 연금을 받는 직종에 대한 질시가 심한데, 아직 부실한 한국의 연금제도 탓도 있어 보인다. 국민연금이 도입된 1988년 이래 꾸준히 연금을 납부해온 세대가 본격적으로 수급자가 된다면 맞벌이라면 3~400만이 넘는 가정도 드물지 않게 된다. 반면 저출산으로 인한 생산인구 감소로 연금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실제로 노후를 살아본 분들의 공통된 증언은 나이가 들수록 생활비는 많이 들지 않는다는 것. 이때는 생계문제보다 남는 시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서 보람과 의미를 찾을 것인가가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런 인생 2막’에 등장하는 분들을 어떻게 찾아내느냐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가장 많은 경우는 이메일을 통한 자천타천이다. 출판사에서 100세카페에 어울릴 것같은 신간을 보내주기도 한다(내돈내산인 경우가 더 많다). 재미있는 것은 한 기사가 나가면 유사한 분들의 소개가 몰려온다는 점. 예컨대 전직 교사가 주인공으로 나가면 교직에서 은퇴하신 분들의 메일이 갑자기 많아지고, 은퇴 후 전원살이하는 분 얘기가 나가면 전원에 정착한 분들이 전국에서 연락해오는 식이다. 이런 경우 아무래도 비슷한 사례를 연달아 다루기 어렵다보니 뒤로 돌려지게 된다. 이 밖에도 언급하지 못한 더 많은 분들을 인생2막이라는 주제로 만났다. 이들은 노년에도 사회와 사람, 세상과의 소통은 중요하다고 입 모아 말한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앞으로도 열심히 찾아 소개하고자 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12-23 01:40
“돈 받으며 세상 구경, 얼마나 좋아요”… 택시 운전하는 전직 교장선생님[서영아의 100세 카페]“선생님,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깔끔한 양복 정장에 나비넥타이, 왼쪽 가슴에는 명찰을 단 중년 기사님이 미소와 함께 이런 멘트를 날린다. 이 택시를 타면 5살 꼬마도 ‘선생님’이 된다. ‘제임스네네(JamesYes!Yes!) 택시’. 1956년생 정정호 씨가 인천에서 몰고 다니는 개인택시의 애칭이다. 2018년까지 그는 인천에서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미추홀외국어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졸 학력으로 영등포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배고픈 소년이었고, 이 소년은 27세에 7살 아래 막냇동생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에 진학해 영어 교사가 됐다.그는 100세 카페 애독자다. 기사에 자신의 체험을 예로 들며 ‘퇴직 후에도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는 댓글을 성심껏 달아주곤 했다. 기자는 그 댓글에 들어 있는 나비넥타이, 인천, 개인택시 등을 단서로 무작위 검색을 통해 그의 블로그를 찾아냈다. 30일 그를 만나러 인천 남동구의 한 카페로 갔다.학생들과 친구처럼 지낸 교장 선생님정정호 씨와 인천과의 인연은 1987년 31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제물포고등학교로 발령받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인천에서 31년간 교직에 머물며 영어 교사, 장학사, 교감, 교장을 거쳤다. 정년퇴직 직전 3년 반 동안 교장으로 봉직한 미추홀외고는 2010년 인천 유일의 공립 외국어고로 개교했다. 당시 그가 인천시교육청에서 장학사로 일하며 설립을 이끌었고 2015년 2대 교장으로 취임했다.교장 시절 그는 전교생 587명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한다.“매일 교장실에서 사진첩 들고 애들 이름 외우곤 했지요. 왜 그랬냐고요? 제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학생들에게 절 부를 때는 ‘교장선생님’이라 하지 말고 ‘제임스’라고 부르라고 했지요.”재미있는 것은 교장이 학생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다녔다는 점. 그가 보여주는 옛날 사진을 보니 의외로 잘 어울렸다. “학생들이 무척 좋아했죠. 친구같이 지냈거든요. 정말 재미있었어요.”택시 운전을 시작한 얼마 뒤 쓴 그의 블로그에는 ‘송도에서 택시 내부를 소독하고 있는데 뒤에서 “제임스, 멋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추홀 외고 졸업생 000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우연히 만난 제자가 친구처럼 부담 없이 큰 소리로 부를 수 있는 그런 교장이었다는 얘기다.―제임스라는 이름은?“영어교사 하면서 제가 지었어요.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아시죠? 그처럼 교사도 만능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미추홀외고 학생들은 언제부턴가 학교 앞에 있는 커다란 호수를 ‘정정호’라 불렀다. 구글에서 학교 이름을 검색하면 이 호수에 대해 ‘정식 명칭은 해오름호수지만 재학생들은 전임 교장의 성함을 따서 정정호라고 부른다’는 구절이 나온다(더 위키).본인은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2018년 8월 그의 퇴임일에 그의 의지와는 달리 점심시간에는 학생들이, 밤에는 학부모들이 깜짝 파티를 열어줬다는 대목에서 그의 인기도는 짐작할 수 있다. 퇴임 뒤에는 인천영어마을 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2년간 일했다.10대 후반엔 소년공 생활, 4년 늦게 고등학교 입학교사가 되기까지, 그는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1·4후퇴 때 신의주에서 맨몸으로 월남한 정 씨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실향민들 사이에 ‘곧 통일이 된다’는 소문이 돌자 급히 서울 생활을 정리해 북한과 가까운 강원도 철원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기다리던 통일은 오지 않았고 슬하에 1녀 5남이 태어났다. 6남매 중 장남이던 정정호 소년은 빤한 형편에 차마 고등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연년생 동생과 함께 상경해 영등포의 한 공장에 취직했다. “저는 조립, 동생은 공작기계 선반을 했어요. 동생은 아직도 그 기술을 살려 일하고 있는데 다들 부러워하지요. 만일 펜대를 잡고 있었다면 66세인 지금 갈 데가 없겠죠. 그 1년 아래 동생도 역시 공장에 들어갔고 지금도 일합니다. 대형 펌프의 권위자예요.”그는 3년 만에 공장일을 접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동기들보다 4년 늦었는데 재학 중 군복무를 한 탓에 졸업은 7년 늦어졌다.“고교 3학년 10월에 군대 들어가서 3년 뒤 7월에 제대했어요. 저보다 7살 어린 막냇동생과 함께 졸업했지요. 같은 철원고를 다니다 보니 참 동네 창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얼마 되지 않는 소년공들의 월급이나마 가계에는 크게 도움이 됐다. 귀향을 포기하고 빚을 얻어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아들들이 적금을 타면 그 돈을 가져가 빚을 갚았다.“그렇게 돈 번 덕에 제가 고등학교에 간 거죠. 저는 가계에는 크게 도움을 못 줬습니다. 둘째 셋째 동생들이 계속 일하면서 큰 기여를 해줬지요.”두 동생은 그가 대학교에 들어가자 방송통신고에 지원해 졸업했다. 그 아래 동생들은 집안 살림이 나아진 덕에 제때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정말 고생들 많이 했지요. 꼰대 같은 얘기가 되지만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데는 이런 세대들이 역경에 맞서 뭔가를 이뤄낸 덕도 크다고 봅니다.”퇴직한 해에 택시운전자격증 취득 택시운전 자격증은 교직에서 퇴임한 2018년에 땄다. 2021년부터 개인택시면허 양수요건이 대폭 완화돼 쉽게 면허를 얻게 됐다.―교장 선생님은 사회적 체면을 중시할 자리인데, 어떻게 택시기사를 생각하셨나요.“저는 사람은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 하죠. 평소에도 ‘교장 옷을 벗으면 내가 교장이라는 생각은 잊어버리자’고 다짐했었습니다. 퇴직 후에는 남에게 서비스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서 호텔 웨이터도 생각했어요. 당시 지원서까지 보냈지만 답이 안 왔죠. 지금 보면 잘 됐어요. 택시운전이 더 자유롭고 좋아요.”―가족의 반응은 어땠나요.“집사람이 전적으로 찬성했어요. 자기도 면허증 있으면 택시 하고 싶대요.”택시 운전을 준비하며 블로그도 시작했다. 블로그 첫 글이 2021년 2월 올린 ‘제임스 제4의 인생’이다. 그대로 옮기자면 ●제1의 인생 영등포 철공장 유성공업 소년공 노동자 ●제2의 인생 미추홀 외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한 교직 ●제3의 인생 인천영어마을 원장 ●제4의 인생 제임스네!네!택시 운전사 이렇게 딱 4줄이 올라와 있다. ―본격적인 글은 그해 7월부터 작성하셨는데 손님들 얘기를 간략하게 쓰셨더군요.“다니다 보니 특이한 분을 많이 만나게 되는 거예요. 이건 기록을 해야겠다, 인생 공부를 할 수 있겠구나 싶었지요.”‘과거를 내려놓는다’는 생각을 실천하고 있었던 걸까. 2년 이상 기록된 블로그에는 교장 시절 얘기는 거의 없었다. 직접 만나 인터뷰하며 옛날 사진들을 보여줄 때에야 그가 당시를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노년에 택시 운전은 하늘이 주신 직업평소 시니어 개인택시 기사들의 일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정 씨가 마침 ‘택시 기사 해서 좋은 점 10가지’를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다. ● 1. 다양한 분을 만날 수 있다 ● 2. 운전대는 바로 내가 잡고 있다● 3. 자가용을 끌고 나가면 돈이 나가지만, 택시는 가지고 나가면 돈이 들어온다● 4. 치매 예방에 최고다● 5. 삼식이를 면할 수 있다(집안의 평화)● 6. 맛집을 찾아 다니며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7. 승객을 통해 나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8. 노동의 신성함을 느끼게 해 준다● 9. 휴일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10. 삶의 시계는 멈추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보너스 : 망할 일이 없다.―‘망할 걱정이 없다’는 말이 와닿습니다.“퇴직자가 창업하면 대부분 실패한다던데, 개인택시는 나중에 양도하면 살 때와 거의 비슷한 가격을 받거든요. 월세니 시설비, 직원 인건비도 필요 없죠. 망할 수가 없어요.”10가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터. 그는 ‘세상 구경을 하며 배울 수 있다’는 점을 가장 강조했다. “택시의 작은 창을 통해 넓은 세상을 보는 거죠. 게다가 돈 받으면서 세상 구경 다니잖아요.”―100세 카페에 퇴직 후에도 열심히 사는 분들의 얘기가 자주 나가는데, ‘뭘 굳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려 하느냐’는 댓글들이 종종 달립니다. 겪어본 분들은 일이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 당혹감을 많이 얘기하시던데…. “교장 모임 같은 곳에 가면 ‘그 나이 먹어서도 일하느냐’고 물어요. 저는 ‘수요일 일요일엔 쉰다’고 답하죠. 정주영 씨가 ‘임자 해봤어’라고 했다지만, 두려움은 바로 ‘해보지 않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결혼식장에서 만난 어느 명예퇴직 교사도 ‘어떻게 그걸 시작했느냐, 나는 발 들여놓기가 두렵다’고 하시더군요. 처음 하는 일들은 다 두렵죠. 하지만 그런 길을 가보는 것도 해볼 만한 일 아닌가요.”그는 자신의 택시 이름에 들어간 ‘네!네!’의 뜻을 열심히 설명했다. “고객의 모든 것에 긍정한다는 뜻이에요. 택시가 a에서 b로의 물리적 이동만이 아니라 심리적 공감의 장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사회가 참 살기 힘들죠. 승객이 무엇을 얘기하건 가치 판단을 하지 말고 무조건 공감을 하자. 그래서 ‘네네’입니다. 누가 무슨 얘기를 하든 ‘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며 긍정해드려요.”“택시운전은 청년들의 선망 직종은 아니죠” ―공무원 연금 받으면서 또 돈 버느냐는 질타도 나올 듯합니다. “제 경우 월 매출 200만 원이 목표예요. 비용 제하면 100만 원 남기는 정도죠. 아침 9시 반에 출근해 5시간 반만 일하고 주 2일은 쉽니다. 제 동생도 딸도 ‘젊은이들 일자리 뺏지 말고 조금만 하라고’ 해요. 다만 우리 사회가 은근히 분업화되고 있는데 택시기사는 청년들이 선망하는 일자리는 아니에요. 고령자들한테는 굉장히 좋은 일자리지만요. 그러니 젊은이 일자리 빼앗는다는 말은 하기 어렵게 돼 있어요.” 실제로 개인택시업계는 고령화됐고 법인택시는 기사 부족으로 가동률이 떨어져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비슷한 이력을 가진 분들이 계시다고요.“2021년 양수조건이 완화되고 나서 인천에서 교장 출신으로는 제가 1호예요. 그 뒤 교장선생님 두 분과 명예퇴직한 교사 한 분이 택시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택시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택시를 몰고 다니면 재미난 일들이 많다. 특히 그의 시선은 어려운 처지의 고령자들에게 자주 향한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편리함의 상징인 택시 앱 탓에 노인들이 힘들어졌다는 것. “젊은이들은 집 앞에서 택시를 부르는데 노인들은 도로까지 나가 택시를 잡으려 애태우시죠. 그나마 빈 택시는 모두 ‘예약’이 걸려 있고요. 전 그런 어르신이 보이면 콜을 끄고 유턴을 해서라도 앞에 세워 드립니다. 무척 좋아하시죠.”94세 할머니가 선풍기 파는 곳으로 가자고 해 상점에 내려드렸다가 결국 할머니 집 앞 거리에서 선풍기 조립까지 해드리고, 남동구청까지 가자며 택시를 탄 남루한 할아버지를 목적지에 내려드리며 택시비를 받는 대신 돌아갈 때도 택시로 가시라고 2만 원을 쥐여 드린 얘기 등 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체험하지 못했을 에피소드가 많다.물건 두고 내린 손님을 쫓아 추격전도 벌이고 손님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우기도 한다. 노부모님이 전 재산을 일찍 아들에게 주고 나서 오갈 데 없게 된 사연을 들으며 “재산은 미리 주면 안 되는 거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직접 택시 호출 앱을 사용하는 92세 할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인터넷뱅킹도 한다는 그 할머니가 ‘조금만 배우면 이렇게 편리한데 친구들이 그걸 못한다’라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며 ‘변화하는 세상, 주도는 못 할지라도 따라는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꽃 피듯 살아온 인생, 꽃 지듯 살다 간 인생…―택시 일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세요?“몇 살이라고 못 박기는 어렵지만 인지능력이나 운동감각이 떨어졌다고 느껴지면 바로 그만둬야죠. 저는 젊고 깔끔하게 보이려고 눈썹 그리고 비비크림 바르고 염색도 하고 다녀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인지능력은 당연히 떨어집니다. 본인은 모르더라도 객관적으로 인지능력이 떨어지면 그만둬야죠. 저만 타고 다니는 거라면 괜찮지만 소중한 생명이 타고 계신데….”―택시를 그만두신 다음은요?“집사람하고 언젠가는 ‘제임스네!네!카페’를 열자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안에 작은 심리 상담소도 두자고. 집사람이 심리상담사 자격증이 있거든요. 많은 시니어들이 속 얘기를 털어놓을 데가 없잖아요. 그런 자리를 좀 만들어보자. 오시는 분들에게 차 대접하고 그분들의 인생사도 들어주고…. 그런 생각을 해보고 있죠.” 30대 중후반에 들어선 두 자녀가 혼인한 지 몇 년 됐는데도 손주 소식이 없어 서운하지만, 그 기대또한 내려놓았다고. 그는 가수 MC 스나이퍼의 ‘인생’이란 노래를 말했다.“중간에 여가수가 피처링하는 대사가 나와요. ‘꽃피듯 살아온 인생/ 꽃 지듯 살다 간 인생/ 돌아보니 아름다웠던 인생/ 이젠 미련이 없네.’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택시 하면서 차창 밖에 보이는 인생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 많이 보잖아요. 저런 평범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나라가 잘 돌아가는구나. 나의 들어 몸 아프신 분들, 그건 또 저의 미래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공부를 많이 합니다. 이게 택시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지요.”인천=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12-09 01:40
정년퇴직 10년차가 고군분투 끝에 찾은 평생 일자리는…“내가 ‘정말로’ 즐길 수 있는 일”[서영아의 100세 카페]근 10년 전인 2014년 4월, 김학서(67) 씨는 32년간 다니던 한국무역협회에서 정년퇴직했다. 만 58세. 한 달 정도는 참 좋았다. 소파에서 딩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속이 편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몸이 근질근질하고 좀이 쑤시면서 깨닫게 됐다. ‘퇴직 후에 뭐라도 배워 새롭게 일을 시작해야 하는구나….’‘OECD 보건통계(2023)’에 따르면 0세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6세, 65세가 된 사람의 기대수명은 86.6세에 이른다. 반면 법정 퇴직연령은 60세, 민간기업의 비자발적 퇴직연령은 49.5세로, 퇴직 후 20~30년이 숙제처럼 남게 된다. “평생 어느때보다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김 씨는 지난 10년간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13일 그가 운영하는 시니어 독서모임에 가봤다.시니어들, ‘내 이야기’ 하면서 치유되고 자존감 높여서울 강동구에 자리한 서울시민대학 동남권캠퍼스의 한 교실. 시니어 남녀 10명이 둥근 테이블 앞에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책 질문지로 토론하는 독서모임. 자신들은 ‘수다떨기 인생학교’라고도 부른다.수다의 화두는 김학서 씨가 신작 수필집에서 뽑아온 9가지 질문. 예컨대 △싫은 사람 △밥벌이 △전원생활 △멍 때리기 △새로움과 마주할 용기 등이 이 날의 질문, 즉 화두다. 질문별로 참가자들은 돌아가며 이야기를 쏟아냈다. 화두가 다양하다보니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기억이나 경험들이 마구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고.김 씨는 2년 전 우연히 책 질문지 만드는 법을 배워 질문지 독서 모임 기획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러 책에서 발췌한 문장과 함께 던지는 질문이 사람들이 자연스레 얘기를 꺼내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내 사연이 소중하면 당신의 사연도 소중하다“퇴직 후 동병상련의 시니어를 많이 만나면서 알게됐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누군가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별로 없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자기 서사를 이야기하며 그 자체로 위로받고 치유된다는 것을요. 나이 든 세대는 하소연할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로 마음 치료가 되는 것같아요.”구성원은 글쓰기나 독서에 관심이 많은 시니어들. 현재는 55세부터 78세까지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나면 뭔가 후련해지고 즐거워지는 것을 체험해본 사람들이다. 한 멤버는“10년 간 혼자 지내던 생활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러 나오는 과정 자체가 용기가 필요했다”면서 “이제는 매주 이 시간을 기다리게 됐다”고 말한다. 구성원은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정책이라 조금씩 들고 나며 8~10명 규모로 2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다. ―혼자서만 길게 얘기한다던가, 물 흐리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요. “자연스럽게 필터링이 되더라구요. 토론 때는 2분이상 발언금지, 다른 사람 얘기에 대한 논쟁 금지. 이런 원칙이 있어요. 지나칠 경우 제지를 하기도 하지요.”각자의 소소한 사연은 자신에게는 소중하지만 타인에게는 관심을 끌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자리에서는 일종의 사회계약이 작동하는 느낌이었다. 타인의 얘기를 소중하게 들어주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퇴직후 5~6년은 경험과 지식 살려 사회활동김학서 씨가 평생 몸담았던 무역협회는 중소무역업체의 수출입업무를 도와주는 기관. 그는 중국실장, 상하이지부장 등을 역임한 중국전문가다. 퇴직 후 우선은 이력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 찾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를 위해 창업컨설턴트 등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기도 했다.이듬해부터 2년간 광운대에서 겸임교수로 ‘중국 경제’를 강의했다. 2016년부터는 한국무역협회 수출전문위원으로 위촉돼 강원지역 중소기업의 수출 활동을 도왔고, 중소벤처기업 진흥공단, 대중소농어업 협력재단, 서울시 창업포럼 등에서 자문과 평가 업무에 참여했다.“퇴직 후 5년 정도는 각종 기관과 단체에서 올리는 모집공고에 적극적으로 신청했습니다. 현직에서 익힌 경험과 지식, 노하우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사명감이 컸지요.”―여러 일을 겸직하면 수입도 어느 정도 확보되나요?“턱도 없죠. 교수는 한 과목 강사료가 전부이고 각종 위원의 경우 한달에 한번 회의 참석하고 교통비 받는 정도입니다. 퇴직 후에 돈 생각하면 즐겁게 일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인생을 즐긴다는 쪽으로 접근해야죠.”―경제적으로 지장은 없나요.“크게 문제 없어요. 평생 월급쟁이였으니 집 한 채에 국민연금, 개인연금 정도 있는데, 베이비붐 세대가 다 비슷할 거예요. 간혹 뉴스에 나오는 노후 부부 최저생활비(월 200~300만원)정도면 무리없이 살 수 있다고 봐요.”100세 시대 무색한 시니어 일자리 사정그에 따르면 이런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은 딱 65세까지다. 65세가 넘으면 아무리 경험이나 지식이 많아도 사회 활동을 중단하라는 공식적인 압력을 피부로 느낀다.“국제노동기구(ILO) 통계가 만 64세까지를 생산활동인구에 넣기 때문일까요. 대부분의 일에서 아예 지원자격이 없어지더군요. 100세 시대가 무색하죠.”사실 60세를 넘기면서 슬슬 사회에서 배제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거리나 슈퍼마켓에서 흔히 마주치는 동년배들이 일터에서는 보이지 않았다.“언젠가부터 회의가 있어 가보면 항상 제가 최고령자더군요. 외롭다는 생각을 넘어, 이걸 계속 나와야 하는지 고민이 되더라구요.”―지자체 등에서 운영하는 ‘노인일자리’는 있을 텐데요.“명목은 ‘일자리’지만 월 30만 원 짜리 돈 뿌리기예요. 그분들이 평생 쌓아온 경험이나 지식과는 무관한, 복지의 대상이 되는 거죠. 문제는 이걸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는 거예요.”그러고보니 그가 가리킨 벽에 붙어 있는 서울시민대학의 ‘중장년 진로탐색 워크샵’ 포스터는 모집대상을 ‘40~64세 중장년 누구나’로 한정하고 있었다. “65세 이상은 모든 울타리에서 벗어나 있어요.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는 거겠죠. 결국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던지 세력화해서 여론과 정치인들을 움직여야 고쳐질 겁니다. 전 그런 일을 시작하기엔 늦었지요.”동년배들의 동병상련그래도 한 20~30년은 더 뭔가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 스스로 길을 찾자. 그가 찾은 일은 두가지. 첫째는 수필가 등단이다.“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게 100세 시대를 즐기는 길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문화센터에 등록하고 열심히 배워 지난해 1월 수필작가로 등단했습니다. 습작으로 쓴 글을 모아 ‘삶의 온도는 따뜻한가요’라는 수필집도 냈지요.”이에 앞서 2020년에 퇴직 후 6년간의 생각을 정리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마이북하우스)’을, 이듬해에는 전자책 ‘중장년, 새 꿈을 펼치자(낙서당)’를 냈다. 그가 찾은 두 번째 일이 이날 보여준 질문지 독서모임이다.“글쓰다 보면 혼자서는 재미있게 지낼 수 있어요. 그런데 동년배들이 눈에 밟히는 거예요. 우리 모임에 나오는 어르신이 78세인데 출석률이 제일 높아요. 말씀 들어보면 ‘이 나이 되니 불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모임 와서 얘기도 하고 또 연배가 아래인 사람들 얘기를 듣고 하면서 너무 즐겁다고 하세요.”―시니어층 중에서도 특히 70대 남성들이 가장 갈 곳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경로당은 너무 이르고. “그러니까요. 앞으로도 많은 시니어와 질문지 모임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조만간 이분들 이름이 공동으로 들어간 결과물을 만들 생각입니다. 종이책이나 전자책, 동영상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만의 무기를 기르세요―베이비붐 세대의 퇴직과 고령자층 진입이 순차적으로 이뤄지고 있죠. 이 분들, 살 길을 찾아 각자도생하거나 세상에서 한 발 빼고 조용히 방관자로 살거나 대충 두갈래인 것 같습니다.“제가 보기에 극소수 퇴직자들이 뭔가를 하려고 하고, 대부분은 그냥 인생을 놓고 살아요.” ―왜 그럴까요.“무언가에 새롭게 도전한다는 생각을 쉽게 못하는 탓 같아요. 저는 그런 분들에게 ‘생산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늘 얘기해요. 소비자 입장에서 노래를 듣기만 할 게 아니라 노래건 뭐건 재미있으면 그걸 직접 하라는 거죠. 누구든지 뭔가를 한 2~3년 꾸준하게 붙들고 가면 밥벌이도 된다고 보거든요. 그러면 반응들이 ‘그 동안에는 뭘 먹고 사느냐’고 해요. 하지만 뭘 하든 간에 그 3년은 지나가요. 아무 것도 안하고 살면 그냥 지나가는 거고 뭔가를 하면 성과물이 조금씩은 쌓이는 거죠.”―좀 더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라는 말씀인가요.“살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잘 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지 못하면 남들이 차려주는 밥상이나 바라게 됩니다. ‘나 좋은 밥상 줘, 그럼 내가 먹을게’ 이런 생각이거든요. 모두가 다 그런 태도라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스스로가 밥상 차릴 생각을 해야지요.”나를 위해, 타인 위해 밥상 차리는 자세그는 요즘 세상의 변화를 오픈카톡방에서 배운다고 했다. “요즘 오픈카톡방 보면 작은 것은 100명 단위, 큰 것은 1200명 정도 가입돼 있는 것도 있어요. 저는 누구건 1000명 정도만 내 고객을 갖고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고 봐요. 그걸 가지고 사업을 한다면 모두 1인 기업이 되는 거죠. 사업도 옛날에는 조직에 의존해서 했다면 지금은 개인들이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것을 확실하게 갖고서 뭔가 챙기는 사람이 승자예요. 즐기면서 잘하는 사람이 가장 강할 수밖에 없고요. 앞으로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해야 해요.”―무슨 말씀인지. “퇴직하고 보니 더더욱 확실하게 알겠어요. 좋건 싫건 의무에 따라 일하는 월급쟁이는 하다 보면 끝내 그냥 월급쟁이죠. 이들은 별 고민도 안 해요. 그에 비해 1인기업들은 그게 자기 것이니까 고민을 하더라고요. 눈덩이로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잘 안 뭉쳐지는데 자신의 고민이라든가 생각을 거기다 자꾸 쏟아붓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눈덩이가 확 커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경제적인 부분도 자동으로 따라올 수 있을 거예요. 스타트업이나 유튜브 채널이나 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요.”용기를 내는 것도 습관“저는 지금도 무언가를 배우려고 애씁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을 공부하고 있어요. 두어달 전, 동영상 만들기 강의를 들으러 부천까지 갔어요. 8만 원 내고 8시간 수업을 듣는데 머리만 아팠죠. 하지만 어찌어찌 동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됐어요. 용기를 내는 것도 습관이에요. 습관은 그 다음부터는 반복되기 때문에 쉽게 굴러가죠.”그는 질문지 만들는 일이 너무 재미있고 그것을 동료들과 나누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요즘 ‘평생 중 가장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뭐라도 좋으니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시작해보세요. 공을 들여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든 뒤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지요. 100세 인생 후반부 30~40년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 관심있는 것 중에 하나씩 붙들고 가면 뭔가를 이룰 수 있어요. 요즘은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조금만 도움을 받으면 전문가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다 좋은데 수필도 독서모임도 돈되는 일은 전혀 아니네요.“지금은 그렇지요. 이것저것 용기를 내어 시도해보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이런 게 제겐 더 소중합니다. 또 누가 압니까. 하다보면 제게도 어떤 기회가 올지. 하하…”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11-25 03:00
[온라인 라운지]한일의원연맹, 한일 전문가 초청 세미나 개최‘캠프 데이비드 이후 한미일 관계-한일 안보협력 과제와 전망’ 주제로한일의원연맹(회장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오는 2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한일 전문가 초청 세미나를 연다고 22일 밝혔다. 행사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주최한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미중 전략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등 주변 안보 환경 변화 속에서 한일 양국 정부의 인식과 대응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양국 정부가 채택한 국가안보전략 문서 등에 대한 평가도 진행한다. 또 지난 8월 미국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나온 공동성명의 의미와 실천 방안을 논의하면서 정책적 제언을 내놓을 것으로 기대된다.한국 측에서는 이상현 세종연구소 소장과 김숙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이병철 경남대 교수가, 일본 측에서는 지지와 야스아키 방위성 방위연구소 주임연구관과 도쿠치 히데시 평화안전보장연구소 이사장, 사하시 료 도쿄대 교수가 발제와 토론을 맡았다. 한일의원연맹에서는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과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패널로 참여한다.한일의원연맹은 지난 6월 ‘김대중-오부치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25주년 기념심포지엄’을 일본 와세다대학 일미연구소와 공동으로 개최한 바 있다. 한일의원연맹은 “앞으로도 양국 전문가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국회 차원에서 안정적이고 바람직한 한일관계 발전방향을 찾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11-22 19:08
아픈 아내 위해 시작한 반찬가게 ‘대박’… “60부터는 나를 위한 삶”[서영아의 100세 카페]경부선 평택역에서 걸어서 4분, ‘착한남성컷’ 간판이 눈에 띈다. 지난해부터 조동근(63) 씨가 혼자 운영하는 이발소다. 메뉴는 크게 컷과 염색 두가지. 컷 7000원, 염색도 1만 원의 파격적 가격을 자랑한다. 대신 머리는 본인이 감아야 한다. 말 그대로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이 편하게 찾는 실용적 이발소다.그는 안정된 직장으로 소문난 한국전력을 50세에 그만두고 반찬전문점 사장을 거쳐 이발소 사장님이 됐다. 그의 사연을 들으러 3일 경기도 평택시의 이발소를 찾았다.20대 후반, 아내가 암 선고를 받았다 50세까지 그의 본업은 한국전력 직원이었다. 19세에 한전직업훈련소를 거쳐 기능직으로 입사했다. 소위 ‘전기원’이라 불리던, 철탑에 오르고 전봇대를 타며 고장을 고치는 그 일을 했다. 32세 때 회사 내 계열 전환 시험에 도전해 기술직 직원이 됐다. 연봉 높고 안정적인 직장으로 유명한 한전이지만 그는 미래가 불안했다. 일찌감치 결혼해 아들딸 낳고 잘 살던 아내가 그의 나이 29세에 비장암 선고를 받았다. 비장은 잘못 건드리면 출혈이 멈추지 않아 사망한다는 장기. 수술이 안 돼 항암치료에 희망을 걸었다.“병명을 알기까지, 입원해서 두 달이 걸렸어요. 만 한 살, 네 살 된 아들딸을 친척 집에 맡기고 회사도 일시 휴직하고 아내 간병에 매달렸죠. 치료비에 가진 것 전부 쏟아붓고 일산의 외양간 같은 곳을 얻어 살았어요. 퇴원 후에는 집 앞 밭 200평을 얻어 온갖 작물을 길러 자연식을 아내에게 해 먹였지요.”그의 나이 37세, 부인이 완치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거의 무일푼이 돼 있었다.“‘이런 상태에서 아내의 병이 재발한다면, 그때는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더라구요. 제가 아내를 간병하는 와중에도 1년을 공부해 기술직에 도전한 것도 혹여 아내가 죽고 저마저 일하다가 사고로 죽으면 아이들이 고아가 될 수 있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반찬전문점으로 ‘대박’돈을 벌기 위해 부업에 나섰다. 낮에는 한전에서 근무하고 밤이면 식당에서 일하며 보신탕집 오리로스구이 가든식당 김치공장 등 닥치는 대로 손댔지만 모두 실패했다. 식당은 그의 사정을 이해하는 직장 동료들의 회식 장소로 애용되곤 했다.1997년 무렵, 5일장에 가서 김치를 팔던 그에게 어느 아주머니가 물었다. “다른 반찬은 없어요?” 섬광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반찬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외식 장사도 사람들의 생활방식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걸 독서를 통해 알고 있었다. 외환위기( IMF)사태가 오면서 모든 사람이 일을 하는 시대가 왔다. 수요가 적지 않을 것 같았다.상가 한구석에서 시작한 반찬가게는 시대 흐름과 맞아떨어져 ‘대박’을 쳤다. ‘명가 찬방’이란 간판을 달고 상가 전면으로 진출했고 매장은 세 군데로 늘었다.성업의 배경에는 끊임없는 연구가 있었다. 그에게는 독서를 통해 얻은 새로운 반찬 레시피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예컨대 식재료를 포장해서 집에서 끓이기만 하면 되게 한 청국장, 부대찌개 등의 반응이 뜨거웠다. 요즘으로 치면 밀키트다.“제조업에 종사하는 오너는 그 제조과정을 다 알고 있어야 해요. 제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배웠어요. 명절 때 부침개 같은 건 정말 어마어마하게 팔렸어요. 3일간 매출이 3000만 원을 넘겼죠. 제가 직접 녹두 갈고 아주머니 10명이 종일 부치고….”50세, 본업보다 부업 수입이 더 많아지자 그는 한전을 7년여 당겨 명예퇴직했다.시대가 변해도 ‘진화’할 직업을 찾아 이 반찬가게를 그는 2015년까지 모두 접었다. 시대가 빠르게 변했고 반찬가게도 시류를 탔다. 1인 가구가 늘고 1인당 소득 3만 달러 시대가 되니 반찬을 사다 먹는 사람이 줄었다. 올라가는 인건비, 대기업들의 시장진출도 설 자리를 좁게 만들었다.그는 노후 자신의 진로를 놓고 연구를 거듭했다. 다행히도 아내의 건강은 괜찮았고 아들딸 모두 가정을 이뤘다. 평생 먹고 살 것은 어느 정도 마련돼 있지만 스스로가 놀 수 없는 체질임을 알고 있었다. 세상과의 소통도 이어가야 했다. 바야흐로 세상은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이 지배하는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그래서 찾은 게 이발인가요?“이발, 설비, 중장비운전 등 몇가지를 놓고 검토했어요. 미래 직업을 △없어질 직업 △대체될 직업 △진화할 직업으로 분류해봤지요. 사람마다 두상이 다르고 모발 질도 다른데, 이 일은 기계가 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고령시대에 싸고 간편하게 이발할 곳을 찾는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지요. 이용학원에 등록하고 6개월간은 마침 학원 위층에 있던 고시원에서 지내며 공부에 매진했습니다.”이발사는 어떻게 진화할 수 있을까. 그는 고령자가 더 늘어나면 출장 이발 수요도 증가할 거라고 보고 있다. 지금은 이발사가 가정을 방문해 이발해주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퇴폐이발소에서 연상되는, 그런 우려 때문이겠죠. 그런데 직접 이발소에 오기 어려운 고령자들이 더 늘어나면 그에 맞게 법도 정비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나이가 많은 이발사들도 부담 없이 프리랜서처럼 일하는 시대가 열릴 수 있지요.”나이 60에 이발사 자격증 따고 평택에 자리 잡아어디에서 개업할 것인가. 자택이 있는 일산 일대를 검토했지만 신도시는 젊은이가 많다. 나이 든 이발사에게 젊은 손님이 오지 않으리라는 게 자명했다. 인구 밀도와 연령대 등을 따져 서울에서 멀지 않고 교통이 편리한 경기도 평택과 안성 구시가지를 노렸다. 고령자도 유동인구도 많아 틈새시장이 있다고 봤다. 그가 2019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안성에 ‘착한남성컷’ 1호점을 연 이유다.“저는 어떤 머리라도 5~7분이면 다 깎습니다. 불필요한 동작을 모두 배제합니다. 패턴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평택에는 시니어층도 많지만 군부대도 많아 휴가 나온 군인들이 적잖게 찾아왔다. 이발소에는 음식점 메뉴처럼 머리모양 샘플 사진이 있고 고객은 그중 번호를 고르면 된다.“평택에는 외국인 근로자도 많아요. 그분들이 머리 깎으러 와서 원하는 스타일을 설명하는 건 쉽지 않죠. 그림을 보며 번호를 고르게 하니 서로 편했어요.”나아가 이 분야에서 일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멘토 역할을 자처했다.“한사람 몫의 이용사가 되려면 1)자격증을 따고 2)실습 750여 시간을 거쳐 3)창업 혹은 취업하는 세 단계를 거쳐야 해요. 자격증은 학원에서, 창업 취업은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실습을 감당해줄 곳이 마땅치 않죠. 그걸 제가 돕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봉사활동과 기능연마 두 마리 토끼 잡아그는 주말이면 ‘원데이 클래스’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매주 화요일이면 함께 이발 봉사를 나가 실습 기회를 만들어준다. 카카오톡에 ‘착한남성컷 학습방’을 만들어 수시로 일정과 정보를 공유하고 참고할 만한 지식을 전달해준다. 이 카톡방에는 현재 40명이 들어와 있다.“인근 요양원이나 정신병원 등에 아침 9시부터 7~8명이 가서 100여 명 정도 이발해드립니다. 봉사는 그 자체로도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이발 기술이 숙련되는 좋은 기회예요. 이분들은 조금 밉게 깎아도 상관 않으시잖아요. 특히 고령 남성들은 대개 빡빡 밀어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제자들에게 이발 기계로 밀기 전에 상고머리 커트하는 연습을 해보라고 하지요. 연습용 가발 한 개에 7~8만 원인데, 절호의 기회죠.”유튜브에 이 발기술 자료 영상을 80여 개 올렸는데, 이발을 공부하다가 이 영상을 발견하고 찾아오는 제자들이 간혹 있다. 그의 신조는 ‘최고보다 최초가 돼라’는 것. ‘크몽’이라는 전문가 등록 전자책 포털 사이트에 ‘이발의 정석’ 교재를 등록하고는 “남성헤어컷 분야 교재로는 최초”라며 자랑한다.현재 ‘착한남성컷’은 전국에 5곳이 있다. 1호점이 자리가 잡히자 제자에게 넘기고 2호점을 평택 서정리에 열었다. 그 뒤 2호점도 다른 제자에게 넘기고 지난해 평택역에 둥지를 튼 게 지금의 3호점이다. 서울 봉천동과 광주광역시에도 50대, 60대 제자들이 ‘착한남성컷’을 열었다.“1호점은 58세 전직 미용사가 맡았는데 센스가 좋아 성업 중이에요. 2호점은 60세 여성인데 거기도 잘 되지요. 3호점은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훗날 여길 근거지로 하려고 합니다.”“사는데 대학은 그리 필요하지 않더라구요”베이비붐 세대의 특징 중 하나가 극도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 또 그렇게 바닥에서 시작했어도 좌충우돌 부딪히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도약을 해낸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조 씨 또한 본인 표현에 따르면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가난한 집안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연탄 한 장 한 장 사다가 때우며 생활하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월사금 낼 돈이 없어 중퇴하고 인쇄소에 취직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장을 전전하다 18세가 되자 ‘이렇게 살면 미래가 없겠구나’는 ‘현타’가 찾아왔고, 야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한전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다.1985년 첫 아이가 태어날 때 그는 검정고시 학원에 있었다. 그해 고입 검정에, 이듬해 대입 검정에 합격해 1987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2년 뒤 아내의 병으로 휴학하면서 그의 학업은 끝났다.-왜 나중에라도 학업을 마치지 않으셨나요.“사는데 대학이 그리 필요하지 않더라구요. 10년간 책을 2000권쯤 읽었어요. 특히 자기계발서에 빠져들었지요. 책 내용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늘 메모하고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봅니다. 나름 시대를 조금은 읽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사실 학벌과는 상관없이 그는 지금도 열심히 공부한다. 음식 장사를 하던 시절에는 외식업 관련 책을 섭렵하고 어떻게 하면 성공할지 고민한 흔적들을 수첩에 빽빽이 남겼다. 반찬가게를 할 때도, 지금의 이발 일을 할 때도 늘 메모하고 읽고를 반복한다. 다만 요즘은 수첩이 아니라 스마트폰에 저장한다고. “한국 청년 걱정되지만…앗! 내색은 안 합니다”마음 같아서는 청년들의 앞길도 열어주고 싶은데 청년세대에는 아직 그의 진심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전철에서 젊은 아이들 보면 안타까워 죽겠어요. 그 귀한 시간을 시시한 게임이나 하며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막상 표정을 보면 세상에서 자기 역할을 찾지 못해 주눅 들어 있고요.”화요일 봉사 모임에도 가끔 청년 이용사 지망생이 오는데 소통이 쉽지 않다. “봉사 다녀오면 후기를 쓰라고 해도 안 써요. 하나라도 배우려는 자세가 잘 안 보여 답답합니다. 그래도 내색하면 ‘꼰대’가 되니까 참아야죠.”-혹시 나이 든 멘토와 소통이 어색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저는요, 평생 세상에 들이댔어요. 제가 세상에 들이댄 것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저에게, 세상에게 들이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60세부터 아내는 가끔 만나는 게 반갑고 좋아요”이 세상 많은 가장이 그러하듯 평생 그를 움직인 동력도 가족이었다. 아내가 투병하던 당시에는 어딜 가도 손을 붙잡고 다녔다. 암으로 인해 혈소판이 줄어 어딘가에 부딪히기만 해도 출혈이 멎지 않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주 1~2회 정도 일산에 올라가 만나는 정도로 쿨하게 지낸다. 자녀들은 다 출가했고 아들과 함께 사는 부인은 교회활동에 열심이라고. 조씨는 주로 평택에 얻은 오피스텔에서 생활한다. 그는 “60세 넘으면 부부는 가끔 만나는 게 제일 반갑고 좋다”며 웃는다. “평생 일해 가족을 지켰습니다.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이 일은 제가 세상과 만나는 창문 같은 겁니다. 인생 바꾸고 싶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이 일을 하길 정말 잘했죠. 아니었으면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고 싶은 이 마음을 전할 방법을 어디서 찾았을지 모르겠어요.”평택=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11-11 03:00
정년퇴직 다음날 새 직장 출근, 어느 빌딩 관리소장의 ‘가늘고 긴’ 평생취업기[서영아의 100세 카페]1961년생 최경묵 씨는 2021년 12월 31일 정년퇴직하고 이듬해 1월 3일 새 직장에 출근했다. 연면적 5만 평 규모 빌딩의 관리소장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금요일까지 전 직장에서 근무하고, 신정을 낀 주말 쉬고 월요일부터 출근했어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최 씨)단순히 운으로만 돌리기엔 설명이 부족하다. 50대 초반부터 그가 노심초사하며 쌓아온 준비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에게 막막하게 느껴지는 퇴직 후 삶. 그는 어떻게 막간도 없이 인생2막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까. 그건 또 어떤 느낌일까.그를 만나러 17일 서울 송파구 문정현대지식산업센터 관리사무소를 찾았다.●무조건 생존하라, ‘가늘고 길게’지하 2층에 자리한 관리사무소 소장실. 그는 이곳에서 아침저녁으로 회의를 하고 소속 직원 50여 명의 중간보고를 받는다. 평일 상주인구 1만1000명이 넘는 건물의 냉난방과 급탕, 소방 안전관리가 그의 책임하에 돌아간다.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비자발적 퇴직 평균연령은 49.5세. 법정 정년인 60세를 채우는 것은 천운이라고들 한다. 반면 한국인이 일을 손에서 놓는 시기는 72세까지 늦춰진다. 충분하지 않은 노후준비 탓이다. ―퇴직과 동시에 재취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요.“틈틈이 따놓은 자격증 덕분이죠. 재직 중에 자격증을 활용해 경력까지 쌓아 놓았어요.”그가 가진 자격증은 안전, 소방, 위험물 관련의 3가지. 용의주도하게 퇴직을 준비한 배경에는 남들보다 일찌감치 ‘철이 든’ 과거사가 있다.●이직 5년 만에 부도가 나버린 회사행정학을 전공한 그는 대형 건설사 인사팀에서 6년 반 정도 일한 뒤 당시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는 한신공영으로 소속을 옮겼다. 하지만 회사는 그가 이직한 5년 뒤인 1997년 부도가 났고 우여곡절 끝에 중견 유통기업에 흡수돼 버렸다.“고용승계 조건으로 회사가 정리됐으니 우선은 버틸 수 있었지만, 동료의 절반 이상은 회사를 나갔습니다. 회사는 수시로 구조조정을 했고 눈치를 줬습니다. 피합병회사의 직원으로서 갑자기 한직으로 발령이 나거나 진급이 안 되거나, 여러모로 한계가 느껴졌죠.”그의 직급은 1992년 이직할 때 과장이었는데, 정년 1년 전까지 ‘차장’에 머물렀다. 어제까지 그의 업무지시를 받던 부하 직원이 상사로 오는 일은 다반사. 40대 후반쯤 되니 ‘나이가 많다’는 눈치가 더해졌다.“그런 모멸감을 이겨내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호기롭게 나간 사람들이 예외 없이 후회하는 모습을 봤거든요. 이구동성으로 ‘힘들어도 참고 다니라’고 하더군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정년퇴직하는 게 최고의 노후 대책’이라고 충고하는 분도 있었죠.”최 씨는 전형적인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1955년~1963년생). 자존심 세우고 목소리 크지만 컴퓨터 앞에서는 ‘독수리타법’이나 구사하는 ‘꼰대’ 동년배들과 선을 긋고 ‘가늘고 길게’ 생존하는 길을 택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령에 묵묵히 따랐고 지방 발령을 받자 더 열심히 일했다. 새벽에 컴퓨터학원에 다니며 파워포인트 포토샵 동영상 제작을 배워 20대 청년보다 빠른 정보화 능력을 탑재했다. 회사에서도 중요한 보고서 작성 때마다 그를 찾게 됐다. 승진은 못 했어도 밥값은 하며 살았다고 자부한다.●만년 차장의 설움, “자격증이 날 지켜줄 것”전 직장에서의 마지막 직책은 경영지원부장. 주로 건물과 용역관리 일을 하면서 관련 자격증이 있다는 데 눈을 떴다.―회사 일하면서 자격증 도전, 할 만한가요.“본격 공부는 3년 정도 했는데, 회사일 정상적으로 하면서 시험공부 하는 건 정말 힘듭니다. 기술 자격증은 대체로 공대 출신에 유리하고 문과 출신에게는 용어부터 생소해요. 책만 보면 졸리고, 봐도 봐도 잊어버리고…. ”3차까지 있는 시험에서 수차례 실패했지만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실력이 쌓였다.“근무시간에는 회사 일을 열심히 하되 밤시간과 주말 등 자기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에는 퇴근 후 바로 도서관에 가서 평균 2시간 정도는 공부했고, 시험 임박해서는 밤 12시에 집에 와서 씻고 한두 시간 더 하곤 했습니다. 이런 때는 하루 서너 시간 자고 공부했던 거 같아요.”●자격증+경력 있으면 좋은 기회 늘어다만 자격증이 좋은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즉시 현장에 투입되려면 경력이 있어야 합니다. 제 경우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딴 뒤 퇴직할 때까지 3년 정도 면허를 걸고 경력을 쌓았어요.”―무슨 말씀인가요.“구청이나 소방서, 산업안전공단 등 공식 기관에 자격증 면허 신고를 하고 실제 활동을 해야 경력이 됩니다. 사전에 회사에 문의를 했어요. ‘자격증을 따면 면허를 걸 테니까 해도 되겠느냐’고. 인사 담당자는 ‘자격증만 따시라, 그 뒤에 얘기하자’고. 아마 수당도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그는 자격증을 딴 뒤 회사를 통해 구청에 ‘총괄재난관리자’로 신고하고 3년간 일했다.―다른 퇴직 예정자도 따라 할 수 있는 걸까요.“자격증을 딴 뒤 회사와 잘 협의해 공식 기관에 회사의 ‘총괄재난관리자’로 신고할 수 있으면 근무 기간이 경력으로 인정되죠. 그러면 퇴직과 동시에 취업으로 연결될 수 있어요. 꼭 그 길이 아니더라도 전기 안전 소방 등의 ‘기사’ 자격증을 가지면 취직이 수월해져요. 예컨대 소방 관련 자격증을 따면 아파트 같은 데서 근무할 수 있습니다. 기사로 근무하다가 경험이 쌓이고 능력이 되면 관리소장에 도전해 볼 수도 있죠.”●“퇴직하면 모두 똑같아지더라”물론 누구에게나 미래는 알 수 없고 불안하다. 그 또한 다르지 않았다.“퇴직 1년 남기고는 ‘뭐 하고 사나’ 걱정의 연속이었지요. 자격증을 준비는 했지만 이게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디서건 청소부라도 하겠다고 작심하고 있었지요.”그런데 퇴직 6개월 전부터 인터넷으로 직장을 알아보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냈더니 한 곳에서 ‘당장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퇴직일로 정해진 12월 31일까지 마무리는 해주고 나가는 게 도리인 것 같다고 그쪽 회사에 사정했어요. 그런데 그쪽은 당장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못 갔어요. 그 뒤 연결된 지금 직장은 기다려줄 수 있다고 해서 이곳으로 결정했지요.” 관리소장으로서 연봉은 5000만 원 수준. 4대보험, 주 5일 근무가 보장된다.“이 정도 큰 빌딩을 관리하다 보니 나름 책임감도 크고 자부심도 느낍니다. 여기서 일하는 게 행복합니다. 보통 퇴직자들이 제2의 직장을 잡아도 2년 이상 다니기 힘들고 경력을 살리기도 힘들죠. 저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아내가 그러더군요. 요즘은 퇴근할 때 표정이 편안해서 너무 좋다고요.”●“나는 ‘최부장’ 아닌 ‘최씨 아저씨’”―퇴직하는 분들에게 조언을 한다면….“과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정년퇴직하고 밖에 나오면 다 똑같아져요. 직책이 어땠건, 학력이 높건 낮건, 재취업을 하면 급여는 대개 200만 원대 초반이에요. 지금 여기서 일하는 기사님들 중에도 서울대 출신, 은행 지점장 출신, 공무원 출신이 있어요. 50대 초반쯤 구조조정 당해서 산전수전 겪고 자격증 딴 케이스가 많아요. 제가 볼 때 ‘깨인’ 분들이죠. 이렇게 깨인 분이라야 자신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일할 수 있어요.”―어차피 퇴직하면 누구나 힘이 빠지지 않습니까.“전화 통화 목소리나 태도에서 보면 옛날을 내려놓지 못한 분들이 많아요. 높은 지위였을수록 그렇겠지요. 퇴직하면 모두 똑같다는 것,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본인만 괴롭죠.”이런 그는 옛 직원들이 그를 ‘최 부장님’이라 부르면 “그냥 ‘최씨 아저씨’라 부르라”고 한다고. 반대로 진급이 빨라 한때 상사가 됐던 친구가 퇴직 후에도 상사 마인드로 자신을 대하는 걸 느낀 순간, 그 친구를 손절해버렸다고 한다.●남은 꿈은 기술사 도전 그에게는 아직 꿈이 남아 있다.“기술사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여러 번 떨어졌습니다. 소방설비기술사 같은 자격증은 최하 연봉 8000만 원 이상이고 건강만 받쳐준다면 80세까지는 일할 수 있어요. 문제는 시험이 어렵다는 거죠. 제대로 준비하려면 전업으로 한 2년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다른 한편으로는 더 늦기 전에 좀 놀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다리 성할 때 집사람과 여행도 좀 다니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도전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기술사는 응시 자격 자체가 까다롭다. 기사 자격증을 딴 뒤에도 다시 오랜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그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 가서 면접과 심사를 거쳐 응시 자격을 인정받았다. 전 직장에 자격증을 걸었던 3년은 물론, 그곳에서 20여년간 건물 시설 관리 업무를 한 이력이 도움이 됐다. -혹시 ‘일 중독’이란 생각은 안 드시는지요.“그냥 그렇게 됐어요. 지난 추석 때 6일 연휴가 있었잖아요. 제 평생 가장 길게 쉰 것 같아요. 전 직장에서는 여름휴가 일주일 받아도 2, 3일 쉬고 회사에 나갔어요. 시설관리라는 일 자체가 마음 놓고 쉬기 어려운 데다가 위에서도 은근히 눈치를 주곤 했지요.” ● “이 나이 되면 공부보다 운동이 중요”―언제까지 일할 생각이세요.“지금 직장은 제가 그만둘 때까지 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65세까지 바라보고 있고, 그 후에는 상황을 봐야죠. 다만 모든 건 건강을 전제로 합니다. 이 나이에는 공부보다 체력 지키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사람을 많이 고용하다 보니 딱 보면 알아요. 그분의 건강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행동이나 말, 걸음걸이가 어눌해지면 일하기 어렵죠. 이건 제게도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요즘 운동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어요.”40, 50대 때 열중했던 마라톤 대신 요즘은 근력운동과 걷기를 열심히 한다.“얼마 전 동창 모임이 있어 고향에 갔는데 열두어 명 중 현역은 저 혼자였어요. 친구들이 ‘도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됐길래 지금까지 일을 하느냐’며 놀리더군요. 친구들이 저를 칭찬해주고 부러워하는 걸 보니까 내가 잘하고 있구나 싶고, 친구들에게 밥이라도 한 번 더 사게 되니 ‘이게 행복이구나’ 싶기도 합니다.”1막에서 마음껏 꽃피우지 못한 아쉬움은 다 풀린 걸까. 부단한 준비로 화려한 2막을 시작하며 웃는 그를 보며 보통 사람의 성공담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10-28 03:00
[온라인 라운지]‘우리가 그리는 미래’ 한일축제한마당, 22일 코엑스서 열린다‘한일축제한마당 2023 in Seoul’이 22일 ‘우리가 그리는 미래’를 주제로 서울 강남구 코엑스 D홀에서 개최된다고 19일 한일축제한마당 실행위원회(위원장 손경식)가 밝혔다. 한일축제한마당은 2005년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한 ‘한일우정의 해’ 주요 사업으로 시작돼 매년 빠짐없이 개최되며 양국 최대 규모의 민간 교류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제 19회를 맞는 올해 축제에서는 특히 한국과 일본의 전통탈춤 특별공연(한국 봉산 탈춤, 일본 이와사키 오니켄바이)이 펼쳐질 예정이다. 지난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한국과 일본의 전통탈춤 무용극(한국 탈춤, 일본 후류오도리)이 동시에 등재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았다. 이 행사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에 관한 협약 20주년 기념사업으로 인정됐다.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진행되는 행사의 오프닝 무대는 서울시 소년소녀합창단과 서울일본인학교의 합동공연으로 양국의 대표적인 동요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함께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이어 조선통신사를 주제로 한 일본극단 시즈오카현사의 공연, 한일 힙합 공연, K-POP과 J-POP 공연 등이 축제장을 뜨겁게 달굴 예정이다. ‘한일 전통의상 체험 부스’에서는 한복과 기모노 등을 직접 입어 보고 포토존에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한일 전통 놀이 체험 부스’와 일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일본 차 문화 체험’, ‘일본 꽃꽂이 체험’도 마련됐다. 한일 만화 특별전 부스에서는 40주년을 맞이한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마크로스’ 시리즈의 전시 코너가 마련됐고, 오리지널 크리에이터 중 한 명인 가와모리 쇼지 감독을 초대해 사인회를 진행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10-20 10:34
10년 넘은 부모님 간병… 60세 딸은 직접 요양원을 세웠다[서영아의 100세 카페]15년 전 어느 금요일 밤. 어머니(당시 72세)가 좀 이상했다. 뇌졸중 전조증상이었지만 가족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날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12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뇌자기공명영상(MRI)을 찍었다. 뇌경색으로 이미 왼쪽 뇌가 하얗게 변했다고 했다. 기나긴 간병생활의 시작이었다.4년 뒤에는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아내가 투병생활을 시작한 뒤 마음 둘 곳 몰라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은 병원에 입원하면서 차라리 편안해보였다. 그 뒤 대학병원과 요양병원, 재활병원을 옮겨다니는 부모님 간병이 이어졌다. 월 700만~800만 원 씩 들어가는 비용은 네 형제가 분담했지만 버거운 일이었다.임수경 보아스골든케어 대표(62)의 고민도 깊어갔다.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들이 편하게 지내고 보호자에게도 힘을 줄 공간은 없는 걸까. 어디에도 없다면 내가 한번 만들어볼까. 마침 그가 8월에 낸 책 ‘우리 부모님은 요양원에 사십니다’(삼인)가 손에 들어왔다. 5일 그의 일터이자 ‘집’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의 요양원을 찾았다.잘 나가던 IT전문가, 요양원장이 되다그는 잘 나가던 IT전문가였다. LG CNS 상무, KT 전무, 국세청 첫 여성 국장, 한전KDN 첫 여성 사장, 광주과학기술원(GIST) 이사장 등 공·사기업을 오가며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이런 그가 인생 마지막 ‘사명’을 노인요양으로 정했다.-요양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은 알겠는데 직접 요양원을 짓는 건 차원이 다른 도전이네요.“아픈 부모님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요양원을 찾다가 이렇게 됐네요. 형제들 모두 바쁘게 생활하면서 부모님을 온전히 모시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작동했어요.”형부가 마침 갖고 있던 현재의 부지를 내어줬다.여기에 어떤 요양원을 지을지 구상하던 2014년 그가 한전KDN 사장으로 발탁돼 전남 나주로 내려가게 되면서 프로젝트는 지연됐다. 2018년 임기를 마친 그는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부모님을 직접 모시기로 했다. 재활의료기기를 갖춘 집을 마련하고 간병 도우미도 구했다. 7년 만에 한 방에 누운 부모님은 깜짝 놀랄 정도로 즐거워했다. 늘 무표정에 가까웠던 어머니의 활짝 웃는 얼굴이 사진에 남아 있다.“더 이상 해드릴 게 없습니다. 퇴원하세요”노인성 질환의 특징은 분명 아프고 불편한데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점이다. ‘더 이상 해줄 게 없다’니, 보호자 입장에서는 이보다 막막한 말이 없다. 그렇게 병원에서 내쳐진 노인이 갈 곳은 집이나 요양병원, 요양원 재활병원 중 하나다.“이런 현실에 대해 최소한의 안내도 없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도 통탄스러운 게, 어머니가 처음 뇌경색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할 때의 정보부족이예요. 그때 의사가 ‘재활병원으로 가라’는 한마디만 해줬어도 어머니가 와상상태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뒤늦게 간병인의 귀띔으로 재활병원에 들어간 어머니는 재활치료 덕에 다리에 조금 힘이 생겼다. 요양원을 짓기 위해 설계만 14번 바꿨다. 10여 년간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아쉬웠던 점을 깨알같이 반영했다. 그에 따르면 원칙은 ‘노인의 삶이 삶인 채로 존재할 수 있는 집과 같은 곳’.“단순 치료 외에 노인의 건강과 정서 상태에 따라 운동·인지·정서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아버지가 운동 삼아 병실 밖에 나가려 하면 간병인이 막아섭니다. 혹시 넘어져 골절상을 입을까봐. 꼼짝 말고 침대에 누워있으라는 겁니다. 노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대개 이래요. 늙고 병들었어도 여전히 오늘을 사는 사람이란 걸 간과하죠. 노인에게도 요양 돌봄 재활치료뿐 아니라 친구 여가 웃음 놀이 쉼이 모두 필요해요.” 부모님 모시고 요양원서 생활그렇게 2020년 4월 문을 연 요양원은 연면적 3000평에 침상 250개로 민간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다. 4층짜리 2개동이 요양원이고 부속동에는 노인요양연구소와 채플을 넣었다. 개인생활과 공동생활의 균형을 갖추도록 ‘유니트 케어 시스템’을 도입했다. 유니트(이곳에선 ‘마을’이라고 부른다)마다 거실을 중심으로 주방이 있고 개인 침실이 배치된다. 한개 층마다 두개의 유니트 사이에 간호스테이션과 목욕실 등이 있다.어르신들은 거실에서 이웃과 함께 식사하고 색칠놀이나 노래교실 등 프로그램을 공유한다. 반찬은 공동조리실에서 만들어오지만 밥은 거실마다 따로 짓는다. 밥짓는 내음으로 입맛을 돋우고 내 집같은 느낌을 살렸다.공간이 널찍널찍하고 어디나 햇빛이 들어오도록 설계돼 밝다. 옥상정원과 텃밭 등 면회 온 가족들과 함께 즐릴 수 있다. ‘종사자들이 즐거워야 어르신도 즐겁다’며 마련한 편백나무 휴게실도 임대표의 자랑거리다. 현재 237개 침상이 가동중인데 2인실을 혼자 쓰며 추가비용을 내는 입소자들이 있어 빈자리는 없다. 간호사 요양보호사 등 정규직 종사자 160여 명이 이들을 돌본다. 임 대표는 개원 이래 부모님 옆방에서 생활한다.건축비와 초기비용이 고스란히 대출로 남아 있는데, 침상이 꽉 차면서 이자를 낼 수 있게 돼 안도하는 중이라고.어르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합치면 100평 규모인 두 군데 물리치료실에는 코끼리자전거와 전동자전거, 기립기, 적외선 치료기 등 노인에게 필요한 기기들을 채웠다. 그가 물리치료를 강조하는 이유는 부모님에게서 효과를 봤기 때문. 노인들이 근력을 키워 조금이라도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삶의 질과 직결된다. 자신의 힘으로 화장실에 가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은 크게 회복된다.딜레마도 있다. 근력을 조금 키운 어르신들이 자신감이 붙어 혼자 움직이려다 넘어지는 사고가 적지 않다는 것. 고관절 골절을 입은 입소자가 수술까지 해 겨우 나았는데 방심한 사이 혼자 움직이다가 주저앉는 바람에 다시 수술한 경우가 있었다. “얼마나 애써서 회복된 건데, 보호자께도 죄송하지만 저희가 더 속이 상했어요. 그런데 이 어머니는 조금 회복되니 또 움직이려 하세요. ‘어머니 근력 운동하시면 또 움직이려 하실 텐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여쭈면 보호자도 답을 못하세요. 저는 어르신이 자력으로 움직이기 원한다면 그래도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휠체어는 정말 못 일어나게 되면 그때 타시면 되죠.”큰 요양원에서는 사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걸을 수 있는 어르신도 모두 휠체어에 태워버리는 경우가 많다. 안전과 걷는 능력, 어느 쪽이 중한지 섣불리 답할 수 없는 사안이긴 하다.‘집 대신 요양원’도 충분한 선택지-요양원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적지 않은데….“입소하는 어르신도 보호자도 마음의 짐이 크죠. 어르신들은 요양원 가는 걸 창피하게 여기고 보호자들도 부모봉양 제대로 못한다는 자책감을 가지세요. 하지만 어르신들이 조금만 마음을 열면 공동생활이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저는 ‘보호자들도 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많이 하죠. 제가 2년 정도 집에서 부모님을 모셨는데, 제 생활이 없었어요. 간병 도우미 2명 데리고 했는데 비용도 많이 들고요. 문제는 부모님께 ‘집에 있다’는 것 말고는 별로 해드릴 게 없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1년쯤 되니 ‘심심하다, 지루하다’ 자꾸 말씀하시더니 갑자기 치매가 오셨어요.”-여기서는 어떻게 지내시나요?“아버지는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산책도 많이 하고 남들 사는 모습도 보고…나름 사회생활이 가능하니 무척 좋아하세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좋아하시고요. 틈만 나면 두 분이 손 붙잡고 계세요.”-가장 힘든 일은?“어르신들은 상태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들어올 때 괜찮았는데 왜 이렇게 되셨느냐’며 항의하는 보호자들이 계세요. 효심이 큰 분일수록, 내가 모셨어야 한다는 자책감이 강한 분일수록 더 그러세요.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 일에 에너지 소모가 많습니다.”따지고 보면 모두가 이미 ‘돌봄이 매우 필요하다’는 장기요양등급을 받은 어르신들이다. 시간이 흐르면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인생 섭리가 그러한 것 아닌가. -좋았던 일은?“이제 보내드려야 하나, 생각했던 분이 회복되시면 힘이 나지요. 4월 병원에서 담석제거 수술을 받고 한달간 입원했던 99세 어르신이 복귀하겠다고 하시길래 보호자께 ‘요양병원쪽으로 알아보시는 게 좋겠다’고 권했어요. 저희는 병원이 아니니 임종을 놓칠 수도 있고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여기가 내 집’이라고 고집하신다는 거예요. 결국 제 방 옆방에 모시고 들여다봤는데 처음엔 음식을 잘 못드시더니 5개월 지난 지금은 스스로 휠체어 운전하고 다니세요.”여생을 어디에서 보낼까여생을 어디에서 보낼까에 정답은 없다. 세계적으로 ‘살던 곳에서 나이들기(aging in place)’가 붐이지만 각자 처한 여건도, 상태도 다르다. 부모 입장에서는 돌봄은 필요하지만 자식들 삶을 망가뜨리면 안된다. 자식 입장에서는 돌봄뿐 아니라 부모님 삶의 질도 생각해야 한다.“어, 우리 아버지 춤춘다. 옆에 우리 어머니…”(임 대표)방을 비운 임 원장의 부모님을 찾아 노래교실이 한창인 거실로 가봤다. 트로트에 맞춰 율동지도가 진행되는 현장을 보자마자 임대표는 아버지가 율동을 따라하시는 것을 반겼다. 거동이 부자유스러운 어르신들의 춤이란 게 강사의 지도에 맞춰 손을 움직이는 정도지만 몸이 리듬을 타고 있는 건 분명했다.“매일 아침 일어나면 13개 마을을 돌며 인사드리고 ‘박수치기’ 같은 것을 함께 합니다. 어르신들과의 소통이 즐겁습니다. 지금이 너무 좋아요. 이곳을 만든 덕분에 저는 노후에 할 일을 얻었고 부모님은 안정되고 편히 지낼 곳을 얻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제 가족이 생의 마지막에 돌아와서 살 곳도 얻었지요.”사실 그가 요양원을 세운 데는 본인 세대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크게 작동했다. “부모님 세대는 우리가 돌보면 되는데, 우리 세대는 그런 걸 기대할 수 없죠. 흔히 효도를 하는 마지막 세대, 효도를 못 받는 첫 세대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갈 곳을 스스로 만들어야겠구나…이곳을 세운 뒤 제 형제나 친구들 모두 ‘더 나이들고 아프면 갈 곳이 있어 든든하다’고 말하고 있어요.”포부는 노인 돌봄 복지 모델을 만드는 것. 요양원에서 다양한 사례를 모아 노인요양 서비스, 프로그램, 노인요양정책 등을 개발하는 데 힘을 실을 생각이다. “어르신들은 살아온 삶에 대한 칭찬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공감하고 위로받는 분들이 많아져 어르신과 보호자들, 편치 않은 분들이 조금은 편해졌으면 좋겠습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10-14 03:00
초등 중퇴 ‘공사판 아지매’, 나이 60에 간호조무사 된 사연은[서영아의 100세 카페]“하이고, 제가 뭐라고, 이렇게 멀리까지…”그를 수소문해 인터뷰 약속을 잡을 때 이숙희(64) 씨가 되뇌었던 말은 ‘제가 뭐라고’였다. 그는 4년 전부터 딸 권기순(40)씨가 원장인 한의원에서 간호조무사 일을 하고 있다.이 씨는 지난해 경상남도가 주최한 ‘인생이모작 성공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우연히 이 수기 ‘굳세어라 숙희야’를 읽고,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한국의 고도성장 시절, 희생만 하고 살았던 우리 누이들의 해피엔딩 스토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11~12일 경남 거제의 한의원을 찾았다.“내가 무슨 일 하고 다니는지, 동네에선 아무도 몰랐어요”1959년 생인 이 씨의 학력은 오랜 세월 초등학교 4학년에서 멈춰 있었다.14세부터 20대 초반까지는 공장에서 보냈다. 23세 때 지금의 남편 권오언(68) 씨와 결혼하며 공장을 떠났지만 가난은 여전했다. 27세부터는 혼자가 된 시어머니(당시 57세)를 모셨고, 30대 후반부터 공사장 일용직 근로자, 속칭 ‘노가다’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병약한 시어머니와 아들딸 5식구가 살아가려니 남편의 외벌이로는 부족했다.현장에서는 ‘설비 아지매’로 불렸다. 아파트 공사 초기에 수도관이나 수전, 양변기 등을 설치하는 일이 주 업무였다. 동파이프 용접 정도는 식은죽 먹기로 해냈다.“설비는 골격만 만들어진 건물에 올라가 작업하는 일이 많아요.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가족에게도 정확히 제가 무슨 일 하고 다니는지 얘기 안했어요. 이웃들에겐 더욱 숨기는 데 급급했죠. 창피했으니까요.”그 많던 여공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그가 공장에서 일하던 1970년대 사진을 보며, 그 많던 ‘산업역군’ 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했다. 낮은 임금에 인생의 꿈과 가능성을 저당 잡혔던 그녀들은 아마도 공장을 벗어난 즉시 이 기억을 흑역사로 묻어버리지 않았을까. 그가 지금도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땀흘린 그 수많은 나날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려 하듯이.한의원에 도착하니 남편 권씨도 와 있었다. 아내에게 중요한 날이니 기사 노릇을 자처했다고. 무언의 응원이 느껴졌다. 저녁 7시, 진료가 끝나자 눈코뜰새없이 바빴던 권원장도 합류했다.“내는 죽어도 대학은 가보고 죽을 끼라”‘못 배웠다’는 것이 그의 평생 한이었다. 남편에 대해 “착한 사람”이라며 “못 배운 저를 받아줬다”고 몇번이나 말했다. 결혼할 때 시아버지께 ‘중졸’이라고 거짓말 했고, 학교에 보내는 서류에도 ‘중졸’이라고 써보냈다. 이 남편에게조차 끝내 ‘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말은 못했다고 한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권씨가 한마디 거든다. “못 배웠어도 사람이 똑똑하면 되는기라. 당신은 똑똑하잖아.”평생의 한을 푼 실마리는 61세 지인이 인터넷 강의로 공부해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땄다는 소식. “귀가 번쩍 뜨였죠. 학원에는 창피해서 못 가지만 인강이라면 혼자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겠구나…”밤마다 밥상 펴놓고 남편에게서 수학과외 받아딸에게 처음으로 “내가 실은 초등학교 졸업자격이 없다”고 커밍아웃했다. 그로서는 ‘하늘이 무너질 정도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한 거였는데, 딸은 “그게 뭐 대수라고, 검정고시 보면 되지”라며 집 근처 초등학교에 문의해 해결책을 가져왔다. 그로부터 1년 4개월 만에 이 씨는 초중고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했다. 초등학교는 한달 여 독학으로 공부한 뒤 2015년 3월에, 중학교는 5월에 합격증을 받았다. 고교 합격증은 이듬해 5월에 받았다.“고등학교 과정은 독학만으로는 벅차서 학원에서 공부했지요.”기초가 없는 수학이 문제였다. 구원투수는 가까이에 있었다. 공고와 폴리텍을 나온 ‘이과계’ 남편 권 씨가 밤마다 밥상을 펴놓고 수학과외를 해줬다.대망의 고교 졸업증서는 손에 넣었지만 수학능력시험을 볼 자신은 없었다. 딸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보라고 권했지만 그의 마음은 오로지 대학에만 향해 있었다. 그러다 검정고시 학원에서 ‘만학도들이 가는 2년제 주말대학’ 정보를 얻게 된다.나에게도 동창이 생겼다!“2년제건 4년제건, 그냥 대학에 한번 다녀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주말에 종일 몰아서 수업하는 학교였는데 보육복지상담과로 들어갔어요. 리포트도 써보고 MT도 가고, 학사모 쓰고 졸업사진도 찍었습니다. 저는 평생 동창이 없었잖아요. 남들이 학창시절 얘기하면 낄 수가 없었죠. 그런 제게도 대학동창에 교수님까지 생긴 거예요.”사실 ‘만학도를 위한 선택지’는 하나 더 있었다. 국립창원대에 개설된 4년제 ‘자산관리학과’가 그것. 며느리가 영어교사란 점도 고려해 아들 부부에게 상담을 청했더니 2년제 쪽을 추천해줬다고. “자산관리는 저로서는 별로 써먹을 데가 없지요. 하하.”의료봉사 현장 도우며 남 돕는 일의 기쁨 맛봐졸업반(2학년) 올라갈 때 미션 하나가 추가됐다. 딸의 권유로 간호학원에 등록한 것. 권기순 원장의 회고다.“그 즈음 가조도에 의료봉사를 갔는데 엄마가 와서 도와줬어요. 교실을 빌려 지역 어르신 30여 명을 치료해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기분 좋아하시는 거예요. 한의원에서도 일손이 부족하면 엄마가 가끔 허드렛일을 도와주셨는데 일 파악도 잘 하시고 정말 믿음직했어요. ‘간호학원 1년이면 간호조무사 자격증 딸 수 있는데, 그거 따서 우리 한의원에서 일하시면 어떠냐’고 했더니 하겠다고 하시더군요.”1년 간 주중에는 간호학원, 주말에는 대학강의를 듣는 강행군을 벌인 끝에 2019년 봄, 만 60세에 이 씨는 간호조무사 자격증과 대학졸업장을 모두 따냈다.“간호학원 상담 과장님이 ‘학원 창립 이래 60세 넘어 합격한 사람은 처음’이라며 ‘너무 고맙다’고 하셨어요. 제가 고맙죠. 안 받아주셨으면 제가 어떻게… ”사실 간호학원 입학할 때 여러 군데에서 나이가 많다고 거절당했다. 이 학원 상담과장은 훗날 “여러 사람 만나다 보니 나름 사람보는 눈이 생겼는데, 이 분은 해낼 것 같았다”고 말해줬다고 한다. 가족의 무관심에 초4에 중단된 학업1960년대에도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었다. 이 씨는 왜 졸업하지 못했을까.“2남 4녀 중 막내딸이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집이 시골에서 안동으로 이사를 갔어요. 아버지가 학교에 전학수속을 밟아줘야 하는데 시기를 놓쳤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언니오빠들은 모두 출가하거나 집을 나갔고 어느 틈에 제가 소녀가장이 돼 있더군요. 부모님 모두 예순이 넘으셨고요. 열넷 정도부터 집근처 과자공장에 다니기 시작했죠.”그뒤로는 아무도 학교 얘길 꺼내지 않았다. 19세 때에는 친척의 소개로 구미의 섬유공장에 취직했다. 이 무렵 전남 광주에서 공군 중사로 근무하던 남편 권 씨와 펜팔로 연결됐고, 권씨가 창원의 기능대(현재의 폴리텍대)에서 공부하면서 창원에 자리를 잡게 됐다.“해가 지면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어야 한다”-그런데 다른 일도 있는데 왜 ‘노가다’ 일이었나요?“제 마음 속에 정해둔 원칙이 있었어요. 해가 지면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어야 한다, 가족 저녁밥은 내가 차려야 한다는 원칙이죠. 해질녘 귀가할 수 있으면서 학력 없이도 할 수 있는 일, 선택지가 없었지요.” 이 일은 당시에도 벌이가 쏠쏠했다. 남편보다 많이 벌 때도 적지 않았다.2002년, 최악의 시련이 닥쳐왔다. 딸이 대학입시에서 떨어져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학원비기숙사비를 대야 했는데 남편은 다니던 대기업에서 ‘잘렸다’. 어머니 병세는 더욱 나빠져 대소변 수발이 필수가 됐다. 집을 사며 얻은 대출도 있었다.모든 불행이 다 내게로 왔던 시절“모든 불행이 제게로만 오는 것같았어요 . 그때 제가 43살. 지금 생각하면 참 젊었는데, 당시에는 제가 무척 어른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보낼 돈도 없었지만, 내 손으로 끝까지 모시겠다는 마음도 컸지요.”당시 그는 늘 불안했다고 한다. “새벽 6시에 어머니 점심까지 차려놓고, 요강 준비 다 해놓고 나가요. 고교생이던 아들이 할머니 요강수발을 많이 도와줬어요.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혹시라도 나 없는 사이 어머니 혼자 돌아가셨을까봐… 현관에서부터 ‘어머니, 어머니!’하고 불러서, ‘그래 에미냐’ 대답이 들리면 가슴을 쓸어내렸죠.”2003년 초 딸이 한의대에 합격한 직후 할머니가 타계했다. 걱정과 달리 시누이 두 분과 이씨까지 집에 있는 상황에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에 온 친척이 ‘자네는 부모한테 잘해서 복 받은 거’라고 했다.‘설비 아지매’에서 ‘숙희 쌤’으로요즘 이 씨는 주 3일 경남 창원의 집에서 한의원이 있는 거제까지 시외버스로 출근한다. 2015년 개원한 한의원은 지역에서 자리를 잡아 손님들이 줄을 선다. 일터에서 모녀는 서로 ‘원장선생님 ’ ‘숙희 쌤’이라고 부른다. 다른 4명의 간호조무사도 이름에 ‘쌤’을 붙여 부르기는 마찬가지. 20년 간 공사 현장에서 ‘설비 아지매’라 불리던 그가 ‘숙희 쌤’으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권 원장이 한의사를 지망한 이유도 가족생각이 컸다.“우선 우리 가족 건강을 제가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여기저기 아프고, 엄마는 40대부터 얼굴이 퉁퉁 붓고 잘 걷지도 못했어요. 수입도 생각했죠. 부모님 고생이 모두 돈 때문인데 내가 돈을 많이 번다면 우리 집에 좀 도움이 되겠다….물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보람도 크죠. 지금 엄마에게 월급 겸 용돈 겸 돈을 드릴 수 있어 너무 좋아요.”(권 원장)무리해서 일 하다 스테로이드 부작용까지권 원장은 공부하다보니 이 씨의 증상이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인한 ‘쿠싱증후군’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날 그날 일을 나가야만 벌이가 있으니 약 먹고 주사 맞아가며 무리를 했는데 스테로이드를 너무 맞았다는 것. -그렇게 고생했는데 가끔 남편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나요.“제가 모자라 그 일을 택했는데 남편 탓할 입장이 아니죠. 솔직히 제가 잘났다면 그런 데 갔겠어요. 다른 거 했겠지.” 부인이 번듯한 직업을 가진 남편 동료들을 보면 이 씨는 남편에게 미안해했다. 그때마다 권씨는 “당신이 공부 더 했으면 나 못 만나. 날 만나줬겠어”라고 말해주곤 했다.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그 어떤 일도 제가 다 이겨내야겠다는 책임감이 굳어지곤 했지요.”세대간 희생과 도움의 선순환세대 갈등이니 세대간 착취니 하는 말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이 씨 가족은 희생을 한 세대덕에 잘 된 아랫세대가 다시 윗세대를 도와서 함께 잘 되는 ‘윈윈’ 모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가족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한 엄마, 그 엄마의 마음을 아는 딸은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답을 찾는데 힘을 보탰다. 특히 평생 이씨를 가둬둔 학력 콤플렉스를 떨치고 세상에 나오도록 마음 썼다. 이씨가 수기를 통해 세상에 모든 걸 공개하겠다는 용기를 낸 것도 딸의 극약처방 덕이다.“(수기 쓸 때) 처음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못 간 얘기는 빼고 고등학교 중심으로 썼어요. 남들 보기 창피하니까요. 그런데 딸이 막 뭐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다 넣었어요.”(이 씨)엄마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었다는 얘기는 아들조차 수기를 통해 처음 알았다고 한다.“엄마의 경우 제 눈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학력은 별 의미가 없었어요. 엄마는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한번도 없어요.저희가 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엄마는 함께 졸업한 셈이예요. 저희가 읽는 교과서, 참고서, 만화책, 제 전공서적까지 모두 읽었거든요. 화장실에 앉으면 신문조각이라도 읽으세요. 늘 조그마한 거 하나에도 배울 게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저희도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지요.” (권 원장)“내 옆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죠”공모전 최우수상 상금은 50만 원. 이 상금을 분배한 얘기에서 이 씨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읽어낼 수 있었다. “고생은 누구나 하는 거고 본인 운명일 뿐이죠. 남탓할 필요 없어요. 그래서 더더욱 옆에 있는 사람이 소중해요. 우리 남편은 그 상금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 큰 힘이 돼 줬어요. 그래서 10만 원 더해서 60만 원 줬고, 사위 딸 며느리 아들에게도 10만 원씩 딱딱 줬어요. ‘너희들이 있어서 내가 완성품이 될 수 있었다, 고맙다’고.”이번엔 권씨에게 60만 원 받아서 뭐하셨냐고 하니 “딱 반 갈랐지”라며 킥킥 웃는다. 이 부부는 뭐든 생기면 즉시 절반으로 나눠 갖는다는 것. 68세, 64세인 부부는 모두 현역.이 씨는 한의원 일을 힘닿는데까지 계속할 생각이다. 남편 권 씨도 전기기사 자격으로 매일 회사에 출근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먼길을 돌긴 했지만 건강한 가정을 일구고 자녀 잘 키우고 60세 넘어 자신의 이름으로 일하기 시작한 이씨. 그의 원동력은 본인의 간절함, 그리고 자신이 안간힘 다해 지켜낸 가족의 뜨거운 응원이었다. ‘굳세어라. 숙희야!’ 거제=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09-23 03:00
“노후 전원생활에도 다 때가 있더군요”…60~75세가 즐길 수 있는 황금기[서영아의 100세 카페]3년째 춘천시 소속 문화관광해설사로 활약하는 박의서(72) 씨는 당초 춘천과 연고가 없는 외지인이었다. 2018년 안양대 관광경영학과 교수에서 정년퇴직하면서 곧장 춘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18년간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전에는 한국관광공사에서 22년간 근무했으니 말 그대로 여행과 관광분야 전문가다. 지금은 시내 근교 주택에서 텃밭을 일구고 산다.도시인들의 로망이기도 한 귀촌과 전원살이, 그 생생한 체험담을 들어보기 위해 지난달 31일 춘천을 찾았다.“춘천은 우리 가족의 블랙홀이었다”요즘 박 씨 가족은 두 딸 내외와 손주 4명까지 모두 10명이 춘천에서 산다. 세 집이 자동차로 5~10분 거리에 있다. 일가의 춘천 입성 계기는 2011년경 둘째 사위의 군복무였다. 입대 전 결혼해 아들을 둔 둘째 사위의 근무지가 춘천이었다. 부대 근처에서 살던 딸 내외는 제대 뒤에도 그냥 춘천에 눌러살기로 했다.-명문대를 나온 젊은 부부에게 적당한 일자리가 있었나요.“둘이 똑같이 미니멀리스트예요. 딱 먹고 살 만큼만 일하면서 농가주택을 빌려 개조해서 재미나게 살더군요. 처음에는 걱정도 하고 잔소리도 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현명했다’고 하게 되더군요.”뒤늦게 결혼한 큰딸도 몇 번 와보고는 춘천이 좋다며 다 정리하고 내려와 버렸다. 지금은 큰 사위만 서울로 출근하는 생활을 한다. 전원생활과 귀촌은 박의서 씨의 로망이기도 했다. 정년과 동시에 서울 생활을 과감히 정리하고 딸들이 사는 곳, 춘천으로 옮겼다. “춘천이 우리 일가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지요. 하하.” “은퇴하고 귀촌해도 소일거리는 있어야 해요”귀촌하면 그저 은퇴생활에 충실할 생각이었다. 춘천에 지연과 학연이 전혀 없다 보니 공부도 하고 사람도 사귈 겸 평생학습관이니 도서관 문화강좌 등을 열심히 다녔는데, 점차 지루함을 느끼게 됐다. 뭔가 소일거리가 필요했다. 하다못해 유치원 버스 운전이나 주유소 알바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고령 탓에 여의찮았다. 그러다 우연히 시청에서 문화관광해설사 모집이 있어 응모했다.“은퇴하고 귀촌했어도 소일거리는 있어야 하겠더군요. 그때만 해도 ‘대학교수까지 하고 해설사 하려고 하냐’는 반응들이 있었어요. 영어특기자로 합격했지요.”면접시험을 통과하고 집합교육 100시간, 현장 교육 100시간을 받은 뒤에야 자격증이 나왔다. 현재 전국에서 3000여 명이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중인데, 춘천시에는 20명이 있다. 소양강댐, 신숭겸 장군 묘역, 청평사 등 춘천의 주요 관광지 8개 지구에서 돌아가며 일한다. 한 사람이 한 달에 10~15일 정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고. 법적으로는 자원봉사지만 교통비 등의 명목으로 시간당 1만 원이 지급된다. 그의 경우 월 80~100만 원 정도 받는다.“돈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이게 쏠쏠하더군요. 손주들 용돈도 주고 밥도 사고, 아주 즐겁게 하고 있어요.” 춘천의 매력, ‘다 갖춰져 있는데 호젓하다’그가 말하는 춘천의 장점은 끝이 없다. 산수가 좋고 교통이 편리한데 쾌적하고 없는 게 없이 다 갖춰져 있다는 것. 예컨대 서울까지는 ITX로 1시간 남짓, 전철로도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심지어 전철은 경로우대가 적용돼 무료다).요즘 지방에서 성행하는 파크 골프를 즐기기에도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파크 골프는 클럽 하나로 치는 골프인데 골프보다 규모는 작지만 재미는 똑같고 비용이 들지 않는다. 세 바퀴 돌면 1만보 정도 걷게 되니 쏠쏠하게 운동도 된다. 춘천에는 지금 파크골프장이 두 군데 있는데, 3군데 더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월회비 몇만 원이면 매일 나갈 수 있어요. 함께 파크 골프 하는 의사들 말이, 요즘 노인들 건강관리의 수훈갑이 파크 골프라고 합니다.”그의 경우 거의 매일 수영을 하는데 이용료 1500원에 국제규격 수영장이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아무 때나 가도 이용할 수 있다. 서울에서 레인별로 시간표 보며 예약해야 했던 것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하다. 이뿐인가. 노년의 전원생활에는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병원에서 멀다’는 지적도 통쾌하게 반박할 수 있다.“집에서 15분 거리에 대학병원이 두 군데나 있어요. 제가 서울에서 빅5병원 바로 곁에 살았는데 응급실에 빨리 가면 뭐합니까. 기다려야 하는데. 여긴 기다릴 필요가 없죠. 노인들 살기에는 천국이에요.”평생 ‘도시여자’였던 부인 신재희(67) 씨도 대만족이라고 한다.“말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굉장히 즐기고 있어요. 요즘은 파크 골프에 푹 빠져서 동호회 사람들과 매일같이 나가요. 여자들은 나이 들어도 새 친구를 잘 사귀더라구요. 남자들은 있던 친구도 정리하는 마당인데… 하하. 거기에 딸 둘 가까이에 살죠, 텃밭 일에도 재미를 붙여서…” “전원생활 제대로 즐기려면 60대 초반에는 옮겨야”100평 정도 짓던 텃밭 농사는 최근 30평 규모로 줄였다. 주로 신 씨가 고추 호박 가지 상추 등 10가지가 넘는 푸성귀들을 키운다.“(아내가) 아침에 눈 뜨면 텃밭부터 나가는데, 농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요. 그걸 체감하곤 해요.”“이렇게 이쁜 애들이 아침마다 절 부르는데 어떻게 안 나와 보나요”(신 씨).박 씨는 농사일은 한해가 다르게 힘들어져 몇 년 더 지나면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그때는 어떻게 하실 계획인가요.“저는 요양원에는 절대 가기 싫어요. 농사 못 짓더라도 여기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제가 경험해보니 전원생활을 꿈꾸는 분들은 적어도 60대 초반에는 옮겨야 15년 정도 전원생활을 누릴 수 있어요. 더 기력 있을 때,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시라고 권하고 싶어요.”서울에 준공을 앞둔 재건축 아파트를 가지고 있지만, 돌아가지 않게 될 것 같다. “텃세? 없진 않지만 어디나 사람 사는 곳”100세 카페에서 지방소멸이니 귀농 귀촌에 대한 기사를 쓰면 반드시 지방의 텃세 문제를 호소하는 댓글이 달린다. 이상적인 메시지는 귀농귀촌을 장려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부조리한 규제니 탁상행정, 지역사회의 따돌림 등으로 발길을 되돌리는 도시민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교수님 경우 그런 문제는 없습니까.“사람 사는 세상이니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지요. 적당히 잘 지내는 경우는 괜찮아요. 그런데 이해관계가 얽히거나 외지인이 조금 튀는 행동을 하는 경우는 역풍을 만나요. 저는 관광 쪽을 오래 했으니 아무래도 지역 관광정책에 대해 의견이 있거든요. 지역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는데, 반응이 아주 차갑더군요. ‘춘천에 대해 당신이 뭘 안다고’ 이런 반응들이죠. 그래서 그냥 조용히 지내기로 했습니다. 제 눈에는 춘천이 가진 잠재력이 무척 큰데, 콘텐츠를 잘 만들어가면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데, 안타깝지요.”이웃과의 관계도 어려움에 빠졌다. 이웃집이 도로부지를 남몰래 대지로 편입한 것을 뒤늦게 알고 항의했지만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이웃들과 사이가 불편해졌다.“절차상 하자가 심각했는데 통하지 않더라구요. 지연 학연으로 얽힌 지역분들끼리 ‘좋은 게 좋은’ 식으로 하는 것은 사회에 좋지 않은 일입니다. 아내와는 ‘이럴 바에야 이사를 가 버리자’는 말도 했는데, 지금은 관계가 나쁘면 나쁜 대로, 신경 쓰지 말고 살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너무 좋으니까요. 불편하긴 하지요.”주경야독으로 석박사 취득조치원 인근 농가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는 장학금으로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언감생심. 당시 박정희 정권이 육성하던 국립 대전공전에 진학했다. 고교 3년과 전문대 2년을 합친 5년제 전문학교였다. 건교부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군에 입대했다.“운 좋게도 미 8군에 배속돼 미군병원에서 일하게 됐어요. 의사들을 상대하다 보니 고급 영어를 배울 수 있었죠. 제가 평생 써먹은 영어는 여기서 배운 거였습니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운도 좋았어요”제대 후 관광공사에 입사했을 때는 경기대 3학년에 편입한 상태. 석사는 미국 뉴욕지사에서 일하면서 야간대학에서 받았고 박사는 다시 경기대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땄다.-늘 주경야독이었네요.“제가 박사까지 받아 교수 생활도 했지만 솔직히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어요. 와중에 운은 좋은 편이었어요. 박사학위를 따자마자 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요.”-운이 좋았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데, 부모 잘 만나 아무 걱정 없이 공부하고 유학 하러 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요.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운도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이 나이 되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그는 3년 전쯤 자신의 아호를 허당(虛堂)이라 지었다. 천자문의 ‘허당습청(虛堂習聽 빈방에서 소리를 내면 울려서 다 들린다는 뜻)’에서 따왔는데, ‘싹 비우고 새롭게 채워 넣겠다’는 각오를 담았다. 춘천으로 옮긴 직후 다니던 서예 교실에서 이 사자성어를 만났다. 그즈음부터 평생 잘못한 것에 대해 ‘거꾸로 쓰는 자서전’도 조금씩 쓰고 있다고 한다. 현역 시절에는 ‘기록 따라 떠나는 한국고전기행(2018) ’, ‘극한을 극복한 글로벌 고전 기행’ 등 인문서와 강단에서 아직도 사용되는 관광경영 관련 교재 등 10여 권을 냈다.늘 부족한 것을 메우려 노력하는 삶을 이어와서일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그에게서 어딘가 헛헛한 느낌도 전해져온다.“제가 평생 웃는 얼굴로 살았는데, 나이 드니 이상하게 웃음기가 줄어요. 우아하게 늙는다는 게 물리적 심리적으로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분명한 건 살다가 머무는 곳이 고향이라면 이제 이곳이 제 고향이란 겁니다.”춘천=서영아기자 sya@donga.com}2023-09-09 03:00
“퇴직자의 시급, 어딜 가도 1만 원이더군요”…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서영아의 100세 카페]대기업 임원 인사는 대체로 금요일 오후에 있다. ‘임원=임시직원’이란 우스개가 있을 정도로 파리 목숨 신세인 임원들. 이들에게 퇴직 통보를 할 때는 더욱 금요일이 유용하다. 주말 새 그들의 흔적을 지워내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 정경아 전 신세계그룹 상무(54)가 30년 직장생활을 끝낸 2019년 10월 그날도 금요일 오후였다.그날, 한 회의실에 불러모아진 10여 명의 임원들을 둘러보며 대표가 무거운 입을 뗐다. “여기 계신 분들은 올해가 마지막인 분들입니다. …그동안 애쓰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명 한 명 악수를 청했다.“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던가요. 30년간 아등바등 일하며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딱 3초 걸리더군요.”● 만 50세,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다유튜브 알고리즘 덕에 정경아 전 상무를 알게 됐다. 앳돼 보이는 여성이 퇴직 체험을 얘기하길래 아나운서인 줄 알았는데, 듣다 보니 본인 얘기였다. 그가 최근 낸 책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RHK)도 언급됐다. 퇴직 4년차로 접어들었다는 정 씨를 17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본사에서 만났다.-금요일 퇴직 통보를 받고도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려 했다면서요.“사실 아무도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명시적으로 얘기해 주지 않았어요. 분위기로 제가 알아들었어야 했는데, 꿈을 꾼 것 같았거든요. ‘이제 출근할 필요 없잖아’라는 남편의 말에 들었던 핸드백을 놓고 주저앉았지요.”책은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그가 써온 퇴직 관련 글들이 기반이 됐다. 퇴직의 당혹감과 이후 겪은 심경 변화, 우여곡절을 거치며 사회에서 홀로서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들이 담겼다. 너무 솔직한 묘사에 “명색이 대기업 임원이었는데 이미지 생각은 안 하느냐”는 반응도 꽤 있었다고 한다.“그런 말 듣고 더 열심히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체면 따지며 쉬쉬하다 보니 퇴직자들의 삶은 세상에 없는 것처럼 여겨지잖아요. 퇴직의 실상이 더 많이 알려져야 해요.”-50대 초반쯤 대기업 임원이 됐다가 2년 만에 나온(잘린) 분들을 여럿 만나봤는데 다들 충격을 삭이지 못해 힘들어하시더군요.“멘털이 털린다고 할까. 평생을 바쳐온 회사에 버려진 느낌? 배신감이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짝사랑하다가 잘린 느낌 같은 거죠. 회사는 무심한데. 그게 회사의 속성이에요.”2017년 말 48세에 상무보로 승진했을 때만 해도 그해 신세계그룹 수십명 승진인사에서 유일한 여성임원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임원 생활은 만 2년으로 끝났다. 임원 1년차의 실적부진이 치명적이었는데, 때마침 환경 이슈가 터져 그가 맡은 상품 분야가 직격탄을 맞았다. 2년차는 소위 ‘퇴직 전 마지막 관문’이라 불리던 자리에 발령받았다. 회사에 올인하다시피 살아온 그에게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찾아왔다. ● “최대 복수는 퇴직 전보다 더 잘사는 것” 직장생활을 오래 한 사람 대부분이 정 씨처럼 ‘현타’가 오는 순간을 만난다. 회사와 자신의 관계가 어느덧 변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회사는 좋은 신입사원을 뽑고 이들을 잘 키워 성과를 내도록 노력하지만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엔 이들을 부담스러워한다. 잘나가던 직장인이 순식간에 퇴물 취급받게 되는 때다.-덕분에 퇴직준비할 시간을 얻은 셈이네요. 그런데 ‘퇴직의 관문’에서는 어떤 일을 하나요? “대외 영업인데, 회사의 신규 수입원을 찾는 일이에요. 돈 되는 건 뭐든지 찾아서 하는 거죠. 그 1년 간은 사람들을 거의 안 만났어요. 사실 만나자는 사람도 없었지요. 명색은 임원이지만 사내 모든 관계에서 배제되는 느낌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주말이나 밤 시간을 풀로 활용해 사이버 대학 강의도 듣고 민간 자격증도 5개쯤 땄습니다. 그 대신 회사 일은 더 열심히 했어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고 혹시나 여기서 성과를 내면 분위기가 바뀌지 않을까라는 미련도 없지 않았지요.”-그동안 쌓은 공이 있는데, 1년 삐끗했다고 내치는 건 회사가 너무한 것 아닌가요. “시대적 상황도 제 몫이니까, 회사에 대한 서운함은 전혀 없습니다. 부단히 새로워져야 하는 게 회사의 생리죠. 온라인에 밀리고 있는 유통 분야는 특히 그렇습니다.” 공기처럼 자신을 감싸주던 회사를 떠난다는 것,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구멍이 뻥뻥 뚫리는 경험이었다. 은행에서 마이너스 통장 대출 연장이 안 된다는 통보가 왔고 건강검진, 보험 등 생활 전반에 문제가 생겼다.“가볍게 떠나는 주말여행도 사전조사를 하고 계획을 세우는데, 퇴직 후 수 십 년 남은 인생 여정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 회사 안은 정글, 회사 밖은 전쟁터퇴직 뒤 많은 일이 있었다. 2021년 첫 책 ‘독한 언니의 직장생활백서’를 냈고 지난 6월 두번째 책인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를 펴냈다. 놀라운 것은 퇴직한 뒤에 첫 책을 썼지만 책 내용에 퇴직 얘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본인은 직장생활 가이드 개념이라 그렇다고 설명하지만, 그만큼 퇴직의 충격이 컸기 때문은 아닐까. 5개월 정도 서울 강남의 면접학원에 상담실장으로 취직해 비품관리, 화장실 청소를 도맡기도 했다. 대가는 시급 1만 원에 점심으로는 김밥 한줄이 제공됐다. -상담실장이 왜 청소하고 쓰레기 버리는 일까지 하지요? “회사 나오면 어디나 그래요.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할 뿐, 다른 여지는 없어요. 이게 세상이에요. 급여도 무조건 시간당 1만 원이에요. 어딜 가도 1만 원. 희한한 일이죠. 퇴직자들은 다 알아요. 회사 나갔을 때 나의 가치는 시간당 1만 원이라는 것을. 직장 문을 딱 나오면 정말 무엇이든지 상상 그 이상이더라구요.”그 와중에 힘든 사람을 등치는 자들은 꼭 있다.어느날 헤드헌팅 업체에서 00기업 00자리에 유력 후보로 올랐다며 연락하더니 이력서를 넘겨주자 소식을 끊었다. 클라이언트에게 섭외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됐다는 걸 깨달았다. 한때 의류유통업 관련 스타트업에 오픈 멤버로 참여해 땀을 흘렸지만 경영이 어려워지자 순식간에 해고되기도 했다.“사회에서는 이력이 있는 직장인을 일회용 소모품으로 이용하려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면 유통업계에 있던 사람은 납품처를 찾는 분들이 판로를 뚫는 역할을 기대하며 접근하죠. 대부분 단물만 빨리고 버려집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재취업한 퇴직자도 1,2년이면 회사를 떠나야 하죠.”● “회사 없이도 내가 성장할 수 있구나”이런 그에게 보람을 안겨준 것은 구청에서 주관하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취약계층 청소년에게 1대 1로 진로지도를 해주는 멘토링 사업이었는데 처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던 중학생 민준이가 점차 마음을 열며 성장하는 모습이 큰 위로가 됐다. 멘토링 기간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민준에게서 문자 하나가 왔다. ‘선생님 저예요. 감사합니다!’ 달력을 보니 스승의 날. 눈물이 핑 돌았다.“그 전까지 저를 성장시키는 동력은 회사가 유일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욱 회사에 매달렸고요. 이런 생각이 민준이를 통해 깨졌어요.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이 제게 뿌듯함과 위로를 줬고 저 스스로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고 느끼게 됐어요.”● 우리 모두에게 세상의 중심은 자신-드디어 회사없는 생활에 적응하는 거군요.“퇴직후 제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 회사가 아니라 내 인생이 삶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점이에요. 지금도 후배나 동료들, 회사에 미친 듯이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어요. 회사 일은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하지만 회사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회사를 나온 뒤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세상의 중심은 바로 당신이란 걸 잊지 말라고.”그래서 그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직장 생활과 퇴직 관련 전문가로서 관계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글쓰기, 강의, 콘텐츠 만들기 등 방식은 여러 가지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책을 내고 관련 강의를 준비하는 데 이어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을 2개 개설했다. 이 중 퇴직 경험자들의 직접 인터뷰를 담은 채널 ‘퇴직학교’는 개설 한 달여 만에 구독자가 4000명을 넘어섰다. ● ‘잘려서’, ‘잘릴 예정이라서’… 공장서 마주치는 대기업 임원들그는 요즘 유튜브 촬영을 위해 많은 퇴직자를 만나고 있다. -회사 밖에서 만난 퇴직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던가요.“임원을 했던 분이건 아닌 분이건 제대로 자리잡은 분을 만나기 쉽지 않아요. 모두 힘들죠. 쿠팡같은 배달일, 공사판, 단순 아르바이트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그분들이 오히려 깨어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 인터뷰한 대기업 임원 출신 퇴직자 얘기가 재미있었어요. 잘리자마자 어느 기업 공장에 일하러 갔는데 거기서 다른 기업의 현직 임원을 마주쳤대요. ‘왜 왔느냐’고 물으니 ‘곧 잘릴 예정이라 어떤 직종이 있는지 연습삼아 다니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퇴직자건 재직자건 이런 현실 얘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각자 뿔뿔이 흩어져 아무 정보도 없이 퇴직해 시간만 흘려보내며 회한을 쌓는 것보다 말이죠.”유튜브 채널을 위해 맨처음 인터뷰했던 중견기업 전 대표 얘기는 여러모로 가슴아팠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꽤 알려진 백화점체인을 만들고 10년간 사장을 맡았던 그는 파견근로법 위반으로 회사가 곤경에 처하자 그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하지만 이 사건탓에 3년간 송사를 거쳐 집행유예 2년형을 받으면서 도합 5년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는데 이런 현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그의 인터뷰 중에는 이런 씁쓸한 에피소드도 나온다.“현역시절 유난히 잘 따르던 후배가 부친상을 당했다. 도리라고 생각해 부산까지 아내와 함께 내려갔는데, 문상을 한 뒤 1시간을 앉아있어도 후배가 나와보지를 않더라. 사장 시절 현장 순시가면 ‘그만 들어가서 볼 일 보라’고 아무리 권해도 끝까지 남아 수행하던 친구였는데…. 그대로 장례식장을 나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아내에게 ‘이제 조문같은 건 가지 말아야겠다’고 말했다.”정 씨는 ‘이런 얘기가 계속 알려져야 퇴직자들은 조금이라도 위로받고 재직자들은 정신차릴 수 있다’고 말한다.● 퇴직자 세계에도 롤 모델이 필요하다 -요즘 우리 사회가 시니어세대나 나이에 대해 굉장히 박한 대우를 하지요.“그래도 늘어나는 머릿수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요즘 시니어들은 신인류라고 생각해요. 이들이 ‘같이 살자, 내 삶도 가치가 있다. 너희도 늙는다’ 정도는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죠.”그는 3년 후에 ‘대기업 임원의 퇴직 일기 3년 후’를 쓸 예정이다. 지금까지 직장물을 빼는 데 3년 걸렸고 다시 3년 뒤엔 어디쯤 가 있을지, 그걸 확인해야 이 퇴직 장정이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될 거라는 생각이다.“퇴직자 세계에도 롤모델이 필요합니다. 제 경우도 그랬지만 퇴직자들에게 가장 절망적인 게 보고 따라갈 이정표가 없다는 거예요. 퇴직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많은 퇴직자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을 텐데, 그게 참 아쉽더라구요. 그래서 길은 없지만, 새로운 길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그냥 뚜벅뚜벅 가보려 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08-26 03:00
[온라인 라운지]청년학생이 주인공, 제1회 한일미래학회 개최(사)한일미래포럼(대표·이혁)은 25일 동국대학교에서 제 1회 한일미래학회를 열었다. 학회는 일본학 및 한국학에 관심을 가진 후속세대 양성과 우호 교류를 위해 청년학생들을 주체로 구성됐다.이날 행사는 6명의 청년 발표자가 발제를 하고 양국의 교수 전문가가 코멘트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첫 세션에서는 동국대 일본학과 이영식 학생이 ‘한일 이민자 노동정책 비교분석 및 시사점‘에 대해 발표했고 이규용 한국노동연구원 고용정책연구본부장이 토론을 진행했다. 일본 고베대학원 국제협력연구과 박사과정 다카오카 미나(高岡聖奈) 학생은 ‘일본 서브컬처로 보는 청년 문화의 변천’을 발표했고 간토가쿠인대학교 경영학부 이와사키 다쓰야(岩崎達也) 교수가 코멘트했다. 이어 동국대 일본학과 이현승 강사가 ‘일본 문화콘텐츠 원천소스로써의 전통문화와 당면과제’를 발표하고 상명대 SW융합학부 안노 마사히데(阿武正英) 교수가 토론했다.제 2세션에서는 한양대 대학원 일본언어문화학과 석사과정 김영채 학생이 ‘일본 서브컬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오타쿠’를 주제로 발표하고 김영덕 전(前) 한국콘텐츠진흥원 부원장이 토론했다. 숙명여대 일본학과 박민설 학생은 ‘영화 <한 남자>와 <드라이브 마이 카>가 담고 있는 일본 사회’에 대해 발표했으며 논픽션 기자인 간노 도모코(菅野朋子)가 토론했다. 서울시립대 융합전공학부 박모세 학생은 “본격적인 AI 대전환 시대를 준비하는 한일 양국의 전략과 협력가능성, 세계경쟁력”에 대해 발표했고 시가현립대 인간문화학부 생활디자인학과 야마다 아유미(山田歩)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사)한일미래포럼의 이혁 대표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기반은 한일 양국 청년의 자유로운 대화와 교류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며 “앞으로도 한일미래학회가 양국 후속세대 양성과 교류 활성화를 도모하는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08-25 15:49
“일흔 넘어 운동하니 키도 크더군요”…81세 ‘몸짱 할아버지’ 이순국 전 신호그룹 회장[서영아의 100세 카페]이순국 전 신호그룹 회장(81)의 인생 후반전은 68세에 시작됐다. 일본 여행 중 협심증으로 쓰러진 게 계기였다. 평생 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그가 마침내 ‘운동할 결심’을 했다. 이후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신체 개조를 단행했다. 이론공부에도 뛰어들어 74세에 서울과학기술대에서 체육학 석사, 76세에 상명대에서 체육학(운동생리학) 박사, 81세에는 순천향대 의대에서 의학박사(예방의학)를 취득했다.건강서 ‘나는 일흔에 운동을 시작했다’를 펴내고 건강전도사로 활약하기 시작한 건 2018년부터. 이듬해에는 전작의 실천편인 ‘몸짱할아버지의 청춘운동법’을 펴냈다. 최근 낸 세 번째 책 ‘다시 시작하는 인생수업(동양북스)’은 인생후반전을 사는 법을 논하고 있다. 요즘도 매일 2~3시간씩 체계적인 운동을 한다는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광화문 본사에서 만났다.혼신 다해 일궈낸 재계 25위 그룹이 물거품으로맨손으로 시작해 한때 재계 25위까지 사업을 키워냈지만 아시아 금융위기로 모든 것을 잃었다.1997년 태국 바트화의 폭락으로 촉발된 아시아 금융위기는 한국의 IMF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1998년부터 기업의 줄도산과 대량 해고 사태가 확산됐다. 1997년 신호그룹은 최정상에 있었다. 제지업에서 철강, 전자, 화학, 금융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해 총매출 1조 원 규모에 35개 계열사를 거느렸다.세상은 그를 ‘부실기업 조련사’, ‘무서운 작은 거인’, ‘마이다스의 손’ 등으로 불렀다. 하지만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30여 년 젊음을 바쳤던 기업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한창 때 ‘비즈니스맨의 신화’라는 말씀을 들었다고요.“망해가는 기업을 인수해 살려내는 것으로 유명했죠. 한 번 그렇게 성공하고 나니 은행에서 부도위기에 빠진 기업을 맡아달라고 자꾸 제안이 왔어요. 그러다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지요. 당시 태국에 신문지 공장이 있었고 국내에도 설비투자를 많이 했어요. 외화차입이 많았는데 환차손이 크게 났지요.”강을 건넜으면 타고 온 뗏목을 버려라우리는 각자의 시대를 각자의 인생사이클에 따라 겪게 된다. 그는 2006년 신호제지 매각을 끝으로 모든 사업을 접었다.-큰 재앙이 닥치면 때마침 가장 많은 것을 일군 세대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지요.“전 그때 50대 중반이니 젊은 축이었죠. 30대 그룹 가운데 절반은 날아갔어요. 진로 한보 해태 삼미 쌍용 동아건설 그 다음에…”-옛날 얘기가 나오면 조금 억울하거나 아쉽지 않으세요.“어쩌면 그건 숙명이었어요. 모두가 중소기업만 했다면 우리나라가 매년 10%대 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전체 파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대우처럼 해외로 뻗어나가는 회사가 필요했던 거죠. 부채도 그래요. 한국은 1960년대부터 ‘부채도 자산’이라며 외자를 도입해 경제를 팽창시켜왔죠.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이 커졌는데, 어느 순간 구조조정이 필요해진 거죠. ‘아…, 우리는 하나의 주춧돌로 쓰였구나’하고 받아들여야죠. 그걸 억울하다고 해야 됩니까? 전 자부심을 갖는 쪽이예요. 내가 30년 간 대한민국 경제부흥의 주춧돌로 사명을 다하고 물러났다고 보는 거죠.”-지금 와서는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그 과정에서는 괴로우셨을 듯해요. “물론이죠, 인간인데…. 그래도 담담하게 정리했다는 얘기죠. 제 신조가 강을 건넜으면 타고 온 뗏목은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과거에 연연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지요.” 68세에 닥친 협심증…신체개조 돌입협심증으로 쓰러진 것은 스스로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뒤 친형인 이순목 전 우방그룹 회장이 74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기업하는 사람은 본인 건강관리는 뒷전일 수밖에 없어요. 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것도 사업할 때 스트레스에 찌든 생활습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사업할 때 폭탄주 10잔은 기본이던 술을 끊고, 생활습관 자체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맥박 재는 기계니 러닝 머신도 사고, 제대로 운동을 시작한 거죠.”무작정 열심히 운동하려다 보니 의문이 생겼다. 고령자에게 적절한 운동이란 무엇일까. 운동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2014년 서울과학기술대 스포츠과학과 대학원에 입학, ‘고강도 저항성 운동이 남성 고령자의 신체 구성 및 활동 체력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을 위해 필리핀에 가서 사람들을 모아 3개월간 운동시킨 뒤 골밀도 등 신체변화 데이터를 비교했다. 이어 ‘저항성 운동 강도가 남성고령자의 신체 구성, 체력 및 산화 스트레스에 미치는 영향(2018)’을 주제로 상명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는 광주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3개월간 운동을 하게 한 뒤 혈액검사 등을 통해 체내 활성산소의 변화양상을 연구했다. 여기에 3년간 운동을 하며 자신이 겪은 체중과 골밀도, 근육량 변화 등도 자료가 됐다.“뭔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처음 대학원에 지원했을 당시 나이가 72세. 교수들 사이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제일 문제가 ‘통계’였다.“논문 쓰려면 엑셀, SPSS같은 통계를 잘 다뤄야 하는데 전 컴퓨터를 만져본 적이 없었어요. 평생 비서가 다 해줬으니까. 타자를 쳐본 일도, 계산기를 두드려본 일도 없었지요. 당연히 교수들이 반대하죠. 제가 책임지고 배우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엑셀 책과 컴퓨터를 사서 더듬더듬 익혀 갔다. 지금은 노트북을 늘 끼고 다니며 능수능란하게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뭔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해보인 셈이다.“처음에는 컴퓨터 자판을 놓고 ‘ㄱ(기역)’이 어디 붙어 있나부터 찾았어요. 인터넷으로 입학원서 하나 쓰며 몇 번을 문의하고 난리를 쳤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겼지요.”-2월에는 의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는데.“운동의 효능을 의학적으로 보면 어떨지 궁금해졌습니다. 꾸준히 운동하며 건강하게 사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답을 찾고 싶었어요.”일흔에 운동 시작하자 키 크고 근육량↑체지방↓일반적으로 노인은 키가 줄어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운동을 시작한 뒤 오히려 키가 커졌다. 그가 운동을 시작한 시점인 70세 11월과 80세 11월의 데이터를 비교하면 신장은 156.5cm에서 157.3cm로 0.8cm 커졌다. 체중은 52kg에서 53.4kg으로, 골격근량은 17.8kg에서 26.5kg으로 늘고 체지방은 20.58%에서 11.4%로 줄었다.“운동으로 노인의 몸도 바람직하게 변하는 거죠. 지금 제 심장의 산소섭취도는 30대 수준입니다.”-이제 협심증 걱정은 내려놓아도 되는지요.“현재로서는 그렇지요. 혈액의 점성을 묽게 하기 위해 평소 물도 열심히 마십니다.”그는 격일로 아침에 1시간 정도 조깅을 하고 매일 오후 헬스클럽에서 2시간씩 근력운동을 한다. 그에 따르면 근육은 72시간까지 운동을 기억한다. 그래서 72시간이 넘기 전에 다시 해당 근육을 운동시켜줘야 한다. 그는 몸의 근육부위를 크게 6개로 나눠 하루 두 군데씩 2시간, 3일간 돌아가며 운동해주는 방식으로 몸 전체의 근력운동을 이어간다. 이렇게 운동을 시작한 이래 십여 년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고 코로나 바이러스에도 감염되지 않았단다.“‘어차피 죽을 건데…’는 자신에 대한 모독”-건강전도사 활동에 열심인 이유는?“제가 운동에 열심인 것은 내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서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한다고 알리고 싶어요. 내가 몸져눕거나 병원을 내집처럼 드나들면 가족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게 되지요.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가급적 오래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추는 것은 자신은 물론, 가족과 타인을 배려하는 일이예요.”-‘누군들 아프고 싶어 아프냐’는 반론이 있을 듯합니다.“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니 미리미리 운동하고 건강해지자는 얘깁니다. ‘늙으면 어차피 죽을 건데, 뭘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 그냥 술이나 마시자.’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이런 말은 자신에 대한 모독이고 가족과 타인에게 무책임한 말이예요. 이런 친구들일수록 어딘가 몸이 안 좋더군요.”“혼자 하는 최후의 여행, 제대로 준비해야”이번 신간 표지에는 홀로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혼자 노저어 서해로 가는 사람을 그린 겁니다. 제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저는 65~70세에 전반전을 끝낸 뒤 혼자 서해바다를 향해 마지막 항해를 하는 게 후반전이라고 봐요. 서해로 간다는 건 죽으러 가는 건데, 그걸 자기 힘으로 가자는 거죠. 혼자 노를 저어 바다로 가라. 노인이 되면 그런 주체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건강이 더욱 중요해집니다.”-모든 고령자가 회장님처럼 운동해야 할까요.“그건 어렵겠죠. 그래도 하루 최소한 30분 걷고 30분 근육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게 운동일지를 적는 겁니다. 어려우면 달력에 운동한 날을 체크만 해놓아도 1년간 내가 며칠 운동했는지 알 수 있죠. 우리가 전반부를 잘 살기 위해 하루 8~9시간씩 학교에 가잖아요. 후반부에 그거 하루 한 시간도 못 하느냐고요.”-앞으로의 계획은.“모 대학 노년학 박사과정에 지원했는데 떨어졌어요. 가을에 다른 곳에 시험 쳐야죠. 혹 노년학이 어려우면 심리학을 공부할까 생각 중입니다. 80대에는 노년학이나 심리학, 90대에는 종교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너무 열심히 사시는 것 아니냐고 물으려다 퍼뜩 드는 생각. 이 세대는, 혹은 이 분에게는 이게 최선이 아닐까. 산업화 세대는 맨손으로 시작해 자신을 갈아넣어 한국의 굵직한 성장을 이뤄낸, 그 성취의 기억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버린 세대다. 어쩌면 ‘노력’은 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08-12 03:00
“혼자만 행복하면 무슨 재미…” 전직 교장선생님이 포크댄스 전도사가 된 까닭은[서영아의 100세 카페]지난달 30일 오전 10시 수원시 권선구 서호초등학교내 댄스실. 한때 교실이었지만 지금은주민문화교실로 변신한 소박한 공간이다. 60~70대 남녀 12명이 이영관(67) 강사의 구령에 맞춰 연습을 시작한다. 남성은 모자, 여성은 스커트로 최소한의 의상을 갖췄지만, 우리가 아는 댄서의 풍모와는 거리가 있다. 지난해 10월 자발적으로 만든 제4기 ‘포크댄스를 즐기는 사람들(포즐사)’ 모임이다.춤추는 팔순노인 얼굴에서 소년이 나타났다…“하나둘 셋, 하나둘 셋, 쓰리스탭 터언~, 쓰리스탭 턴! 돌고 손뼉 칠 때 시선은 어딜 봐라? 파트너를 봐라. 턴할 때 다리가 뻗정다리면 안 되죠. 자세를 낮추라고 했어요. 다시 한번!”회원들의 움직임이 성에 차지 않을 때는 목소리가 커지는 게 영락없는 ‘호랑이 선생님’이다. 최근 오는 10월 수원화성문화제 출전이 결정되면서 그의 신경이 조금 곤두서 있다. 출전작은 러시아의 대표적 민속춤 코로브시카(행상인의 춤). 동명의 민요 리듬에 맞춰 남녀 한 쌍으로 춤추는 포크댄스다. 추위를 이겨내려는 듯 뛰고 열을 내는 동작이 많다는 게 특징이다. 틀리는 곳을 고치고 반복하는 연습 중에 그가 정색하고 말한다. “지금은 연습 중이니 제가 발이 틀렸다고 막 잔소리하죠. 하지만 실제 대회에 나가면 수원 시민들은 우리 발이 틀리나 맞나 유심히 안 봐요. 그럼 뭘 보느냐? 우리 표정을 보죠. 저 사람이 행복하게 춤추나? 지금 포크댄스를 즐기고 있는가를 봅니다. 우리 모임 이름이 뭐죠? 포즐사, 포크댄스를 즐기는 사람들이죠? 포크댄스는 즐겨야 하는 겁니다.” 연습을 지켜보며 한가지 발견한 게 있다. 무표정해 보이던 회원들(특히 남성들) 얼굴이 제대로 음악을 틀고 본연습으로 들어가자 확 달라졌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자연스레 미소가 피어난다. 음악이 빨라지고 열기가 달아오르자 팔순 노년의 얼굴이 마법처럼 소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표정은 본심을 숨길 수가 없다. 이분들, 즐기고 있구나.곡이 끝난 뒤 누군가로부터 “마지막 부분 음악이 너무 빠르다”는 탄식이 나왔다. “힘드시죠. 지금 헉헉대시는 분, 이게 정상이에요. 코로브시카는 상급 코스예요. 우리가 초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이걸 택한 거예요. 뒤로 갈수록 음악이 빨라지는 건 포크댄스 음악의 특징이에요. 달리기할 때 피날레처럼 있는 힘 다해 달려야 하는 구간이에요. ”알기 쉬운 언어로 힘있게 설명한다. 최고령자는 79세 백홍준 씨, 아들뻘인 강사의 구령에 맞춰 꼼짝없이 발을 맞춘다. 제4기 포즐사는 수원시 글로벌 평생학습관에서 포크댄스 제자가 된 오희강(68) 씨가 회장을 맡아 팀을 모았다.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며 그에게 재능기부를 요청한 것. 강의를 들은 제자들과 지인들이 알음알음으로 모여들었다. 오 회장은 “이 나이에 학예회 준비하듯 상기된 기분에 빠져 지낸다”고 말한다.이광복(63) 씨는 “활동량이 많아서 운동도 잘 되고 이렇게 팀워크도 다지다 보니 너무 좋다”고 말한다. 조성완(78)씨는 “강사 선생님이 잘못된 것은 호되게 지적해주는데 다 저희 잘되라고 그러는 게 느껴진다”며 “이왕 즐기려면 확실하게 배우라는 것”이라고 해석해준다. ●“나는 포크댄스 전도사이자 평생학습 전파자”이영관 강사는 1956년생 수원 토박이다(호적은 1959년생). 교직에서 39년 근무한 뒤 7년 전 명예퇴직했다. 1977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돼 경기도 내에서만 중학교 국어 교사, 지역교육청 장학사, 중학교 교감, 교장, 경기도 교육청 장학관 등을 두루 거쳤다.이런 그가 퇴직 후에는 신중년 포크댄스 강사로 거듭났다. 지역의 평생학습관, 복지관, 경로당 등 시니어가 모이는 곳이 그의 활동 무대다.포크댄스에 ‘꽂힌’ 계기는 신참 교사 시절 어느 숙직 날 학교 운동장에서 본 교회 수련회 포크댄스의 장관. 이때부터 포크댄스 연구를 시작했고 그가 몸담았던 수원 매원초교는 포크댄스 실행교가 되었다. 교직원 포크댄스 연수회에서 4년간 20여 종을 지도하기도 했다. 다만 이런 인연은 그가 중학교 교사가 된 1984년 뒤로는 명맥만 유지할 정도에 그쳤다.퇴직은 조금 갑작스러웠다. 2016년 정년(62세)을 5년 당겨 퇴직했다. 당시 진보교육감 밑에서 장학관 일을 하려니 매사에 정책 방향이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그냥 ‘내 할 일만 한다’는 자세로 버티지 그러셨어요.“제 생각과 동떨어진 공문을 ‘장학관 이영관’ 명의로 내려보내야 했는데 자존감이 땅에 떨어졌어요. 허수아비 노릇 하며 자리를 지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일선 학교로 돌아가 원로교사 생활을 1년 한 뒤 명예퇴직 신청을 했습니다.”-퇴직할 때 포크댄스 강사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전혀요. 이런 삶을 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탁구 교실이니 통기타 강습, 남성 요리 강습 등을 들으러 다녔어요.”인생 후반에 화려하게 부활한 포크댄스포크댄스는 그가 은퇴 2년 차에 찾아간 수원시 평생학습관 인생 수업 모임에서 소환됐다. 지역 퇴직자들이 자생적으로 모여 뭐라도 공부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뭐라도학교’. 그는 동기들에게 “수업 후 그냥 가지 말고 포크댄스를 배우며 가까워지자”고 제안했다.이렇게 시작된 포크댄스 동아리 ‘포즐사(1기)’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뒤 포크댄스 강사 일은 본궤도에 올랐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에는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지역주민과 함께 포크댄스 한마당’을 펼쳤다. 아파트에 현수막을 내걸고 홍보 포스터를 붙이고 경로당을 찾아가 홍보 활동을 벌였다.“어르신들의 행복한 미소는 우리의 보람이었죠. 활동무대도 넓어져서, 경로당 복지관 문화교실 강사가 되어 형님 누님들께 포크댄스의 재미를 안겨드렸지요.”그의 목표는 ‘포크댄스로 건강하고 신바람 나는 신중년 문화 만들기’. 포크댄스를 통해 신중년의 건강과 사회성 증진, 자존감과 성취감 증대, 사회봉사를 통한 자아실현을 꾀하겠다는 것. 실제 1석 5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신한다.“예를 들어 주민센터나 구청, 지역사회에서 문화행사가 있으면 저희에게 출연 요청이 와요. 한 달에 한 번 숲속 ‘포레포레’ 행사가 열리면 현장에서 포크댄스를 가르치죠. 엄마아빠들이 무척 좋아해요. 자기 자녀와 손 붙잡고 그렇게 즐겁게 춤춘 기억이 없거든요.”“혼자만 행복하믄 무슨 재민겨”-그래서 지금 행복하세요.“저야 너무 행복하죠. 그런데 누군가 이런 말을 했죠.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저는 ‘혼자만 행복하면 무슨 재민겨’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선 나 자신이 행복해야 하고 그다음에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자. 그게 진짜 행복이다. 나는 행복한데 주위 사람들은 불행하다면 그건 진짜가 아니죠.”-포즐사 연습할 때 보니 끝에 속도가 빨라졌을 때 정말 즐거움이 막 폭발하는 느낌이 전달돼 오더군요. 동심 같은 것도 느껴지고요. “제 보람이 그거예요. 팔십 넘으신 분의 빨갛게 상기되고 미소가 만개한 얼굴에서 그분의 청춘을 봐요. 참 소중한 발견입니다.”그에게는 작은 꿈이 있다고 한다. ‘신중년 포크댄스 경연대회’를 직접 주최하는 것. “경로당이나 복지관에서 대회에 출연하려고 막 연습들을 하겠죠. 그러면서 그분들이 건강해지는 거죠. 그걸 한번 해보고 싶어요. 장소나 비용은 지자체 지원을 좀 받아야 하려나. 상의를 해봐야죠.”지론은 ‘도전은 즐겁다. 실행이 답이다’, 모임이 있는 곳마다 포크댄스를 도입하자고 제안하고 나선다. “우선 친교와 화합 시간을 가지라는 얘기죠. 거기에 레크리에이션을 넣고 포크댄스가 들어가면 제가 재능기부를 하는 거죠. 그러면 사람들이 어느 틈에 한마음이 돼요.”-삭막한 세상이 돼 가는데 반대의 길로 가자 하시는 거네요.“코로나 전에는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총동문회에도 포크댄스를 접목했어요. 함께 등산을 끝내고 식사 전에 포크댄스 시간을 갖는 거예요. 300여 명이 동시에 춤추는 장관이 벌어지죠. 서로 돌아가면서 ‘저 0회 누굽니다’ 하면 ‘아, 후배구나’ 하고. 어떤 후배는 ‘태어나서 처음 남자 57명의 손을 잡아봤다’고 하더군요. 파트너가 바뀔 때마다 악수하다 보니까. 하하”“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선생님은 지역사회에 잘 스며든 경우인데, 일반적으로 퇴직 후 갈 곳이 없다는 분들이 많습니다.“등산족이 대표적이죠. 체력만 강화하면 뭐 하겠어요. 평생 배운 것들을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사회에 환원해야죠. 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겠다고 생각을 바꾸면 정서적 방황이 줄어들 거예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요. 우리 삶 자체가 배움이죠.”그에게 포크댄스는 세상과 만나는 매개체다. 자신을 편하게 열고 타인을 수용하는 사회성을 부여해주고 남을 이해하고 교류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나아가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일이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이다. 최근 영통구가 예산이 없다며 9월부터 경로당 4군데의 포크댄스 수업을 없애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예산이란 시간당 2만 원의 교통비 지원이다.“오늘(25일) 종강이었는데, 어르신들이 2학기부터 수업이 없어진다고 서운해하세요. 그래서 ‘지원 없어져도 불러주신다면 언제라도 오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어르신들이 기뻐하신다면 저도 기쁘니까요.”수원=서영아 기자sya@donga.com}2023-07-29 01:40
[온라인 라운지]한일미래포럼, ‘경제안보시대의 한미일 협력과 한일관계 개선방안 모색’ 세미나 개최(사)한일미래포럼(대표·이혁)은 24일 동국대학교 고순청 세미나실에서 ‘경제안보시대의 한미일 협력과 한일관계 개선방안 모색’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제1세션에서는 김충식 가천대학교 특임부총장이 사회를 맡아 ‘언론의 역할과 과제’에 초점을 맞췄다. 사와다 카츠미(澤田克己) 마이니치신문 논설위원과 이하원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최근 양국을 둘러싼 국제환경 변화와 그 속에서의 양국 미디어의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 이어 아오키 요시유키(青木良行) NHK 서울지국장과 길윤형 한겨레신문 국제부장이 토론을 진행했다. 제2세션은 ‘산업의 역할과 과제’를 주제로 송혜선 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서석숭 한일경제협회 상근부회장과 하기와라 타이지(萩原泰治) 오카야마상과대학 경제학과 교수가 자국보호주의가 강조되는 국제질서하에서 경제안보를 지키기 위한 양국간 협력과제를 꼽아봤다. 이어 주원석 산업통상자원부 과장과 사공목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이 토론을 진행했다. 제3세션에서는 진창수 세종연구원 일본연구센터장이 사회를 맡아 ‘기관의 역할과 과제’를 살펴봤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일본연구센터 교수와 마에카와 나오유키(前川直之) 일본무역진흥기구 서울사무소장이 발표를, 정우성 국토연구원 연구위원, 오승희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교수가 토론자로 나섰다. 제4세션에서는 ‘학계의 역할과 과제’를 주제로 이혁 한일미래포럼 대표가 사회를 맡았다. 오구라 기조(小倉義蔵) 교토대학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 교수, 송정현 동국대학교 일본학과 교수가 발표를, 배종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강철구 배제대학교 일본학과 교수가 토론을 진행했다. 이날 세미나를 총괄한 이혁 대표는 “한일 협력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나날이 증대되는 현재, 본 세미나를 통해 언론, 산업, 학계, 기관 등 다양한 주체가 한일 협력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구축을 위한 방안을 고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07-24 17:59
“연봉 300만 원 벌겠다고 5수(修)까지… 나이 들어도 가슴 뛰는 일을 찾으세요”[서영아의 100세 카페]‘이야기 할머니’를 아시는지? 유아교육기관을 방문하여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 56세 이상 여성 시니어 자원봉사자를 말한다.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매년 초 서류, 면접전형을 통해 선발된 뒤 6, 7개월의 교육과정을 거쳐야 한다. 15년간 평균 경쟁률 4.9대 1, 올해는 6.7대 1을 기록했다. 재수, 3수는 기본이고 5수 끝에 합격한 분도 있다고 한다. 이야기할머니들은 5-7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적 정서를 담은 선현들의 이야기를 외워서 구연(口演)한다.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옛날얘기를 속삭이던 ‘무릎교육’의 전통을 살리면서 세대간 정서적 소통을 도모한다.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학진흥원이 협력해 노령 여성인력 일자리 창출과 사회참여를 통한 문화복지를 위해 시작했다. 첫해 안동에서 30명을 선발한 이래, 점차 늘어 현재 전국 8617곳 유아교육기관에서 3162명이 활동 중이다. 이야기할머니 입장에서 보자면 주 2-3회, 연간 85회 수업에 활동비는 1년 320만 원 수준. 자원봉사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한번 이야기할머니가 되면 대부분 최장 10년까지 일을 계속하려 애쓴다. 새로 이야기할머니가 되려는 이에게 진입장벽이 높은 이유다. 이들은 왜 이야기할머니에 열광할까. 최근 열린 동화구연 배틀에 참여중인 이야기할머니 5명을 11일 서울 광화문 본사에서 만났다. ‘약속시간 엄수!’ “항상 미리 가서 기다린다”이 분들, 시간개념이 철저하다. 오후 3시 약속이었는데 2시 15분경 전화벨이 울린다. 할머니 세분이 로비에 와 있는데 기다릴 곳이 마땅치 않다는 얘기였다. 이중 두 분은 각기 구미, 창원에서 기차타고 올라온 분들이다. “세상사 혹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항상 여유있게 움직인다”고 한다. 부랴부랴 인터뷰 장소까지 안내하는 사이 또 한 분. 10분 전에 도착한 마지막 할머니는 지각이라도 한 듯 미안해했다.2015년부터 이야기할머니로 활동한 동기가 3명. 오세신(64) 씨는 아마추어 배우이자 수필가다. 5남매의 어머니이자 8명의 손주군단을 거느린 할머니이기도 하다. 방영희(66) 씨는 시니어패션모델로 일한 경험이 있고 1년 전부터 배운 판소리가 프로급이다. 시낭송대회에서 받은 상장만 30개쯤 된다고 한다. ‘늙어도 동자, 하얀 동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백동자(71) 씨는 꽃꽂이와 도예의 달인. 40, 50대엔 구미 거북이봉사단 일원으로 어르신 목욕봉사와 호스피스 활동 등에 오래 헌신했다. 2019년 이야기할머니가 된 이예훈(64) 씨는 유아들 앞에서는 구수한 옛날얘기를 해주는 할머니지만 색소폰을 멋지게 연주하고 가는 곳마다 웃음을 선사하는 분위기메이커다. 50대에 찾아온 우울증을 떨치기 위해 색소폰을 잡았고 기회닿는 대로 봉사하러 다닌다. 2021년 이야기할머니가 된 홍영란(67) 씨는 KBS와 TBC 등에서 활동한 성우였다. TV애니메이션 개구리왕눈이의 ‘아롬이’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아무리봐도 이분들에게 ‘할머니’란 호칭은 위화감이 좀 느껴진다. 하지만 “5-7세 아이들 눈에는 할머니가 맞다”는 설명을 들으니 수긍이 간다.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빛, 이야기에 집중하다가 까르르 터뜨리는 웃음 소리에 할머니들은 세상 시름 다 잊는다고 한다. 오세신 씨는 “가끔 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요즘처럼 아이가 귀한 세상에 주 3일이나 많은 꿈나무들을 만날 수 있으니 특혜죠. 친할머니 외할머니들도 손주가 보고 싶으실 텐데, 그걸 빼앗는 것 같아 살짝 미안함도 느낍니다.” 이야기할머니의 집에는 항상 이야기가 녹음기에서 흘러나와 남편도 내용을 외울 정도. 20분간 구연할 내용을 완벽하게 외워야 하니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자랑한다. 도전정신이 할머니를 강하게 한다 이 분들과 얘기하다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모두 도전정신이 강하다. 할 일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였다. 노력을 통해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고 다음단계로 나아갔다. 오세신 씨는 50대에 자신의 삶을 찾겠다며 어린이집 운영을 그만둔 뒤 짧은 공인중개사 생활을 거쳐 연극을 배우고 시낭송대회에서 대상까지 탔다. 방영희 씨는 성가정입양원, 시립요양원에서 오랜 기간 자원봉사하는 한편으로 민요와 시낭송 판소리를 배우고 시니어모델 활동도 했다. 홍영란 씨는 성우활동을 그만둔 뒤 남편 사업을 돕는 한편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 녹음 등 끊임없이 봉사활동을 벌였다. 백동자 씨는 60대에 접어들어 목욕봉사가 힘에 부치자 도서관에 나가 동화구연을 배우다가 이야기할머니와 인연을 맺었다. 이예훈 씨는 색소폰을 배우기 위해 무작정 찾아간 강습장에 여자는 자기 혼자였지만 ‘지금 아니면 못한다’는 생각에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우리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둘째, 가족 우선의 삶을 살다가 나이 들어 자유로워진 경우가 많다. 지금 60대 이상인 세대만 해도 부인의 바깥활동에 거부감을 가진 집이 많았던 탓이다. 이날 만난 5명중 3명이 남편의 반대로 꿈을 접었다고 했다. 예컨대 오 씨와 방 씨는 연극을 하고 싶어했지만 ‘집안 망한다’는 남편의 반대에 부딪힌 사연이 있다.이 대목에서 화제는 요즘 사회문제인 저출산으로 옮아갔다. 가만 보면 지금 한창 결혼 안 하고 아이 안 낳는 세대가 바로 엄마들의 이런 삶을 보고 자란 세대 아닌가. “‘여자는 결혼하면 손해’라거나 아이 낳아서 내 인생없이 사는 거 싫다고 하는 젊은이들이 많지요. 그러니 더더욱 저희 세대가 삶의 주인공이 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봐요.”(방영희)“나이 들어도 꿈은 많아” 셋째 자신의 꿈에 솔직하다.친언니가 이야기할머니 하는 모습이 좋아보여 도전했다는 이예훈 씨는 “K전통문화 콘텐츠를 해외에 알리는데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올해를 끝으로 만 8년간의 이야기할머니 활동을 정리할 생각이라는 백동자 씨는 “수업에는 반드시 한복을 입고 갔는데, 한복차림이 잘 어울린다는 칭잔을 참 많이 들었다”며 “한복모델은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새 포부를 밝혔다. 역시 올해가 마지막해인 오세신 씨는 “우선은 이야기할머니에 재도전하는 길을 찾아보겠다”며 이 일을 놓지 못하는 마음을 토로했다. “만약 더 연장할 수 없다면 도서관에서 ‘책읽어 주는 할머니’에 도전해보겠다”고 한다. 봉사도 여행도 연극도, 걸어다닐 힘이 있을 때까지는 도전하고 싶다고. ‘이야기 할머니’에서 ‘이야기 예술인’으로이런 이야기할머니의 세계에 올들어 변화가 일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구연동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인 ‘오늘도 주인공’이 개최된 것.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야기 할머니들이 기량을 맘껏 뽐낼 수 있도록 한국국학진흥원, CJ ENM과 손잡고 만든 무대다. 참여자들은 4명씩 4개의 팀을 이루어 연예인 팀장과 함께 구연극 경연을 펼쳤다. 예능적 성격이 가미되다보니 6070세대 내에서 스타를 찾아내는 작업인 것으로도 보였다. 배경에는 고령화시대에 6070세대의 문화참여 열망을 살려 이들이 예술창작활동의 주역으로 활약하도록 지원한다는 취지가 담겼다. 특히 전통이야기 구연을 K전통문화 콘텐츠로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그래서 문체부와 국학진흥원은 올해부터 아예 ‘이야기할머니’를 ‘6070 이야기 예술인’으로 바꿔 부르고 있기도 하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6070 예술인들을 응원하며 창작지원을 확대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18일 방송될 최종 공연이 끝나면 여기서 만들어진 이야기극을 각색해 10월부터 전국 주요도시에서 10여차례 공연할 예정이다. 하반기부터는 이야기할머니들의 구연 영상에 외국어 자막을 입혀 해외에 전파한다는 계획도 마련돼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8월부터 이야기할머니를 파견하는 범위를 현재의 유치원·어린이집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돌봄 서비스인 ‘늘봄학교’로 넓힐 예정이기도 하다.“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세요”이분들에게 혹시 행복하지 않은 동년배 여성분들이 있다면 어떤 조언을 할지 물어봤다. “나이가 들어도 가슴 뛰는 일을 계속 찾아야 해요. 저는 그렇게 하고 있어요.”(방영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자원봉사 중인데 동료 봉사자 대부분이 75세 이상이세요. 이 분들, 늘 책을 들고 다니면서 역사 공부를 즐기세요. 이런 자세를 배우고 싶습니다.(이예훈) “몇살이건 꿈을 갖고 실천에 옮겨야 해요. 아무리 권해도 자신 없다던 후배가 내년에는 이야기할머니에 도전하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철저 지도해주기로 했어요.”(오세신) “간절함과 열의로 무언가에 도전하는 경험은 꼭 해보셨으면 해요.”(홍영란)동화구연이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인 홍 씨지만 2014년 이야기할머니 면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고 한다. 그가 털어놓은 경험담이 많은 이에게 참고가 될 듯하다.“제가 방송국 들어갈 때 500대 1 경쟁률도 뚫었는데, 이야기할머니 선발 경쟁이 훨씬 어렵더라구요. 동화구연은 제가 생각해도 잘 했고 심사위원도 감탄하셨어요. 그런데 제게는 간절함이 부족했어요. 옆의 분이 굉장히 간절하게 자기가 꼭 되고 싶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열의가 너무 대단하더라구요. 저는 ‘간절하신 분이 하셔야죠’ 이러고 말았다니까요. 마음속에 품은 간절함은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해요.”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07-15 03:00
“군대? 환경보호? 후배들아, 험한 일은 우리가 할게”[서영아의 100세 카페]시니어 아미(Senior Army)라니? BTS(방탄소년단) 팬클럽 ‘아미’의 시니어 분과인가? 이름에서 다소 장난기가 느껴지는 이 모임, 진짜 군대(army)를 지향한다. 물론 현역 군인은 아니고 예비 병력, 어쩌면 예비의 예비 병력이다. 저출산 인구 감소로 병역자원 고갈이 우려되는 현실에서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은퇴 세대들이 앞장서 징집에 응하겠다고 서약하는 운동을 벌인다. 23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열린 창립총회에는 백발은 희끗해도 활기가 넘치는 남녀 50여 명이 참석해 ‘국가가 부르면 우리는 헌신한다’고 다짐했다. 창립발기인의 신분과 면면은 제각각이다. 농부, 자영업자, 전직 언론인, 변호사, 정치인에 일본 영주권자도 있다. 주부를 비롯한 여성도 간간이 눈에 띈다. 시니어 아미 최영진 공동대표(중앙대 교수·정치국제학)는 “회원 자격은 남녀 불문, 병역 불문, 국적 불문이다. 대한민국을 지키고 인간 기본권을 수호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가능하다. 다만 유사시 징집을 자원하는 동원 등록 회원은 50∼75세로 한정하고자 한다”고 밝혔다.●“유사시? 살 만큼 산 사람들이 전장에 나가야죠…”주최 측에 따르면 발단은 지난해 초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인구 1억5000만 명의 대국 러시아가 예비역 30만 명 동원에 쩔쩔매는 현실을 보며 예비군의 중요성을 되새겼다. 출산율은 줄고 노인 인구는 늘어가는 한국에서 앞으로 군대가 유지되겠냐는 걱정이 만연하던 참이다. 그즈음 최영진 공동대표가 낀 60대 동창 모임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 “이러다 우리 군대 두 번 가야 하는 거 아냐?” “까짓, 가면 되지 뭐. 아직 건강하고 시간도 많은데.” “우리가 지금 등산에 마라톤에 스쿠버다이빙까지 하고 다니는데 경계병 정도야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가볍게 시작된 얘기는 조금씩 커져 갔다. 생각할수록 그럴싸했다. 요즘 군은 자동화가 진행돼 있다. 경계병이나 감시병 정도는 60대 시니어라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군대 경험이 없는 여성들도 도울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동창회, 지인 모임 등 이런저런 단체카톡방에 이런 취지를 올리니 뜨거운 반응이 올라왔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사람이 부족한데 전쟁터에 보내면 안 되지요. 요즘 시니어들이 건강하고 군사 경험이 있으니 마땅히 나서야죠. 평소 생각하던 바입니다.”(손교명 변호사) “살 만큼 산 사람들이 전장에 나가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생산에 종사하고.”(선남규 씨·중소기업경영) “다 같이 위국헌신 정신으로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지켜 나갑시다.”(오세윤 씨·농부) 논의가 산으로 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시니어 아미를 일자리 창출 개념으로 접근한 일부 시각이 그런 예다. 시니어를 아예 장병 수준 급여로 고용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오자 금세 “난 돈 주지 않으면 안 하겠다”는 주장이 튀어나왔다. 연회비 3만 원에 대해서도 “목숨 바쳐 전선에 나가겠다는데, 돈까지 내야 하느냐”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시니어 아미는 회원들의 자발성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도 철저히 정부 지원 배제, 자비 부담 원칙을 고수하겠다고 한다. 조건 없는 헌신, 대가 없는 봉사가 아니라면 시니어로서 자긍심을 얻기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정부 지원 배제, 자비 부담 원칙 고수앞으로 인허가 절차를 거쳐 사단법인으로 발족할 계획인 시니어 아미는 7월 초순 홈페이지를 열어 가입 신청을 받을 예정이다. 아직 구상 단계이지만 몇 가지 활동 계획은 굳히고 있다. 1년에 한두 번이라도 단기 동원훈련 정도는 해 보려 한다. “정부가 허락하면 평시에도 주특기 훈련이나 경계근무 지원을 2박 3일 정도 할 수 있겠지요. 이런 경우 훈련장은 빌리고 총은 대여받되 밥값은 자비 부담한다는 게 원칙입니다. 동원예비군 훈련 때 몇십 명이라도 시니어들이 함께 훈련받는다면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이 단체가 출범 직전 50∼75세 장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데이터리서치)에서는 ‘은퇴한 장노년층이 동원예비군으로 다시 복무하자’는 주장에 대해 57.3%(적극 찬성 29.4%, 다소 찬성 27.9%)가 찬성했다. 이 같은 취지를 서약하자는 운동이 벌어진다면 참여하겠다는 답변은 61.4%(적극 동참 27.5% 가급적 참여 33.9%)에 이르렀다. “개인적으로 예비역 장군에게 얘길 꺼내 봤는데 그분도 반색하더군요. 해병전우회 장부상 회원이 100만 명, 한국ROTC중앙회 장부상 회원은 20만 명에 성우회(장군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이런 모임들이 조직적으로 가입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최영진 공동대표) “저희 세대 사이에서 반응이 너무 좋았습니다. 일단 100만 회원 가입이 목표입니다. 우리 경쟁 상대는 BTS 팬클럽 아미예요. 하하.” 인원이 늘면 세력화가 진행되고 정치색이 끼어들 수도 있다. 자칫 제2의 태극기부대로 오인받을 가능성은 없을까.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은 권재홍 전 MBC 부사장은 “그런 우려를 저희도 좀 했고 그래서 가장 큰 원칙을 ‘정치적 중립’으로 삼았다”고 잘라 말한다. “국가 안보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지요. 조심조심 경계할 것은 경계하되, 너무 무겁지 않게 운영해 나갈 생각입니다.” ●“노년이 달라져야 미래가 달라진다”손주 세대의 미래를 걱정하며 행동에 나선 시니어들도 있다. 지난해 1월 출범한 ‘60+기후행동’은 “손주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다”며 시니어가 나서서 행동하는 환경운동을 표방한다. 기성세대가 성장 중심으로 앞만 보고 달려오는 사이 미래 세대가 살아갈 환경을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성찰이 배경에 깔렸다. 스웨덴의 소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당사자로서 일상의 환경운동을 추동해 냈다면 이들은 자손들을 걱정하는 부모 마음을 담아 활동하는 것이다. 시위 방식도 독특하다. 대규모 인원이 주먹을 쥐고 목소리를 높이는 형태가 아니라 시니어 한두 명이 피켓을 들고 문제의 현장을 기웃대는 ‘어슬렁 시위’ 같은 것을 펼친다. 자체 밴드를 만들어 ‘방탄노년단’이라 이름 붙이고 즐기기도 한다. 강남식 60+기후행동 공동대표는 “기후 관련한 모든 숫자들이 다음 세대가 미래를 꿈꾸는 것은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말해준다”며 “우리는 노년이 달라져야 미래가 달라진다는 기치 아래 모였고, 미래 세대의 미래와 노년 세대의 여생을 위해 ‘녹색 전환’을 추구하는 활동을 한다”고 말했다.●베이비붐 세대, 초고령사회의 새로운 노인들이처럼 현역이 아니어도,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해도 미력이나마 세상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시니어들의 활동은 연간 100만 명 전후씩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머릿수 힘까지 더해 강점이 되고 있다. 2000년대 초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미래포럼’은 베이비붐 세대가 앞장서 초고령사회의 체인지메이커가 되겠다고 표방하며 ‘우리가 디자인한다’는 뜻의 ‘우디클럽’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베이비붐 세대는 과거의 노인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대라고 규정하고 새로운 노인들이 사회에도 도움이 되고 스스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이 같은 활동 배경에는 자식 세대의 빈 곳을 보완하겠다는 의지에 더해 세상에 대한 작은 참여로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고 싶은 은퇴 세대의 바람이 담겨 있다. “난 아직 죽지 않았다”고 외치는, 또 실제 그럴 능력이 충분한 이들이 바꿔놓을 미래가 다가온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2023-07-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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