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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 시절, 국가유공자 유족의 집 출입문에 명패를 달아주는 사업이 있었다. 애국지사 조원경의 외손녀인 88세 윤준용 할머니와 60대 아들이 세들어사는 집을 찾아갔다. 아들은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 국민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어 있었다. 명패를 달아드리려 하니 집주인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놓고 가라고 했다.퇴직 일주일 전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 독지가가 기부한 쌀 20kg 포대를 지고 갔다. 다행히 출입문 한쪽에 ‘애국지사의 집’ 명패가 붙어 있었다.‘할머니, 저 며칠 있으면 정년퇴직합니다. 건강하세요.’ 할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 시간을 더 할애해 이야기를 많이 들어드리고 올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담당 통장에게 오며가며 잘 챙겨달라고 당부했다.” (‘수고했어, 박 동장’에서) ‘동장 박성택’(64). 2019년 말 31년간의 서울시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퇴직했다. 최종 직함은 중랑구 망우본동 동장. 망우동은 1988년 그가 9급 새내기 공무원 시절 처음 배치됐던 곳이다. 퇴직을 딱 1년 앞두고 5급 사무관으로 승진한 그는, 자신의 원점인 이 자리를 고집스레 자원했다.기초단체에서 소를 키우던 ‘늘공’ 퇴직 1년 뒤에는 공직생활을 정리한 ‘퍼블릭 서번트의 꿈’(삼일)이란 책을 펴냈다. 다시 1년 뒤 ‘익지 않은 과일을 따버린 농부의 심경’으로 손질을 더한 개정판 ‘수고했어 박 동장’을 같은 출판사에서 냈다. 그를 알게 된 건 이 책 덕이다. 신문사 문화부에 들어온 기증본 더미에서 집어와 방치해뒀다가 조금 여유가 생긴 최근 펼쳐보게 됐다.출세한 공무원들의 이야기는 넘쳐 나지만 평생 말단을 지킨 공무원 이야기는 드물다. 여기에 숨가쁘게 바뀌어온 30년 간의 시대배경이 어우러져 묵묵히 시민의 삶을 지켜온 공직자의 깨알같은 기록은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저자는 책상머리 관료가 아니라 바닥을 훑으며 시민의 ‘공복’이라는 자세를 지키고 있었다. 이리저리 차이는 신세이면서도 늘 어려운 사람 편에 선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여기 누가 ‘영혼없는’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그가 퇴직후 어떻게 지낼지 궁금해졌다. 출판사를 통해 연락처를 얻고 지난달 31일 그가 귀향한 전남 무안으로 향했다. 평생 입버릇, “퇴직하면 고향 내려간다”그는 2023년에 고향인 전남 무안군 현경면 양학리에 정착했다. 빈 농가를 사서 고치고 마당에는 작은 연못도 팠다. 집에는 자물쇠가 없다. 자신이 집에 없더라도 누구든지 들어와서 자고 가라는 취지다. “도시로 간 이곳 사람들도 조상 묘가 있으니 벌초하러 오잖아요. 그런 분들이 자고 가면 좋잖아요. 고향에 와도 아는 사람도 없고 모텔에서 자고 가니 서글프더라는 얘길 들었거든요. 집이 작지만 집들이할 때는 동네분들 23명이 밥 먹었어요. 베개도 10개 정도 있어요.”마을은 대대로 3개 성씨 50여 가구가 모여 살던 곳인데 지금은 35가구 정도 남아 있다. 혼자 사는 노인도 많다.“일가 친척은 모두 떠났지만 선산이 여기 있고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들도 계시고 친구들도 남아 있어요. 친구들과는 자주 여기서 술 한잔씩 합니다.”―농사도 지으세요?“짓고 싶었는데 제가 체력이 안 되더라구요. 좀 무리 했더니 여기저기 아파서. 선산에 나무나 좀 심고 가꾸는 정도예요. 농사 짓는 친구들은 단련이 돼서 어깨를 만져보면 돌덩이 같아요.” 올림픽 앞두고 밤마다 페인트공 역할도무안에서 목수이자 농사꾼이던 집안의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고교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해양경찰로 임용돼 2년 남짓,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서울시경이 모집한 ‘외국어 특기자 경찰’로 들어가 8개월 여 일했다.“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당시 주소지인 관악경찰서로 배치됐는데 사복경찰팀으로 차출돼 대학가에 투입됐어요. 두달 만에 ‘이건 못하겠다’고 사표를 썼지요. 그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서울시 시험을 보게 됐죠.”1988년 5월 처음 배치된 곳이 서울의 동쪽 변방인 중랑구 망우2동 사무소다. ―서울시 공무원은 구청과 동사무소를 오가며 정말 여러가지 일을 하시더군요. 88올림픽 직전에는 밤마다 거리에 나가 페인트칠도 하시고. “행정직들은 그래요. 올림픽 직전에는 거리 환경미화 때문에 야밤에 페인트공이 되어 돌아다녔죠. 야식 먹고 길에 널브러져 앉아 쉬는데, 노숙자처럼 보였는지 지나가는 엄마가 아이에게 ‘너 공부 안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고 하더군요. 하하.”그의 민원처리 제1원칙은 ‘명확한 규정이 없는 한, 이해관계자가 없는 한, 어려운 자에게 유리하게 적용한다’는 것. 홧김에 사표를 던지기도 하고 민원인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하는 등 해프닝이 끊이지 않았다. 약자 편에 서다보니 출세와는 거리가 있었던 듯하다. 확 달라진 공무원 사회―9급에서 5급까지 올라가는 데 30년 걸렸네요. “6급에서 8년인가 멈춰 있었죠. 그런데 지자체 공무원 승진은 운도 많이 작용하고 정치 바람도 많이 타요. 구청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죠.”―정년퇴직 딱 1년 전 5급으로 승진했는데 늦었다는 아쉬움은 없으세요?“전혀. 그래도 1년 했으니까요. 친한 구의원들은 제가 동장할 때 ‘자넨 동장 일을 즐기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더 있었으면 조금 더 많이 일할 수 있었으려나. 중랑구에는 다문화 가정이 많거든요. 제가 다문화자녀들의 합창단을 만들었는데 계속 키워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엄마들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었는데.” ―혹시 공무원 선택한 거 후회는?“제가 그때 인문계 고졸 출신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공무원이 되어 끝까지 한 것, 최선의 선택이었고 운도 좋았다고 봐요. 이 나이 되니 친구들도 다 부러워해요.” ―책을 쓴 이유는.“제가 보고겪은 것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수다. 이런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역사란 기록인데, 역사서들을 보면 군주의 기록만 잔뜩 있지 백성의 것은 없어요. 한국에도 높은 사람이나 정치가들의 기록은 있지만 저같은 말단 공무원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시대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없죠. 이 모두가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니 뭔가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죠.“지난 30년간 공무원 사회도 확 바뀌었다. “주민등록 전산화, 지방자치시대 개막, 호주제 폐지, 복식부기 도입 등 공무원 사회가 달라진 몇가지 계기가 있었어요. 복식부기로 수입과 지출을 한눈에 동시에 알아보게 되니 투명성이 확보됐습니다. 제도를 보완하면 어느 정도 부패를 막을 수 있더군요.” 못 말리는 ‘공복’ 정신무안에 자리잡자 서울에서 인연을 맺은 분들이 보고 싶다며 찾아온다. 이들 중에는 전라도 땅을 처음 밟아본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삼삼오오 2박3일 정도 일정으로 지내고 돌아가서는 힐링됐다고 고마워한다.“무안군 관광과에서 알아야 하는데, 저 때문에 이곳을 찾는사람들이 늘었다는걸 말이죠. 하하. 얼마 전 경찰 시절 동기 몇명도 월출산 등산하고 하룻밤 자고 갔어요. ‘숙박시설이 아니라 벗의 집에서 편안하게 하룻밤 보내니 무척 좋았다’고 하더군요. 밤에 마당에서 장작불 피워 ‘불멍’ 타임 해주고 고구마 구워주고 싱싱한 산낙지 안주 대령해주고….“ 농촌 인심에 푹 빠져 지내기도 한다.“뭘 갖다주는 분이 많아요. 쌀은 작년에 네 가마니 들어왔는데 다 소비됐어요. 김장김치는 열두 집에서 두어포기씩 가져다 주셔서, 그 김치들 보관하느라 결국 김치냉장고를 샀어요. 할매들은 고추장 된장 참기름 같은 걸 갖다주시며 신신당부해요. ‘내가 줬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어.’”고향 생활은 현지 노인들과 어울리는 생활에 가깝다. 집근처 마을회관에는 늘 할머니 7~8 분씩은 계신다. “사람이 귀하니까 누구라도 오면 반가워하시죠. 저는 딸이나 손자가 내려오면 우선 데리고 가서 할머니들한테 인사부터 시켜요. 우리 손자가 지금 30개월인데, 마을회관에 데려가면 난리가 나요. 다행히 손자놈이 낯을 안 가려서 더 귀염을 독차지하죠.”고향집에 머물 때면 밤에 마루등을 켜놓는다. 동네 노인들은 그것만으로도 반긴다.“이분들 주인이 죽은 빈집에는 귀신들이 달려들어서 산다고 믿으세요. 그래서 무섭다고. 제가 들어와서 왁자지껄 사람 소리가 나니까 그것만으로도 무척 좋아하세요.”말단 공무원의 역사, 백성의 역사동네 어르신 몇 분에게는 정기적으로 문안을 간다. 이중 94세 할아버지와 96세 할머니 댁은 각별하다.“동네에 초고령자가 15분 계신데 할아버지는 딱 한분이세요. 할머니는 96세가 최고령인데 그 밑으로 80대 ‘아짐’들이 여러 명 계세요. 더 젊은 층은 노인회관에 나오시니까 걱정을 덜 해도 되고요.”―남성이 장수를 못해서 그런 건가요.“그렇죠. 다들 먼저 가시고 혼자 남으셔서. 할머니들이 많은 마을회관에도 안 가시니 더 외롭죠. 이 분은 제 동창 아버지라서 제가 더 챙겨요. 도시에 사는 자녀들은 번갈아가며 온다고 해도 자주는 못 오니까. 누구라도 가면 굉장히 반가워하세요. 앉으면 놀다 가라고 붙잡으시고. 말씀도 많이 해주시죠. ”알고보니 그가 어르신들을 섬기는 이유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서라고 한다. “아버지는 1977년에 59세로, 어머니는 1984년에 64세로 돌아가셨어요. 이 분들은 제 부모님과 형님 동생 하면서 살았던 양반들이죠. 부모님 흔적을 느낄 수가 있어요.”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아버님을 기억하세요?“물론입니다. 열댓살 위 동네 큰형님으로 기억하시죠. 이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상여가 나갈 때 앞에서 매김소리하는 역할을 하셨어요. 동네분들 돌아가시면 모두 그 분이 치우신 거죠. 그래서 더 고마움이 있는 거예요. 동네 80대 할머니 한 분은 제가 돌아온 뒤 아들에게 우리 어머니가 장터에서 국수 사준 기억을 얘기하시더래요. 아이 낳고 얼마 뒤 밥도 굶은채 읍내까지 5km를 걸어서 장에 갔는데 우리 어머니가 산모가 허기진 상태인 걸 알아차린 거죠. 그 국수 얻어먹은 걸 잊지 못하고 계셨다가 아들한테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지금은 그 할머니가 매년 복지센터에 쌀도 몇 가마씩 몰래 갖다주고 그러시더라구요. 이런 노인들이 다 돌아가시면 이제 부모님 흔적은 직접 들을 수가 없게 돼요.”그래서 마을 주민들의 밴드(폐쇄형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도 만들었다. 도시에 나간 사람까지 현재 115명이 들어와 있다. 고령의 노인들은 밴드 사용이 어렵다보니 그가 동네 소식을 올린다. ‘지금 ㅇㅇ아짐이 벼 베고 계시다’며 사진과 함께 올리는 식이다.“자기 어머니 추레한 모습 왜 올리냐며 항의하는 애들도 있습니다. 전 사진 찍어서 올리는 것도 기록이고 우리들이 살았던 흔적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다 역사인 거죠. 지금은 이해를 못 해도 나중에 자기 어머니 안 계시게 됐을 때 흔적도 기록도 없으면 어떤 기분일까요. 백성들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명백하게 이 시대를 살았고 그런 스토리들이 있는데 왜 지워져야 하나요.” 이웃집 공복그는 고향에서도 공복으로서의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매의 눈’으로 안전 복지 행정을 지켜보며 도로유실이나 하수구 막힘, 가로등 불꺼짐을 보이는대로 신고해 고치게 한다. ―앞으로 무안에서 하고 싶은 일은.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갈 겁니다. 보고 싶은 사람 보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리고 날 풀리면 지난해 했던 마을문화자원 조사를 이어갈 거예요.” 지난해부터 무안문화원 회원이 되어 마을문화자원 조사 작업을 벌이고 있다. 노인들만 남은 고향, 소멸위기에 빠진 고향에서 지역 역사와 문화를 조사한다. 특히 노인들이 간직한 기억들을 오롯이 살려내 기록을 남기는 게 목표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는 구절을 체감하고 있다고 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박상철(76) 전남대 연구석좌교수는 국내 노화장수 연구의 선구자다. 서울대 의대 생화학교실에서 세포 노화연구에 매진하다 1996년 서울대에 체력과학노화연구소를 만들었고 2000년부터는 100세인(人) 연구분야를 개척해 25년간 1500명이 넘는 100세인을 만났다. 그가 최근 ‘백세 엄마, 여든 아들(시공사)’이란 책을 냈다. 2017년 부친 박선홍 옹을 91세로 여의고 홀로 남은 어머니 강영례 씨(96)와 함께 지낸 7년여 간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당초 모자가 살고 있는 광주광역시의 자택으로 찾아가고자 했으나 어머니가 언론사 인터뷰를 극구 싫어하신다고 했다. 17일 서울대 후문에 자리한 국제백신연구소(IVI) 한국후원회장실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아버지가 입고 떠난 70년 된 두루마기의대에 진학한 뒤 고향에는 명절 때나 손님처럼 찾아가는 무심한 아들이었다. 50년만에 고향살이를 시작한 계기는 2017년 아버지의 타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장례식에서 본 아버지 복장이 좀 이상했어요. 수의 위에 빛바랜 하얀 두루마기가 입혀져 있었지요. 내색을 못하고 있다가 며칠 뒤 넌지시 여쭤보니 ‘그 두루마기, 네 애비가 장가올 때 입고 온 옷이다’라고 하세요. 아버지가 70년 전 결혼식 때 처갓집에 입고 간 두루마기를 어머니는 고이 간직했다가 마지막 가는 길에 입혀드린 거죠.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메이더군요.”70년을 해로한 아버지의 부재가 미칠 영향이 걱정되던 차에 어머니가 폐렴으로 앓아누웠다. 입원 일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안 보이고 어머니는 “네 애비가 날 부르는구나”고 하는 상황. 다행히 새로나온 항생제 덕에 살아나셨다.박 교수는 고민에 빠졌다.“어머니와 더 오래, 더 가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향으로 가서 어머니 곁에서 살자….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무척 후회할 것 같았어요. 100세인들을 만나고 다니며 그분들이 가진 장남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감을 익히 알고 있었거든요.”당시 그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석좌교수였다. 5년 계약중 2년이 지난 상태였고 그가 데려온 교수 3명이 자리를 잡는 중이었다. 한편 그의 사연을 들은 전남대에서는 연구석좌교수라는 새로운 직함을 만들면서까지 자리를 마련해줬다. 결국 DGIST의 양해를 얻어 월 1회 대구에 가서 연구를 돕기로 하고 전남대로 활동무대를 옮겼다.아흔살 노모와 함께 TV연속극 삼매경2018년부터 월화수는 광주에서, 목금토일은 서울에서, 한달에 한번은 대구에 가서 1박2일 지내는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다. 일흔살 아들과 아흔 엄마의 삶은 크게 변했다.“새벽 5시면 어머니가 깨우며 ‘목욕하고 오너라’고 하세요. 평소 안 먹던 아침식사를 차려주시니 먹어야 했고 저녁이면 가까운 학교 운동장을 댓바퀴 돌고 오라고 명하셨죠. 술 한잔 마시고 돌아온 날이면 으레 ‘아직도 술 먹고 다니냐’, ‘넌 하는 짓거리가 왜 네 애비하고 똑같냐’며 가차없이 야단을 치시고요.”박교수는 노모와 한솥밥을 먹고, TV 연속극을 보고, 텃밭을 가꾸고, 꽃구경하며 가끔은 어린 시절처럼 잔소리와 꾸지람도 들으며 일상을 보냈다. 남편이 떠난 후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큰아들을 보살피며 다시 엄마 역할을 부여받아 활력을 되찾았다.“귀향하면서 스스로 두가지 다짐을 했어요. 첫째, 어머니 말씀은 무조건 들어드리자. 둘째,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자주 갖자. 50년 동안 제가 어머니하고 대화도 해본 적이 없더군요. 명절 때 내려가도 장남이다보니 아버지나 손님들과 대화를 이어가야 했고, 어머니는 주방쪽에만 계셨으니까요. 어머니와 함께 있기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TV를 보는 거였어요. 덕분에 평소 안 보던 드라마도 꽤 봤습니다.”어머니에겐 일흔 넘은 아들이 여전히 방에 처박혀서 공부만 하던 고교시절의 자식일 뿐이었다. 기거하는 방에 TV를 두려 하자 “공부해야 하는데 무슨 TV다냐”고 못 두게 했다. 나이든 아들은 다시 어려지고 늙으신 어머니는 다시 젊어지는 시간들이다.“가만히 있으면 뭐 한다냐”어머니 집에는 45년째 출퇴근하며 살림을 돌봐주는 남순댁이 있다. 두 여동생도 가까이 살며 수시로 드나든다. 어머니가 아들의 건강을 직접 챙기자 86kg에 육박하던 박교수의 체중은 74kg까지 떨어지기도 했다.“어머니께 ‘나 살 많이 빠졌죠?’하고 자랑했다가 일언지하에 ‘아직 멀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곁에 있던 여동생이 ‘큰오빠가 일흔 넘어 광주 대구 서울을 다니면서 고생하는데 칭찬도 좀 해주시라’고 거들자 어머니는 ‘일흔 살도 나이다냐? 나는 그때 날아다녔다’고 일갈하시더군요. 일흔이라는 나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니까 더욱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었죠. 눈앞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그동안 고민해왔던 연령 한계를 어머니는 손쉽게 뛰어넘으신 거죠. 나이를 핑계로 변화에 소극적이던 스스로를 반성했습니다.” 가까이서 본 어머니의 삶에는 ‘쉼’이 없었다. 항상 무언가를 하려고 궁리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근교의 100평 남짓한 밭에 80여 가지 농작물을 유기농법으로 재배해 철 따라 각종 야채가 줄이어 나오게 했다. 농사에 미숙한 딸과 사위들을 채근하며 농작물을 때맞춰 심게 하고 풀 뽑고 벌레들을 일일이 잡도록 지시했다. 연령한계는 스스로 뛰어넘는 것TV에 방영된 각종 건강요리는 메모해뒀다가 일일이 직접 만들어 보기 때문에 어머니 식단은 항상 새로움이 가득하다. 여동생들은 어머니가 식재료를 구해달라 요청하면 툴툴거리면서도 기꺼이 구해왔다. 소싯적엔 국내 맛집기행의 선구자인 백파 홍성유(1928~2002) 선생이 어머니가 해준 추어탕에 감동해 글을 썼을 정도로 어머니의 음식솜씨가 좋았다고 한다.“어머니의 지론은 간단해요. ‘가만 있으면 뭐 한다냐?’는 거죠.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는 자세가 바로 장수인(人)들의 공통점이예요. 도시생활에 젖어 살아온 제게 어머니가 동네사람들과 어울리며 오손도손 지내는 모습도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그나저나 인터뷰를 왜 싫어하시나요? “당신이 늙은 모습 보이기 싫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귀찮다는 거죠. 요즘은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하세요. 언젠가는 제가 TV 출연해서 어머니가 아흔살 생신 기념으로 딸들과 홋카이도에 여행가셨다고 언급했다가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는 통에 민망했다고 야단치시더군요.”―96세면 혹시 기억력이 좀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나요?“우리 여동생들이 어머니 앞에서 말을 못해요. 오만거 다 기억하셔서 끽소리도 못하죠. 한번 본 꽃이나 나무가 어디에 있었다는 걸 일일이 기억하세요.”91~3세 사이 임틀란트 15개, 93세에 대동맥판막대체술초고령 사회가 당면한 고민 중 하나가 의료시술의 연령한계 문제. 어머니는 최고령 수술 기록의 보유자다. 91~93세 사이 임플란트를 15개나 해 넣었고 93세에 대동맥 판막 대체시술을 받아 전남대 병원 최고령 기록을 썼다. “30년간 틀니를 사용하셨는데 더 이상은 곤란한 상황이 됐어요. 치과와 상의를 많이 했는데, 잇몸이 괜찮을 것같다고 해서…. 안하겠다는 어머니를 설득했어요. 얼마간이라도 행복한 시간을 사시는 게 낫다고.”그러던 어느 날 광주에 내려가니 어머니 표정이 아주 밝았다.“그날 깍뚜기를 씹으셨다고. 시술 후 1년이 지나면서 그동안 마음대로 씹지 못하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특히 좋아하는 고기를 항상 죽이나 미음 형태로 갈아서 드셨는데 육회도 그냥 씹어 드실 수 있게 됐죠. 심지어 누룽지, 쥐포까지 씹을 수 있게 되니 생활에 활력이 생겼습니다. 식욕도 늘어 음식 종류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먹고 싶다 하시니 자식 된 입장에서는 반갑기 짝이 없었죠.”―그 연세에 임플란트 15개는 대단하시네요.“어머니가 견뎌주셔서 감사할 뿐이죠. 다만 한 3년 되니까 뼈들이 녹아서 다시 빠지고 있어서 요즘 또 좀 불편하세요.” ―그럼 공연히 고생하신 거 아닌가요?“그때 목표는 어머니가 하루라도 편하게 식사하시는 거였어요. 저로서는 어머니가 다만 몇 년이라도 삶의 질을 즐기셨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영원한 건 있을 수 없죠.”그 뒤 병원에서 그냥 두면 1년 이상 생존이 어렵다는 판정을 받고 어머니를 설득해 대동맥판막 대체술도 받았다. 박 교수는 90세가 넘으면 큰 외과적 수술은 금기시 돼왔지만 의술이 더 발달하면 병을 치료하며 장수하는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난 95세 이상 아니면 상대 안해요”“제 주변엔 장수인들만 모여요. 영어로 100세 이상을 ‘센티네리언’, 95세 이상은 ‘세미(semi) 센티네리언’이라고 해서 100세인 취급해요. 그러니 저를 만나려면 만 95세는 넘어야 해요. 하하.”아닌 게 아니라 그의 주변은 별천지처럼 건강한 100세인들이 많다. 인터뷰 중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1928년생)이 방문을 두드렸다. 퇴근 인사하러 오신 것. 국제백신연구소는 한국에 본부가 있는 유일한 UN기구다. 97세인 조 총장은 매일 이곳으로 출근한다. 105세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조 총장과 밥먹으러 가끔 들른다고.“조 선생님도 오래 만났지만 만 95세 되기 전에는 인터뷰를 안 했어요. 이길여 가천대 총장(1932년생)도 저랑 친하지만 100세인 대접 받으려면 2년 이상 기다려야 해. 이 총장이 ‘나도 나이 많다’고 하면 제가 ‘그게 무슨 나이냐’며 잘라버리죠.”―2000년 경부터 100세인 연구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1994년 국내최초로 노화 종적(縱的) 관찰을 시작했는데 연구비가 문제였어요. 종적 연구는 하버드대처럼 적어도 80년은 해야 성과가 나오는데, 한국 현실은 길어봐야 3년짜리예요. 그래서 방향을 바꿔 추적의 제일 끝, 즉 종말기를 봤어요. 그걸 100세로 설정하고 세가지를 연구합니다. 첫째 종말기에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의학적 조건이 뭐냐. 둘째 그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을는가. 셋째 수명연장은 어떻게 가능할까.”시행착오를 거쳐 서울대 다양한 분야 교수들을 불러모아 세계 유일의 다학제적 100세인 연구팀을 만들었다. 이 팀이 2006년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로 이어졌다. 그는 국제백세인연구단(ICC) 세계대회에 참석한 해에 회장으로 뽑혀 2006년 한국에서 세계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초고령사회, 고향과 가족의 의미―학술적인 책만 내시다가 개인사를 쓴 이유는… “100세인 연구를 하다 보니 20년 전과 너무 달라졌어요. 전에는 혼자 사는 분이 10% 정도였는데 지금은 30~50%가 혼자 살아요. 요양원 사는 분도 20~30%예요. 가장 큰 문제는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의 본질은 가족이죠. 이 가족 관계가 갈수록 멀어지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모신다는 게 노인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보람있는 일인지 좀 알리고 싶었습니다. 가령 제가 24시간 모시는 것은 못 하지만 자주 어머니 옆에 있기만 해도 어머니에게 활력과 즐거움이 생깁니다. 밭에 가서 작물 중에도 좋은 것 있으면 동생들에게 ‘그거 큰오빠 줄란다’하며 즐거워하세요. 남녀평등 관점에서는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어르신한테는 그게 힘이니까. 여동생들은 뭐 ‘좋을 대로 하세요’하면서 즐겁게 져드리죠.”그는 책을 쓴 또다른 이유를 덧붙였다. “어머니께 헌정하고 싶은 마음도 컸어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뭐라도 하나 남겨드리려고 메모를 해 온 걸 책으로 낸 거죠. 이번에 내려가서 드릴 건데, 아마 ‘뭐 이런 쓸데없는 걸 썼냐’고 야단치실 거예요.”늙은 세포가 더 안 죽는다―‘거룩하게 늙는다’는 표현을 자주 하시는데.“21세기 들어 노화세포의 특성이 새로 발견됐어요. 늙은 세포가 젊은 세포보다 치명적 스트레스에 더 강한 저항성을 보여요. 잘 안 죽는다는 거죠. 개체 수준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노화란 생명체가 단순하게 죽음에 이르는 단계가 아니고 오히려 죽음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과정이라고 봐요. 증식을 포기하는 대신 생존을 보장받는 생명유지 현상인 거예요. 이렇게 보니 늙음의 의미가 특별해지죠. 실제로 100세 넘어서도 당당하게 활동하는 분들을 만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들의 적극적인 삶의 태도와 생명을 마지막 순간까지 소중하게 지키려는 의지가 느껴지거든요. 그 점에서 나이듦과 늙음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해요.”―노인이라는 존재가 생명의 성스럽고 거룩한 결정체다. “제가 결정적으로 사람에게 이 개념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광주 대교구 윤공희 대주교(1924년생)예요. 2023년에 백수연 축하미사에 갔다가 감동했습니다. 만 99세 어르신이 1시간 동안 미사를 집전하고 마지막에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현재는 하느님이 사랑에 맡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시다’라는 강론을 하세요. 그분이 살아온 길까지 생각하면 99세 신부가 말씀하는 구절 하나하나가 살아 숨쉬는 것 같더군요. 그 강론을 들으면서 아, 이거구나. 사람한테도 ‘늙는다는 것은 거룩한 일’이란 메시지를 던지자.” 행복한 100세인=자식 이웃과 관계가 좋은 사람그는 지난해 12월 고령화와 노인 복지를 연구해온 국내 석학 70여명과 함께 ‘시니어 스카우트’ 결성을 제안했다. 시니어스카우트는 복지 혜택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노인이 아니라 사회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시니어들의 연대를 뜻한다. 오는 4월 정식 출범할 예정이다.―100세인들의 특징이라면.“수많은 100세인을 만나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일들을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의 삶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하게 항상 무엇인가 하시는 모습, 새로운 것을 배워 시도해보는 도전정신, 자식 및 이웃과 어울리고 배려하는 삶,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 건강을 스스로 지키려는 적극적 노력, 일흔이 넘은 자식에게 꾸지람을 주며 생활을 지도하는 어머니의 당당함. 이런 것들이죠.”여든을 바라보지만 백 살을 바라보는 어머니 앞에서는 늘 어린 아들이다. 그래서일까. 박 교수는 내내 유쾌하다. 책이건 말이건 매사에 고마움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고 주어진 여건과 주변 존재들에 대해 고마워한다. 간혹 자랑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어쩌랴. 정말 자랑스러운 것을.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초고령사회 진입과 동시에 한국사회 퇴행을 경고하는 신호등이 여기저기 켜지고 있다.지난해 말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는 ‘올해의 단어’로 ‘뇌 썩음(brain rot)’을 선정했다. 미국 생태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1854년 ‘월든’에서 처음 쓴 말이라고 한다. ‘영국은 감자 부패(potato rot)는 치료하려 애쓰지만 뇌의 부패를 치료하려는 노력은 없다’며 시민들이 복잡한 사고를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퇴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오늘날 뇌 썩음은 주로 청소년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중독을 경고할 때 거론된다. 자극적인 쇼트폼 콘텐츠 과잉 소비로 집중력이 저하되고 문해력이 약화되는 등 지적 퇴화가 심각하다는 얘기다. 특히 콘텐츠를 추천하는 알고리즘에 중독성이 있어 청소년 뇌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했다.극우 유튜브에 중독된 대통령비단 청소년뿐이랴. 중노년층도 뇌 썩음에 유의해야 할 세대로 꼽힌다. 가뜩이나 40대부터 뇌 전두엽이 위축되는 게 자연의 섭리인데, 당장 편하다고 유튜브 삼매경에 빠져들면 세상을 객관화할 단서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알고리즘에 끌려다니다 보면 정보의 편식이 일어나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이 더욱 강화된다.극우 유튜브에 중독돼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져 버린 윤석열 대통령의 상태가 이를 잘 설명해준다. SNS 중독에 의한 뇌 썩음이 비상계엄에 이르는 오판을 낳고 그것이 온 나라를 흔들어버렸다. 여기에 중노년이 흔히 접하는 알코올과 고혈당, 스트레스는 전두엽을 더욱 위축시켜 감정 조절 장애와 인지 능력 후퇴를 가져온다.한국인 문해력도 추락하고 있다. 문해력(리터러시)은 글을 읽고 해석하는 힘인데,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과 상식이 갖춰져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흔히 청년들의 문해력 문제로 ‘사흘’을 4일로 안다거나 ‘시발점’을 욕으로 알더라는 우스개가 떠돌지만, 객관적인 조사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 문해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한 81개국 만 15세 학생 대상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조사에서 한국 학생은 읽기 영역 3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같은 해 조사한 만 16∼65세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서 성인 문해력은 500점 만점에 249점으로 OECD 평균(260점)보다 11점 낮았다. 10년 전 조사 때보다 20점 이상,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고 연령이 높을수록 하락 폭이 컸다.지난해 8월 통계로 한국인 1인당 유튜브 시청 시간은 하루 73분꼴로 5년 전보다 2배 늘었고, 세계 유튜브 사용자들의 하루 평균 19분의 4배에 가깝다.물론 성인 문해력이 빠르게 떨어지는 이유를 유튜브에만 돌리는 건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책이나 신문 같은 활자를 읽는 모습이 급격히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유튜브 시청하느라 TV도 책도 안 본다는 어르신도 부쩍 늘었다.뇌 썩음 막으려면 세상의 상식과 소통해야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를 겪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르신들에게 당장 유튜브 시청을 줄이고 책과 신문을 읽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시라고 권하고 싶다.과거 종이신문 독자들은 이웃들이 가진 일반적인 상식과 교양을 알고 배우기 위해 신문을 구독했다. 아무리 개성과 다양성의 시대라 해도 동 세대의 관심과 생각을 알아볼 필요는 있다. 나아가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서는 내 생각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점을 한 번쯤 되돌아보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민주주의의 근간인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공간이 생겨날 수 있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sya@donga.com}
2020년, 지형운 씨(68)가 고향에 돌아왔다. 강원도 철원. 큰누나 지형숙 씨(73)가 살고 있고, 그가 중학교 때까지 개구쟁이 생활을 하던 곳이다. 처음엔 그저 좀 쉬어가려는 생각이었다. 2016년 30년간의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대학 강의와 사업 등을 전전하며 쉬지 않고 달려왔다. 베트남 중국 인도를 뛰어다니다가 중국에서 의류 무역업을 펼치던 시점에 하필 코로나 19 사태가 터졌다. ‘올스톱’ 상태가 된 상하이에서 철수했다.“고향이 여기 있었네”불과 몇 달 뒤, 그는 농부로 변신했다. 1400평 크기 비닐하우스 2개 동으로 구성된 ‘대형팜’을 짓고 노랑 빨강 색색 파프리카를 연간 30~40t씩 출하하고 있다. 농장이름 ‘대형’은 그의 아들 이름이다.“아무 계획 없이 한 달가량 누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데 갑자기 제 눈에 고향산천 논밭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좋은 곳을 두고 힘들게 나가서 돌아다녔나’ 싶었죠. 이 참에 ‘고향에 뼈를 묻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15평 빌라를 빌려 살 곳부터 정했습니다.”당시 63세. 철원에서 무엇을 하고 살지 고민했다. 남들은 연금으로 살면서 취미활동이나 하라고들 했지만 너무 지루할 것 같았다. 어릴 때 집에서 과수원을 했고 자신도 영북실고(농과)를 졸업해 농사에는 친근감이 있었다. ‘농사지으며 고향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수확의 기쁨, 말로 표현 못해”그는 바로 군 농업기술센터가 운영하는 귀농귀촌교육을 신청했다. 교육을 받으며 축산도 고려해보고 벼농사나 과실작물도 생각해봤다. 최종적으로 철원 특산품인 토마토와 파프리카 중 무게가 가벼워 유통이 수월해보이는 파프리카를 택했다. 지인이 많은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를 택해 첫해에는 600평짜리 하우스를 운영했고, 이듬해 지금의 대형팜을 열었다.“가장 즐겁고 보람찬 순간은 역시 수확할 때입니다. 수확의 기쁨이 있어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잊고 즐겁게 일할 수 있었죠.”‘돌아온 탕아’처럼 나타나 농사를 짓겠다는 그에게 동창들은 짖굿게 놀려댔다. “야. 너 들깨 참깨 구분은 하냐?” “감자꽃 본 적은 있니?”실제로 뒤늦게 귀농했다가 몇 년을 못 버티고 떠나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다들 ‘한 1,2년 저러다 말겠지’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귀농해서 5년간 벼농사를 짓던 지인도 얼마 전 논밭 다 팔고 떠나버렸지요. 벼농사는 상대적으로 덜 힘든데 이윤이 남질 않아요. 연간 3000만 원 정도 이익 남기려면 논이 1만 평은 있어야 하는데 땅값만 10억 원은 들 겁니다. 은행이자를 생각하면 버는 게 아니지요.”‘한 1, 2년 저러다 말겠지’남들이야 뭐라하건, 그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아침마다 빨리 농장에 가고 싶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갈 곳이 있다는 것도 좋고, 매일같이 달라진 모습으로 절 기다려주는 파프리카 나무들도 좋고. 농번기에는 농장에서 생활하는 일꾼 깨울까봐 억지로 늦게 나가는 날도 많았지요.”파프리카는 1년생 작물이다. 하우스 농사라 해도 철원에서는 3월부터 11월까지 재배하고 한겨울은 쉰다. 한겨울 파프리카는 경남 진주 쪽에서 많이 재배한다고.물론 농사는 녹록치 않았다. 그가 겪은 가장 큰 시련은 3년 전 하우스에 일어난 화재였다. 파프리카를 심은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온도 조절 기계가 불완전연소돼 불이 났다. 119가 와서 불을 껐고 수리비 일부는 보험처리했다. 2년 전 가을에는 쓰레기를 옮기다 배수로에 떨어져 오른쪽 어깨를 다쳤다. 오랜 기간 통증이 이어졌지만 지역 병원에서는 원인을 찾지 못했다. 지난해 8월 서울의 종합병원에 갔더니 힘줄이 끊어져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4일간의 입원시간을 내지 못해 수확이 다 끝난 12월 말에야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보조 기구를 메고 있다.“이제 회복될 일만 남았어요. 2주일 정도만 더 이거 메고 다니면 됩니다. 하하.”날 지켜준 ‘뒷배’는 고향이었다그는 농고 졸업 뒤 자동차 공장에 취직했으나 고졸사원과 대졸사원의 급여차가 엄청난 현실을 깨닫고는 사직하고 대학진학을 준비했다. 동국대 식품공학과를 졸업한 뒤 1986년 국정원에 7급 공채로 입사해 충북지부장(1급)까지 역임하다 2016년 말 퇴직했다. 이후 충북 유원대 보건의료행정학과 초빙교수로 3년간 강의했고, 광주 DK산업 해외산업본부장을 거쳐 중국 상해 무역업체 부회장으로 중국에서 일했다.―젊은 시절 방황이 많으셨다고요.“고교도 대학도 입시실패를 겪으며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같아요. 오히려 국정원에 들어가면서 적성에 맞는다고 느꼈습니다.”―그 직장은 정치바람 같은 게 많지는 않았는지요?“그런 걸 많이 봤지만 저는 해당이 안 됐어요. 강원도 변방 출신이라 지역색도 없고 동국대가 또 그렇게 두드러진 학벌이 형성돼 있지도 않죠. 그곳에서 저를 지켜줬던 것은 직장에서 맺은 선배 상사들과의 인연이예요. 같이 근무하며 챙겨주고 끌어주고 하는. 그걸 혈연 지연 학연 외에 ‘직연’이라 하죠. 또하나, 고향에 돌아온 뒤 직장 후배들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퇴직하고 보니 나를 키워준 건 8할이 고향이었더라’고. 진급을 앞두고 치열한 경쟁을 할 때도 내 ‘뒷배’는 고향이었어요. ‘여기서 잘려도 난 돌아갈 곳이 있어’, ‘고향가서 농사나 지을란다’ 뭐 이런 든든함을 주는 뒷배 덕에 무사히 1급까지 마치고 퇴직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평생 도전하는 삶이었던 것같습니다. 농고 졸업 후 공돌이 생활도 해봤고 힘들게 진학한 대학에서 전공에 대한 방황이 이어졌죠. 국정원 입사도 그런 가운데 이뤄졌어요. 59세에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해 완주하고 61세에 중국어 공부를 시작해 중국 의류사업에 뛰어들었죠. 63세에 귀농해 64세부터 파프리카 농장을 경영하고 있죠.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고민할 때도 비닐하우스 농사가 수익은 많지만 제일 어렵고 힘들다고 해 도전해봤습니다.”귀농귀촌 돕는 지역조직 활성화그는 혼자만 많이 수확하는 것으로는 즐겁지 않았다. 자신처럼 어려움을 겪는 초보 농군들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며 유명무실하던 철원군 귀농귀촌연구회를 활성화시켰다. 2023년 3월 이 연구회 회장으로 선출됐다.약 100여 명의 회원들은 귀농자들이 현지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중개자 역할을 자임한다. 정기 모임과 회원농가 일손돕기, 성공적으로 정착한 회원들의 체험담 공유, 외부 인사 초청특강, 회원 수확물 공동판매사업 등을 통해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귀농귀촌을 꿈꾸는 동년배들에게 조언을 주신다면.“은퇴 2~3년 전부터는 준비해야 합니다. 각 시군에 설치된 농업기술센터의 귀농귀촌 교육을 반드시 이수하세요. 초보 농업인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줍니다. 가능한 연고가 있는 지역을 선택하는 게 좋습니다. 고향이나 친척, 친구가 있는 곳, 전에 땅을 사놓은 곳, 멘토를 찾고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으세요. 그렇게 땅을 구입하고 현지 사람들과 교류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준비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집니다.”작물선택에도 요령이 있다.“작물은 수익이 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수익이 잘 나야 농사가 재미있어져요. 수익으로 봉사를 할 수도 있고, 생활비로 써도 됩니다. 농사를 전업, 직업으로 생각하면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죠. 귀농은 충분히 제2의 직업이 될 수 있어요. 시간을 가지고 알아보고 준비하고 결정하시길 바랍니다.”―귀농자들 중에는 지역 텃세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많던데요.“텃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다만 입장을 좀 바꿔놓고 생각해봐야 해요. 밖에서 들어온 사람 입장에서는 텃세지만 오랜 세월 지역에서 살아온 분들 입장에서는 낯선 불편함이 있어요. 가령 마을 발전 기금만 해도 그래요. 마을 기금은 오랜 세월 주민들이 여러 형태로 십시일반해 마련해놓고 사용해온 거거든요. 밖에서 들어와 그동안 아무 기여도 없었는데 똑같은 혜택을 누리려 하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거죠. 저는 귀농인들에게 늘 ‘내가 먼저 주민들께 다가가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평생동지’ 같은 누나―대형팜의 연간 매출은 어느 정도인지요?“순수입 5000만 원 정도를 목표로 합니다. 될 때도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1명 쓰느냐 2명 쓰느냐에 따라 달라져요.”철원군에는 베트남에서 계절노동자 형태로 인력이 들어온다. 그의 경우 1년 단위로 1명 또는 2명을 고용해 일을 해왔다. 외국인 노동자 임금은 철저히 국내 임금과 같아야 한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국 임금의 10배쯤 된다고 한다.―다른 작물을 재배할 계획은?“파프리카만 해도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전문성을 갖춰야 비용을 최소화하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거든요.”취재 내내 큰누님이 어깨를 다친 그 대신 차를 운전해주고 커피를 타주며 세심하게 도왔다. “누님은 제 평생 동지 같아요. 2년 전 매형이 돌아가셔서 혼자 계시니 마침 제가 와서 든든해하시기도 하고요.”―가족은요?“각자 바쁩니다. 아들은 미국에서, 딸은 부산에서 직장 다녀요. 아내는 아들이 있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지내는데 곧 손주가 나올 거라서 그곳에 머물 것 같습니다. 저도 겨울에 다녀올 계획이구요.”‘평생 현역’이 꿈―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적어도 75세까지는 제 손으로 농사지을 수 있다고 봅니다. 힘들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인력을 더 쓰면 되겠지요. 그때는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청소년대상 멘토 역할을 하면서 교회 봉사활동에 힘을 쏟을 것 같습니다. ‘평생 현역’으로 사는 게 꿈이예요. 하하.”귀농귀촌연구회장으로서 목표는 토마토 파프리카는 물론, 오이 생강 대파 등 작목별로 수익모델을 만드는 것. 귀농인들끼리 도움을 주고 받으며 지역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바람도 있다.그는 “귀농해 대파농사를 짓는 분이 있는데 초보 농군이라 실패가 잦았습니다. 하지만 저희 연구회 농업기술분과위원장의 컨설팅을 통해 지난해에는 큰 수익을 창출했어요. 귀농은 우선 좋은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저희 연구회 회원들같은 멘토를 만나신다면 성공이 보장되죠.”이런 그의 관심은 지방소멸이나 인구감소까지 확산된다. “철원 인구가 약 4만 명인데 매년 1000명씩 줄고 있다고 해요. 많은 귀농인들이 철원으로 와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철원=서영아 기자 sya@donga.com}
100년 가까운 일생 중 74년을 언론인으로 산 일본 요미우리 신문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1926∼2024) 전 주필의 타계 소식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2000년대 초반 그를 다룬 ‘언론과 권력’이라는 책을 읽었다. 평기자로 입사한 그가 승승장구하면서 요미우리를 1000만 부 발행 규모의 신문사로 키우고 ‘미디어의 제왕’이 된 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한 책이다.일본 정언유착의 대명사 제2차 세계대전 때 반(反)군국주의 소년, 도쿄대 학생 시절 공산당 지역 책임자였던 와타나베는 공산당을 탈퇴하고서도 여기서 배운 전략적 사고를 평생 간직했다. 1950년 당시 신문업계 3위였던 요미우리신문에 입사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1, 2등 신문사보다 규모가 작아야 정상에 오르기 쉽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쿄대 시절 절친이던 우지이에 사이이치로(氏家齊一郞)에게 입사를 강권해 훗날 사내정치에 힘을 보태게 했다. ‘나베쓰네’라는 통칭으로 불리며 언론과 정치판을 쥐고 흔들던 그의 비결은 치밀한 인맥 관리였다. 정치부 기자 시절 자민당 2인자였던 오노 반보쿠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정계의 정보를 얻어 미디어를 관리했다. 한일관계 막전 막후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노를 이용만 한 것은 아니다. 오노가 세상을 뜨자 그의 정부를 위해 고인의 뼛조각을 몰래 훔쳐다 줄 정도로 세심하게 충성을 바쳤다. 이런 그가 미국 워싱턴 지국장으로 발령받았을 때의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웬만하면 견문을 넓힐 기회로 반길 만도 했지만, 그는 유배당한 것처럼 괴로워했다.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기 위해 몸부림쳤고, 본사 정치부와 연락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영향권에서 떠난 부하를 체크하기도 했다. 이 시절 신경안정제나 위장약 등을 달고 살았다. 마키아벨리즘에 심취했던 그는 사내 권력투쟁에서 자기 사람이 아닌 기자는 철저하게 짓밟았고, 자신에게 고개 숙이는 기자는 파격적으로 키워줬다. 주변에는 권력의 속성에 대해 “굳이 시키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처리해 주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누구라도 자신을 앞지르는 일도 용납하지 않았다. 절친 우지이에가 그보다 먼저 차기 톱으로 부상했지만 사주로부터 오해를 사 1982년 계열사인 니혼TV 부사장으로 ‘좌천’(당시의 개념이다)되기도 했다. 그 뒤 우지이에는 2011년 니혼TV 회장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문에 돌아오지 못했다. 나오키상 수상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의 패러디 단편집 ‘촌장선거’에는 그를 모델로 한 다나베 미쓰오(78)가 등장하는 챕터(‘오너’)가 있다. 고령의 권력자인 그는 권력의 종말을 뜻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패닉장애를 겪으면서도 현직에서 떠날 줄 모른다. 낮이건 밤이건 환한 방에서 지내며 잠도 자지 않았다. 권력자에겐 혼자 남겨지는 것이 가장 두려운 법이다. 실제 와타나베는 사망 직전까지 병원 침상에서 현직 주필로서 사설을 점검했다. 98세 주필을 모신 신문사나 그 자리를 지켜낸 와타나베, 모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마지막까지 현직 지킨 권력의 화신 한 해가 저물고 나라를 뒤흔드는 소식들에 황망함을 느끼는 요즘, 개인적으로는 한 시대가 끝났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특히 역대 대통령 중 상당수가 감옥행으로 끝나는 제왕적 대통령제, 그것을 만들어낸 1987년 체제가 종언을 고할 때가 됐다. 당시 청년 학생과 넥타이 부대로 대표되는 시대정신은 자기 손으로 직접 국가 리더를 뽑는다면 이상적인 국가가 실현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쏠리고 여러 부작용을 낳는 구조가 탄생했다. 와타나베의 타계 소식은 과거처럼 언론과 정치를 소수가 막후에서 주무르는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도 제왕적 권력이 세상을 좌우하는 일을 더 이상 용인해선 안 된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정말 한 시대가 끝났다.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sya@donga.com}
인생 ‘100세 시대’라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조금 우울해진다. 통계청 생명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2023년 출생아 기준 83.5세(남성 80.6세, 여성 86.4세). 하지만 건강수명은 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건강수명 조사가 이뤄진 2022년 생명표 기준으로 보면 기대수명 82.7세 중 유병 기간을 제외한 기간은 65.8년에 불과하다. 질병이 있더라도 주관적으로 본인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기간은 72.2년이었다. 통계상 노인들은 마지막 16.9년간 골골거리며 병원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된다는 뜻이다.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비법은 없을까.일본의 정신과 의사 와다 히데키(和田秀樹·64)는 고령자 전문 정신과 의사로서 35년 간 6000여 명의 고령 환자를 접하며 깨달은 점을 저서로 내놓았다. 사실 그는 저서가 50권이 넘는 다작작가에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이중 ‘70세는 노화의 갈림길(2021)’ ‘80세의 벽(2022)’ ‘70세의 정답(2022)’ ‘60세부터는 멋대로 살아라(2022)’ 등 2020년대 이후 쏟아낸 연령을 주제로 한 저서들은 일본에서 수십 만 부씩 팔리며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일부는 한국에서도 번역출간됐다. 이 책들에서 참고가 될 만한 대목을 소개해본다.‘버럭’ 60대, ‘감정 제어’에 유의해야60대는 신체적으로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뇌는 다르다. 50, 60대 무렵부터 ‘버럭’ 화를 내는 사람이 늘어난다. ‘부모님이 나이 들수록 화를 잘 내신다’거나 ‘나이 들면서 성격이 거칠게 변하셨다’고 하는 얘기를 적잖게 들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폭주(暴走)노인’ ‘노인성 분노조절장애’가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고령자에게서 흔한 분노조절 장애의 배경에는 뇌 전두엽 변화가 있다. 뇌 앞부분에 있는 전두엽은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는 기관으로 논리적 사고, 언어 기능도 담당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기관인 셈. 문제는 이 전두엽이 뇌에서 가장 빨리 노화가 시작된다는 점. 빠르면 40대부터 위축이 시작된다. 알코올이나 고탄수화물증, 스트레스에 의해 손상이 가속된다. 전두엽이 위축되면 감정 콘트롤 능력이나 의욕, 창조성이 확 줄어든다.충동제어 기능 전두엽, 뇌에서 가장 빨리 노화50, 60대가 되면 전두엽 기능은 본격적으로 떨어진다. 이 시기에는 ‘성격의 첨예화’ 현상도 일어난다. 평소 화를 잘 내던 사람은 더욱 화를 내게 되고, 의심많은 사람은 더 의심이 깊어진다. 완고했던 사람은 더 옹고집이 된다. 온화했던 사람은 더 부드러워진다.적응력도 떨어져 새로운 정보나 사고방식에 대해 유연성이 사라지고 보수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젊은 직원이 낸 아이디어에 대해 “그런 식으로 해서 일이 되느냐. 철없는 소리” 식의 반응을 보이는 ‘꼰대’가 이래서 생겨난다.와다 박사는 60대가 신체와 뇌의 기능을 유지하려면 계속 부지런히 사용해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장 권장하는 것은 적어도 70대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70세는 노화의 갈림길70대 초반까지는 인지장애(치매)가 되거나 환자가 된 사람은 10%도 채 안 된다. 이 시기를 의도적으로 노력하며 보낸다면, 신체도 뇌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남의 간병을 받는 환자가 되는 시기를 늦출 수 있다.와다 박사는 “70세부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몸과 마음의 건강이 언제까지 유지되느냐가 결정된다”고 지적한다. 70대에도 신체적 기능은 비교적 건강하지만, 전두엽 노화로 의욕이 저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70대는 집에 틀어박혀 활발하지 않은 생활에 젖어 들기 쉬운 연령대다. 그러므로 노화를 늦춘다는 측면에서도 여전히 사회활동을 하는 게 좋다. 나이가 들면 은둔 생활을 하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70세 넘어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단숨에 뇌 기능, 운동 기능을 노화시켜 버릴 위험이 있다. ‘은퇴하면 팍 늙는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언제까지나 현역으로 생활한다는 자세가 노화를 늦추고 만년을 건강하게 보내는 비결이다.”다만 노년의 일하는 방식은 젊을 때와는 달라야 한다. 돈이나 효율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살려 누군가를 돕고 사회에 도움을 주는 데 가치를 두는 게 바람직하다.80세 이후 행복의 비결80대쯤 되면 신체 능력과 뇌 기능에서 개인차가 커진다. 치매가 진행돼 대화가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라톤을 완주하거나 현역으로 경영을 하거나 학자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70대 무렵까지는 현역 때와 그다지 변화 없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80대를 넘기면 대부분 늙어간다. 늙음을 멈출 수는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늙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가 80대 이후 반드시 찾아온다.”‘80세의 벽’에서 와다 박사는 “70대가 늙음과 싸우는 시기라면 80대는 늙음을 받아들이는 시기”라고 말한다. 80세 이후 행복의 비결은 건강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늙음을 받아들이는데 있다는 것.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소중히 여기면 삶을 긍정에너지로 채울 수 있다.와다 박사는 또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는 과도한 강박과 욕심은 스스로를 압박하고 무리한 절제로 이끌어 결과적으로 행복하지도, 건강하지도 못한 삶을 만든다고 경계했다. 당장 내일 생이 마감돼도 후회되지 않도록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것이다.<80대가 유념할 것>⦁걸어라. 걷지 않으면 못 걷게 된다. ⦁씹으면 씹을수록 몸과 뇌는 깨어난다. ⦁혈당 혈압치는 낮추지 않아도 된다. ⦁고독, 홀가분한 시간을 누리자, ⦁좋아하는 일을 한다.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자. 틀어박히면 뇌가 우울해진다. ⦁싫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라. ⦁잠이 오지 않으면 자지 않아도 된다. ⦁하고싶은 말은 해버려야 마음이 가볍다. ⦁노인의 변신은 무죄…변절을 두려워말라. ⦁천진난만은 늙음의 특권이다. ⦁배우기를 멈추면 늙는다. ⦁‘렛 잇 비’로 산다. ⦁80세가 넘으면 건강검진은 하지 않아도 된다. ⦁병과 싸우지 말고 병과 함께 살아간다. ⦁80세 이후는 대형병원 전문의보다 동네의사와 상의한다. ⦁장기별 진료보다 통합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약은 몸이 좋지 않을 때만,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암은 절제하지 않는다. ⦁혈압은 80대 이후에는 높아도 된다. ⦁먹고 싶은 음식은 참지 않고 먹는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뇌 전두엽이 자극돼 뇌가 젊어진다. ⦁술은 마셔도 되지만 정도껏. ⦁담배도 피워도 된다. ⦁운동은 적당히, 산책이 제일이다. ⦁우울증은 몸과 마음을 움직여 예방한다. ⦁삶의 보람을 찾지 않는다. 즐기다 보면 보이니까. ⦁치매를 늦추려면 약보다 머리를 써야 한다 ⦁전두엽 위축으로 의욕이 사라진다면 뇌를 써서 자극해준다. ⦁오래 살기가 중요할까, 남은 인생이 중요할까. -‘80세의 벽’에서“젊게 오래 살고 싶으면 노년 다이어트는 금물”와다 박사는 “오랜 세월 많은 고령자를 진찰했는데 고령에도 건강한 사람은 통통한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실제 나이보다 10~20년 젊어 보이는 사람은 대부분 통통한 체형이다. 반대로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사람은 마른 체형인데, 식사에서 단백질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 고령자의 단백질 부족은 노화를 앞당기고 면역력 저하도 초래한다. 때문에 암을 비롯한 다양한 질병 위험이 높아진다.”그는 사람을 오래 살게 해주는 의료 기술과 건강을 유지해주는 의료 기술은 다르다고 한다. 예컨대 콜레스테롤은 ‘장수의 적’이라 불리지만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사람일수록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 콜레스테롤은 남성호르몬 재료이기도 한데, 고령남성은 이 수치가 높을수록 몸과 머리가 건강하다. 고령자의 경우 혈압이나 혈당치가 비교적 높을수록 머리가 맑다. 반대로 혈압약이나 혈당약을 복용해 수치를 인위적으로 낮추면 머리가 멍해진다. 고혈압이나 고혈당이면 염분과 식단을 제한하게 되는데 삶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기운없는 노인이 되기 십상. 오래 살기가 중요할까, 남은 인생이 중요할까약을 먹더라도 의사가 권장하는 수치가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량을 떨어뜨리지 않는 정도로 조절하는 게 낫다. 흐릿한 정신으로라도 오래만 살지, 맑은 정신으로 남은 인생의 질을 확보할지 생각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아울러 와다 박사는 “70대부터는 영양 부족에 주의하는 게 우선”이라며 “체중 조절을 한다면 의학적 기준 체중보다 약간 통통한 쪽에 목표를 맞추라”고 권한다.실제로 국내에서도 뚱뚱한 사람이 사망률이 낮다는 연구결과가 최근 나왔다. 지난달 11일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연구원은 20여 년 전 건강검진을 받은 성인 847만 명을 추적 관찰한 결과, 한국인 비만 진단 기준인 ‘체질량지수(BMI) 25 부근에서 사망 위험이 가장 낮더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몸무게(㎏)를 신장의 제곱(㎡)으로 나눈 값인 BMI는 비만 판정의 기준. 한국은 BMI 18.5~22.9를 ‘정상’, 23~24.9를 ‘비만 전단계’(위험체중·과체중), 25 이상을 ‘비만’으로 분류하고 있다. 예컨대 신장 170cm인 사람의 BMI지수를 예로 들면 체중 60kg이면 20.7, 70kg이라면 24.2, 80kg 이라면 27이 된다. 이 조사에서는 BMI 18.5 미만과 35 이상에서 사망 위험이 가장 높았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가까운 회사 동료가 최근 퇴직했다. “다른 건 아쉽지 않은데, 수십 년간 함께했던 동료, 이 좋은 사람들과 아무 관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무척 상실감이 느껴진다….” 역시 몇 달 뒤 퇴직을 앞둔 다른 동료의 얘기도 절절했다. 그런 때마다 빠지지 않고 “우리끼리라도 퇴직 후 연 1, 2회 정기적으로 만나자”는 다짐이 이어졌다. 올 6월 퇴직한 또 다른 동료의 송별회에선 그의 지인인 타사 사진기자가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어 줬다. 그의 지시에 맞춰 전체 부원이 배경이 돼 박수를 치고 주인공은 꽃다발을 들고 웃음 짓는 ‘행복한 그림’이 나왔다. 본인 역시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사진기자는 쓸쓸하게 사라지는 퇴직자에게 조금이나마 따뜻한 기억을 남겨주고자 기회가 닿는 대로 사진 촬영 봉사를 다닌다고 했다. 퇴직 전 평소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을 많이 찍으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를 통해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배운 느낌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그도 사무실을 뒤로하고 낙향했을 것이다. 퇴직자의 회한과 ‘불완전연소감’ 미련 퇴직을 앞두면 누구나 회한이 적지 않다. 수십 년 한 우물을 파온 ‘운 좋은 직장인’이라면 그 상실감은 더욱 크다. 어쩌면 이런 풍경도 조만간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요즘 청년 세대에게 커리어 관리법은 이직을 거듭하며 몸값을 높이는 게 상식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5060 구세대들은 여전히 회사에 정 떼지 못해 힘들고, 퇴직 이후 삶은 막막하다. 100세 카페를 통해 만나 온 ‘이런 인생 2막’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과거를 말하다 가슴속 꾹꾹 눌러둔 회한에 힘들어하기 일쑤였다. 더러는 한 맺힌 응어리였고, 때로는 가슴 먹먹한 복받침이기도 했다. 커리어에 미련이 남았거나 잘나가다가 푹 꺾어지는 계기가 있었던 사례자들은 특히 그랬다. 소위 말하는 ‘불완전연소감’이다. 일본의 직장소설에는 승승장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회사로부터 버림받은 중장년 이야기가 정말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런 혼돈의 시기를 거쳐 결국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냈다. 평생 해온 일의 연장선에서 강연이나 저술 등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분들도 있다. 퇴직한 뒤 아예 새로운 기술을 배워 ‘○○기사’ 자격증을 따낸 뒤 인생 2막을 걷는 분들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이었다. 30여 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그림 서예 사진 등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김영균 씨(77)가 대표적이다. 그는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후 벌써 3년이 다 됐는데, 매년 전시회 소식을 전해 온다. 올해도 11일부터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갖는다.“잘 살아왔어” 자신에게 트로피를 60세 넘어 처음으로 해외여행에 도전한 김원희 할머니(74)는 매년 한 달 정도 본인이 모든 계획을 짜서 배낭여행(실제로는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을 다닌다. 최근에는 처음으로 자가 출판 플랫폼을 통해 오롯이 본인 힘으로 책을 냈다고 알려왔다. 제목은 ‘여행은 현재 진행 중: 운 좋으면 120살까지’인데, “자가 출판이다 보니 홍보가 잘되지 않는다”며 하소연했다. 나이 듦을 받아들이지만 ‘그냥 할머니’는 아쉬워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그는 쉬지 않고, 하지만 무리하지도 않고 꾸준하게 무언가를 벌인다. 이런 분들에게 불완전연소감이란 없다. ‘30년 근속 부장님’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멋진 할머니’ 등, 각자 자기 인생에 최선을 다한 증거라면 세상이 알아봐 주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트로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성공과 출세도 좋지만 “잘 살아왔어”라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의 인정과 응원, 격려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더 크고 험한 세상으로 출발하는 선후배 동료들에게 따스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2일 오후 5시 충북 청주시 오창호수공원 야외공연장. 점차 어둠이 내려앉고 늦가을의 찬 기운이 스며들 무렵, ‘지토벤’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재즈 피아니스트 지성철 씨(65)의 무대가 시작됐다.계단식 관객석을 채운 100여명의 시민들이 쏟아낸 환호와 함께 그의 손이 건반 위를 날아다녔다. 올드팝부터 대중가요, 클래식 소품의 친숙한 곡조들이 화려한 재즈의 선율로 변신해 공중에 울려퍼진다.60세 이상 시니어예술가들이 만드는 거리 공연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장애를 딛고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지토벤의 존재는 최근 알게 됐다. 작곡가이자 재즈 피아니스트, 한때 대학 강단에도 섰던 그는, 60세를 넘기고는 음악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피아니스트가 돼 있다. 6일 수원의 전문공연장 ‘윤아트홀’에서 그를 만났다.● 20대, 생애 첫 작곡으로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그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1986년 난생처음 작곡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유열)’가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다.“유열 씨와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죠. 저는 그 무렵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손님 중 한 분이 제 반주로 ‘마이웨이’를 부르고 싶다고 청해왔어요. 평소 반주하는 걸 싫어하는데 이상하게 그 날은 해주고 싶었어요. 노래를 참 잘 부른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그 손님이 유열이었어요. 비슷한 또래이니 친구가 됐지요.”한달 쯤 뒤 유열이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으니 곡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왔다.“대중가요곡은 한 번도 쓴 적이 없다고 고사했는데 고집이 엄청나더군요. 좋은 가사를 가져오면 해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더니 두어 달 뒤 정말 직접 쓴 가사를 들고 상기된 표정으로 왔더라구요. 그걸 들고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 3일만에 메인 테마를 완성했어요. 상은 탈 것 같았지만 대상까지 받을 줄은 몰랐죠.”1989년에는 대학가요제 금상곡 ‘사랑은 이별을 위해(이은영)’와 동상곡 ‘그대 떠나도(이재영)’를 작곡해 한때 ‘가요제 전문 작곡가’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1990년대부터는 전국 순회공연과 재즈피아노 독주회 등을 통해 재즈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유열 씨와의 인연도 이어져 유열컴퍼니가 주관하는 가족뮤지컬 ‘브레멘 음악대’의 작곡을 전담했다. 이 작품은 2006년부터 10년간 50만 관객을 동원했고 중국에서는 ‘음악이 좋은 뮤지컬’에 주어지는 송레이상도 받았다.유열 씨는 6년 전부터 폐섬유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최근 폐 이식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다. 그에 앞서 모친상을 당했지만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중했다.“(유 씨는)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절제하는 사람인데 어쩌다 그런 병에 걸렸는지.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하루빨리 완쾌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예전에는 유열 씨와 공연을 많이 한 것 같은데, 타격은 없었나요?“제가 직접 공연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거기에 몇 년간 코로나 상황까지 겹쳐 좀 힘들었습니다. 유튜브를 통한 라이브 공연도 해보고 교재도 쓰고. 그러다 실버 마이크도 알게 됐지요.”● 아들의 장애 이겨낸 어머니의 투쟁피아노를 배운 계기를 묻자 길고긴 사연이 쏟아져나오는데, 고비고비마다 그의 어머니의 고민과 사랑이 읽혔다. 지 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백내장’ 진단을 받고 초등학교 입학 전에 7차례나 눈수술을 받았다.“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첫돌 조금 지나 눈수술 받고 병원에 누워 있었는데 침대 난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더래요. 옹아리가 아니고 제법 음정과 박자가 있는 노래였다고, 그래서 ‘이 아이는 무조건 피아노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 먹으셨다고 합니다. 본인이 여고 합창단 솔리스트 출신이라 그런 감이 오셨다고요. 눈이 불편한 제 앞날을 걱정해 뭐라도 다른 재능을 키워주고 싶으셨던 거겠죠. 어머니는 제가 5살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려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습니다.”어느덧 학령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가 지 씨가 갈 곳은 맹학교라고들 했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당시 종로구 효자동에 있던 맹학교 입학원서를 써놓고도 장안의 안과를 다 뒤졌대요. 무교동 공안과에서 최종산 박사님을 만나 6번째, 7번째 수술을 받았는데 다행히 성공한 겁니다.”덕분에 시야가 조금은 확보됐다. 초등학교 반배정이 다 끝난 시기였지만 교장을 찾아가 읍소해 겨우 입학했다. 이후 용산중학교를 거쳐 서울예고로 진학했다.―지금 시력은 어느 정도입니까?“오른쪽은 0.08 정도, 왼쪽은 망막박리로 시력이 없어요. 한쪽 눈으로도 잘 살고 있습니다.”● 즉흥 재즈 피아니스트 ‘지토벤’―‘지토벤’이란 애칭은 언제부터…“1990년대말 경, 유열 씨하고 대구 공연을 갔는데, 관객석에서 이례적으로 피아노 연주 신청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즉석에서 신청곡을 받았더니 유 씨가 하는 말이 ‘여러분 베토벤 잘 아시죠? 베토벤하고 비슷한 친구입니다. 지토벤입니다’라고 추켜세워 줬습니다. 듣기가 썩 나쁘지 않아서 이후 계속 써먹고 있어요. 하하.“서울예고는 피아노가 아니라 성악으로 입학했는데, 대학 입시를 한 달 앞두고 ‘신경성 성대 경련증’이란 병이 찾아와 또다시 좌절을 맛봤다. 지금도 그는 일상적인 대화때에도 발성이 자연스럽지 않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면서 ‘내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혼자 세계적 피아니스트들의 곡을 듣고 즉흥 연주 공부를 했지요. 국내 대학에는 그런 걸 가르치는 곳은 없더군요. 그러다가 재즈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1980년 당시 무교동에 유명한 클럽이 많았어요.”하루 30분짜리 연주를 3차례씩 했는데 보수는 일반 회사원의 두 배가 넘었다.“내 음악을 연주하는 즐거움을 매일 느꼈습니다. 다른 일 할 생각 없이 ‘지금 이 생활이 너무 좋다’는 충만감을 가지고 지냈지요.”● 60세 넘어 실버마이크 프로그램에서 힘 얻어―요즘에는 거리 연주를 많이 하신다고요.“3년 전부터 5월~11월 사이엔 실버마이크(충청권) 공연에 주력합니다. 지역문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인데 매월 마지막 수요일인 ‘문화가 있는 날’ 주간에 야외공연이 집중됩니다. 저는 올해 10번 무대에 섰습니다.”‘실버마이크’ 사업을 통해 숨어있던 실버예술가들의 존재감이 빛나게 됐다. 다만 이들은 매년 엄격한 오디션을 통해 실력과 기량을 인정받아야 무대에 설 수 있다.충청권 실버마이크를 관장하는 문화기획사(문화충동)에 따르면 그는 현장에서 신청곡을 받아 즉흥연주를 하는 등 관객 중심의 무대를 진행해 호응이 매우 좋다고 한다.“공연에서 늘 제가 맨 끝 순서라 앙코르도 한두곡 씩 합니다. 제게는 관객과의 소통이 가장 즐겁습니다.”모든 일을 혼자 헤쳐가야 하는 답답한 상황도 실버마이크가 풀어줬다.“그동안 공연장 섭외부터 홍보, 티켓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제가 직접 했어요. 당연히 효율도 떨어지고 전문성도 부족하죠. 실버마이크 활동을 하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내년부터는 정부나 지자체 문화재단 등의 지원을 챙겨 광고도 하고 공연도 제대로 할 생각입니다.”유럽 등 문화선진국에서는 어디를 가나 쉽게 진짜 예술을 향유하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 우리도 이같은 시도가 이뤄지는 건 반가운 일이다.● 나이 드니 ‘찾아가는 공연’하게 돼실버마이크가 다른 거리 공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청남대에서 월 4회 정기 연주 의뢰가 들어왔고 공연을 보러 왔던 금산여고 교사는 11월 하순 학교 연주를 요청해왔다.“5교시에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연주를 듣게 됩니다. 문화체험 수업이겠죠. 보수를 떠나 학생들에게 제 음악을 선물한다는 게 기쁩니다.”요즘 지 씨는 ‘청춘마이크’ 참가자인 예술가와 콜라보 무대를 선보이고 아이돌 그룹 뉴진스의 ‘버블검’을 재즈곡으로 연주하는 등 젊은 층과의 소통에도 열심이다.―최신 아이돌 곡도 소화하시던데 연습을 얼마나 하신 건가요.“어떤 곡이건 세 번 정도 들으면 연주할 수 있어요. 평소 연습은 손 푸는 정도만 합니다. 즉흥 연주다 보니까 집에서 연습을 해버리면 실제로 공연할 때 김이 빠지거든요.”―연주는 체력도 필요한 일인데….“전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그냥 100%가 나와요. 저도 불가사의라고 생각할 정도예요. 주변 사람들도 일단 피아노 앞에 앉으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하더군요.”―60대의 음악은 젊은 시절과 어떻게 다릅니까.“예전엔 보여주는 공연을 많이 했습니다. 화려한 테크닉을 앞세웠지요. 이제는 진솔하면서 내공이 꽉 찬 공연으로 바뀌고 있다고 저 스스로 느낍니다. 또 젊을 때는 사람들이 저를 불러줘서 공연을 했는데 이제는 제가 스스로 찾아가는 공연을 해야 해요. 음악가가 나이가 들었다고 재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연륜이 가져다주는 깊은 맛이 추가되지요. 실버마이크에 참여하는 다른 분들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오랜 세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갈고닦아온 분들이어서 그 깊이가 다릅니다.”● 노년은 예술 즐기기에 딱 좋은 나이사실 공연자도 듣는 이들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다.“시니어들께 젊은 때 바빠서 즐기지 못했던 예술을 다시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여러모로 여유가 생기는 노년은 예술을 공부하고 즐기기에 딱 좋은 나이입니다.”―재즈라도 주로 대중적인 곡을 연주하시네요.“음악은 기분 좋고 힐링되고 감동받으려고 듣는 건데 생판 모르는 곡을 들으면 계속 집중해야 해서 스트레스를 받기 십상입니다. 저는 귀에 익은 곡에 제가 가진 영혼을 투자해 ‘그 곡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하고 감탄하시도록 연주하고 싶어요.”그의 유튜브채널 ‘지토벤 음악다방’에는 직접 연주한 곡들이 적지 않게 올려져 있다. 예컨대 ‘엘리제를 위하여’의 재즈풍 연주는 조금은 껄렁한 듯, 묘한 맛과 재미가 있다. 동요인 ‘학교종’도 상당히 멋스러운 재즈곡으로 변신한다. 최근에는 독집 연주 음반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세미 트로트 가요 작곡에도 손대고 있다고.그가 쓴 트로트곡 ‘인생 그림’은 자신의 이야기이자 실버세대에 대한 헌사다.‘강물 같은 시간 속에/지난 날 되돌아보면/고된 날도 많았지만/내가 너무 잘 살았구나…중략…앞만 보며 걸어가요/멋진 꿈이 거기 있어요/아름다운 내 인생그림’. 65세 실버뮤지션 지토벤이 그려 나갈 인생 그림이 기대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일본의 리더십 교체와 한일관계 전망’ 주제로 일본 전문가 초청 세미나한일의원연맹이 주관하는 제 12차 한일현안연구회가 15일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주제는 ‘일본의 리더십 교체와 한일관계 전망’. 주호영 한일의원연맹 회장은 “11일 열린 일본 특별국회에서 자민당 이시바 시게루 현 총리가 재임됐으나 제2차 이시바 정권의 앞날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며 근래 일본의 급격한 정국 변화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일본 전문가를 초청한 배경을 설명했다.이날 세미나에는 호시 히로시(星浩) 정치저널리스트와 하코다 데쓰야(箱田哲也) 아사히신문 전 논설위원이 참석해 일본 정국상황을 분석하고 향후 한일관계를 전망했다. 하코다 전 논설위원은 동지적 관계를 쌓은 ‘기시다-윤석열 정상’ 시대를 거쳐 ‘이시바- 윤석열 정상 시대’로 이행하는 한일관계가 내년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해 발전적인 논의를 하자는 입장에는 일치하고 있으나 완전해결되지 못한 역사문제 등 시련도 계속되고 있다고 짚었다. 호시 히로시 정치 저널리스트는 일본 정치는 짧은 시간에 ‘아베 1강’에서 총선거에서 참배한 소수여당정권까지의 변용이 이뤄졌다며 이런 가운데 일본 사회에는 좌우 포퓰리즘과 일부 배외주의 조짐도 일고 있다고 지적했다. 호시 저널리스트는 또 △대중국 포위망으로서의 한미일 연대 △미국 트럼프 정권에 대한 대응 △ 한일민간교류 확대 △국교 정상화 60주년 과제 등을 앞으로 양국 앞에 놓인 숙제로 꼽았다. 이날 세미나에는 주호영 한일의원연맹 회장, 민홍철 간사장, 윤호중 고문 등 십여 명의 의원연맹 소속 의원들이 참석해 열띤 질문과 토론을 벌였다. 한일 현안연구회는 한일의원연맹이 2021년부터 주관해온 세미나 모임으로 회를 거듭할수록 소속 의원들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교육부 국립국제교육원과 일본 공익재단법인 일한문화교류기금이 주최한 ‘2024년 한·일 고교생 교류 방한 연수’ 프로그램 연수단이 7일 동국대를 방문했다. ‘한국 온 김에 동국일주’라는 이름을 붙인 이 행사에는 일본 고등학생 88명과 동국대 재학생 40여 명이 참가해 피자와 치킨을 함께 하며 화기애애한 교류를 다졌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송정현 동국대 일본학과 교수가 ‘한일문화콘텐츠산업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송 교수는 “문화콘텐츠 산업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고 기존 산업 대비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과 일본은 각자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문화콘텐츠 역량을 지니고 있다”며 “양국이 협력 체제와 공동 네트워크를 강화할 경우 문화산업 발전에 공헌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송 교수는 “한일 관계의 미래를 담당할 학생들이 문화콘텐츠 분야에서의 교류를 통해 상대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한일 관계 구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정년 연장’ 논의가 돌연 뜨거워졌다.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 의무가입 연령을 64세까지로 늦추는 방안을 내놓자 그렇다면 정년도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행정안전부는 소속 공무직 근로자 정년을 최근 65세로 올렸다. 대한노인회 이중근 신임 회장은 노인 기준을 75세로 상향하자는 제안을 내놓아 파문을 던졌다.우려도 적지 않다. 가장 큰 걱정은 실제 고용을 담당할 기업의 부담과 청년 일자리에 미칠 영향이다. 이런 때 일본 사례를 참고하자는 의견이 단골처럼 나온다. 마침 지난주 일본의 지인이 정년퇴직 인사를 왔다. 그의 사례를 보면 60세 이상 고용의 민낯을 엿볼 수 있다.뒤늦게 불붙는 정년 연장 논의한일 관계 전문가인 그는 올 7월 말 40년 다닌 직장을 만 65세로 퇴직했다. 이번 방한은 재직 중 교류했던 한국인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이뤄졌다. 필자가 도쿄 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할 무렵 만 60세를 앞뒀던 그는, ‘달리 할 일이 없으니’ 회사 일을 계속한다고 했다. 직원이 60세가 되면 일단 퇴직시킨 뒤 재고용하던 그의 회사는 당시 정년을 65세로 바꿨다.그는 평소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60세가 된 순간 급여는 이전 대비 40% 선으로 줄었다. 그나마 이전의 재고용 방식보다 두 배로 늘어난 급여였다. 그 대신 업무 강도도 세졌다. 지인은 “하는 일은 그대로인데 급여는 절반 이하라 불만들이 많았다. 나도 마지막 2년은 너무 힘들어 그만둬 버릴까 여러 차례 생각했다”고 했다. 이처럼 고령 직원에게 취업 기회를 주기 위한 일본 기업들의 노력은 대체로 대폭 줄인 급여 덕에 이뤄진 경우가 많다.현재 일본 기업의 99% 이상이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재고용 중 하나를 택해 65세까지 고용을 보장해준다. 법정 정년은 아직 60세다. 2004년 정부가 기업들의 ‘65세 고용 확보 조치’를 의무화하면서도 법제화는 하지 않았다. 기업들의 부담을 의식했기 때문이다.저출산고령 사회에서 고령자 고용 연장은 언젠가는 이뤄질 일이다. 생산인구가 쪼그라드는 ‘정해진 미래’ 앞에서 경제의 규모와 성장률을 유지하고 복지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고령자가 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버려지는 ‘잃어버린 세대’가 나올 수 있다. 특히 국민연금 수급 시기와 법정 정년의 격차에서 발생하는 소득 공백기가 문제다. 올해 퇴직자까지는 3년이지만 내년부터 4년, 2029년부터는 5년으로 갈수록 벌어진다.1998년 국민연금법을 개정해 2013년부터 연금 수급 연령을 4년마다 한 살씩 올리기로 결정할 당시, 관계자들은 아마도 이때쯤이면 고용 형태도 바뀔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소관 부처가 ‘직무유기’를 한 셈이다.‘정년 연장’보다 ‘계속 고용’부터그런 점에서 늦었지만 정년과 관련해 다양한 사회적 논의가 나오는 건 바람직하다. 스스로 ‘노인’임을 부정하는 대한노인회 주장에서는 똑같은 생산 주체로서의 역할과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더 큰 그림도 읽힌다. 직장에서 50세만 넘어도 퇴물로 취급받는 최근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런 움직임들은 시니어들이 일하는 분위기 조성에 큰 힘이 될 것이다.앞서 소개한 일본 지인에게서는 주어진 소명을 다해 냈다는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대학에서 특강 요청을 받았고 사회복지법인을 돕는 일도 시작한다며 의욕을 보였다. 퇴직 다음 달부터 연금을 받은 건 물론이다.이 대목에서 문득 인생 선배들의 충고가 떠오른다. 100년 넘게 살아본 김형석 교수는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로 60∼75세를 꼽았다. 이 나이쯤이면 더 노력해 뭔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아직 세상과 인생을 즐길 기운은 남아 있는 황금기라는 얘기다. 소중한 60대를 어떻게 만들어 갈지, 선택은 그야말로 본인의 자유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신들의 숲’이라 불리는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1990년대 말 도로가 뚫렸지만 지금도 대중교통수단은 하루 6대 들어오는 버스가 전부다.학생이 없어 폐교됐던 이곳 황둔초등학교 창평분교가 3년 전부터 할머니들의 예술 창작공간인 ‘할매발전소’로 환생했다. 학교에 다닐 기회가 없었던 할머니들이 이곳에서 한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렸다. 지난달 27일 할매발전소의 세 번째 전시회 ‘내 이름에게-나의 이름에게 보내는 헌사’에 다녀왔다. 전시회는 지난달 13~29일에 열렸는데, 금~일요일 3일간만 문을 여니 총 9일간의 전시회다.갈망했던 학교에서 여든 넘어 한글 공부전시장 입구부터 올해 처음 한글을 배운 할매 8명이 삐뚤빼뚤 쓴 글씨들이 맞아준다. 고구마를 찍어내고 ‘고구마구마’ ‘못생겼구마’ 같은 문구를 곁들인 그림 액자도, 자유롭게 그린 그림들도 보인다.산골의 척박한 환경에서는 농사 외에는 먹고살 길이 없었다. 1930~40년대생인 할머니들은 손가락 마디가 망가질 정도로 쉬지 않고 일했지만 대부분 평생 소원이던 학교를 가보지 못했다. 본인 이름으로 제대로 불려본 일도 많지 않았다.18세에 시집와 할매발전소 근처에 사는 서월이 할머니(86)는 3남매를 이 학교에 보냈지만 정작 본인은 자기 이름을 써볼 기회조차 없었다고 한다.“내가 ‘가’자를 몰랐어요. 더도 말고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다녔더라면 내 인생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해요. 내 자식들은 어떻게건 학교에 보내고 싶어 돈을 벌려구 나오니 세상이 깜깜하더라구요. 보따리 장사를 하며 누구에게 물건을 떼어오고 또 보내려면 그 이름이라도 알아야 하니 이 사람 저 사람한테 겨우 물어가며 글씨 하나, 산수 하나씩 익혔어요. 정작 내 이름 석 자는 못 배운 세월이었어요.”그 옛날 촌에선 주로 맏딸들이 희생됐다. 조계화(87) 할머니도 그랬다.“난 맏이라 학교를 아예 못 갔고 바로 밑 동생은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어요. 그 아래 동생들은 초등학교 졸업했고. 남동생들은 중학교까지 공부했지요. 동생들 국어책 들고 순이 철수하는 거 그냥 보기만 하고, 그 책이 왜 이렇게 부러워. (내가) 보려면 또 동생들이 제 거라 하지. 또 볼 새도 없어. 일하느라고. 그 그림이나 좀 봤으면 좋겠는데, 밥해 먹여야지, 빨래해 입혀야지, 옛날 우리 어린 시절 살 적에 진짜 힘들었어.” 이런 조 할머니는 한글공부 수료장을 받고는 “내 저승가서도 잊지 않을께”라고 다짐했다.한글공부에 진심인 이윤택(81) 할머니도 맏딸이었다.“동생들 돌봐야 하니 부모님이 아예 학교를 안 보냈지. 형제들 중에 나만 못 갔어요. 그래도 여기서 가르쳐주면 한 자라도 배울 수 있어 좋아요. 더 좀 배웠으면 좋겠는데. 집에서 혼자 하는 건 잘 안 되더라고….”이 할머니는 주 2회 수업을 하고 나면 집에서 열심히 복습해 이제 TV자막도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전시장 입구의 제목도 그의 글씨다. 캘리그래피를 공부한 한글 교사에게서 배웠다.전시회에는 할머니들이 남기고 싶은 모습을 촬영한 ‘여든 너머’ 프로젝트의 작품들, 할머니 13명이 현대미술 수업을 통해 만들어낸 작품들도 있다. 프로그램은 매년 할머니들과 상의해 결정한다.“올해 현대미술 수업은 앙리 마티스, 호안 미로, 데이비드 호크니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이야기와 이들의 기법을 알려드리고 할머니들 본인이 표현하고 싶은 걸 하시게 했어요. 수업을 18회나 했는데 다들 너무 재미있어 하시고 13명중 개근하신 분도 많아요.”(심지혜)전시회의 특징은 할머니들이 무대의 주인공이고 젊은 예술인들이 스태프로 뛰어다닌다는 점. 매년 20~30명의 청년예술인들이 프로젝트를 도왔다.할매발전소는 3년째 매년 봄에서 여름에 걸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가을에 그 결과물로 전시회를 열었다. 첫해에 할머니 9명, 지난해엔 16명, 올해는 연인원 22명이 참가했다. “산골 할머니가 우주 섭리 꿰뚫어”4년 전, 고요했던 산골 할매들의 삶에 청년들이 쳐들어왔다. 정확히는 이 마을 안호녀(86) 할머니에게 손녀딸 심지혜 씨와 친구들이 자꾸 찾아오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시국에 혼자 살던 할머니는 이웃과의 소통단절에 갈수록 의기소침해지고 있었다. “할머니들 대부분이 혼자 사시는데 코로나 시국에 정말 힘들어 보였어요. 모이지도 못하고 고스톱도 못 치고 함께 밥도 못 먹고. 할머니가 몇 시간이고 방에 우두커니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며 ‘큰일났다’ 싶더라구요.”(심지혜)김영채 심지혜 석양정 41세 동갑내기 3인방은 2019년부터 지역 이야기를 수집하고 다양한 문화예술과 연결하는 작업을 해왔는데, 바로 이 작업을 신림면에서 하기로 했다. 2021년 ‘로컬리티:’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디자인과 영상컨텐츠는 김영채 대표, 전시기획과 현지네트워크는 심지혜 큐레이터, 아카이빙과 텍스트 콘텐츠작업은 석양정 작가로 역할분담이 이뤄졌다. 회사명에 붙은 ‘콜론(:)’은 쉬어간다는 의미라고.이들은 할머니들과의 대화를 통해 지역의 특색을 가장 잘 드러내는 존재는 바로 할머니들이라고 확신했다. ‘할머니의 가치’ ‘할머니의 존재감’에 주목했다.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내어주고 자신의 것은 챙기지 못한 주름진 빈손, 혹독한 세월을 살아온 훈장같은 주름이 가득한 얼굴과 닳아버린 손마디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평생 산골에서만 사신 할머니들이 우주의 섭리를 꿰뚫고 있었어요. 척박한 땅을 일구고 가족에 헌신해온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뜨거운 생의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모으면 문화예술 컨텐츠가 될 수 있고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봤습니다.”(김영채 대표)조금씩 쇠약해지는 할머니들할머니들을 모시고 하는 작업은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이 많았다. 한글 수업을 하기 위해 김영채 심지혜 두 사람은 구역을 반씩 나눠 차로 할머니들을 모시러 가고 수업이 끝나면 모셔다 드리는 일을 했다. 한시간 수업을 위해 모셔오고 바래다드리는 데 각각 1시간씩 걸리는 식이다.―2년 전 기사를 보면 전시의 주인공인 할머니들이 직접 도슨트 역할을 하도록 준비한다고 했는데 잘 안 된 것 같아요.“첫 해에는 괜찮았던 할머니들이 건강악화가 생각보다 심했어요. 다리도 아프시고 그간 수술도 많이 하셨고. 하려다가 못하게 된 사업이 많아요. 첫해에는 ‘할매가 잘 차린 밥상’ 촌캉스를 했어요. 청년들이 할머니가 가꾼 텃밭에서 식재료를 따오면 할머니들이 레시피를 알려주시고 청년들이 요리해서 밥먹으며 할머니들과 대화도 하는 프로그램이죠. 외국인들도 찾아오고 인기가 좋았어요. 할머니들도 재미있어 하셨죠. 그런데 할머니들이 아프시면서 그 이후로는 힘들어졌어요.”원주역에서 40분을 버스를 타건 운전을 하건 찾아와야 하는 장소이다 보니 관람객이 많지는 않지만 한번 와본 사람은 반복해서 찾아온다고 한다. 할머니나 고향 향수 위안 힐링 아날로그적인 전시…. 이런 텍스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 작품을 사겠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지난해 한 점, 올해 두 점을 팔았다. 할머니 작가 본인과 상의해 승낙을 받고 판매액은 고스란히 할머니들에게 전달했다.아쉽게도 폐교 건물은 올해 이후로 사용하지 못한다.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게 가장 큰 숙제다. 만나는 할머니마다 이구동성으로 “내년에도 계속했으면 좋겠는데”라며 걱정했다.“이장 협의체와 면에서 힘을 보태주시겠다고 해요. 사실 빈 공간은 꽤 있는데 누가 어떻게 승인해 줄 건가를 푸는 문제거든요.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심지혜)현재로서는 시내에 있는 초등학교의 빈 공간을 활용하는 방안이 유력하다.“면장님이 먼저 제안해 주셨어요. 사실 신림에 비어 있는 공간이 몇 개 있는데 쉽지 않아 보였던 것 같아요. 학교는 아이들이 줄면서 생긴 빈 교실 하나면 되니까요. 교육부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의지를 갖고 추진 중이셔서 희망을 가져봅니다.”“노인세대, 지역 예술의 주체”김영채 대표는“할매발전소는 지역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인이 예술생산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전환에서 시작됐다”면서 “노인세대가 지역사회의 해결과제가 아닌 예술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한다. ―3년 해보니 어떠세요?“앞으로 할 일이 더 많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이제야 알아봐 주세요. 처음 저희가 설명드렸을 때도, 전시회를 보러 오셔서도 ‘이게 뭔가’하는 분위기였는데 3년 동안 꾸준히 계속하고 참여하는 할머니들이 너무 좋아하시하니까요. 이장님 같은 분은 저희가 다른 공간 찾아야 한다니까 ‘이런 인재들이 다른 데로 빠져나가면 우리 어르신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혜택을 못 받지 않느냐, 너무 아깝지 않냐’하시면서 계속 면사무소에 압력을 넣어주고 계세요.”―아무래도 할머니들이 쇠약해지고 인지도 안 좋아지시고 이런 과정이 쭉 진행이 되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을까요?“저희도 그게 걱정이긴 해요. 그래서 항상 ‘저희가 할머니들한테 예술은 가르쳐드릴 수 있는데 건강은 못 챙겨드리니까 꼭 건강 챙기시라’고 말씀드려요. 저희가 3년째 뵙고 있잖아요. 첫해 때보다 다들 무릎도 안 좋아지고 다리도 안 좋아지고 청력도 안 좋아지시는 게 보이죠. 그래도 이런 활동을 통해 그런 속도가 조금 더뎌지잖아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이들의 작업을 보다 보면 약간 숙연해진다고나 할까 경건해진다고 할까. 곧 사라질 존재들의 마지막 기록을 남기는 작업에서, 마음 한 켠에 숨겨둔 이별의 아쉬움과 각오가 느껴지기도 한다.‘길도 글도 전기도, 내 이름 석 자도 어느것 하나 쉬이 허락되지 않던 깜깜하기만 했던 시절을 지나 여든 너머 이제야 나는 내 이름에게 도착했어요. 결국 학교에는 가지 못했지만 나는 이제 옛 학교였던 할매발전소와 나란히 살아요. 처음 써본 내 이름, 그 곁에 우리 강아지, 아롱이 이름도 사이좋게 써봤어요.’ (서월이-나의 이름에게 보내는 헌사)원주=서영아 기자 sya@donga.com}
1일 일본에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신임 총리가 취임하자 그에 대한 많은 칼럼과 논평이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뒤늦게 한마디 보태고자 한다. 한일 언론에 회자되는 “상대가 납득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을 도쿄 특파원 시절 세상에 내보낸 당사자로서, 그간 함구해 온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서다. 2017년 5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인터뷰 기사가 나간 뒤 일본에서는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산케이신문이 발언 경위를 이시바에게 캐물었고 그는 “‘사죄’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서로가 납득할 때까지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얼버무렸다. “그렇다면 동아일보에 항의하라”는 산케이신문의 요구에는 “그럴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이 옥신각신은 자기들끼리 이뤄졌고, 필자는 뒤늦게 지면을 통해 이를 읽었다. 다만 기사대로 해석하면 동아일보가 ‘오버’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인간 존엄 훼손, 해선 안 되고 죄송한 일” 다행히 필자에겐 56분 분량의 인터뷰 녹음 파일이 남아 있다. 이번에 다시 들어봤다. 일본군위안부 관련 구절은 두 단락에 걸친 그의 발언을 합친 것이었다. 그는 일본 내에서 나오고 있는 여러 주장을 주욱 나열한 뒤 “하지만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미국인이건, 인간의 존엄에 상처를 주는 것은 해선 안 될 일이고 죄송한 일”이라고 했다. 필자가 ‘사실 몇 차례 사과도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하다’고 하자 “바로 그 점을 꼭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알아줄 때까지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받아 필자는 다시 당시 아베 신조 총리의 접근 방식(‘정부출연 배상금 10억 엔 냈으니 모두 해결됐다’거나 할머니들에게 사죄 편지를 쓸 계획에 대해 ‘털끝만큼도 없다’고 한 국회 답변 등)이 한국 내에서 몰고 온 반발을 지적했다. 이에 그는 “어떤가요. 정말 일본인이 성실하게, 인간의 존엄을 훼손한 것에 대해 죄송했다고 말하면 알아주시긴 할까. 그런 식으로 노력해 온 일본인은 많았다. 그러나 결국 알아주지 않더라는 좌절감, 실망감이 적지 않다. 아무리 성실하게, 마음으로부터 죄송하다고 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기사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문장 일부가 생략됐지만 정확한 워딩은 이랬다. 잘 들어보면 그는 ‘사죄’라는 단어보다는 ‘죄송하다(申し訳ない)’ ‘사과하다(謝る)’ 등 경어나 구어체 표현을 많이 썼다.일관됐던 7년 전, 17년 전 인터뷰 당시 ‘녹음 파일이 있다’고 나서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삼가기로 했다. 그러잖아도 당내 ‘왕따’였던 이시바가 매우 곤란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한일 관계가 살벌한 분위기에서 일본 정치인들 모두가 기피하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해 준 것도 고마웠다. 실제 인터뷰 도중 필자는 ‘(기사가) 당신에게 피해를 줄까 솔직히 우려된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돌아보면 그 10년 전인 2007년 11월에도 그는 후쿠다 야스오 정권의 방위상으로서 한국 언론 최초로 본보와의 인터뷰에 응해 줬다. 2006년에는 도쿄 유학생들의 공부 모임에 불려 와서 일본 정치에 대해 논의하고 간단한 회식을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한국인과의 만남에 항상 열린 자세였다. 그는 ‘공부하는’ 정치인이다. 예컨대 2002년부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는데, 2007년 인터뷰에서 그 이유에 대해 ‘역사 공부를 한 뒤부터 차마 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군사 오타쿠’적인 면이나 이상주의적 면모도 있지만 지방창생상을 맡아 ‘인구 감소가 최대의 안보 위기’라며 지방 살리기를 주창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회한 정치인들을 상대로 조율하고 설득하고 이끄는 권력자 역할이 적성에 맞을지는 의문이다. 이시바 총리가 역사 문제나 이웃국가 관계에서 소신을 펼 수 있으려면 넘어야 할 산이 참 많아 보인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퇴직한 뒤 꼭 일해야 해? 그냥 좀 쉬면 안돼?’ 그간 주변에서 이런 질문들이 적지 않았다. 퇴직 뒤에도 사회적 의미를 찾거나 생계에 보태기 위해 바쁘게 뛰는 선후배들을 보며 던지는 질문이다. 그래서 찾아봤다. 좀 느긋하게 ‘노시는’ 분은 없으려나? 유튜브 ‘퇴직학교’ 채널에서 발견한 이종섭 씨(61)가 비슷해보였다. 삼성그룹 홍보분야에서 35년간 일하고 지난해 7월 정년퇴직한 그는, ‘매일 공연보는 남자’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무대 삼매경에 빠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한다’는 원칙하에 분주한 그의 퇴직후 1년 이야기를 들어봤다. ● 매일 공연 보는 남자10일 오후 서울 성북구 보문동 성북50플러스센터의 한 강의실. 50~70대 남녀 6명이 모여앉아 돌아가며 대본을 낭독한다. 매주 화요일 모인다는 아마추어 연극인 모임 ‘정통연극연구소’다. 첫 대본읽기라 역할 상관없이 한줄 씩 돌아가며 읽는다. 한참 읽어가다가 누군가가 말했다. “이거 대본만 읽어서는 무슨 메시지인데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게요. 몇 번 읽어봐야 할 것같아요.“이종섭 씨는 이 모임 총무다. 지난 봄 이곳에 개설된 연극 수업에서 만난 멤버들이 4월 ‘택시 드리벌’이라는 20분짜리 연극을 무대에 올렸고, 헤어지기 아쉬워 모임을 이어가기로 했다.‘매일 공연보는 남자’. 자신의 블로그 제목처럼 그의 하루는 공연으로 시작해 공연으로 끝난다. 매일 아침 블로그에 전날 본 공연에 대한 리뷰나 새로운 공연정보, 할인정보 등을 올린다. 가끔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에세이 형태로 쓰기도 한다. 오후에는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받으러 다니고 저녁에는 공연을 보러 간다.“종일 제가 좋아하는 일정으로만 짜여 있죠. 이중 제가 직접 해본 분야가 연극이었습니다. 근 석달 간 수강생 모두가 노력해서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저로서는 꿈이었던 연극 무대에 서 본 것이 제 퇴직 후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35년만의 자유그는 직장생활 35년 대부분을 홍보쪽에서 일했다. 기자들을 상대로 회사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일이다. ―만 60세로 정년퇴직하셨으니 직장인으로서 천수를 누린 셈이네요. “퇴직할 때 둘러보니 입사 동기(1988년)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어요. 드문 케이스죠.” 불완전 연소감에 시달리는 퇴직자들이 적지 않은데 비해 그는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마치 군대나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 같았다. 말하는 내내 회사 밖 세상을 ‘사회’라고 표현하는 것도 공교로웠다.―퇴직 당시 심경은?“정년 6개월 전부터 보직을 내려놨습니다. 회사가 배려를 해 준 거죠. 처음엔 걱정이 많았어요. 내가 하루 세끼 밥은 먹을 수 있을까. 누구랑 어떻게 놀지, 내가 명함이 없어지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정해진 날 들어오는 월급이 없어진 상태에 대한 두려움…. 퇴직한 분들 이야기도 들어보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 지금까지 살아온 걸 돌이켜보기도 하고….”무엇보다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어릴 때 기억들을 소환한 것이 도움이 됐다. 초등학교 소풍 때 앞에 나가 사회 보고 오락 담당하고 노래하고 춤추던 기억이 가장 즐겁게 떠올랐다. 여기에 퇴직을 석 달 앞둔 무렵, 난생 처음 본 뮤지컬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다룬 창작 뮤지컬 ‘영웅’을 보게 됐는데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역시 내 길은 저런 무대, 혹은 그런 걸 즐기면서 사는 삶 아닐까. 그때부터 수시로 공연을 보고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연장 가는 것 자체가 즐거웠어요. 예약하면서도 너무 짜릿했고 공연을 기다리고 공연장 가서 티켓 발급받는 그런 과정들이 너무 설렜습니다. 그러면서 ‘이 길이다’라고 깨달아나간 거죠.”―그 전에는 공연을 본 적이 없나요?“직장생활 35년 동안은 없어요. 영화 정도는 봤지만 연극 뮤지컬 오페라 발레 같은 건 거의 못 봤죠. 홍보 생활이라는 게 수시로 터지는 이슈에 대처하는 거잖아요. 주말이고 주중이고 문화생활은 불가능하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뭐였더라?”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지망하던 방송사보다 먼저 삼성그룹 시험에 붙었다. 첫 근무처는 삼성항공. 6개월 정도 영업에서 일했는데 홍보 쪽에서 일하던 동기가 “홍보할 사람이왜 거기 가 있느냐”고 했다. 그가 입사동기 같은 차수 200명 중 ‘학습부장’(오락부장)을 맡아 ‘잘 노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끼’가 있다고 말한다.“성동50플러스에서 들은 강좌 중에 적성 검사가 있었는데 ‘예술 지향’이 엄청 강하게 나왔어요. 검사를 하는 선생님이 ‘지금까지 조사한 중에 처음 봤다’고 할 정도였죠. ‘끼’가 데이터로도 증명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죠.”―퇴직 후에도 일을 하거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나이 60에 일을 그만두는 건 너무 빠르다는 우려도 해 봤고, 35년간 종사해온 홍보와 마케팅의 경험을 살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고민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연이란 걸 찾고 나서는 홍보는 과감하게 접어버렸습니다. 퇴직 초기 취업을 해볼까 해서 공연 분야에 이력서를 내보기도 했는데 절 찾는 곳은 없더군요. 현재는 취업을 해야 된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습니다.”―돈을 안 벌어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으신 건가요?“이 부분은 와이프에게 감사할 일이죠. 제가 퇴직 후에 물질적으로 집에 도움을 줘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와이프는 당연한 듯이 ‘그런 생각할 필요 없다, 당신 좋은 거, 하고 싶은 일 하라’고 하더군요. 그 한마디가 제게 엄청난 힘이 됐습니다. 그래서 와이프를 믿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이들 다 키웠고 부부 생활비 말고는 돈 들어갈 곳도 없어요.” ● “퇴직 전 가장 큰 걱정은 부인과의 소통”그는 부인과 단둘이 산다. 1남1녀 자녀들은 모두 출가했다. 퇴직할 때 가장 큰 걱정은 부인과의 소통문제였다고. ―어떻게 해결했나요.“대화가 달라졌습니다. 요즘은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한시간 가까이 대화를 하는데 전에 없던 일이죠. 그 한시간 동안 저는 전날 공연장에서 만난 사람들, 또 공연장에서 있었던 일, 공연 내용 등을 시시콜콜 얘기해줍니다.제 화법도 달라졌어요. 과거에는 주로 ‘남 탓’ ‘아내 탓’ 하는 화법이었다면 지금은 제 얘기 위주로 해요, ‘모든 잘못과 원인은 나한테 있다’는 전제를 까는 거죠.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는 내가 부족했다’거나 ‘내가 방법을 잘 몰라서 그런 거 같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오히려 와이프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가장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제일 소중한 아내와의 소통 문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의외로 퇴직 후 배우자와의 관계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대화방식 변화는 어떻게 터득한 건가요?“어딘가 강좌에서 배운 것 같습니다. 퇴직 후 남자들이 참 많이 변하고 있고 변할 수밖에 없어요. 제 또래 동창이나 회사 퇴직자모임 같은 데 가면 한결같이 듣게 되는 얘기가 ‘우리는 영식님이 돼야 한다’는 거예요. 하루 세끼 먹는 ‘삼식이’, 두끼 먹는 ‘두식이’가 아니라 밥을 오히려 해서 바치는 ‘영식님’이죠. 지금까지 밥을 얻어먹었으니 이제는 내가 앞치마 두르고 밥을 해서 와이프에게 줘야 한다는 얘기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집안일 거의 안 했거든요. 지금은 아침에 밥은 집사람이 해주지만 저도 청소하고 분리수거하고 설거지도 합니다. 역할분담은 굳이 안했지만 가사의 절반 이상은 제가 하는 것같아요.”● 가성비 공연 관람 노하우 대방출그는 두 달 전부터 국민연금을 2년 당겨 수령하고 있다. 그 돈으로 자신의 생활비와 용돈을 충당한다. 이중 공연에는 월 30만 원 정도를 쓴다고.―공연을 그렇게 많이 보는데 그 돈으로 가능한가요?그는 기다렸다는 듯 티켓꾸러미를 가방에서 꺼냈다. “올초부터 8월까지 관람한 표들이예요. 146회를 봤어요. 연극이 제일 많지만 오페라나 발레, 뮤지컬도 있어요. 올해 쓴 공연비는 월평균 27만 8000원입니다. 회당 1만5000원 안팎이죠.”―오페라나 뮤지컬은 비쌀 텐데요.“오페라 R석은 몇십만원도 하죠. 다만 좌석 등급이 낮은 건 1, 2만 원대 표도 있어요. 예술의 전당이라면 4층에서 보는 게 제일 싸죠. 전 그런 자리에서 봐요. 망원경을 사용하면 1층에서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하거든요. 블로그에는 1, 2만 원짜리 시야에서 본 관람 후기를 올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돈 없어도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겠구나’라고 용기를 얻는 분이 생기죠. 돈 없이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 편에서 감상을 적어주고 또 그런 티켓을 어떻게 구입했는지 소상히 알려드립니다.”―할인 노하우를 좀더 소개해 주신다면.“일단 어떤 공연이 있을지 꿰뚫고 있어야 돼요. 모든 공연은 오픈 날짜에 맞춰 예매하면 조기 예매 할인을 해줍니다. 또 공연 끝나기 일주일 정도 전부터는 ‘막공 할인’에 들어갑니다. 보고 싶은 공연인데 돈이 없다면 그걸 기다리는 거죠. 대학로 공연 전문 사이트들은 대부분 50%~70% 할인해줍니다. ‘플레이 티켓’ 사이트의 경우 할인은 기본이고 무료 공연이 항상 4~5개는 있어요. 무료인데 예약만 하면 됩니다. 또 성남아트센터나 세종문화회관에서는 거의 매달 ‘만 원의 행복’ 또는 ‘천 원의 행복’같은 이벤트를 합니다. 예술의 전당 국립국악원 등 유료회원가입을 하면 회비 이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공연장도 많습니다. 제가 블로그를 통해 자세히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아요. 문화가 꽃피는 곳에서 사회도 발전합니다.” ●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었네”―회사의 기억은 어떻게 남아 계세요? “35년간 가족들을 먹여 살린 직장인데 감사하죠. 다만 회사를 떠난 느낌은 마치 알을 깨고 나가는 것 같은 해방감이예요. 나는 보이지 않는 큰 창살 속에서 정해진 시간을 살아냈다. 이제 나는 자유다… ” ―‘나와보니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었네’ 하면서….“너무 좋아요. 이렇게 즐길 게 많고 그런 것들이 삶을 얼마나 활기차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지. 집사람도 무척 좋아하죠. 제가 돈은 안 벌어와도 항상 즐겁고 행복해하니까요. 제가 했던 말과 행동이 다 글로 나오는 것도 재미있어 하죠. 그렇다고 제가 몇백 만 원씩 쓰고 다니면 좀 짜증스럽겠지만, 한 달 30만 원, 그것도 자기 연금 받아서 쓰는데 뭐라 하겠습니까?”-연극의 매력은.“연극을 통해 내가 꿈꾸고 희망하는 또 다른 삶을 무대에서 구현해 볼 수 있다는 것, 오랜 과정을 거쳐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 때 느껴지는 희열, 그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사실 설 수 있는 무대가 있든 없든 내가 이 루틴한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또 다른 다양한 삶을 살아본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매력인 것 같습니다.” -동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뭔가를 찾으시라고, 만약 찾았다면 그 일을 주저 없이 과감하게 밀어붙여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경우 두가지가 도움이 됐습니다. 첫째 자신의 과거 모습으로 돌아가보는 것. 어머니께 한번 여쭤보세요. 내가 정말 뭘 좋아했는지. 둘째 좀 돈을 들이더라도 자신의 성격 분석을 한번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연극과 봉사 병행하는 삶이 목표―앞으로 계획은.“오늘 연습하던 분들과 내년 경기도 용인에서 열리는 시민연극제를 목표로 무대를 만들 계획입니다. 연극 지도하는 강사님을 모시고 5060세대의 순수한 극단을 만들어보려 해요. 연극 강의를 할 준비를 하고 관련 책을 쓰려고 출판 과정에 대한 교육도 받고 있습니다. 또 청소년 상담 봉사를 하기 위해 청소년지도사 자격증을 땄고 지금은 사회복지사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연극과 봉사를 병행해가고 싶습니다.”―청소년상담에 관심 가지는 이유가 있나요.“제 청소년 시절의 경험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때 교회에 다녔는데 너무 심하게 빠져들었습니다. 누구 하나 잡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인생의 방황기에 누군가가 나를 잡아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번에 아동센터 가서 어린 친구들하고 얘기해보니 길 밖의 청소년들이 너무 많고, 도움이 필요한 곳도 무척 많습니다.”그의 블로그 프로필에는 ‘허당완보’ 라는 호와 함께 이런 자기소개가 올라와 있다. 35년/ 직장생활을 끝내고/ 인생 2막/ 남은 인생을/ 어릴 적 꿈이었던/ 노래와 춤 몸짓/ 공연과 함께 합니다/ 나의 묘비명에/ 이렇게 씁니다/ 한평생/ 공연을 즐기고 나누며/ 행복했어요. 안녕~서영아 기자 sya@donga.com}
2024년 ‘한일축제한마당 in seoul’이 2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다. 올해 20회를 맞는 한일축제한마당은 서울과 도쿄에서 각각 열리는 민간교류 행사로 올해 테마는 ‘축제에서 피는 우정의 꽃’이다. 올해 축제에서는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의 주제가를 부른 세계적 성악가 메라 요시카즈와 크로스오버 테너 박완이 함께 ‘천의 바람이 되어’ 등을 부르는 우정의 무대를 선보인다. 2025년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공식 캐릭터 ‘먀쿠먀쿠’가 인사하고 한일 아이돌 그룹인 아일릿과 아이비, 한일가왕전 일본대표(가노 미유, MAKOTO),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한 단발교복소녀팀 아방가르디가 공연한다. 한일 훌라댄스와 한일소년소녀합창단 등 세대를 아우르는 출연진이 무대에 오른다. 한일 전통의상, 일본 차와 꽃꽂이 등을 체험하거나 양국 길거리 음식을 맛보고 전통주를 시음할 수 있는 부스도 준비돼 있다. 한일축제한마당은 2005년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해 ‘한일 우정의 해’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한국 측은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시 등이, 일본 측에서는 주한일본대사관 관광청 일본정부관광국(JNTO) 등이 후원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일축제한마당 2024 in Seoul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나이 60이 되니 모두 평등해지더라.’ 일본 베스트셀러 소설 ‘끝난 사람’ 후기에서 읽은 구절이다. 작가 우치다테 마키코(75)가 환갑 전후 부쩍 늘었던 각종 동창회에서 느낀 점이라고. 학창시절 미남 미녀였건 아니건, 공부를 엄청나게 잘했건 아니건, 사회에서 잘나갔건 아니건, 모두 적당히 주름지고 구부정한 모습에 사회적으로는 ‘끝난 사람’이 돼 있더라는 것. 돈이 많고 적음도 이 나이쯤 되면 자기 책임이고, 길어진 여생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신세다. 인생이 잘 풀렸던 사람일수록 이 평등은 받아들이기 불편하다. 그러나 추억과 싸워 봐야 이길 수는 없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품위 있게 물러나기’를 말한다.품위 있게 물러나는 자세 투자계 현인 워런 버핏의 장수 비결도 적당히 내려놓은, 자유롭고 소박한 삶의 표본과도 같다. 그는 94세 나이에도 매일 콜라와 햄버거 같은 정크푸드를 먹지만 건강과 장수를 누린다. 포천지(誌)는 그 비결로 △8시간 수면 △카드 게임 △‘아무것도 없는 날’이 포함된 가벼운 일정 △하루 5∼6시간 독서와 사색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아는 것을 꼽았다. 고령자가 급증하는 한국에서도 노년의 삶에 대한 조언이 넘쳐난다. 필자가 격주 연재하는 ‘100세 카페’에서도 자신의 삶을 찾아 열심히 살아가는 고령자들을 소개했다. “궁금했던 동년배들 삶을 엿보게 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한다. 6070세대 삶에 대해 이렇게 관심이 많았던 시기가 없다. 과거에 없던 ‘젊은 노인’들이 출현했고 이들이 어떤 길을 만들어 나가느냐는 미래 세대에도 영향을 줄 터다. 덤처럼 주어진 수십 년 세월을 어떻게 보람되고 즐겁게 만들어 갈 것인가. 이렇다 보니 노년의 의무를 강조한 ‘○○해야 한다’ 유가 강조된다. ‘나이 들면 근육운동을 해야 한다’거나 ‘얼마 이상 돈을 모아야 한다’거나, 적절한 일과 지적 자극이 권장되기도 한다. ‘○○대가 되어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 유의 겁주는 내용도 적지 않다. 노인으로 사는 일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것이다.“60부터는 대충 멋대로 살자” 노년의 여러 숙제를 강조하다 지쳐서일까.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사회를 맞은 일본에서는 노년에는 ‘대충대충,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주장이 대안처럼 떠오르는 듯하다. 정신과 의사 호사카 다케시는 저서 ‘대충 사는 노후를 권함’에서 “제2의 인생이 주는 스트레스를 버리라”고 충고한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를 버려라 △인간관계도 적당히 대충 △작은 일에도 지치는 스스로를 용서하자 △‘돈 부자보다는 시간 부자’ 정신으로 △건망증, 잊을 수 있음이 노인의 힘이다 △무리하지 않고 쓸데없이 애쓰지 말고 ‘적당히 대충’ 사는 게 좋다고 강조한다. ‘이부자리는 매일 개지 않아도 된다’ ‘규칙적인 식사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 등 깨알 같은 조언도 있다. ‘70세의 벽’ ‘80세의 벽’ 등 노년 전문 서적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정신의학자 와다 히데키도 ‘60세부터는 멋대로 살자’라는 신서(新書)에서 ‘몸과 마음, 환경이 격변하는 60대는 제2의 인생을 즐기기 위한 터닝포인트’라며 건강이건 식생활이건 돈이건 인간관계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고 한다. 목차를 보면 △일부러 병원에 갈 필요는 없다 △마른 체형보다 조금 통통한 체형이 장수한다 △혈압도 콜레스테롤도 조금 높은 쪽이 머리가 맑다 △고령자야말로 고독을 즐겨라 등이 있다. 노년의 삶에 정답은 없다. 누군가로부터 성적표를 받는 것도 아니다. 각자 좋은 대로 살고 스스로 만족하면 최고 아닌가. 운동을 하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다고 운동을 하지 못하는 현실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다. 낙관주의와 함께 몸과 마음, 삶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남들은 하던 일도 접는다는 나이 일흔에, 이석대(71) 씨는 불쑥 책방을 내겠다고 나섰다. 가족을 제외한 모두가 반대했다. 잘 나가던 서점들도 줄줄이 문닫는 판에, 책 중에서도 가장 안 팔린다는 시집만 파는 책방이라니. 하지만 고집과 뚝심은 그의 힘의 원천. 지난해 5월 ‘산아래시(詩)’ 라는 간판을 단 독립서점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왜 가족은 반대하지 않았을까.“워낙 오래 전부터 제가 말해왔거든요. 더 나이 들면 작은 책방 하나 내겠다고.”(이석대 씨)그의 딸 현경 씨도 “당연히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사실 그의 존재는 딸 현경 씨가 최근 보내준 책 ‘일흔살의 창업일기’를 통해 알게 됐다. 표지에는 “은퇴한 뒤/‘여생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는/이 땅의 6070님들께/ ‘일흔’/ 이 출렁이는 기운을 바칩니다”라고 씌여 있다. 100세 카페에 딱 맞는 컨셉이다.그는 인터뷰에 응할지 여부를 놓고 무척 망설였다. 책 저자는 ‘이동림’이라는 필명(아명)이었고 그는 이름 없는 책방지기가 되고자 줄곧 본명을 숨겨왔다는 것. 겨우겨우 인터뷰를 약속한 이튿날 아침, 다시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책방이 알려져 자매 책방들의 기를 살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조명이 맞춰지는 건 아닌 것같다’는 얘기. 결국 인터뷰는 자매 책방 대표님들도 모시고 지난달 26일 진행했다. 그가 이 책방 주인으로서 본명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전국의 시인들에게 시집 우송받아 판매시집전문책방 ‘산아래 詩’는 대구시 남구 현충로 앞산 카페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엔 카페로 쓰이던 13평 공간을 빌려 책꽂이를 설치했다. 나머지는 시집들이 저마다 색깔과 내공을 뽐내며 공간을 채워준다. 초록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된 간판로고. 꼬부랑 전선줄로 늘어뜨려진 전등까지, 소박하지만 세련된 장식품들은 모두 그의 수제품이다. ―책방 열고 1년 여,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고맙다’였다고요.“시인들은 시집을 보내며 ‘고맙다’고 하시고 손님들도 고맙다고 하셨죠. 많은 시인들이 ‘시인되고 처음으로 내 책이 책방에 걸렸다’고 감격해 했습니다. 그 정도로 독자를 기다려온 시인들이 많습니다.”시집만 파는 책방이 개업을 앞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자작 시집을 챙겨들고 찾아오거나 택배나 소포로 보내는 시인들이 늘었다. 어쩌면 책방이라기보다 참여시인들의 작품집을 한곳에 모아놓은 ‘시집 전람회장’이다. 멀리 지방에서 감격에 겨워 책을 싸들고 찾아오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책방에 걸면 어울릴 것 같다며 그림을 보내주는 시인도 있었다. 산아래시에는 8월말 현재 350여 명의 시인이 회원으로 등록해 있고 시집 390종이 진열돼 있다. 200여 명의 시인들이 모인 단체카톡방도 운영된다.“지난해 6월에 책 판 돈을 처음으로 송금했는데, 기껏해야 몇천 원씩이죠. 그런데 그걸 받아본 한 분이 단톡방에 ‘내 시집 팔렸다! 제주도에 땅 보러 가자!’라고 올리더군요. 하하.”시가 우리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출판사를 통하지 않고 전국 시인들과 직거래를 통해 위탁판매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시인들이 시집을 10부씩 보내주면 책방이 전시 판매하는 역할을 하는 것.주인을 찾지 못하고 장롱 속에 쌓여 있던 책들이 보내지니 동네책방의 고민인 사입 비용이나 재고 부담이 없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이 책방이 망할까봐 모두가 걱정인 듯하다. 책을 보내주며 ‘책값은 필요 없으니 서점 운영에 보태라’는 시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고집있는 원칙주의자다. 책값을 송금할 계좌번호를 주지 않으면 책을 진열해주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또 처음 보내온 10권이 다 팔려도 한동안은 새로 주문하지 않겠다고 미리 밝혔다. 아직 안 팔린 다른 시집들도 기회를 얻어야 하므로.운영원칙은 더 있다. 시집들은 독자들을 고르게 만날 수 있도록 수시로 자리를 옮겨가며 진열된다. 손님이 ‘좋은 시집’을 추천해달라고 해도 절대 응하지 않는다. 책방에 비치된 시집이 모두 다 ‘좋은 시집’이기 때문. 시집에 집중하기 위해 커피나 소품을 팔지 않는다. 시인들에게는 팔린 책값의 60%를 매달 정산해준다.지난해 6월 서울시인협회 간부가 찾아와 이런 시스템 설명을 듣고는 “출판물 유통구조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수도권에서도 이런 책방 운영을 고민해보겠다”고 했다고. 대구수필가협회는 비슷한 방식으로 ‘에세이 전문책방’을 검토한다고 했다.―시인들과는 처음에 어떻게 연결이 된 겁니까?“모르겠습니다. 시인들끼리 아는 시인들을 초대해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개념의 서점 창업이 가능했지요.”―대부분 무명시인입니까?“이름이 덜 알려진 분들이 많죠. 그런데 저희는 무명이건 유명이건 본인이 보내주면 팝니다. 예컨대 김재진, 안도현 시집도 본인들이 보내줘서 팔았습니다. 이건 호주 교민 시인이, 이건 인도네시아 교민 시인이 보내온 거예요. 제가 한 1년 해보니까 소위 무명 시인 작품들 중에 주옥같은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운이 나빠 매스컴에 덜 나오고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뿐이예요.”6070, 은퇴했다고 주저앉지 말자―나이 일흔에 책방을 낸 이유는?“책방은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젊을 때 친구 여러명이 투자해 책방을 냈다가 망한 적도 있죠. 하하.여기 더해 6070세대가 흐르는 세월 속에 속절없이 떠내려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을 봐도 매일 산이나 도서관에 가거나 집안에서 눈치보며 빈둥거리는 모습들입니다. 흐르는대로 세월 보내기에는 시간을, 내 삶을 허투루 여기는 것같아서 안되겠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6070세대의 평생 훈련되고 축적된 지식과 업무역량이 ‘나이’ 때문에 멈춰버린 채 낭비되는 게 너무 아쉽고 안타깝지요. 이들이 다시 한번 든든한 ‘현역’이 되도록 우리 삶의 현장으로 불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흔’이 다시 ‘호기심과 열정의 나이’가 되도록 눈빛을 초롱초롱 밝혀야죠. 제게는 그게 책방이었습니다만, 마음만 고쳐먹으면 다시 도전할 일이 책방 말고도 얼마나 많겠습니까….”―그럼 왜 시집만 파는 책방일까요?“누군가가 해야 할 일 같았습니다. 몇 해 전에 시인인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작품을 모아 시집을 펴냈는데 주위에 몇권 나눠줬을 뿐, 서점에는 한권도 깔린 적 없고 책장 한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다고. 문단에는 이런 시인이 많다’고. ‘그중에는 빼어난 작품도 많은데 도대체 독자를 만날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하더군요.저는 시를 쓰지는 않지만 시 한편 마무리할 때까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산고를 겪었을까 짐작은 갑니다. 오랫동안 꿈꿔온 대로 내가 만약 책방을 열게 된다면 이 소중한 시집들만 모아서 독자 앞에 널리 소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그 보람을 많이 느끼는 중이시군요.“제가 겪어보니 시인들은 개성이 강한 분이 많고 근본이 선합니다. 시집을 사러 오시는 분들도 내가 사회생활할 때 겪었던 많은 분들보다 더 선해요. 그래서 이 시집 책방이 잘 돼야 된다는 생각을 제가 거듭거듭 하게 됩니다.” 시집책방 창업교실 “세상에 시를 뿌리자”지난해 낸 책 ‘일흔에 쓴 창업일기’는 그가 책방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했다. 적당한 점포를 구하고 사업자등록과 은행계좌 개설, 청소와 인테리어까지 모두 손수 해나가는 과정을 시집을 닮은 편집의 책에 담았다.2월부터는 ‘세상에 시를 뿌리자’는 슬로건을 걸고 시집책방 창업교실을 두차례 열었다. 강좌에 참여한 수강생들이 창업을 시작해 대구 경북 부산에 자매책방 5곳이 문을 열었고 올해안에 충북 청주, 경기 안성 등 4곳에서 오픈을 준비 중이다. 자매책방들은 기존 영업장 구석에 책방을 내는 ‘샵 인 샵’ 형태가 대부분이라 책꽂이만 준비하면 개업준비가 끝난다.자매책방 1호인 개정칠곡점 책방지기 조미숙(57) 씨는 현직 중학교 수학교사이자 지난해 11월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5월 가족이 운영하는 비빔밥 체인점 귀퉁이에 책방을 열었다.“준비에 2주일 정도 걸렸어요. 시인들 단톡방에 ‘제가 책방을 하려는 아무개입니다’하고 주소 올리면 그 200분이 각자 5권씩을 일제히 보내주세요. 일주일이면 1000권이 배달되는데 그걸 주욱 진열해주면 바로 책방 오픈입니다.”―본인도 시인이시니 더 공감이 됐겠군요.“제 시집도 지인들 나눠주고 많이 남았어요. 산아래시 책방의 존재가 너무 반가웠죠. 여기 가져다두면 누군가가 그걸 사준다니. 더 놀라운 건 제 시집을 처음으로 사준 사람이 우연히 이 책방에 들른 제 옛제자였어요. 이 선생님이 바로 사진 찍어 보내주셨는데 너무 신기했죠. 제 책이 누군가에게 팔리고 그 피드백이 오는 건 정말 설레는 일이예요. 1호점 창업을 한 이유도 저같은 분이 많을 거란 생각에서입니다. 써놓고 인쇄는 했는데 줄 데가 없는 시집들의 갈 곳을 찾아드리자. 이제 제 꿈은 이 시인들이 북 콘서트 같은 거 편하게 할 장소를 제공하는 거예요.”2호점주가 된 김민석(32) 씨는 경산에서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국밥집 한구석을 책방으로 꾸몄다. 아직 시작 단계지만 손님들 반응은 좋다고 한다. “언젠가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내건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며 “시집은 마음의 건강 담당”이라고 한다. 자매책방은 이 씨에게도 큰 힘을 주고 있다.“책방들이 더 늘어나고 책방지기들이 보람도 느끼고 신명 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독자들이 쉽게 시집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다는 열망 같은 게 생겼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이런 말도 합니다. ‘산아래시’ 하면 대구에서 유명한데 왜 자꾸 자매책방을 만드냐. 너 혼자 독점으로 하면 잘 될 건데, 너 장사꾼 맞냐고. 그런데 돈 생각하면 책방 하면 안되지요.”책방지기의 시선그가 제일 좋아한 손님들 얘기를 통해 그가 가진 책방에 대한 또다른 기대를 엿볼 수 있다.“지난해 8월 경부터 매주 오던 중1(당시) 남학생 2명이예요. 목, 또는 금요일 오후 5시쯤 와서는 저 탁자 밑에 가방 놓고 의자 두 개에 앉습니다. 새로 들어온 시집이 있으면 한 번씩 들고 훑어보고 자기들끼리 종이 가져다가 필사도 합니다. 그리고는 서로 읽어주고 마주보고 웃고. 그렇게 한시간 가량 놀다 가는 거예요. 어찌나 예쁘던지, 저기 사탕바구니도 제가 그 아이들 먹으라고 갖다놓은 겁니다. 지금까지 시집 한 권 안 샀지만, 와서 노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아이들이 저렇게 해맑게 웃고 시를 베끼는 마음을 간직한 채 성장해서 사회에 나간다면 세상이 지금보다 좀더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내가 이러려고 책방을 하는 거다…. 뭐 이런 생각들이죠. 그런데 이 아이들이 5월쯤부터 안 보여요. 2학년일 텐데, 학원을 다니게 됐으려나….”그는 언론인을 거쳐 지역 건설회사에서 홍보팀장으로 일했다. 외환위기 직후 부도로 직원 120명이 한꺼번에 ‘잘릴’ 상황이 되자 그는 협력업체 1400군데에 편지를 보냈다. ‘회사를 나가야 할 직원들에게 격려 전화라도 해주시고 여력 되신다면 채용해주십사’고. 이 일은 당시 중앙일간지에도 보도됐다. 그 1년 뒤엔 그도 회사를 나갔다. 총무팀장으로서 40여 명의 구조조정을 담당한 뒤 ‘남아 있을 면목이 없다’며. 당시 나이 50세. 부인이 운영하던 작은 광고기획디자인회사 ‘밝은 사람들’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회사는 매년 전국규모 기획디자인상을 수상하며 지역사회에서 정평을 얻고 있다. 정작 그 자신은 젊은 직원들의 참신한 생각을 방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4~5년 전부터 업무를 내려놓았다.‘갇힌 자유’를 만끽하는 칠순―책방 경영은 괜찮으십니까.“월세 80만 원 빼고는 돈 들어갈 일이 별로 없어요. 책방 열고 나서 친구들과 밥먹고 술먹는 일이 사라졌습니다. 책방 하느라 한 달에 몇십 만 원 손해봐도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밥값 술값 쓰는 것 생각하면 남는 겁니다.이 책방에 들어올 때 나이 칠십인데 좀 삶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전화번호부터 정리했어요. 1500개 넘던 번호를 절반으로 줄였는데, 시인들 만나느라 다시 200명 넘게 늘긴 했지요. 빈 가게를 혼자 지킬 때는 정말 면벽좌선하는 수행승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 나이엔 그런 시간들이 참 뜻깊고 귀하더군요. 예전엔 밖에 돌아다닐 때 자유로운 줄 알았는데 책방에 묶여 지내면서 갇혀 있는 게 자유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갇혀 있는데 이 안에서 자유로운 거죠.”―나이 들수록 외로움과 친구가 돼야 한다는 얘기들을 많이들 하시더군요.“늙어가면서 제가 철없이 살아왔다는 걸 깨닫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제일 잘 못 해준 사람이 배우자예요. 젊어 아무 것도 모르고 가난한 월급쟁이에게 시집와서 평생 시부모님 봉양하고 아이들 키웠는데. 내가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서 빚 좀 갚아야겠는데, 별로 갚을 방법이 없어요. 업고 다닐 수도 없고 돈이 많아서 자꾸 줄 수도 없고. 그저 설거지라도, 집안청소라도 틈나는 대로 해주면서 마음 상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밖에 없더군요. 그냥 제가 더이상 마음고생만 안 시켜도 다행이다….”―세상을 주도하던 어르신들이 인생 늦으막히 배우자, 가족의 소중함을 토로하시는 걸 많이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잘 하시지….“맞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이걸 좀 미리 깨달을 수 있다면 가정만 평화로워지는 게 아니고 사회도 달라질 겁니다.”비록 그가 만든 건 동네책방 하나지만 꿈은 훨씬 창대하다.“작은 책방들이 여기저기 자꾸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동네마다 들어서는 작은 책방들이 우리 문화생태계와 일상에 새로운 진화의 동력으로 수혈되면 좋겠습니다. 골목마다 카페가 늘면서 커피 수요가 폭증하듯이 동네마다 책방이 많이 생긴다면….”올곧고 고집스런 칠순 책방지기는 오늘도 책이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히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대구=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한일친선협회중앙회(회장 김태환)가 오는 11일 제1회 ‘한일 미래세대 포럼’을 개최한다고 4일 밝혔다. 장소는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이다.중앙회는 매년 한일관계를 진단하고 개선방향을 제안하기 위해 전문가 중심의 세미나를 개최해 왔다. 올해 행사에 대해 중앙회는 “전문가패널 세미나와 별도로 한일 양국 대학(원)생들이 직접 토론자로 참석해 청년들의 시각에서 한일관계를 조명하고 바람직한 관계 구축을 위한 스스로의 역할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의미부여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사망자가 늘면서 ‘다사(多死)사회’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연평균 130만 명대이던 사망자 수는 지난해 157만 명으로 늘었고, 2040년 167만~168만 명으로 정점을 찍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벌써부터 장례를 치르려 해도 화장장이 모자라 1, 2주 기다리는 게 예삿일이 되고 있다.당연한 일이지만 사망자가 늘면서 상속도 늘었다. 특히 고도 경제성장기에 부를 축적한 고령자들의 사망으로 연간 약 50조 엔(약 460조 원)의 유산이 계승되는 ‘대상속시대’가 문을 열었다는 표현도 등장했다.다만 상속을 받는 입장에선 부동산 자산이 마이너스로 작동하는 일이 늘어 유족 간 다툼으로 이어지고 있다. 집값이 떨어지고 팔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가정재판소의 상속 관련 상담은 연간 약 18만 건으로 10년 전과 비교해 2배로 늘었다.상속이 부채를 부르는 시대전쟁이 끝난 뒤 베이비붐 세대가 등장하는 건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일본에서는 3년간 800만 명 넘게 태어난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가 여기에 해당한다. 미국(1946~1965년생)이나 한국(1955~1974년생)의 베이비붐 세대보다 기간이 압축돼 있지만 일본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집단으로 일컬어진다.이들은 고도 경제성장기에 20, 30대를 보내고 버블경제기에 40대를 보내며 부를 쌓았다. 또 단카이 주니어 세대(1970~1974년생)를 낳으며 2차 베이비붐을 만들어냈다.2023년판 일본 고령사회백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의 자가 보유율은 87.4%에 이른다. 75.6%가 단독주택, 11.8%는 맨션을 보유하고 있다. 2030년이면 단카이 세대가 모두 80세를 넘어서고 단카이 주니어들은 60대를 바라보게 된다. 앞으로 수백만 가구의 상속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를 일본 언론은 ‘절망의 상속’이라 부르고 있다.가장 큰 이유는 부동산 가격의 하락 추세에 있다.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전반적으로 하락세다. 인구는 2008년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신규 주택은 지속적으로 공급되면서 주택 공급이 넘치는 미스매치가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앞으로 단카이 세대가 살던 낡은 주택 수백만 채가 그들의 사망과 함께 남겨진다.부(負)동산의 악순환한번 인구 감소가 시작된 지역은 사회 기반시설이 낙후되고 산업은 쇠퇴한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재개발도 멈춘다. 그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다시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단독주택인 양친의 집을 상속받아도 이미 60대를 바라보는 자녀 세대는 도시 지역에 주택을 소유한 경우가 많다.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관리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재산세나 유지비를 매년 내야 하고 붕괴나 화재 등 안전 관리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건물을 방치하면 급격히 훼손돼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팔기도 어렵다.그러니 상속을 받았다면 가급적 빨리 팔아야 하고, 그게 어렵다면 철거해야 한다. 문제는 일본에서 지은 지 수십 년 넘은 주택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집을 철거하려 들면 수백만 엔의 비용이 발생하고 세금 부담도 늘어난다.일본 전국에 버림받은 빈집이 증가하는 이유다. 2023년 기준 전국 빈집은 900만 채. 방치된 가옥이나 토지에 대한 대책 마련에 행정기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5년부터 ‘빈집 대책 특별조치법’을 시행했다. 본래 주택이 세워진 토지는 나대지의 6분의 1만 재산세를 내면 되지만 지방자치단체가 ‘관리가 필요한 특정 빈집’으로 지정하면 나대지에 준해 세금을 매기겠다는 것이 골자다. 제대로 관리하거나 철거하라는 압박이다.빈집 문제는 단독주택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 ‘분양 맨션’이라 부르는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고도 경제성장기에 지어져 50년이 넘은 ‘한계 맨션’이 도시 지역에도 나타나고 있다. 도심에서 1시간 통근 거리인 뉴타운 주변에서도 빈집 예비군들이 적잖다.상속 포기 늘고 빈집 폭증그래서인지 상속 포기를 택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다. 사법통계에 따르면 일본에서 상속 포기 건수는 2019년 22만5000여 건에서 2022년 26만여 건으로 늘었다. 상속 포기를 하면 부동산뿐 아니라 현금이나 보험금 등 다른 자산도 포기해야 하지만 매년 증가하고 있다.부동산 상속으로 손해를 보는 사례가 늘면서 불필요한 자산을 서로 떠넘기려는 가족 간 싸움도 우려된다. 유족들이 모두 “저금은 받겠지만 집은 필요 없다”고 나선다면 뭔가를 받겠다고 싸우는 것 이상의 진흙탕 싸움이 될 수 있다.상속 포기나 떠넘기기가 계속되면서 ‘소유자 불명’이 돼 버린 골칫덩이 부동산도 전국에 늘고 있다. 이런 부동산은 행정기관도, 가족도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사(死)유지’라 불린다. 예컨대 100여 년간 등기가 이뤄지지 않은 채 폐허가 됐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건물들이다. 일본 언론에는 이런 사례가 심심찮게 보도된다.인지장애(치매)가 오면 자산은 잠긴다설상가상으로 고령자에게 찾아오는 인지장애(치매)라는 복병이 있다. 2022년 미쓰이스미토모 신탁은행에 따르면 일본의 인지장애 고령자가 보유한 자산 총액은 2020년 기준 약 250조 엔(약 2300조 원)이고, 2040년이면 345조 엔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같은 기간 부동산은 80조 엔에서 108조 엔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됐다.‘치매 걸린 부모님 집’은 일본에서 주간지나 책자의 주요 테마다. 고령의 부모님은 치매가 찾아오면 당연한 수순처럼 요양원에 입소한다. 이후 거처하던 집은 자연스레 빈집으로 남는다. 일본 다이이치 생명보험 경제연구소의 추정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방치된 치매 고령자의 집이 2021년 기준 약 221만 채이고, 2040년에는 280만 채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되나 법적으로 아무도 손댈 수가 없다.일본에서 치매 환자는 상거래나 법률 행위를 할 수 없어서다. 일본 정부는 늘어나는 치매 환자의 재산 보호를 위해 2020년 민법을 개정해 ‘의사능력이 없을 때 그 법률 행위는 무효로 한다’고 정리했다. 치매 노인과 부동산 매매 계약을 했더라도 그가 치매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계약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가족이 대신 팔기도 어렵다. 설사 본인이 동의하더라도 치매 진단이 내려진 경우 부동산회사나 행정기관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2008년 범죄수익 이전 방지법도 시행돼 부동산 매각 시 본인 확인이나 의사 확인이 엄격하게 시행된다.치매 판정을 받은 노인의 은행 계좌가 동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 돈 많은 부모의 요양원비나 간병비를 가난한 자녀가 대신 내는 상황이 벌어진다. 금융기관들은 치매 판정을 받기 전에 임의후견인을 정해 놓거나 가족신탁을 해둘 것을 권한다. 치매 판정을 받은 뒤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가정법원이 지정하는 법정후견인 제도가 있는데, 매달 수수료를 내야 하고 타인의 관리를 받아야만 한다.“보람된 일 하는 곳에…” 기부 유언 늘어자녀나 부모 등 상속받을 사람이 없어 국고로 귀속된 상속 재산도 2022년 기준 768억 엔(약 7000억 원)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최근 9년 새 2배 이상 늘었다.이런 가운데 재산을 자신의 사후 가족이 아니라 사회공헌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NPO) 등에 양도하는 ‘유증 기부’도 늘고 있다. NHK는 유증 기부 총액이 연간 400억 엔 가까이로 늘었다고 올 2월 보도했다. 이런 기부액이 지난해 일어난 노토반도 지진 피해 지원 현장이나 난치병 연구 등에 활용된다.보도에 따르면 유증 기부가 활성화된 배경에는 독신이나 무자녀 등 가족 형태의 변화와 망자의 재산을 반드시 가족이 받지 않아도 된다는 가족관의 변화가 있다. 자녀도, 가족도 없다는 한 80대 여성이 대표적이다. 그는 “내가 남긴 돈을 국가가 가져가서 쓰는 건 싫다”며 개발도상국에 교육 지원을 하는 단체에 살던 집을 포함한 모든 유산을 기부하겠다는 유언 공증을 남겼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았다는 70대 할머니는 아들의 권유로 동네 결식아동을 위한 ‘어린이식당’에 자신의 저금 30만 엔을 기부하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한 뒤 뿌듯해한 것으로 소개됐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한국의 상속세는 사망자가 남긴 모든 재산을 합산해서 과세한다. 일괄공제액을 5억 원으로 정한 건 1997년이다. 당시 서울 도심 84㎡(전용면적 기준) 아파트 가격이 1억 원대 중반이었다. 아파트 3채 정도는 세금 부담 없이 가족에게 물려주라는 취지에서 정해진 금액이다. 그런데 근래 몇 년 새 서울 아파트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살던 집 팔아 상속세를 내야 하는 가정이 적잖다.세대 간 부의 이전, 청년 세대에 마중물 역할 최근 정부가 상속세 감면을 포함한 세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물가 인상을 반영하고 조세 체계를 합리화하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일찌감치 ‘중산층도 상속세 걱정할 시대 왔다’는 기사를 썼던 입장에서 반갑게 느껴진다. 예상 밖이었던 점은 일괄공제가 아닌 자녀공제를 현행 5000만 원에서 5억 원으로 올린 대목이다. 조만간 상속을 해야 할 80, 90대 세대로서는 자녀가 많으니 혜택이 기대된다. 하지만 앞으로 상속을 준비해야 하는 50, 60대 세대로서는 자녀 수가 확 줄어 큰 도움 안 된다. 국회 통과라는 절차도 남아 있어 아직 먼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자녀공제를 늘린 데는 저출산 시대에 출산 장려의 메시지도 담았다는 설명이 나온다. 정말 출산율을 걱정하고 경제활성화를 도모했다면, 사망 뒤 상속이 아니라 살아생전 다음 세대로 부의 이전을 돕는 증여세 감면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실제 출산할 연령대는 20, 30대 세대이고, 이들에게 정부가 추진하는 상속세 공제 혜택은 너무 먼 얘기일 수 있어서다. 요즘은 ‘재산은 죽기 직전까지 움켜쥐고 있으라’는 말을 신봉하는 어르신이 적지 않다. 자녀에게 미리 재산을 넘겨주면 불효를 부추긴다는 말도 나온다. 그때마다 ‘저분은 자녀 대신 국가에 재산을 헌납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안대로 상속세는 줄이고, 증여세는 그대로라면 자녀가 많은 고령자일수록 증여를 미루는 게 절세전략에 맞는다. 한국보다 15∼20년가량 고령화에서 앞선 일본은 정반대 정책을 펼쳤다. 80, 90대 부모가 사망하면 60, 70대 자녀가 상속을 받는 ‘노노(老老) 상속’으로, 부의 잠김 현상이 사회 문제가 됐기 때문. 고령자의 막대한 부가 소비나 재투자로 이어지지 못한 채 예금 형태로 잠겨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3년 생전증여제도를 확대했다. 60세 이상 부모가 18세 이상 자녀나 손자녀에게 증여하면 주택구입비 500만∼1000만 엔, 손주 교육비 1500만 엔, 결혼육아비 1000만 엔을 비과세하는 특례를 한시 도입했다. 노인 세대의 자산을 청장년층으로 옮겨줘 소비를 진작하고 돈이 돌게 한 것이다. 이에 앞서 2001년부터 1인당(수증자 기준) 연간 110만 엔까지의 증여는 과세하지 않는 ‘역년(曆年) 증여’ 제도를 도입해 상속세 부담을 줄이게 했다. 역년 증여에는 자녀와 손주는 물론이고, 타인에게 하는 기부도 포함했다. 이때 상속일 기준 3년 이내 역년 증여한 액수부터는 상속액에 합산되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올해부터 ‘7년 이내’로 늘렸다. ‘더 빠른’ 증여를 유도한 것이다.“이중과세” vs “부의 대물림 조장” 자산 고령화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60세 이상 고령층 순자산은 3700조 원을 넘어 전체 자산의 40%에 육박한다. 더 큰 문제는 이 자산이 대부분 부동산에 잠겨 있다는 점이다. 건강한 부의 이전을 고민해야 할 이유다. 상속 증여세와 관련해 한쪽에선 이중과세 이슈가, 다른 한쪽에서는 ‘부자감세’라며 부의 세습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단골처럼 나온다.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라면 성실하게 일하고 저축하면서 자산을 불려 나가는 삶은 권장돼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