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아

서영아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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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100세 시대를 생각합니다.

sya@donga.com

취재분야

2024-03-27~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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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흔 넘어 운동하니 키도 크더군요”…81세 ‘몸짱 할아버지’ 이순국 전 신호그룹 회장[서영아의 100세 카페]

    이순국 전 신호그룹 회장(81)의 인생 후반전은 68세에 시작됐다. 일본 여행 중 협심증으로 쓰러진 게 계기였다. 평생 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그가 마침내 ‘운동할 결심’을 했다. 이후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신체 개조를 단행했다. 이론공부에도 뛰어들어 74세에 서울과학기술대에서 체육학 석사, 76세에 상명대에서 체육학(운동생리학) 박사, 81세에는 순천향대 의대에서 의학박사(예방의학)를 취득했다.건강서 ‘나는 일흔에 운동을 시작했다’를 펴내고 건강전도사로 활약하기 시작한 건 2018년부터. 이듬해에는 전작의 실천편인 ‘몸짱할아버지의 청춘운동법’을 펴냈다. 최근 낸 세 번째 책 ‘다시 시작하는 인생수업(동양북스)’은 인생후반전을 사는 법을 논하고 있다. 요즘도 매일 2~3시간씩 체계적인 운동을 한다는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광화문 본사에서 만났다.혼신 다해 일궈낸 재계 25위 그룹이 물거품으로맨손으로 시작해 한때 재계 25위까지 사업을 키워냈지만 아시아 금융위기로 모든 것을 잃었다.1997년 태국 바트화의 폭락으로 촉발된 아시아 금융위기는 한국의 IMF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1998년부터 기업의 줄도산과 대량 해고 사태가 확산됐다. 1997년 신호그룹은 최정상에 있었다. 제지업에서 철강, 전자, 화학, 금융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해 총매출 1조 원 규모에 35개 계열사를 거느렸다.세상은 그를 ‘부실기업 조련사’, ‘무서운 작은 거인’, ‘마이다스의 손’ 등으로 불렀다. 하지만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30여 년 젊음을 바쳤던 기업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한창 때 ‘비즈니스맨의 신화’라는 말씀을 들었다고요.“망해가는 기업을 인수해 살려내는 것으로 유명했죠. 한 번 그렇게 성공하고 나니 은행에서 부도위기에 빠진 기업을 맡아달라고 자꾸 제안이 왔어요. 그러다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지요. 당시 태국에 신문지 공장이 있었고 국내에도 설비투자를 많이 했어요. 외화차입이 많았는데 환차손이 크게 났지요.”강을 건넜으면 타고 온 뗏목을 버려라우리는 각자의 시대를 각자의 인생사이클에 따라 겪게 된다. 그는 2006년 신호제지 매각을 끝으로 모든 사업을 접었다.-큰 재앙이 닥치면 때마침 가장 많은 것을 일군 세대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지요.“전 그때 50대 중반이니 젊은 축이었죠. 30대 그룹 가운데 절반은 날아갔어요. 진로 한보 해태 삼미 쌍용 동아건설 그 다음에…”-옛날 얘기가 나오면 조금 억울하거나 아쉽지 않으세요.“어쩌면 그건 숙명이었어요. 모두가 중소기업만 했다면 우리나라가 매년 10%대 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전체 파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대우처럼 해외로 뻗어나가는 회사가 필요했던 거죠. 부채도 그래요. 한국은 1960년대부터 ‘부채도 자산’이라며 외자를 도입해 경제를 팽창시켜왔죠.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이 커졌는데, 어느 순간 구조조정이 필요해진 거죠. ‘아…, 우리는 하나의 주춧돌로 쓰였구나’하고 받아들여야죠. 그걸 억울하다고 해야 됩니까? 전 자부심을 갖는 쪽이예요. 내가 30년 간 대한민국 경제부흥의 주춧돌로 사명을 다하고 물러났다고 보는 거죠.”-지금 와서는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그 과정에서는 괴로우셨을 듯해요. “물론이죠, 인간인데…. 그래도 담담하게 정리했다는 얘기죠. 제 신조가 강을 건넜으면 타고 온 뗏목은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과거에 연연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지요.” 68세에 닥친 협심증…신체개조 돌입협심증으로 쓰러진 것은 스스로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뒤 친형인 이순목 전 우방그룹 회장이 74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기업하는 사람은 본인 건강관리는 뒷전일 수밖에 없어요. 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것도 사업할 때 스트레스에 찌든 생활습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사업할 때 폭탄주 10잔은 기본이던 술을 끊고, 생활습관 자체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맥박 재는 기계니 러닝 머신도 사고, 제대로 운동을 시작한 거죠.”무작정 열심히 운동하려다 보니 의문이 생겼다. 고령자에게 적절한 운동이란 무엇일까. 운동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2014년 서울과학기술대 스포츠과학과 대학원에 입학, ‘고강도 저항성 운동이 남성 고령자의 신체 구성 및 활동 체력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을 위해 필리핀에 가서 사람들을 모아 3개월간 운동시킨 뒤 골밀도 등 신체변화 데이터를 비교했다. 이어 ‘저항성 운동 강도가 남성고령자의 신체 구성, 체력 및 산화 스트레스에 미치는 영향(2018)’을 주제로 상명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는 광주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3개월간 운동을 하게 한 뒤 혈액검사 등을 통해 체내 활성산소의 변화양상을 연구했다. 여기에 3년간 운동을 하며 자신이 겪은 체중과 골밀도, 근육량 변화 등도 자료가 됐다.“뭔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처음 대학원에 지원했을 당시 나이가 72세. 교수들 사이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제일 문제가 ‘통계’였다.“논문 쓰려면 엑셀, SPSS같은 통계를 잘 다뤄야 하는데 전 컴퓨터를 만져본 적이 없었어요. 평생 비서가 다 해줬으니까. 타자를 쳐본 일도, 계산기를 두드려본 일도 없었지요. 당연히 교수들이 반대하죠. 제가 책임지고 배우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엑셀 책과 컴퓨터를 사서 더듬더듬 익혀 갔다. 지금은 노트북을 늘 끼고 다니며 능수능란하게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뭔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해보인 셈이다.“처음에는 컴퓨터 자판을 놓고 ‘ㄱ(기역)’이 어디 붙어 있나부터 찾았어요. 인터넷으로 입학원서 하나 쓰며 몇 번을 문의하고 난리를 쳤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겼지요.”-2월에는 의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는데.“운동의 효능을 의학적으로 보면 어떨지 궁금해졌습니다. 꾸준히 운동하며 건강하게 사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답을 찾고 싶었어요.”일흔에 운동 시작하자 키 크고 근육량↑체지방↓일반적으로 노인은 키가 줄어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운동을 시작한 뒤 오히려 키가 커졌다. 그가 운동을 시작한 시점인 70세 11월과 80세 11월의 데이터를 비교하면 신장은 156.5cm에서 157.3cm로 0.8cm 커졌다. 체중은 52kg에서 53.4kg으로, 골격근량은 17.8kg에서 26.5kg으로 늘고 체지방은 20.58%에서 11.4%로 줄었다.“운동으로 노인의 몸도 바람직하게 변하는 거죠. 지금 제 심장의 산소섭취도는 30대 수준입니다.”-이제 협심증 걱정은 내려놓아도 되는지요.“현재로서는 그렇지요. 혈액의 점성을 묽게 하기 위해 평소 물도 열심히 마십니다.”그는 격일로 아침에 1시간 정도 조깅을 하고 매일 오후 헬스클럽에서 2시간씩 근력운동을 한다. 그에 따르면 근육은 72시간까지 운동을 기억한다. 그래서 72시간이 넘기 전에 다시 해당 근육을 운동시켜줘야 한다. 그는 몸의 근육부위를 크게 6개로 나눠 하루 두 군데씩 2시간, 3일간 돌아가며 운동해주는 방식으로 몸 전체의 근력운동을 이어간다. 이렇게 운동을 시작한 이래 십여 년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고 코로나 바이러스에도 감염되지 않았단다.“‘어차피 죽을 건데…’는 자신에 대한 모독”-건강전도사 활동에 열심인 이유는?“제가 운동에 열심인 것은 내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서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한다고 알리고 싶어요. 내가 몸져눕거나 병원을 내집처럼 드나들면 가족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게 되지요.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가급적 오래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추는 것은 자신은 물론, 가족과 타인을 배려하는 일이예요.”-‘누군들 아프고 싶어 아프냐’는 반론이 있을 듯합니다.“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니 미리미리 운동하고 건강해지자는 얘깁니다. ‘늙으면 어차피 죽을 건데, 뭘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 그냥 술이나 마시자.’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이런 말은 자신에 대한 모독이고 가족과 타인에게 무책임한 말이예요. 이런 친구들일수록 어딘가 몸이 안 좋더군요.”“혼자 하는 최후의 여행, 제대로 준비해야”이번 신간 표지에는 홀로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혼자 노저어 서해로 가는 사람을 그린 겁니다. 제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저는 65~70세에 전반전을 끝낸 뒤 혼자 서해바다를 향해 마지막 항해를 하는 게 후반전이라고 봐요. 서해로 간다는 건 죽으러 가는 건데, 그걸 자기 힘으로 가자는 거죠. 혼자 노를 저어 바다로 가라. 노인이 되면 그런 주체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건강이 더욱 중요해집니다.”-모든 고령자가 회장님처럼 운동해야 할까요.“그건 어렵겠죠. 그래도 하루 최소한 30분 걷고 30분 근육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게 운동일지를 적는 겁니다. 어려우면 달력에 운동한 날을 체크만 해놓아도 1년간 내가 며칠 운동했는지 알 수 있죠. 우리가 전반부를 잘 살기 위해 하루 8~9시간씩 학교에 가잖아요. 후반부에 그거 하루 한 시간도 못 하느냐고요.”-앞으로의 계획은.“모 대학 노년학 박사과정에 지원했는데 떨어졌어요. 가을에 다른 곳에 시험 쳐야죠. 혹 노년학이 어려우면 심리학을 공부할까 생각 중입니다. 80대에는 노년학이나 심리학, 90대에는 종교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너무 열심히 사시는 것 아니냐고 물으려다 퍼뜩 드는 생각. 이 세대는, 혹은 이 분에게는 이게 최선이 아닐까. 산업화 세대는 맨손으로 시작해 자신을 갈아넣어 한국의 굵직한 성장을 이뤄낸, 그 성취의 기억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버린 세대다. 어쩌면 ‘노력’은 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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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자만 행복하면 무슨 재미…” 전직 교장선생님이 포크댄스 전도사가 된 까닭은[서영아의 100세 카페]

    지난달 30일 오전 10시 수원시 권선구 서호초등학교내 댄스실. 한때 교실이었지만 지금은주민문화교실로 변신한 소박한 공간이다. 60~70대 남녀 12명이 이영관(67) 강사의 구령에 맞춰 연습을 시작한다. 남성은 모자, 여성은 스커트로 최소한의 의상을 갖췄지만, 우리가 아는 댄서의 풍모와는 거리가 있다. 지난해 10월 자발적으로 만든 제4기 ‘포크댄스를 즐기는 사람들(포즐사)’ 모임이다.춤추는 팔순노인 얼굴에서 소년이 나타났다…“하나둘 셋, 하나둘 셋, 쓰리스탭 터언~, 쓰리스탭 턴! 돌고 손뼉 칠 때 시선은 어딜 봐라? 파트너를 봐라. 턴할 때 다리가 뻗정다리면 안 되죠. 자세를 낮추라고 했어요. 다시 한번!”회원들의 움직임이 성에 차지 않을 때는 목소리가 커지는 게 영락없는 ‘호랑이 선생님’이다. 최근 오는 10월 수원화성문화제 출전이 결정되면서 그의 신경이 조금 곤두서 있다. 출전작은 러시아의 대표적 민속춤 코로브시카(행상인의 춤). 동명의 민요 리듬에 맞춰 남녀 한 쌍으로 춤추는 포크댄스다. 추위를 이겨내려는 듯 뛰고 열을 내는 동작이 많다는 게 특징이다. 틀리는 곳을 고치고 반복하는 연습 중에 그가 정색하고 말한다. “지금은 연습 중이니 제가 발이 틀렸다고 막 잔소리하죠. 하지만 실제 대회에 나가면 수원 시민들은 우리 발이 틀리나 맞나 유심히 안 봐요. 그럼 뭘 보느냐? 우리 표정을 보죠. 저 사람이 행복하게 춤추나? 지금 포크댄스를 즐기고 있는가를 봅니다. 우리 모임 이름이 뭐죠? 포즐사, 포크댄스를 즐기는 사람들이죠? 포크댄스는 즐겨야 하는 겁니다.” 연습을 지켜보며 한가지 발견한 게 있다. 무표정해 보이던 회원들(특히 남성들) 얼굴이 제대로 음악을 틀고 본연습으로 들어가자 확 달라졌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자연스레 미소가 피어난다. 음악이 빨라지고 열기가 달아오르자 팔순 노년의 얼굴이 마법처럼 소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표정은 본심을 숨길 수가 없다. 이분들, 즐기고 있구나.곡이 끝난 뒤 누군가로부터 “마지막 부분 음악이 너무 빠르다”는 탄식이 나왔다. “힘드시죠. 지금 헉헉대시는 분, 이게 정상이에요. 코로브시카는 상급 코스예요. 우리가 초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이걸 택한 거예요. 뒤로 갈수록 음악이 빨라지는 건 포크댄스 음악의 특징이에요. 달리기할 때 피날레처럼 있는 힘 다해 달려야 하는 구간이에요. ”알기 쉬운 언어로 힘있게 설명한다. 최고령자는 79세 백홍준 씨, 아들뻘인 강사의 구령에 맞춰 꼼짝없이 발을 맞춘다. 제4기 포즐사는 수원시 글로벌 평생학습관에서 포크댄스 제자가 된 오희강(68) 씨가 회장을 맡아 팀을 모았다.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며 그에게 재능기부를 요청한 것. 강의를 들은 제자들과 지인들이 알음알음으로 모여들었다. 오 회장은 “이 나이에 학예회 준비하듯 상기된 기분에 빠져 지낸다”고 말한다.이광복(63) 씨는 “활동량이 많아서 운동도 잘 되고 이렇게 팀워크도 다지다 보니 너무 좋다”고 말한다. 조성완(78)씨는 “강사 선생님이 잘못된 것은 호되게 지적해주는데 다 저희 잘되라고 그러는 게 느껴진다”며 “이왕 즐기려면 확실하게 배우라는 것”이라고 해석해준다. ●“나는 포크댄스 전도사이자 평생학습 전파자”이영관 강사는 1956년생 수원 토박이다(호적은 1959년생). 교직에서 39년 근무한 뒤 7년 전 명예퇴직했다. 1977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돼 경기도 내에서만 중학교 국어 교사, 지역교육청 장학사, 중학교 교감, 교장, 경기도 교육청 장학관 등을 두루 거쳤다.이런 그가 퇴직 후에는 신중년 포크댄스 강사로 거듭났다. 지역의 평생학습관, 복지관, 경로당 등 시니어가 모이는 곳이 그의 활동 무대다.포크댄스에 ‘꽂힌’ 계기는 신참 교사 시절 어느 숙직 날 학교 운동장에서 본 교회 수련회 포크댄스의 장관. 이때부터 포크댄스 연구를 시작했고 그가 몸담았던 수원 매원초교는 포크댄스 실행교가 되었다. 교직원 포크댄스 연수회에서 4년간 20여 종을 지도하기도 했다. 다만 이런 인연은 그가 중학교 교사가 된 1984년 뒤로는 명맥만 유지할 정도에 그쳤다.퇴직은 조금 갑작스러웠다. 2016년 정년(62세)을 5년 당겨 퇴직했다. 당시 진보교육감 밑에서 장학관 일을 하려니 매사에 정책 방향이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그냥 ‘내 할 일만 한다’는 자세로 버티지 그러셨어요.“제 생각과 동떨어진 공문을 ‘장학관 이영관’ 명의로 내려보내야 했는데 자존감이 땅에 떨어졌어요. 허수아비 노릇 하며 자리를 지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일선 학교로 돌아가 원로교사 생활을 1년 한 뒤 명예퇴직 신청을 했습니다.”-퇴직할 때 포크댄스 강사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전혀요. 이런 삶을 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탁구 교실이니 통기타 강습, 남성 요리 강습 등을 들으러 다녔어요.”인생 후반에 화려하게 부활한 포크댄스포크댄스는 그가 은퇴 2년 차에 찾아간 수원시 평생학습관 인생 수업 모임에서 소환됐다. 지역 퇴직자들이 자생적으로 모여 뭐라도 공부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뭐라도학교’. 그는 동기들에게 “수업 후 그냥 가지 말고 포크댄스를 배우며 가까워지자”고 제안했다.이렇게 시작된 포크댄스 동아리 ‘포즐사(1기)’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뒤 포크댄스 강사 일은 본궤도에 올랐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에는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지역주민과 함께 포크댄스 한마당’을 펼쳤다. 아파트에 현수막을 내걸고 홍보 포스터를 붙이고 경로당을 찾아가 홍보 활동을 벌였다.“어르신들의 행복한 미소는 우리의 보람이었죠. 활동무대도 넓어져서, 경로당 복지관 문화교실 강사가 되어 형님 누님들께 포크댄스의 재미를 안겨드렸지요.”그의 목표는 ‘포크댄스로 건강하고 신바람 나는 신중년 문화 만들기’. 포크댄스를 통해 신중년의 건강과 사회성 증진, 자존감과 성취감 증대, 사회봉사를 통한 자아실현을 꾀하겠다는 것. 실제 1석 5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신한다.“예를 들어 주민센터나 구청, 지역사회에서 문화행사가 있으면 저희에게 출연 요청이 와요. 한 달에 한 번 숲속 ‘포레포레’ 행사가 열리면 현장에서 포크댄스를 가르치죠. 엄마아빠들이 무척 좋아해요. 자기 자녀와 손 붙잡고 그렇게 즐겁게 춤춘 기억이 없거든요.”“혼자만 행복하믄 무슨 재민겨”-그래서 지금 행복하세요.“저야 너무 행복하죠. 그런데 누군가 이런 말을 했죠.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저는 ‘혼자만 행복하면 무슨 재민겨’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선 나 자신이 행복해야 하고 그다음에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자. 그게 진짜 행복이다. 나는 행복한데 주위 사람들은 불행하다면 그건 진짜가 아니죠.”-포즐사 연습할 때 보니 끝에 속도가 빨라졌을 때 정말 즐거움이 막 폭발하는 느낌이 전달돼 오더군요. 동심 같은 것도 느껴지고요. “제 보람이 그거예요. 팔십 넘으신 분의 빨갛게 상기되고 미소가 만개한 얼굴에서 그분의 청춘을 봐요. 참 소중한 발견입니다.”그에게는 작은 꿈이 있다고 한다. ‘신중년 포크댄스 경연대회’를 직접 주최하는 것. “경로당이나 복지관에서 대회에 출연하려고 막 연습들을 하겠죠. 그러면서 그분들이 건강해지는 거죠. 그걸 한번 해보고 싶어요. 장소나 비용은 지자체 지원을 좀 받아야 하려나. 상의를 해봐야죠.”지론은 ‘도전은 즐겁다. 실행이 답이다’, 모임이 있는 곳마다 포크댄스를 도입하자고 제안하고 나선다. “우선 친교와 화합 시간을 가지라는 얘기죠. 거기에 레크리에이션을 넣고 포크댄스가 들어가면 제가 재능기부를 하는 거죠. 그러면 사람들이 어느 틈에 한마음이 돼요.”-삭막한 세상이 돼 가는데 반대의 길로 가자 하시는 거네요.“코로나 전에는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총동문회에도 포크댄스를 접목했어요. 함께 등산을 끝내고 식사 전에 포크댄스 시간을 갖는 거예요. 300여 명이 동시에 춤추는 장관이 벌어지죠. 서로 돌아가면서 ‘저 0회 누굽니다’ 하면 ‘아, 후배구나’ 하고. 어떤 후배는 ‘태어나서 처음 남자 57명의 손을 잡아봤다’고 하더군요. 파트너가 바뀔 때마다 악수하다 보니까. 하하”“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선생님은 지역사회에 잘 스며든 경우인데, 일반적으로 퇴직 후 갈 곳이 없다는 분들이 많습니다.“등산족이 대표적이죠. 체력만 강화하면 뭐 하겠어요. 평생 배운 것들을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사회에 환원해야죠. 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겠다고 생각을 바꾸면 정서적 방황이 줄어들 거예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요. 우리 삶 자체가 배움이죠.”그에게 포크댄스는 세상과 만나는 매개체다. 자신을 편하게 열고 타인을 수용하는 사회성을 부여해주고 남을 이해하고 교류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나아가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일이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이다. 최근 영통구가 예산이 없다며 9월부터 경로당 4군데의 포크댄스 수업을 없애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예산이란 시간당 2만 원의 교통비 지원이다.“오늘(25일) 종강이었는데, 어르신들이 2학기부터 수업이 없어진다고 서운해하세요. 그래서 ‘지원 없어져도 불러주신다면 언제라도 오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어르신들이 기뻐하신다면 저도 기쁘니까요.”수원=서영아 기자sya@donga.com}

    • 202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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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한일미래포럼, ‘경제안보시대의 한미일 협력과 한일관계 개선방안 모색’ 세미나 개최

    (사)한일미래포럼(대표·이혁)은 24일 동국대학교 고순청 세미나실에서 ‘경제안보시대의 한미일 협력과 한일관계 개선방안 모색’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제1세션에서는 김충식 가천대학교 특임부총장이 사회를 맡아 ‘언론의 역할과 과제’에 초점을 맞췄다. 사와다 카츠미(澤田克己) 마이니치신문 논설위원과 이하원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최근 양국을 둘러싼 국제환경 변화와 그 속에서의 양국 미디어의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 이어 아오키 요시유키(青木良行) NHK 서울지국장과 길윤형 한겨레신문 국제부장이 토론을 진행했다. 제2세션은 ‘산업의 역할과 과제’를 주제로 송혜선 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서석숭 한일경제협회 상근부회장과 하기와라 타이지(萩原泰治) 오카야마상과대학 경제학과 교수가 자국보호주의가 강조되는 국제질서하에서 경제안보를 지키기 위한 양국간 협력과제를 꼽아봤다. 이어 주원석 산업통상자원부 과장과 사공목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이 토론을 진행했다. 제3세션에서는 진창수 세종연구원 일본연구센터장이 사회를 맡아 ‘기관의 역할과 과제’를 살펴봤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일본연구센터 교수와 마에카와 나오유키(前川直之) 일본무역진흥기구 서울사무소장이 발표를, 정우성 국토연구원 연구위원, 오승희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교수가 토론자로 나섰다. 제4세션에서는 ‘학계의 역할과 과제’를 주제로 이혁 한일미래포럼 대표가 사회를 맡았다. 오구라 기조(小倉義蔵) 교토대학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 교수, 송정현 동국대학교 일본학과 교수가 발표를, 배종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강철구 배제대학교 일본학과 교수가 토론을 진행했다. 이날 세미나를 총괄한 이혁 대표는 “한일 협력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나날이 증대되는 현재, 본 세미나를 통해 언론, 산업, 학계, 기관 등 다양한 주체가 한일 협력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구축을 위한 방안을 고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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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봉 300만 원 벌겠다고 5수(修)까지… 나이 들어도 가슴 뛰는 일을 찾으세요”[서영아의 100세 카페]

    ‘이야기 할머니’를 아시는지? 유아교육기관을 방문하여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 56세 이상 여성 시니어 자원봉사자를 말한다.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매년 초 서류, 면접전형을 통해 선발된 뒤 6, 7개월의 교육과정을 거쳐야 한다. 15년간 평균 경쟁률 4.9대 1, 올해는 6.7대 1을 기록했다. 재수, 3수는 기본이고 5수 끝에 합격한 분도 있다고 한다. 이야기할머니들은 5-7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적 정서를 담은 선현들의 이야기를 외워서 구연(口演)한다.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옛날얘기를 속삭이던 ‘무릎교육’의 전통을 살리면서 세대간 정서적 소통을 도모한다.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학진흥원이 협력해 노령 여성인력 일자리 창출과 사회참여를 통한 문화복지를 위해 시작했다. 첫해 안동에서 30명을 선발한 이래, 점차 늘어 현재 전국 8617곳 유아교육기관에서 3162명이 활동 중이다. 이야기할머니 입장에서 보자면 주 2-3회, 연간 85회 수업에 활동비는 1년 320만 원 수준. 자원봉사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한번 이야기할머니가 되면 대부분 최장 10년까지 일을 계속하려 애쓴다. 새로 이야기할머니가 되려는 이에게 진입장벽이 높은 이유다. 이들은 왜 이야기할머니에 열광할까. 최근 열린 동화구연 배틀에 참여중인 이야기할머니 5명을 11일 서울 광화문 본사에서 만났다. ‘약속시간 엄수!’ “항상 미리 가서 기다린다”이 분들, 시간개념이 철저하다. 오후 3시 약속이었는데 2시 15분경 전화벨이 울린다. 할머니 세분이 로비에 와 있는데 기다릴 곳이 마땅치 않다는 얘기였다. 이중 두 분은 각기 구미, 창원에서 기차타고 올라온 분들이다. “세상사 혹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항상 여유있게 움직인다”고 한다. 부랴부랴 인터뷰 장소까지 안내하는 사이 또 한 분. 10분 전에 도착한 마지막 할머니는 지각이라도 한 듯 미안해했다.2015년부터 이야기할머니로 활동한 동기가 3명. 오세신(64) 씨는 아마추어 배우이자 수필가다. 5남매의 어머니이자 8명의 손주군단을 거느린 할머니이기도 하다. 방영희(66) 씨는 시니어패션모델로 일한 경험이 있고 1년 전부터 배운 판소리가 프로급이다. 시낭송대회에서 받은 상장만 30개쯤 된다고 한다. ‘늙어도 동자, 하얀 동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백동자(71) 씨는 꽃꽂이와 도예의 달인. 40, 50대엔 구미 거북이봉사단 일원으로 어르신 목욕봉사와 호스피스 활동 등에 오래 헌신했다. 2019년 이야기할머니가 된 이예훈(64) 씨는 유아들 앞에서는 구수한 옛날얘기를 해주는 할머니지만 색소폰을 멋지게 연주하고 가는 곳마다 웃음을 선사하는 분위기메이커다. 50대에 찾아온 우울증을 떨치기 위해 색소폰을 잡았고 기회닿는 대로 봉사하러 다닌다. 2021년 이야기할머니가 된 홍영란(67) 씨는 KBS와 TBC 등에서 활동한 성우였다. TV애니메이션 개구리왕눈이의 ‘아롬이’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아무리봐도 이분들에게 ‘할머니’란 호칭은 위화감이 좀 느껴진다. 하지만 “5-7세 아이들 눈에는 할머니가 맞다”는 설명을 들으니 수긍이 간다.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빛, 이야기에 집중하다가 까르르 터뜨리는 웃음 소리에 할머니들은 세상 시름 다 잊는다고 한다. 오세신 씨는 “가끔 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요즘처럼 아이가 귀한 세상에 주 3일이나 많은 꿈나무들을 만날 수 있으니 특혜죠. 친할머니 외할머니들도 손주가 보고 싶으실 텐데, 그걸 빼앗는 것 같아 살짝 미안함도 느낍니다.” 이야기할머니의 집에는 항상 이야기가 녹음기에서 흘러나와 남편도 내용을 외울 정도. 20분간 구연할 내용을 완벽하게 외워야 하니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자랑한다. 도전정신이 할머니를 강하게 한다 이 분들과 얘기하다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모두 도전정신이 강하다. 할 일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였다. 노력을 통해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고 다음단계로 나아갔다. 오세신 씨는 50대에 자신의 삶을 찾겠다며 어린이집 운영을 그만둔 뒤 짧은 공인중개사 생활을 거쳐 연극을 배우고 시낭송대회에서 대상까지 탔다. 방영희 씨는 성가정입양원, 시립요양원에서 오랜 기간 자원봉사하는 한편으로 민요와 시낭송 판소리를 배우고 시니어모델 활동도 했다. 홍영란 씨는 성우활동을 그만둔 뒤 남편 사업을 돕는 한편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 녹음 등 끊임없이 봉사활동을 벌였다. 백동자 씨는 60대에 접어들어 목욕봉사가 힘에 부치자 도서관에 나가 동화구연을 배우다가 이야기할머니와 인연을 맺었다. 이예훈 씨는 색소폰을 배우기 위해 무작정 찾아간 강습장에 여자는 자기 혼자였지만 ‘지금 아니면 못한다’는 생각에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우리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둘째, 가족 우선의 삶을 살다가 나이 들어 자유로워진 경우가 많다. 지금 60대 이상인 세대만 해도 부인의 바깥활동에 거부감을 가진 집이 많았던 탓이다. 이날 만난 5명중 3명이 남편의 반대로 꿈을 접었다고 했다. 예컨대 오 씨와 방 씨는 연극을 하고 싶어했지만 ‘집안 망한다’는 남편의 반대에 부딪힌 사연이 있다.이 대목에서 화제는 요즘 사회문제인 저출산으로 옮아갔다. 가만 보면 지금 한창 결혼 안 하고 아이 안 낳는 세대가 바로 엄마들의 이런 삶을 보고 자란 세대 아닌가. “‘여자는 결혼하면 손해’라거나 아이 낳아서 내 인생없이 사는 거 싫다고 하는 젊은이들이 많지요. 그러니 더더욱 저희 세대가 삶의 주인공이 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봐요.”(방영희)“나이 들어도 꿈은 많아” 셋째 자신의 꿈에 솔직하다.친언니가 이야기할머니 하는 모습이 좋아보여 도전했다는 이예훈 씨는 “K전통문화 콘텐츠를 해외에 알리는데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올해를 끝으로 만 8년간의 이야기할머니 활동을 정리할 생각이라는 백동자 씨는 “수업에는 반드시 한복을 입고 갔는데, 한복차림이 잘 어울린다는 칭잔을 참 많이 들었다”며 “한복모델은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새 포부를 밝혔다. 역시 올해가 마지막해인 오세신 씨는 “우선은 이야기할머니에 재도전하는 길을 찾아보겠다”며 이 일을 놓지 못하는 마음을 토로했다. “만약 더 연장할 수 없다면 도서관에서 ‘책읽어 주는 할머니’에 도전해보겠다”고 한다. 봉사도 여행도 연극도, 걸어다닐 힘이 있을 때까지는 도전하고 싶다고. ‘이야기 할머니’에서 ‘이야기 예술인’으로이런 이야기할머니의 세계에 올들어 변화가 일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구연동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인 ‘오늘도 주인공’이 개최된 것.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야기 할머니들이 기량을 맘껏 뽐낼 수 있도록 한국국학진흥원, CJ ENM과 손잡고 만든 무대다. 참여자들은 4명씩 4개의 팀을 이루어 연예인 팀장과 함께 구연극 경연을 펼쳤다. 예능적 성격이 가미되다보니 6070세대 내에서 스타를 찾아내는 작업인 것으로도 보였다. 배경에는 고령화시대에 6070세대의 문화참여 열망을 살려 이들이 예술창작활동의 주역으로 활약하도록 지원한다는 취지가 담겼다. 특히 전통이야기 구연을 K전통문화 콘텐츠로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그래서 문체부와 국학진흥원은 올해부터 아예 ‘이야기할머니’를 ‘6070 이야기 예술인’으로 바꿔 부르고 있기도 하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6070 예술인들을 응원하며 창작지원을 확대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18일 방송될 최종 공연이 끝나면 여기서 만들어진 이야기극을 각색해 10월부터 전국 주요도시에서 10여차례 공연할 예정이다. 하반기부터는 이야기할머니들의 구연 영상에 외국어 자막을 입혀 해외에 전파한다는 계획도 마련돼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8월부터 이야기할머니를 파견하는 범위를 현재의 유치원·어린이집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돌봄 서비스인 ‘늘봄학교’로 넓힐 예정이기도 하다.“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세요”이분들에게 혹시 행복하지 않은 동년배 여성분들이 있다면 어떤 조언을 할지 물어봤다. “나이가 들어도 가슴 뛰는 일을 계속 찾아야 해요. 저는 그렇게 하고 있어요.”(방영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자원봉사 중인데 동료 봉사자 대부분이 75세 이상이세요. 이 분들, 늘 책을 들고 다니면서 역사 공부를 즐기세요. 이런 자세를 배우고 싶습니다.(이예훈) “몇살이건 꿈을 갖고 실천에 옮겨야 해요. 아무리 권해도 자신 없다던 후배가 내년에는 이야기할머니에 도전하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철저 지도해주기로 했어요.”(오세신) “간절함과 열의로 무언가에 도전하는 경험은 꼭 해보셨으면 해요.”(홍영란)동화구연이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인 홍 씨지만 2014년 이야기할머니 면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고 한다. 그가 털어놓은 경험담이 많은 이에게 참고가 될 듯하다.“제가 방송국 들어갈 때 500대 1 경쟁률도 뚫었는데, 이야기할머니 선발 경쟁이 훨씬 어렵더라구요. 동화구연은 제가 생각해도 잘 했고 심사위원도 감탄하셨어요. 그런데 제게는 간절함이 부족했어요. 옆의 분이 굉장히 간절하게 자기가 꼭 되고 싶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열의가 너무 대단하더라구요. 저는 ‘간절하신 분이 하셔야죠’ 이러고 말았다니까요. 마음속에 품은 간절함은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해요.”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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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 환경보호? 후배들아, 험한 일은 우리가 할게”[서영아의 100세 카페]

    시니어 아미(Senior Army)라니? BTS(방탄소년단) 팬클럽 ‘아미’의 시니어 분과인가? 이름에서 다소 장난기가 느껴지는 이 모임, 진짜 군대(army)를 지향한다. 물론 현역 군인은 아니고 예비 병력, 어쩌면 예비의 예비 병력이다. 저출산 인구 감소로 병역자원 고갈이 우려되는 현실에서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은퇴 세대들이 앞장서 징집에 응하겠다고 서약하는 운동을 벌인다. 23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열린 창립총회에는 백발은 희끗해도 활기가 넘치는 남녀 50여 명이 참석해 ‘국가가 부르면 우리는 헌신한다’고 다짐했다. 창립발기인의 신분과 면면은 제각각이다. 농부, 자영업자, 전직 언론인, 변호사, 정치인에 일본 영주권자도 있다. 주부를 비롯한 여성도 간간이 눈에 띈다. 시니어 아미 최영진 공동대표(중앙대 교수·정치국제학)는 “회원 자격은 남녀 불문, 병역 불문, 국적 불문이다. 대한민국을 지키고 인간 기본권을 수호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가능하다. 다만 유사시 징집을 자원하는 동원 등록 회원은 50∼75세로 한정하고자 한다”고 밝혔다.●“유사시? 살 만큼 산 사람들이 전장에 나가야죠…”주최 측에 따르면 발단은 지난해 초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인구 1억5000만 명의 대국 러시아가 예비역 30만 명 동원에 쩔쩔매는 현실을 보며 예비군의 중요성을 되새겼다. 출산율은 줄고 노인 인구는 늘어가는 한국에서 앞으로 군대가 유지되겠냐는 걱정이 만연하던 참이다. 그즈음 최영진 공동대표가 낀 60대 동창 모임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 “이러다 우리 군대 두 번 가야 하는 거 아냐?” “까짓, 가면 되지 뭐. 아직 건강하고 시간도 많은데.” “우리가 지금 등산에 마라톤에 스쿠버다이빙까지 하고 다니는데 경계병 정도야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가볍게 시작된 얘기는 조금씩 커져 갔다. 생각할수록 그럴싸했다. 요즘 군은 자동화가 진행돼 있다. 경계병이나 감시병 정도는 60대 시니어라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군대 경험이 없는 여성들도 도울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동창회, 지인 모임 등 이런저런 단체카톡방에 이런 취지를 올리니 뜨거운 반응이 올라왔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사람이 부족한데 전쟁터에 보내면 안 되지요. 요즘 시니어들이 건강하고 군사 경험이 있으니 마땅히 나서야죠. 평소 생각하던 바입니다.”(손교명 변호사) “살 만큼 산 사람들이 전장에 나가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생산에 종사하고.”(선남규 씨·중소기업경영) “다 같이 위국헌신 정신으로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지켜 나갑시다.”(오세윤 씨·농부) 논의가 산으로 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시니어 아미를 일자리 창출 개념으로 접근한 일부 시각이 그런 예다. 시니어를 아예 장병 수준 급여로 고용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오자 금세 “난 돈 주지 않으면 안 하겠다”는 주장이 튀어나왔다. 연회비 3만 원에 대해서도 “목숨 바쳐 전선에 나가겠다는데, 돈까지 내야 하느냐”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시니어 아미는 회원들의 자발성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도 철저히 정부 지원 배제, 자비 부담 원칙을 고수하겠다고 한다. 조건 없는 헌신, 대가 없는 봉사가 아니라면 시니어로서 자긍심을 얻기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정부 지원 배제, 자비 부담 원칙 고수앞으로 인허가 절차를 거쳐 사단법인으로 발족할 계획인 시니어 아미는 7월 초순 홈페이지를 열어 가입 신청을 받을 예정이다. 아직 구상 단계이지만 몇 가지 활동 계획은 굳히고 있다. 1년에 한두 번이라도 단기 동원훈련 정도는 해 보려 한다. “정부가 허락하면 평시에도 주특기 훈련이나 경계근무 지원을 2박 3일 정도 할 수 있겠지요. 이런 경우 훈련장은 빌리고 총은 대여받되 밥값은 자비 부담한다는 게 원칙입니다. 동원예비군 훈련 때 몇십 명이라도 시니어들이 함께 훈련받는다면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이 단체가 출범 직전 50∼75세 장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데이터리서치)에서는 ‘은퇴한 장노년층이 동원예비군으로 다시 복무하자’는 주장에 대해 57.3%(적극 찬성 29.4%, 다소 찬성 27.9%)가 찬성했다. 이 같은 취지를 서약하자는 운동이 벌어진다면 참여하겠다는 답변은 61.4%(적극 동참 27.5% 가급적 참여 33.9%)에 이르렀다. “개인적으로 예비역 장군에게 얘길 꺼내 봤는데 그분도 반색하더군요. 해병전우회 장부상 회원이 100만 명, 한국ROTC중앙회 장부상 회원은 20만 명에 성우회(장군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이런 모임들이 조직적으로 가입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최영진 공동대표) “저희 세대 사이에서 반응이 너무 좋았습니다. 일단 100만 회원 가입이 목표입니다. 우리 경쟁 상대는 BTS 팬클럽 아미예요. 하하.” 인원이 늘면 세력화가 진행되고 정치색이 끼어들 수도 있다. 자칫 제2의 태극기부대로 오인받을 가능성은 없을까.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은 권재홍 전 MBC 부사장은 “그런 우려를 저희도 좀 했고 그래서 가장 큰 원칙을 ‘정치적 중립’으로 삼았다”고 잘라 말한다. “국가 안보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지요. 조심조심 경계할 것은 경계하되, 너무 무겁지 않게 운영해 나갈 생각입니다.” ●“노년이 달라져야 미래가 달라진다”손주 세대의 미래를 걱정하며 행동에 나선 시니어들도 있다. 지난해 1월 출범한 ‘60+기후행동’은 “손주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다”며 시니어가 나서서 행동하는 환경운동을 표방한다. 기성세대가 성장 중심으로 앞만 보고 달려오는 사이 미래 세대가 살아갈 환경을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성찰이 배경에 깔렸다. 스웨덴의 소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당사자로서 일상의 환경운동을 추동해 냈다면 이들은 자손들을 걱정하는 부모 마음을 담아 활동하는 것이다. 시위 방식도 독특하다. 대규모 인원이 주먹을 쥐고 목소리를 높이는 형태가 아니라 시니어 한두 명이 피켓을 들고 문제의 현장을 기웃대는 ‘어슬렁 시위’ 같은 것을 펼친다. 자체 밴드를 만들어 ‘방탄노년단’이라 이름 붙이고 즐기기도 한다. 강남식 60+기후행동 공동대표는 “기후 관련한 모든 숫자들이 다음 세대가 미래를 꿈꾸는 것은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말해준다”며 “우리는 노년이 달라져야 미래가 달라진다는 기치 아래 모였고, 미래 세대의 미래와 노년 세대의 여생을 위해 ‘녹색 전환’을 추구하는 활동을 한다”고 말했다.●베이비붐 세대, 초고령사회의 새로운 노인들이처럼 현역이 아니어도,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해도 미력이나마 세상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시니어들의 활동은 연간 100만 명 전후씩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머릿수 힘까지 더해 강점이 되고 있다. 2000년대 초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미래포럼’은 베이비붐 세대가 앞장서 초고령사회의 체인지메이커가 되겠다고 표방하며 ‘우리가 디자인한다’는 뜻의 ‘우디클럽’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베이비붐 세대는 과거의 노인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대라고 규정하고 새로운 노인들이 사회에도 도움이 되고 스스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이 같은 활동 배경에는 자식 세대의 빈 곳을 보완하겠다는 의지에 더해 세상에 대한 작은 참여로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고 싶은 은퇴 세대의 바람이 담겨 있다. “난 아직 죽지 않았다”고 외치는, 또 실제 그럴 능력이 충분한 이들이 바꿔놓을 미래가 다가온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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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수 현미의 죽음이 쓸쓸하지 않은 이유는…”대한민국 1호 유품정리사가 말하는 죽음 준비의 철학[서영아의 100세 카페]

    모든 죽음은 결국 고독하다. 하지만 고독한 임종을 거쳐 몇 날 며칠을 시신으로 내버려져 있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유기체에서 생명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시작되는 부패를 떠올리면 더욱 무참하다. 이런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인간의 위신도 존엄성도 무색해진다.지난달 18일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례가 2021년에만 3378건 있었다. 5년 전보다 40%가 늘어난 수치다. 고독사가 우려되는 위험군이 153만 명이나 되고 이중 50~60대 중장년 남성이 가장 취약하다고 지목되기도 했다. 이런 발표들을 보며 ‘고독사’라는 일본산 신조어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인물을 떠올렸다. ‘대한민국 최초의 유품정리사’라 불리는 김석중 키퍼스코리아 대표(53). 그를 만나러 22일 부산으로 향했다. 그는 며칠 뒤 서울에서 강연 2건이 예정돼 있지만 당일 인터뷰 시간을 내기는 빠듯하다고 했다.지인들과 수시로 연락= 고독사 예방부경대 창업지원센터에 자리한 키퍼스코리아 사무실. 유품 촬영이나 분석작업을 하는 공간이다. 그는 4월 초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돼 충격을 던진 원로가수 현미 씨 얘기부터 꺼냈다. 보도에 따르면 현미 씨는 전날 저녁까지도 지인들과 소통했지만 다음날 오전 방문한 팬클럽 회장에게 쓰러진 채 발견됐다. 그는 “그래도 고독사를 피해서 다행”이라고 했다.“몇 년 전 현미 선생님과 고독사를 주제로 한 예능프로(2019년 5월 방송)에 함께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때 혼자 사는 고령자가 고독사를 피하려면 매일같이 연락하는 지인을 주변에 많이 둬야 한다고 조언했는데 선생님이 무척 공감하셨어요. 그걸 잘 실천하셨던 거죠. 그 덕에 선생님의 마지막은 외로웠어도 고독사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법적으로 정의된 고독사는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자살 병사 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그 시신이 일정 시간(최소 3일 이상) 흐른 뒤 발견되는 죽음’을 말한다.반대로 4월 말 그가 유품 정리를 의뢰받은 66세 여성은 사망 뒤 3일 만에 처참하게 녹아내린 상태로 발견됐다. 자녀들이 외국에 있어 혼자 살던 고인은 침대에 누운 채 발견됐는데 아파트 전체에 난방이 가동되고 있었다.-고독사를 막으려면 현미 씨 경우처럼 일상적인 연결망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겠군요. “물론입니다. 다만 갈수록 고독사나 죽음에 대한 관점이 왜곡되고 있어 곤혹스럽습니다. 일부 미디어에서 처참한 현장을 치우는 ‘특수청소’ 위주의 자극적인 소재로 이용되고 있지요. 고독사라 하면 기괴한 현장이나 악취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돼버린 거죠. 망자들의 고독에 공감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 머문다면 사회적 의미가 없어요.”-복지부 고독사 예방 실무협의회 전문위원이십니다. 이번에 정부가 고독사 예방대책으로 이웃들에 게이트키퍼 역할을 부여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습니다. 실효성이 있을까요?“행정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주변 지인들과 연락 관계를 구축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는 없지요.”중고품 판매업자, 폐기물 업자 난립도초고령사회가 목전인데 1인 가구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고독사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 황망하게 맞이하는 죽음일수록 고독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김 대표는 고독사를 생전 정리와 연결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생전 정리는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를 미리 준비하는 일이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해둬야 유족이 고인의 삶의 족적과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이 일을 사후에 돕는 존재가 유품정리사다. “한 사람의 죽음 뒤 집 한 채 분량의 유품이 생겨납니다. 유품정리사는 고인의 품위를 지키고 생전 의도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인이 남겨놓은 것들을 남길 것과 버릴 것, 돈으로 바꿀 것으로 분류하고 유족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 안내하죠. 또 고인 삶의 기록을 통해 유족들이 추모할 수 있도록 해드리고 이 과정에서 유족을 위로하는 역할도 하지요. 그러려면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유품 정리가 한국에 뿌리내리기 어려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현실에서는 망자의 집은 대개 신속하게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 예컨대 집을 상속받으면 내용물을 빨리 비워내고 처분하기를 원하는 유족들로서는 찬찬히 추억거리까지 골라내는 유품 정리 과정을 번거롭다고 느낀다. 비용도 일반 이사 비용의 2배 가까이 불어난다. 그래서인지 최근 국내에 난립하는 유품정리업체 중에는 중고품 판매업자나 폐기물 업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이들은 고인의 짐을 한꺼번에 쓸어간 뒤 값나가는 물건만 추려내고 나머지는 모두 버린다. 당장 돈이 안 된다면 추억이건 학술 예술적 가치건 정보건 그들에겐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30대 후반, 아끼던 직원 사망에 인생관 바뀌어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무역회사를 경영하던 김 대표가 유품정리사가 된 데는 사연이 있다. 2006년 아끼던 20대 직원이 휴가를 갔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충격 속에 힘든 나날을 보내던 무렵, 우연히 일본 최초의 유품 정리 전문회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천국으로의 이사를 도와드립니다’가 이 회사의 캐치프레이즈였다. 무턱대고 방송에 소개됐던 ‘키퍼스’의 요시다 다이치(吉田太一) 대표를 찾아갔다. 당시 일본서는 고독사 문제가 부각되고 장례 관련 박람회나 엔딩산업이 태동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사업으로서 승산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3년간 일본을 오가며 연수를 마친 뒤 2010년 한국 최초의 유품정리업체 ‘키퍼스코리아’를 세웠다.-이후 사업이 순조롭지는 않았던 듯한데요.“일본에서 배운 것들을 한국에 접목하려다 보니 ‘그걸 왜 하느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고 왜곡이나 편견도 심했습니다. 직원들도 흩어져갔죠. 그때 제 스스로 생전 정리를 해봤습니다. 인생을 리셋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부분들을 되돌아봤지요. 그간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내팽개치고 너무 많은 외부 활동을 했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구나. 내 몸을 돌보지도 않았구나. 그래서 우선 운동을 시작했고 술을 끊고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이제 어느 정도 자리 잡아가고 있는 사업은 다른 일거리들도 안겨줬다. 그간의 경험과 생각을 담아 2018년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지택코리아)’를, 지난해 ‘당신의 마지막 이사를 도와드립니다(김영사)’를 펴냈다. 그새 유명 강사가 됐고 방송활동도 많은 편이다. 정부 정책에도 이런저런 자문을 한다. 2019년부터 부산과학기술대 장례행정복지과 외래교수로 출강하며 후학을 키우고 있기도 하다. 이 중에서도 그가 요즘 가장 힘을 기울이는 것은 강연이다.“월 10회 이상 전국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오는데 여건이 되는 한 달려갑니다. 죽음에 대비하는 생전 정리는 아예 사회와 문화가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니까요.“아끼다가 ‘똥’ 됩니다. 좋은 물건부터 쓰세요”25일 서울 강남구 웰에이징센터에서 주최한 주민 대상 강연회장에 가봤다. 타이틀은 ‘성공적인 인생 마무리를 위한 생전 유품 정리’. 강남구 거주 어르신 150여 명이 모였다.어르신들 앞에서 당신들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김 대표는 그런 금기를 노련하게 넘나들었다. 강의를 듣는 어르신들의 리액션도 유쾌했다.유품 정리 과정에서 보고들은 여러 사례들, 생전 정리의 의미와 요령이 소개됐다. 예컨대 가진 물건 중 중복되는 것은 과감히 처분하고 좋은 것, 새것부터 쓰시라고 권한다.“아끼다가 똥 된다는 말이 있죠. 어르신들이 남긴 집에서는 ‘언젠가 쓰겠지’ 하며 쟁여둔 물건들이 쏟아져나옵니다. 대개 손톱깎이가 10개, 구둣주걱도 6~7개 정도? 하하”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에서 자신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가타미와케’ 풍습처럼 지인들에게 미리미리 물건을 나눠주라는 조언도 했다.또 혼자 사는 어르신은 주변에 본인 의사대로 사후 정리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세 명 정도 지정해 놓을 것을 권했다. 그러면 훗날 이분들이 서로 협의해 망자의 의사대로 정리해줄 수 있다는 것. 강연이 끝난 뒤 무대 뒤로 잔뜩 고무된 표정의 어르신들이 몰려들었다.“그러잖아도 난 벌써 주변에 다 나눠주고 있어요. 이 나이 되니 새 옷도 별로 필요 없더라고.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몰라.” 칭찬해달라는 듯이 와서 말하는 멋쟁이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강의 참 좋았다”며 명함을 건네는 어르신도 있다.한 할머니가 “젊어서부터 매일같이 써온 가계부 수십 권을 보관하고 있는데, 자식들이 자꾸 버리자고 해서 갈등이 있다”고 하소연하자 김 대표는 “아이고, 그건 아깝죠. 기록물이 될 수도 있는데…”라고 응수한다. 수십년간 꼼꼼히 기록된 가계부라면 그 시대의 물가나 사회상이 잘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자료 가치가 충분할 것 같다. 곧장 서울역으로 향하는 김 대표와 전철역까지 동행했다. “이런 어르신들은 혼자 산다 해도 고독사 위험은 없지 않겠어요.”자살 예방 위해 ‘심리적 부검’도 시도부산 사무실 한편에는 최근 극단적 선택을 한 42세 미혼남성의 유품들이 쌓여 있었다. 유족이 전체적인 정리를 부탁하며 고인이 사용하던 컴퓨터 하드웨어부터 각종 서류와 노트, 증명서 등을 택배로 보내왔다. 그는 자살 예방을 위한 ‘심리적 부검’을 하는 심경으로 분석을 진행할 거라고 한다.“디지털 아카이브 작업을 하기 위해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고인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 명문대를 나왔고 좋은 기업에 취직을 했지만 적응을 못했던 것 같아요.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곳을 알아봤지만 잘 안됐던 듯하고요. 직장이 불안정하니 결혼도 못 했고, 집이 지방이니 주거비부터 생활고에 시달렸을 것이구요. 박수받으며 떠난 고향에 빈손으로 되돌아오기도 힘들었겠지요. 문제는 이런 젊은이들이 줄을 서 있다는 점이에요. 요즘 한국 사회는 한번 궤도에서 이탈하면 다음 기회가 없으니까 말이죠. 정말 심각합니다.”-유족에 대해서도 많이 마음을 쓰는 것 같습니다.“유품 정리가 끝나고도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유족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령 동생이 극단적 선택을 한 뒤 한참 만에 발견되는 사건을 겪은 한 유족은 계속 동생을 따라갈 생각을 하더군요.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도록 대화해주고 지켜봐 주는 일을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그건 사업하고는 무관한데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 아닐까요.“모르는 척하고 그냥 지나가야 되는데 유족을 보면 안타까운 거죠. 슬픈 상황에 놓인 분들을 어떻게건 돕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요. 어차피 큰돈 벌려고 시작한 사업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사실 대표직도 내놓고 싶습니다. 제가 키퍼스 코리아의 기본 틀은 어느 정도 만들었거든요. 앞으로 회사를 이끌어갈 적절한 대표가 나타난다면 언제라도 넘겨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생전정리를 사회에 알리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해나가고 싶고요. 생전 정리를 생각하는 순간 삶이 다르게 보입니다. 정말이에요.” 부산=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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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1호 유품정리사가 말하는 ‘죽음 준비의 철학’[서영아의 100세 카페]

    모든 죽음은 결국 고독하다. 하지만 고독한 임종을 거쳐 몇 날 며칠을 시신으로 내버려져 있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유기체에서 생명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시작되는 부패를 떠올리면 더욱 무참하다. 이런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인간의 위신도 존엄성도 무색해진다. 지난달 18일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례가 2021년에만 3378건 있었다. 5년 전보다 40%가 늘어난 수치다. 고독사가 우려되는 위험군이 153만 명이나 되고 이 중 50, 60대 중장년 남성이 가장 취약하다고 지목되기도 했다. 이런 발표들을 보며 ‘고독사’라는 일본산 신조어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인물을 떠올렸다. ‘대한민국 최초의 유품정리사’라 불리는 김석중 키퍼스코리아 대표(53). 그를 만나러 지난달 22일 부산으로 향했다. 그는 며칠 뒤 서울에서 강연 2건이 예정돼 있지만 당일 인터뷰 시간을 내기는 빠듯하다고 했다.●지인들과 수시로 연락=고독사 예방부경대 창업지원센터에 자리한 키퍼스코리아 사무실. 유품 촬영이나 분석 작업을 하는 공간이다. 그는 4월 초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돼 충격을 던진 원로 가수 현미 씨 얘기부터 꺼냈다. 보도에 따르면 현미 씨는 전날 저녁까지도 지인들과 소통했지만 다음 날 오전 방문한 팬클럽 회장에게 쓰러진 채 발견됐다. 그는 “그래도 고독사를 피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몇 년 전 현미 선생님과 고독사를 주제로 한 예능 프로그램(2019년 5월 방송)에 함께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때 혼자 사는 고령자가 고독사를 피하려면 매일같이 연락하는 지인을 주변에 많이 둬야 한다고 조언했는데 선생님이 무척 공감하셨어요. 그걸 잘 실천하셨던 거죠. 그 덕에 선생님의 마지막은 외로웠어도 고독사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법적으로 정의된 고독사는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자살 병사 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그 시신이 일정 시간(최소 3일 이상) 흐른 뒤 발견되는 죽음’을 말한다. 반대로 4월 말 그가 유품 정리를 의뢰받은 66세 여성은 사망 뒤 3일 만에 처참하게 녹아내린 상태로 발견됐다. 자녀들이 외국에 있어 혼자 살던 고인은 침대에 누운 채 발견됐는데 아파트 전체에 난방이 가동되고 있었다. ―고독사를 막으려면 현미 씨 경우처럼 일상적인 연결망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군요. “물론입니다. 다만 갈수록 고독사나 죽음에 대한 관점이 왜곡되고 있어 곤혹스럽습니다. 일부 미디어에서 처참한 현장을 치우는 ‘특수 청소’ 위주의 자극적인 소재로 이용되고 있지요. 고독사라 하면 기괴한 현장이나 악취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돼버린 거죠. 망자들의 고독에 공감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 머문다면 사회적 의미가 없어요.” ―복지부 고독사 예방 실무협의회 전문위원이십니다. 이번에 정부가 고독사 예방 대책으로 이웃들에 게이트키퍼 역할을 부여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습니다. 실효성이 있을까요. “행정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주변 지인들과 연락 관계를 구축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는 없지요.”●중고품 판매업자, 폐기물 업자 난립도초고령사회가 목전인데 1인 가구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고독사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 황망하게 맞이하는 죽음일수록 고독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김 대표는 고독사를 ‘생전정리’와 연결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생전정리는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를 미리 준비하는 일이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해 둬야 유족이 고인의 삶의 족적과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이 일을 사후에 돕는 존재가 유품정리사다. “한 사람의 죽음 뒤 집 한 채 분량의 유품이 생겨납니다. 유품정리사는 고인의 품위를 지키고 생전 의도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인이 남겨놓은 것들을 남길 것과 버릴 것, 팔 것으로 분류하고 유족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 안내하죠. 또 고인 삶의 기록을 통해 유족들이 추모할 수 있도록 해드리고 이 과정에서 유족을 위로하는 역할도 하지요. 그러려면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유품 정리가 한국에 뿌리내리기 어려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현실에서는 망자의 집은 대개 신속하게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 예컨대 집을 상속받으면 내용물을 빨리 비워내고 처분하기를 원하는 유족들로서는 찬찬히 추억거리까지 골라내는 유품 정리 과정을 번거롭다고 느낀다. 비용도 일반 이사 비용의 2배 정도다. 그래서인지 최근 국내에 난립하는 유품 정리 업체 중에는 중고품 판매업자나 폐기물 업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이들은 고인의 짐을 한꺼번에 쓸어간 뒤 값나가는 물건만 추려내고 나머지는 모두 버린다. 당장 돈이 안 된다면 추억이건 학술 예술적 가치건 정보건 쓰레기에 불과하다.●30대 후반, 아끼던 직원 사망에 인생관 바뀌어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무역회사를 경영하던 김 대표가 유품정리사가 된 데는 사연이 있다. 2006년 아끼던 20대 직원이 휴가를 갔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충격 속에 힘든 나날을 보내던 무렵, 우연히 일본 최초의 유품 정리 전문 회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무턱대고 방송에 소개됐던 ‘키퍼스’의 요시다 다이치(吉田太一) 대표를 찾아갔다. 당시 일본에서는 고독사 문제가 부각되고 장례 관련 박람회나 엔딩산업이 태동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사업으로서 승산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3년간 일본을 오가며 연수를 마친 뒤 2010년 한국 최초의 유품 정리 업체 ‘키퍼스코리아’를 세웠다. ―사업이 순조롭지는 않았던 듯한데요. “일본에서 배운 것들을 한국에 접목하려다 보니 ‘그걸 왜 하느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고 왜곡이나 편견도 심했습니다. 직원들도 흩어져 갔죠. 그때 저 스스로 생전정리를 해봤습니다. 인생을 리셋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부분들을 되돌아봤지요. 그간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내팽개치고 너무 많은 외부 활동을 했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구나. 내 몸을 돌보지도 않았구나.’ 그래서 우선 운동을 시작했고 술을 끊고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사업은 다른 일거리들을 안겨줬다. 그간의 경험과 생각을 담아 2018년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지택코리아)를, 지난해 ‘당신의 마지막 이사를 도와드립니다’(김영사)를 펴냈다. 유명 강사가 됐고 방송 활동도 많은 편이다. 정부 정책에 이런저런 조언을 한다. 2019년부터 부산과학기술대 장례행정복지과 외래교수로 출강하며 후학을 키우고 있다. 이 중 요즘 가장 힘을 기울이는 것은 강연이다. “월 10회 이상 전국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오는데 여건이 되는 한 달려갑니다. 죽음에 대비하는 생전정리는 아예 문화가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돈이 안 되고 몸도 피곤하지만 사명감으로 다닙니다.”●“아끼다가 똥 됩니다. 좋은 물건부터 쓰세요”지난달 25일 서울 강남구 웰에이징센터에서 주최한 주민 대상 강연회장에 가봤다. 타이틀은 ‘성공적인 인생 마무리를 위한 생전 유품 정리’. 강남구 거주 어르신 150여 명이 모였다. 어르신들 앞에서 당신들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김 대표는 그런 금기를 노련하게 넘나들었다. 강의를 듣는 어르신들의 리액션도 유쾌했다. 유품 정리 과정에서 보고 들은 여러 사례들, 생전정리의 의미와 요령이 소개됐다. 예컨대 가진 물건 중 중복되는 것은 과감히 처분하고 좋은 것, 새것부터 쓰시라고 권한다. “아끼다가 똥 된다는 말이 있죠. 어르신들이 남긴 집에서는 ‘언젠가 쓰겠지’ 하며 쟁여둔 물건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대개 손톱깎이가 10개, 구둣주걱도 6∼7개 정도? 하하.”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에서 자신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가타미와케’ 풍습처럼 지인들에게 미리미리 물건을 나눠주라는 조언도 했다. 또 혼자 사는 어르신은 주변에 본인 의사대로 사후 정리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을 3명 정도 지정해 놓을 것을 권했다. 그러면 훗날 이분들이 서로 협의해 망자의 의사대로 정리해줄 수 있다는 것. 강연이 끝난 뒤 무대 뒤로 잔뜩 고무된 표정의 어르신들이 몰려들었다. “그렇잖아도 난 벌써 주변에 다 나눠주고 있어요. 이 나이 되니 새 옷도 별로 필요 없더라고.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몰라.” 칭찬해 달라는 듯이 와서 말하는 멋쟁이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강의 참 좋았다”며 명함을 건네는 어르신도 있다. 한 할머니가 “젊어서부터 매일같이 써온 가계부 수십 권을 보관하고 있는데, 자식들이 자꾸 버리자고 해서 갈등이 있다”고 하소연하자 김 대표는 “아이고, 그건 아깝죠. 기록물이 될 수도 있는데…”라고 응수한다. 수십 년간 꼼꼼히 기록된 가계부라면 그 시대의 물가나 사회상이 잘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자료 가치가 충분할 것 같다. 곧장 서울역으로 향하는 김 대표와 전철역까지 동행했다. “이런 어르신들은 혼자 산다 해도 고독사 위험은 없지 않겠어요?”부산=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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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과 이민, 30년 간병이 그에게 남긴 것, 재미교포 작가 김석휘 씨[서영아의 100세 카페]

    4월 초 미국 시카고에서 e메일이 하나 왔다. 발신인은 재미교포 김석휘 씨(74). 현지에서 자전적 장편소설 ‘누가 엄마를 울게 했는가(Who Made Mom Cry)’를 어렵사리 냈다는 내용이었다. 책에 대해 ‘한 가여운 여성의 파란만장 일대기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현대사, 이민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했고 2014년 한국어로 낸 원작 ‘가족의 온도’(청동거울)가 있다고 했다. 2017년 이래 고국을 처음 찾았다는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나봤다.59세에 교통사고로 가슴 이하가 마비된 어머니인터넷서점에서 구해 본 한국어판은 350여 쪽 두께. 경제적으로 파산했던 한 가족이 장남의 미국 이민을 시작으로 하나둘 미국에 정착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교통사고로 전신마비라는 엄청난 고통을 안게 된 어머니의 절절한 이야기가 생생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4남매의 장남으로서 가난에 찌든 가족을 일으켜 세우고 장애를 안은 어머니의 삶을 끝까지 지켜내는 김 씨 본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전해져왔다.1949년 전북 전주 생인 김 씨는 1979년 간호사로 기술이민을 간 아내를 따라 미국에 건너갔다. 이듬해 어머니를, 그 1년 뒤 아버지를 초청했다.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던 어머니는 1987년 버스 교통사고로 경추 3, 4번을 크게 다친 뒤 가슴 이하 마비 판정을 받았다. 그나마 고된 재활훈련을 거친 덕에 당초 전신마비 판정보다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본인 힘으로 숟가락도 못 드는 상황인데 두뇌활동이나 보고 듣고 말하는 기능은 이상이 없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괴로우셨겠어요. 돌아가신 2016년까지의 29년은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낫기 위해, 살기 위해 벌인 투쟁의 시간이었습니다.”김 씨는 내내 바로 곁에서 이 투쟁을 도왔다. “내 인생 2막은 어머니의 사고로 시작됐다”인생 무대에도 ‘판’이 바뀌는 때가 있다. 그의 인생 최대 전환기는 언제였을까. 그는 주저 없이 어머니가 다쳐 장애를 안게 된 1987년 12월이 그때라고 답한다.“저로서는 평생의 꿈을 포기하는 시작점이었어요. 제 꿈은 항공 기계공학 공부를 계속해 박사학위를 딴 뒤 교수나 공학자(엔지니어)가 되는 거였어요. 사고 당시 일리노이공대 항공기계공학 석사과정을 한 학기만 남긴 상태였어요.직장 다니며 하는 공부라 미국 간 지 딱 10년, 입학한 지 8년 만에 끝낼 참이었죠. 어머니의 사고로 한 학기를 늦추면서 솔직히 속으로 절망했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아파서 쩔쩔매는 걸 보니 젊고 건강한 내 입장을 돌아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좀 돌아가자, 우선은 최선을 다해 어머니를 낫게 해드리자고 생각한 거죠.”그가 평소 잘 쓰는 말이 ‘난 우회를 하더라도 내 일을 할 거야’였다. 1989년 5월 석사를 취득했지만 박사과정도 한없이 늦춰졌다. 어머니보다 11세 연상인 아버지도 노쇠해 2006년 향년 8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며 그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박사과정 자격시험 준비하다가 아버지가 넘어져 다리를 다치고, 공부 좀 끝낼 만하면 또 어머니가 넘어지고…. 그렇게 10년쯤 끌다가 어느 학기엔가 학교 측으로부터 제가 행정조치를 제대로 안 해 제적됐다는 연락을 받게 됐지요.나락에 빠졌던 집안 경제김 씨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선 탓에 가계가 무너졌다. 아버지의 월급 절반에 차압이 들어왔고 살던 집을 팔고는 해마다 쫓기듯 이사를 다녔다. 고교생 시절 김 씨가 서울에 있는 대학 진학을 꿈꾼 데에는 여섯 식구가 한방에서 생활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우리 집 형편에 서울의 대학은 언감생심이었지만 어머니의 격려 하에 무조건 서울행 기차를 탔지요. 어머니가 어렵사리 입학금을 마련해주셨고 그 뒤로는 학비며 생활비는 제가 벌어 해결했습니다. 대학 졸업 뒤 석사와 박사를 미국에서 도전하겠다는 꿈도 꾸게 됐지요.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신념은 곧 제 신념이었습니다.”그가 항공대에 입학한 뒤 어머니는 수도권의 건설 현장을 쫓아다니며 8년 정도 속칭 ‘함바집(가설식당)’을 운영하는 생활을 하기도 했다. 거친 공사 현장 인부들을 상대로 하는 이 일은 식대를 떼이기 일쑤. 죽어라 일해도 겨우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는 정도였다.김 씨가 1976년 대기업에 입사해 월급을 받게 되면서 처음으로 집안 경제가 피었다. 어머니는 평생 처음 통장에 잔고가 쌓이기 시작했다고 기뻐했다. 그 돈을 모아 서울 신림동에 단독주택을 전세로 얻어 가족이 다시 모여 지낼 수 있었다. 이 집에서 김 씨를 비롯해 형제 3명이 불과 1~2년 사이 혼사를 치렀다.“근 30년 이어진 간병에 내 꿈은 접었지만…” -한국이건 미국이건 부모님이 아프면 시설로 보내드리는데, 그런 생각은 안 하셨나요.“부모를 떠나 인간으로서 그 고통과 절절함이 너무 다가왔습니다. 어렸을 때 제가 아프면 엄마를 불렀던 기억이 생생한데…. 아마 시설에 계셨다면 대소변 등 문제 때문에라도 금방 돌아가셨을 거예요. 소변줄 염증 관리해야 하고 변비가 심해 약이나 관장으로 안 되면 손가락으로 파내는 일도 적지 않아요. 그런 걸 저만큼 잘할 사람은 없어요.”전신마비 환자는 24시간 간병이 필요하다. 낮과 밤, 주말이 따로 돌아가는 3교대 체제인데, 간병인 구하기도 힘들었다. 어머니와 말이 통하는 한국인은 더욱 쉽지 않았고 밤에 근무하려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다. 어머니에게는 간병비와 재활치료비 등으로 1년에 10만 달러(약 1억 3000만 원)씩 들어갔다. 시카고시로부터 배상금을 받았지만 15년 정도 더 사신다는 것을 전제로 계산된 액수였다. 29년을 더 사셨으니 갈수록 형편이 쪼그라들어 아파트 한 채를 팔고 사시던 집도 팔아야 할지를 걱정해야 했다.“그래도 초기 10년은 상태가 조금씩 좋아지는 듯했어요. 아직 상대적으로 젊은 시기니까요. 손끝을 조금 움직이거나 보행기에 의지해 한 걸음씩 떼기도 했지요. 하지만 균형을 잡지 못하니 자꾸 넘어졌어요. 넘어지면 한쪽 다리 부러지고 다음번엔 반대쪽 다리 부러지고 아휴, 말도 못 해요. 어머니는 낫고자 하는 의지가 끝까지 무척 강했어요. 자꾸 움직여보려 하다가 넘어지고 부러지고 했지요. 그때마다 뒷일은 모두 제가 감당해야 했죠.” 간병의 십자가본인의 뜻으로 어쩌지 못하는 이런 시련들을 그는 운명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피하거나 한탄하는 대신 이 모든 과정을 관찰하고 꼼꼼히 기록했다. 그것들이 훗날 책을 쓰는 소재가 됐다.그에게 어머니는 모순된 존재였다. 현실에서는 그의 성장에 방해가 되고 있었지만 그가 살아가는 방향을 잡아주고 성장의 목표를 세워준 존재이기도 했다. 어머니 본인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지만 자식들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며 자녀들을 실업계로 보내려는 남편에게 맞섰다. 그 덕에 김 씨네 4형제는 항공대, 철도간호학교, 공군사관학교 등 국립이라 학비 부담이 적은 곳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한사람에게 간병부담이 쏠리는 걸 ‘독박간병’이라 하죠. 마치 ‘십자가를 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혹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그때그때 갈등은 있었지요. 그런데 이걸 누구한테 시키겠어요. 한국에 사는 여동생은 부모님이 한국 가면 굉장히 열심히 도와요. 한동안 한국의 병원에 입원도 하시고 침 치료를 받으러 지방에 다니기도 하시고, 참 여러 시도를 해봤습니다. 미국 사는 남동생과 여동생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자기 가정 꾸려야 하죠. 할 수 없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저만 보면 함박웃음을 지으셨고 어머니도 ‘내가 우리 돼지 때문에 믿고 살아’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그보다 더 큰 힘의 원천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록 젊은 시절 30년을 큰일을 못 하고 어머님을 간병했지만 절대 후회는 없어요. 더 못 해 드린 게 지금도 마음 아픕니다.”“희생은 우리 세대로 끝이겠구나”아내와 자녀들도 늘 그를 응원하고 힘을 보탰다. 특히 간호사인 아내는 다방면에서 큰 도움이 돼 줬다. 아들과 딸은 모두 명문대를 나와 마케팅 전문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김 작가를 지탱하는 힘은 끈끈한 가족애인 듯합니다. 그런데 혹시 본인이나 부인에게 비슷한 일이 닥친다면 어떨까요.“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예요. 아들이 고1 때인가,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요새 아빠가 할머니 때문에 이렇고 저렇고’라며 한 10여 분 얘기했더니 이 녀석이 ‘왜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해요?’하더군요. 섬찟했습니다. 은연중에 ‘우리가 아프게 되면 너희가 아버지처럼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걸로 여기지나 않을까. 애들한테는 저나 집사람이나 절대로 이런 문제를 맡기면 안되겠구나…. 소위 ‘희생’ 같은 건 우리 세대로 끝나는 것 같아요.”-그럼 만일의 경우 어떻게….“음…. 어려운 얘기죠. 하지만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요양시설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한인사회에서도 많이 봤습니다. 안 가겠다고 버티는 노인들도 많이 봤고요. 스스로의 힘으로 일상생활이 어렵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요.”-지금의 장노년 세대를 흔히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라고 하지요. 억울하지 않으세요.“억울하기까지야. 아쉽기는 해요. 하하.”먼 길 돌아왔지만… 우회지에서 새로운 희망과학자의 길을 단념하면서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 글쓰기다. 2007년 에세이집 ‘어느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2014년 ‘가족의 온도’를 출간했다.“나이 들다보니 제가 선망하던 공학보다는 형이상학 쪽으로 관심이 옮아갔습니다. 지금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무척 만족하고 있어요. 엔지니어였던 친구들도 요즘 보면 은퇴해서 그냥 살더군요. 전 74세지만 지금도 열심히 쓰고 운동하고 집사람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여행을 굉장히 많이 다니고 있어요. 여행도 한동안은 어머니 때문에 못 했지만 이제 자유롭죠.”‘가족의 온도’를 영어판으로 가필 정정한 책 ‘누가 엄마를 울게 했는가’는 미국에서 지난해 7월 출간됐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들은 물론이고 미국 사회, 전 세계에 한국적인 정서를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출간 뒤에도 코로나 상황 탓에 지난 4월 초에야 아마존에 작가 페이지를 개설했다.-책에서 내 능력보다 한 발 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도전하는 ‘멀리뛰기‘를 강조하시던데, 74세 김석휘 작가의 멀리뛰기는 무엇입니까.“항상 자기 능력까지만 하겠다고 하면 성취가 안 일어나죠. 지금은 글이나 책을 더 잘 쓰고 싶습니다. 영화 ‘미나리’나 ‘빠찡코’ 등 이민자의 희로애락을 그린 작품들이 미국 사회에서 반향을 얻었는데, 제 책도 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서영아기자 sya@donga.com}

    • 202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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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련 속에 희망이… ” 가난과 이민, 30년 간병이 그에게 남긴 것[서영아의 100세 카페]

    4월 초 미국 시카고에서 e메일이 하나 왔다. 발신인은 재미교포 김석휘 씨(74). 현지에서 자전적 장편소설 ‘누가 엄마를 울게 했는가(Who Made Mom Cry)’를 어렵사리 냈다는 내용이었다. 책에 대해 ‘한 가여운 여성의 파란만장 일대기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현대사, 이민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했고 2014년 한국어로 낸 원작 ‘가족의 온도’(청동거울)가 있다고 했다. 2017년 이래 고국을 처음 찾았다는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나봤다.●59세에 교통사고로 가슴 이하 마비된 어머니인터넷서점에서 구해 본 한국어판은 350여 쪽 두께. 경제적으로 파산했던 한 가족이 장남의 미국 이민을 시작으로 하나둘 미국에 정착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교통사고로 전신마비라는 엄청난 고통을 안게 된 어머니의 절절한 이야기가 생생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4남매의 장남으로서 가난에 찌든 가족을 일으켜 세우고 장애를 안은 어머니의 삶을 끝까지 지켜내는 김 씨 본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1949년 전북 전주 출생인 김 씨는 1979년 간호사로 기술이민을 간 아내를 따라 미국에 건너갔다. 이듬해 어머니를, 그 1년 뒤 아버지를 초청했다.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던 어머니는 1987년 버스 교통사고로 경추 3, 4번을 크게 다친 뒤 가슴 이하 마비 판정을 받았다. 그나마 고된 재활 훈련을 거친 결과였다. “두뇌 활동이나 보고 듣고 말하는 기능은 이상이 없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괴로우셨겠어요. 돌아가신 2016년까지의 29년은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낫기 위해, 살기 위해 벌인 투쟁의 시간이었습니다.” 김 씨는 내내 바로 곁에서 이 투쟁을 도왔다. 인생 무대에도 ‘판’이 바뀌는 때가 있다. 그는 주저없이 어머니가 다쳐 장애를 안게 된 1987년 12월이 그때라고 답한다. “저로서는 평생의 꿈을 포기하는 시작점이었어요. 제 꿈은 항공 기계공학 공부를 계속해 박사학위를 딴 뒤 교수나 공학자(엔지니어)가 되는 거였어요. 사고 당시 저는 일리노이공대 항공기계공학 석사과정을 한 학기만 남긴 상태였어요. 직장 다니며 하는 공부라 미국 간 지 딱 10년, 입학한 지 8년 만에 끝낼 참이었죠. 어머니의 사고로 한 학기를 늦추면서 솔직히 속으로 절망했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아파서 쩔쩔매는 걸 보니 젊고 건강한 내 입장을 돌아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좀 돌아가자. 우선은 최선을 다해 어머니를 낫게 해드리자고 생각한 거죠.” 그가 평소 잘 쓰는 말이 ‘난 우회를 하더라도 내 일을 할 거야’였다. 1989년 5월 석사를 취득했지만 박사과정도 한없이 늦춰졌다. 아버지도 노쇠해 2006년 향년 8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렸다. “박사과정 자격시험 준비하다가 아버지가 넘어져 다리를 다치고, 공부 좀 끝낼 만하면 또 어머니가 넘어지고…. 그렇게 끌다가 어느 학기엔가 행정조치를 제대로 안 해 제적됐다는 연락을 받게 됐지요.”●“약 30년 이어진 간병에 내 꿈은 접었지만…” ―한국이건 미국이건 부모님이 아프면 시설로 보내드리는데, 그런 생각은 안 하셨나요. “부모를 떠나 인간으로서 그 고통과 절절함이 너무 다가왔습니다. 어렸을 때 제가 아프면 엄마를 불렀던 기억도 생생했고…. 아마 시설에 계셨다면 대소변 등 문제 때문에라도 금방 돌아가셨을 거예요. 소변줄 염증 관리해야 하고 변비가 심해 약이나 관장으로 안 되면 손가락으로 파내는 일도 적지 않아요. 저만큼 잘 관리할 사람은 없어요.” 전신마비 환자는 24시간 간병이 필요하다. 낮과 밤, 주말이 따로 돌아가는 3교대 체제인데, 간병인 구하기도 힘들었다. 어머니에게는 간병비 등으로 1년에 10만 달러(약 1억3000만 원)씩 들어갔다. 시카고시로부터 배상금을 받았지만 15년 정도 더 사신다는 것을 전제로 계산된 액수였다. 29년을 더 사셨으니 갈수록 형편이 쪼그라들어 아파트 한 채를 팔고 사시던 집도 팔아야 할지 걱정해야 했다. “그래도 초기 10년은 상태가 조금씩 좋아지는 듯했어요. 아직 상대적으로 젊은 시기니까요. 손끝을 조금 움직이거나 보행기에 의지해 한 걸음씩 떼기도 했지요. 하지만 균형을 잡지 못하니 자꾸 넘어졌어요. 넘어지면 한쪽 다리 부러지고 다음번엔 반대쪽 다리 부러지고 아휴, 말도 못 해요. 어머니는 낫고자 하는 의지가 끝까지 무척 강했어요. 자꾸 움직여 보려 하다가 넘어지고 부러지고 했지요. 그때마다 뒷일은 모두 제가 감당해야 했죠.” 본인의 뜻으로 어쩌지 못하는 시련을 그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인 듯하다. 피하거나 한탄하는 대신 이 모든 과정을 관찰하고 꼼꼼히 기록했다. 그에게 어머니는 모순된 존재였다. 현실에서는 그의 성장에 방해가 되고 있었지만 그가 살아가는 방향을 잡아주고 성장의 목표를 세워준 존재이기도 했다. 본인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지만 자식들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며 자녀들을 실업계로 보내려는 남편에게 맞섰다. 그 덕에 김 씨네 4형제는 항공대, 철도간호학교, 공군사관학교 등 국립이라 학비 부담이 적은 곳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한 사람에게 간병 부담이 쏠리는 걸 ‘독박간병’이라 하죠. 혹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그때그때 갈등은 있었지요. 그런데 이걸 누구한테 시키겠어요. 한국에 사는 여동생은 부모님이 한국 가면 굉장히 열심히 도와요. 미국 사는 남동생과 여동생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자기 가정 꾸려야 하죠. 할 수 없어요. 그래도 부모님은 저만 보면 웃어주셨어요. 그보다 더 큰 힘의 원천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록 젊은 시절 30년을 큰일을 못 하고 어머님을 간병했지만 절대 후회는 없어요. 더 못 해 드린 게 마음 아프죠.”●“희생은 우리 세대로 끝이겠구나”아내와 자녀들도 늘 그를 응원해 줬다. 특히 간호사인 아내는 큰 도움이 돼 줬다. 아들과 딸은 모두 명문대를 나와 마케팅 전문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김 작가를 지탱하는 힘은 끈끈한 가족애인 듯합니다. 그런데 혹시 본인이나 부인에게 비슷한 일이 닥친다면 어떨까요.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예요. 아들이 고1 때인가,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요새 아빠가 할머니 때문에 이렇고 저렇고’라며 한 10여 분 얘기했더니 이 녀석이 ‘왜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해요?’ 하더군요. 섬찟했습니다. 은연중에 ‘우리가 아프게 되면 너희가 아버지처럼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걸로 여기지나 않을까. 애들한테는 저나 집사람이나 절대로 이런 문제를 맡기면 안 되겠구나…. 소위 ‘희생’ 같은 건 우리 세대로 끝나는 것 같아요.” ―그럼 만일의 경우 어떻게…. “음,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요양시설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한인사회에서도 많이 봤습니다. 안 가겠다고 버티는 노인들도 많이 봤고요. 스스로의 힘으로 일상생활이 어렵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지금의 장노년 세대를 흔히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라고 하지요. 억울하지 않으세요? “억울하기까지야. 아쉽기는 해요. 하하.” 과학자의 길을 단념하면서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 글쓰기다. 2007년 에세이집 ‘어느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2014년 ‘가족의 온도’를 출간했다.●먼 길 돌아왔지만… 우회지에서 새로운 희망“나이 들다 보니 제가 선망하던 공학보다는 형이상학 쪽으로 관심이 옮아갔습니다. 지금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무척 만족하고 있어요. 엔지니어였던 친구들도 요즘 보면 은퇴해서 그냥 살더군요. 전 74세지만 지금도 열심히 쓰고 운동하고 집사람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여행을 굉장히 많이 다니고 있어요. 여행도 한동안은 어머니 때문에 못 했지만 이제 자유롭죠.” ‘가족의 온도’를 영어판으로 가필 정정한 책 ‘누가 엄마를 울게 했는가’는 미국에서 지난해 7월 출간됐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들은 물론이고 미국 사회, 전 세계에 한국적인 정서를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출간 뒤에도 코로나 상황 탓에 올 4월 초에야 아마존에 작가 페이지를 개설했다. ―책에서 내 능력보다 한발 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도전하는 ‘멀리뛰기’를 강조하시던데, 74세 김석휘 작가의 멀리뛰기는 무엇입니까. “항상 자기 능력까지만 하겠다고 하면 성취가 안 일어나죠. 지금은 글이나 책을 더 잘 쓰고 싶습니다. 영화 ‘미나리’나 ‘파친코’ 등 이민자의 희로애락을 그린 작품들이 미국 사회에서 반향을 얻었는데, 제 책도 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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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한일미래포럼, ‘경제안보시대 한미일 협력’ 세미나

    (사)한일미래포럼(대표·김충식)은 19일 동국대학교 초허당 세미나실에서 ‘경제안보시대의 한미일 협력과 한일관계 개선방안’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열었다. 제1세션에서는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과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이 ‘경제안보시대 한미일 협력과 한일관계 개선방안’에 대해 발표했다. 이어 라종일 전 주일대사, 최운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기태 통일연구원 평화연구실장, 김지영 한양대 일본학과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해 청중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제2세션에서는 송정현 동국대 일본학과 교수의 사회로 이날 참가자 전원과 청중까지 참여하는 ‘한일관계개선 해법을 위한 다자간 토론’이 이뤄졌다. 이날 세미나를 총괄한 김충식 대표는 “경제안보시대 건설적인 한일관계 구축을 위해 한일 양국이 노력해야 한다”며 “본 세미나를 통해 바람직한 한일관계에 관한 전문가 및 시민사회의 관심이 증대되길 바란다”고 밝혔다.서영아기자 sya@donga.com}

    • 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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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이석연 전 법제처장 몽골서 ‘反부패’ 특강

    이석연 전 법제처장(동서대 석좌교수·사진)은 12일 몽골에서 현지 국회의원과 고위공직자 400여 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한다. 강의주제는 ‘한국 부패방지제도의 현황과 몽골 반부패정책에 대한 제언’이다. 몽골 정부는 올해와 내년을 ‘부패와의 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정부 차원의 반부패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번에 고위 관리들에게 부패 퇴치와 관련한 경험을 공유하고 전수하기 위해 이 전 처장을 초청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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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넘어지면 큰일”…어버이날 선물로 ‘낙상 백신’ 어때요?[서영아의 100세 카페]

    “그냥 넘어지셨을 뿐인데…” 낙상(落傷), 떨어지거나 넘어져 다치는 것을 말한다. 흔히 ‘사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젊은이라면 작은 타박상으로 끝날 일도 고령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예컨대 고령자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고관절 골절은 수술을 하더라도 2년 이내 사망률이 30%, 방치할 경우 2년 이내 사망률이 70%에 이른다는 통계마저 있다. 흔히 ‘노인은 넘어지면 끝장’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고관절 골절, 수술해도 2년 내 사망률 30%고령자는 하체 근력이나 평형 유지 기능이 약해진 데다 유연성이 떨어지니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도 넘어지기 쉽다. 뼈와 관절이 약해져 있으니 작은 충격에도 부러지고 금이 간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혹은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등 일상생활 중 50㎝ 정도 높이에서 엉덩방아를 찧었을 뿐인데도 고관절 골절이 일어나기도 한다.노년기 골절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오랜 시간 누워서 보내거나 활동량이 줄면 여러 합병증으로 이어진다. 근육 손실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가뜩이나 80대면 60대의 절반 정도로 줄어든 근육이 한달 정도 누워서만 지낸다면 다시 그 절반까지 감소할 수 있다.고령자 낙상이 가장 많은 장소는 항시 거주하는 집안이다. 한국소비자원 통계에 따르면 최근 4년간(2018~2021년) 소비자위해감시시스템(CISS)에 접수된 고령자 안전사고는 모두 2만 3561건에 이른다. 이중 62.7%(1만 4778건)가 낙상 사고였고, 장소는 주택이 74%나 됐다. 주택 내에서도 침실과 욕실에서 대부분 발생한다. 고령자의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다리와 둔부 부상이 늘어난다.<집안에서 고령자 낙상사고가 많은 장소> 연도2018년2019년2020년2021년합계침실/방95610729758243827욕실.화장실8698729999533693문제는 익숙한 장소일수록 방심하기 쉽다는 점이다. 일상 속 예방을 위해서는 집안 환경 개선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한국의 노인가구중 78%는 노인단독가구(노인 1인, 노인 부부)이다 보니 자녀들이 신경을 써야 한다. 다행히 큰 비용 들이지 않고도 낙상을 대거 줄일 방법도 적지 않다. 물론 가장 가성비 좋은 낙상 예방 활동은 고령자 스스로 평소 가벼운 운동을 통해 근육과 평형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다.집에 대한 안전예방 활동은 거창하지 않다. 100세카페에 1월 말 소개했던 ‘우리동네좋은사람들’이 지난해 강남구에서 펼쳤던 활동을 다시 살펴보자. 핵심 장비는 안전손잡이, 미끄럼방지스티커, LED센서등의 3종세트 정도다.1. 욕조 : 고령자가 욕조에서 움직일 때 안전손잡이가 큰 도움이 된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욕실을 가급적 건식으로 유지하는 게 좋다. 이를 위해 샤워 커튼이 권장된다.2. 화장실 : 샤워의자는 고령자가 앉아서 샤워할 수 있어 낙상 예방에 도움이 된다. 욕실 바닥에는 미끄럼방지 매트를 깔거나 타일형 스티커를 붙인다. 욕실 물청소를 줄이기 위해 남성의 좌식소변 생활화도 권장된다.3. 침대 안전손잡이 : 가정 내에서 고령자 낙상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장소는 침실과 화장실이다. 침실이라 해도 화장실에 가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오다 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다. 침대 난간에 안전손잡이를 설치하면 고령자가 침대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고 침대에서 일어설 때 의지도 된다.4. 침실-화장실 간 LED 무선 센서등 : 고령자가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에 갈 때 전등 스위치가 멀면 불을 켜지 않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움직이면 자동으로 켜지는 무선 센서 등을 설치하면 쉽게 조도를 확보할 수 있다.5. 장애물 제거 및 동선 최적화 : 바닥에 늘어진 전선줄이나 카펫 모서리도 고령자에게는 예상치 못한 흉기가 될 수 있다. 동선상의 장애물을 없애거나 재배치하고 불필요한 가구도 정리해 여유 공간을 확보한다. 부모님 집에는 출가한 자녀들의 물건이나 아까워서 못 버린 물건 등 자리만 차지하는 것들이 많다. 이것들을 치우는 것도 부모님 낙상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일본서는 고령자 60% 이상이 욕실 개조공사 세계 최고 고령화율을 자랑하는 일본에서는 간병 이전에 간병받을 상태로 가는 것을 막는 ‘개호(介護·돌봄, 간병) 예방’이라는 개념이 널리 인식돼 있다. 이를 위해 개인도 국가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예컨대 직장인이 정년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주택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다. 오랜 세월 대출을 갚은 뒤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주택의 문턱을 없애고, 미끄럼 방지 조치를 하며, 안전손잡이를 설치하는 등 고령자가 사용하기 쉽게 바꾸는 것이다.그 마중물 노릇을 하는 것이 한국의 장기요양보험과 유사한 개호보험에서 지원하는 주택수선비용이다. 액수는 20만 엔(약 200만 원) 정도지만 여기에 지자체 지원 등을 합치면 최대 100만 엔까지도 가능해진다고 한다. 이것을 시드머니로 해 자신의 퇴직금을 더해 노후를 살아갈 집으로 고쳐나간다는 것이다.실제 개호보험에서 보조금이 나오는 수리 항목은 안전손잡이 부착, 바닥의 단차 해소, 미끄럽지 않은 마루로 변경, 여닫기 쉬운 문손잡이로 개선, 변기 교체 등에 들어가는 돈이다. 일본 고령자 60% 이상이 욕실 개조공사를 벌인다는 통계도 있다. 주택 여건이 가능하다면 휠체어가 다닐 정도로 여유있게 확장하려 노력한다.“초고령사회 욕실, 면적 키우고 건식으로 바꾸자”2021년 12월 혼자 살던 77세 노인이 목욕을 하려고 욕실에 들어갔다가 무려 15일이나 갇혔던 사건이 발생했다. 문손잡이 고장 탓이었는데, 욕실에 휴대전화도 없이 들어간 것이 불운이었지만 수돗물을 마실 수 있었고, 한겨울 집안 난방도 후끈하게 유지됐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지인의 신고로 구조된 노인은 건강에 별 이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여하튼 우리 인식 속의 욕실은 좁고 밀폐된 공간이다. 욕실전문기업 새턴바스 정인환 대표는 초고령 시대에는 비좁은 욕실을 거실로 내오는 일종의 ‘욕실문화 개선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욕실은 더 넓고 개방된 공간으로 끄집어내 주거 공간의 일부로 삼아야 합니다. 1인 또는 2인 가구 시대에 굳이 밀폐할 필요도 없지요. 요즘 고급 호텔에 가면 욕실을 키우고 거실과 일원화한 레이아웃이 적지 않아요.”그가 보여주는 샘플들은 거실과 오픈된 형태로 사용하는 건식 욕실이다. 문 대신 칸막이 정도로 공간은 분리돼 있다. 아예 침실과 베란다를 트고 베란다에 프리스탠딩 욕조를 놓은 레이아웃도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는 길은 벽을 따라 저절로 조명이 켜지는 안전바가 달려 있어 한방 중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그는 100세 시대에는 아예 주택 설계단계부터 이같은 디자인이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재건축 연한을 채운 아파트만 수십만 채입니다. 가구주 대부분이 40~50대 이상으로 10~20년 후 입주할 때쯤이면 고령자에 가까워지겠죠. 이 분들이 살 집을 30대 시절 살던 것과 똑같은 구조로 짓는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1000만 고령자시대, ‘살던 곳에서 나이 들어가기’ 각종 조사에서 고령자는 ‘살던 곳에서 나이 들어가기(aging in place)’를 원하지만, 집에서 지내기 불편해지면 쉽게 요양기관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고령자 스스로가 자립해서 생활하고 또 누군가가 안전하게 돌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더욱 오래 자신의 집에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 2025년이면 한국은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고령자는 1000만 명을 넘어선다. 요양시설을 아무리 지어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고령자들이 살던 집에서 보다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방안을 사회 모두가 찾아내야 한다.주택 리모델링이든, 안전용구 설치든, 아니면 간단한 집안 정리든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미리 준비하는 일이다. 김종훈 ‘우리동네좋은사람들’ 대표는 4월 초 서울 강남구보건소에서 열린 강좌에서 “어버이날 부모님께 낙상 백신을 선물하자”고 제안했다. 주사 한방으로 큰 질병을 예방하듯이 부모님댁에 낙상 방지를 위한 조치를 조금씩이나마 해드린다면 그 어떤 것 보다 좋은 어버이날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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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넘어지면 큰일”… 어버이날 선물로 ‘낙상 백신’ 어때요?[서영아의 100세 카페]

    “그냥 넘어지셨을 뿐인데….” ‘낙상(落傷).’ 떨어지거나 넘어져 다치는 것을 말한다. 흔히 ‘사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젊은이라면 작은 타박상으로 끝날 일이 고령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예컨대 고령자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고관절 골절은 수술을 하더라도 2년 이내 사망률이 30%, 방치할 경우 2년 이내 사망률이 70%에 이른다는 통계마저 있다. 흔히 ‘노인은 넘어지면 끝장’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고관절 골절, 수술해도 2년 내 사망률 30%고령자는 하체 근력이나 평형 유지 기능이 약해진 데다 유연성이 떨어지니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넘어지기 쉽다. 뼈와 관절이 약해져 있으니 작은 충격에도 부러지고 금이 간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혹은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등 일상생활 중 50cm 정도 높이에서 엉덩방아를 찧었을 뿐인데도 고관절 골절이 일어나기도 한다. 노년기 골절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오랜 시간 누워서 보내거나 활동량이 줄어들면 여러 합병증으로 이어진다. 근육 손실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가뜩이나 80대면 60대의 절반 정도로 줄어든 근육이 누워서만 지낸다면 한 달에 절반이 더 감소할 수도 있다고 한다. 고령자 낙상이 가장 많은 장소는 항시 거주하는 집 안이다. 한국소비자원 통계에 따르면 최근 4년간(2018∼2021년) 소비자위해감시시스템(CISS)에 접수된 고령자 안전사고는 모두 2만3561건에 이른다. 이 중 62.7%(1만4778건)가 낙상 사고였고, 장소는 주택이 74%나 됐다. 주택 내에서도 침실과 욕실에서 대부분 발생한다. 고령자의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다리와 둔부 부상이 늘어난다. 문제는 익숙한 장소일수록 방심하기 쉽다는 점이다. 일상 속 예방을 위해서는 집 안 환경 개선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한국의 노인 가구 중 80%는 노인 단독가구(노인 1인, 노인 부부)이다 보니 자녀들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다행히 큰 비용 들이지 않고도 낙상을 대거 줄일 방법도 적지 않다. 물론 가장 가성비 좋은 낙상 예방 활동은 고령자 스스로 평소 가벼운 운동을 통해 근육과 평형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다. 집에 대한 안전예방 활동은 거창하지 않다. 100세 카페에 1월 말 소개했던 ‘우리동네좋은사람들’이 지난해 서울 강남구에서 펼쳤던 활동을 다시 살펴보자. 핵심 장비는 안전손잡이, 미끄럼 방지 스티커, 발광다이오드(LED) 센서등의 3종 세트 정도다. 1. 욕조: 고령자가 욕조에서 움직일 때 안전손잡이가 큰 도움이 된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욕실을 가급적 건식으로 유지하는 게 좋다. 이를 위해 샤워커튼이 권장된다. 2. 화장실: 샤워의자는 고령자가 앉아서 샤워할 수 있어 낙상 예방에 도움이 된다. 욕실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거나 타일형 스티커를 붙인다. 욕실 물청소를 줄이기 위해 남성의 좌식 소변 생활화도 권장된다. 3. 침대 안전손잡이: 가정 내에서 고령자 낙상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장소는 침실과 화장실이다. 침실이라 해도 화장실에 가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오다 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다. 침대 난간에 안전손잡이를 설치하면 고령자가 침대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고 침대에서 일어설 때 의지도 된다. 4. 침실∼화장실 간 LED 무선 센서등: 고령자가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에 갈 때 전등 스위치가 멀면 불을 켜지 않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움직이면 자동으로 켜지는 무선 센서등을 설치하면 쉽게 조도를 확보할 수 있다. 5. 장애물 제거 및 동선 최적화: 바닥에 늘어진 전선줄이나 카펫 모서리도 고령자에게는 예상치 못한 흉기가 될 수 있다. 동선상의 장애물을 없애거나 재배치하고 불필요한 가구도 정리해 여유 공간을 확보한다. 부모님 집에는 출가한 자녀들의 물건이나 아까워서 못 버린 물건 등 자리만 차지하는 것들이 많다. 이것들을 치우는 것도 부모님 낙상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 일본에서는 고령자 60% 이상이 욕실 개조 공사 세계 최고 고령화율을 보이는 일본에서는 간병 이전에 간병받을 상태로 가는 것을 막는 ‘개호(介護·돌봄, 간병) 예방’이라는 개념이 널리 인식돼 있다. 이를 위해 개인도, 국가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예컨대 직장인이 정년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주택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다. 오랜 세월 대출을 갚은 뒤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주택의 문턱을 없애고, 미끄럼 방지 조치를 하며, 안전손잡이를 설치하는 등 고령자가 사용하기 쉽게 바꾸는 것이다. 그 마중물 노릇을 하는 것이 한국의 장기요양보험과 유사한 개호보험에서 지원하는 주택 수선 비용이다. 액수는 20만 엔(약 200만 원) 정도지만 여기에 지자체 지원 등을 합치면 최대 100만 엔까지도 가능해진다고 한다. 이것을 시드머니로 해 자신의 퇴직금을 더해 노후를 살아갈 집으로 고쳐 나간다는 것이다. 실제 개호보험에서 보조금이 나오는 수리 항목은 안전손잡이 부착, 바닥의 단차 해소, 미끄럽지 않은 마루로 변경, 여닫기 쉬운 문손잡이로 개선, 변기 교체 등에 들어가는 돈이다. 일본 고령자 60% 이상이 욕실 개조 공사를 벌인다는 통계도 있다. 가능하면 휠체어가 다닐 정도로 여유 있게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초고령사회 욕실, 면적 키우고 건식으로 바꾸자2021년 12월 혼자 살던 77세 노인이 목욕을 하려고 욕실에 들어갔다가 무려 15일이나 갇혔던 사건이 발생했다. 문손잡이 고장 탓이었는데, 욕실에 휴대전화도 없이 들어간 것이 불운이었지만 수돗물을 마실 수 있었고, 한겨울 집안 난방도 후끈하게 유지됐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지인의 신고로 구조된 노인은 건강에 별 이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하튼 우리 인식 속의 욕실은 좁고 밀폐된 공간이다. 욕실 전문 기업 새턴바스 정인환 대표는 초고령 시대에는 비좁은 욕실을 거실로 내오는 일종의 ‘욕실문화 개선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욕실을 더 넓고 개방된 공간으로 끄집어내 주거 공간의 일부로 삼아야 합니다. 1인 또는 2인 가구 시대에 굳이 밀폐할 필요도 없지요. 요즘 고급 호텔에 가면 욕실을 키우고 거실과 일원화한 레이아웃이 적지 않아요.” 그가 보여주는 샘플들은 거실에 오픈된 형태로 사용하는 건식 욕실이다. 문 대신 칸막이 정도로 공간이 분리돼 있다. 아예 침실과 베란다를 트고 베란다에 프리스탠딩 욕조를 놓은 레이아웃도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는 길은 벽을 따라 저절로 조명이 켜지는 안전바가 달려 있어 한밤중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그는 100세 시대에는 아예 주택 설계 단계부터 이 같은 디자인이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재건축 연한을 채운 아파트만 수십만 채입니다. 가구주 대부분이 40, 50대 이상으로 10, 20년 후 입주할 때쯤이면 고령자에 가까워지겠죠. 이분들이 살 집을 30대 시절 살던 것과 똑같은 구조로 짓는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1000만 고령자 시대, ‘살던 곳에서 나이 들어가기’ 각종 조사에서 고령자는 ‘살던 곳에서 나이 들어가기(aging in place)’를 원하지만 집에서 지내기 불편해지면 쉽게 요양기관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고령자 스스로가 자립해서 생활하고 또 누군가가 안전하게 돌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더 오래 자신의 집에서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 2025년이면 한국은 초고령사회로 진입해 고령자는 1000만 명을 넘어선다. 요양시설을 아무리 지어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고령자들이 살던 집에서 보다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방안을 사회 모두 찾아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주택 리모델링이든, 안전용구 설치든, 아니면 간단한 집안 정리든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미리 준비하는 일이다. 김종훈 ‘우리동네좋은사람들’ 대표는 4월 초 서울 강남구보건소에서 열린 강좌에서 “어버이날 부모님께 낙상 백신을 선물하자”고 제안했다. 주사 한 방으로 큰 질병을 예방하듯이 부모님 댁에 낙상 방지를 위한 조치를 조금씩이나마 해드린다면 그 어떤 것보다 좋은 어버이날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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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서 노인은 왜 차별받나” 주명룡 은퇴자협회 대표의 답은?[서영아의 100세 카페]

    일찌감치 100세카페에 모셔야 했던 분인데, 너무 늦었다. 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KARP) 대표(78) 얘기다. 2000년대 초 ‘노령 사회를 선도하는 NGO’ 를 내걸고 활동하던 그를 취재현장 여기저기서 마주친 적이 있다.세상을 바꾸겠다던 ‘그때 그 NGO 관계자’ 중 상당수가 제도 정치권으로 진출했지만 오랜만에 들여다본 은퇴자협회는 여전했다. 과한 정치 색도 없고 정부 지원 없이 회비와 기부금만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반면 그의 사재가 마구 들어갔다는 게 함정이다).13일 서울 광진구의 상가건물 지하에 자리한 KARP 사무실을 찾았다. 천장에서 물이 새기도 하고 화장실도 없는 90여 평 공간은 각종 책자와 서류가 빼곡한 사무실과 회의실, 강의 공간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구석에서는 마침 고령의 강사가 학생 2명에게 휴대전화 사용법을 강의하고 있었다. 장노년층 위한 다양한 제도도입에 기여대한은퇴자협회는 1월 15일 창립 21주년을 맞았다. 그 사이 한국사회도 많이 변했다. 특히 시니어 관련제도들, 즉 연령차별금지법, 주택연금, 정년 연장, 기초노령연금 등이 도입된 데는 그가 기여한 몫이 적지 않다.-가장 보람이 있다고 꼽는 업적은 뭔지요.“주택연금이 도입된 겁니다. 2003년 미국의 역(逆)모기지 제도를 도입하자고 당시 재정경제부에 제안서를 전달했는데, 감감무소식이더니 2006년 주택금융공사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며칠 뒤 미국에 출장가려 하니 관련 섭외를 해달라고요.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연락을 취해 일정을 짜줬습니다. 대여섯명이 출장을 다녀오더니 6개월만에 법안을 만들어내더군요.”2007년 7월 실시된 주택연금 제도는 사실 실수요자가 많아진 요즘 더 주목받고 있다. 주로 한국 사회에 생소한 미국 제도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다보니 지금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에피소드가 넘쳐난다. 2002년 5월 협회에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방문해 연령 차별금지 권고문을 요청하자 담당자는 “나이 차별이 무슨 차별이냐”며 반려했다. 미국에서 1960년대에 제정된 고용상 연령차별금지법이 21세기 한국에서는 개념조차 이해할 수 없는 딴 세상 얘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2009년에야 ‘고령자고용촉진법’에 연령 차별금지 조항이 들어갔다. 협회는 그 7년간 끈질기게 캠페인을 벌이며 싸웠다. 이밖에 협회는 저출산고령화위원회,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서울시의 중장년 생애 설계를 돕는 50+시스템을 만드는 기초를 제공했다. 정년 연장의 경우 창립 초기부터 줄기차게 65세를 주장해왔다. 한국 기업에서 은퇴 교육이 전무하다며 ‘타오름 아카데미’라는 자체 교육프로그램을 운영 중이기도 하다. 2003년 시작한 ‘YOU·Young Old United)’ 세대통합 운동은 장청 세대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것을 지향한다. 한국에서 NGO활동을 한다는 것은 KARP는 초기에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2002년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연 창립총회에는 김원길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 미국은퇴자협회(AARP) 테스 켄자 회장, 주한미국대사관 공사, 문태준 한국사회복지협회장 등 명사들이 총출동했다. 서울 마포에 월세 1000만 원이 넘는 남부럽지 않은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 18명을 뽑았다.-배후에 대단한 스폰서가 있는가 했습니다.“스폰서가 저였어요. 사재를 투입했지요. 사무실에 전화기를 100대나 놓았습니다. 미국에서 본 은퇴자협회 느낌을 살리려고요(웃음). 몇 년 투자하면 잘 굴러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무모했지요.”해마다 6억 원씩 적자가 났고, 3년쯤 지나자 현타(현실자각 타임)가 왔다. ‘큰일났구나….’ 결국 사무실을 현재의 광진구 상가건물 3층으로 옮겼다. 3년 전에는 다시 지하층으로 내려왔다. -지금 협회 살림은 어떻게 운영되나요.“ 저희 연회비가 10만 원입니다. 전국 회원 18만 명이라고 하고는 있는데…. 진성회원(회비내는 회원)이 1%인 1800명만 돼도 좋아서 만세를 부르겠어요. 운영비 마련을 위해 과자공장이나 카페, 식당도 운영해봤지만 잘 안됐습니다.” -모델로 삼은 미국 은퇴자협회는 회원 3800만 명, 예산 2조 원 규모로 성업 중인데요.“가장 큰 차이는 수익 모델이죠. 1950년대 퇴직교사협회에서 시작됐던 미국 협회는 보험사가 끼면서 재정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요즘은 미국 언론이 AARP를 ‘세계에서 제일 큰 보험회사’라며 비판할 정도입니다. 저도 한국에서 보험 쪽을 알아봤는데 기존 보험회사의 지부 역할밖에 못하게 돼 있더군요. 그걸 포기하고 나니 힘이 드는 거죠. 결국은 돈이 문제예요.”한국 노인이 차별받는 이유는 -주대표는 평소 우리 사회에 노인 차별, 노인경시 문화가 만연했다고 지적하곤 합니다. 한국에서 노인은 왜 차별받는다고 보십니까.“차별받는다는 것은 약자라는 얘기입니다. 왜 약자가 되었을까요. 스스로 힘을 키우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차별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똑똑해져야 합니다. 다만 책임을 다하면서 권리를 주장해야 해요.”여기에는 뉴욕한인회장으로 일하면서 미국 정가를 상대할 때의 경험이 깊이 녹아들어가 있다. “우리 노인들은 대접 받으려는 생각이 강한 반면 스스로 기여하려는 생각은 못하는 경향이 있어요. 민주시민 훈련이나 사회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시대를 살아온 거죠. 하지만 세상이 변했어요. 노인이 된 것을 벼슬처럼 여기려는 순간 무시당하게 되지요.” 그에 따르면 미국은퇴자협회의 모토는 ‘봉사받지 말고 봉사하라(Serve, not to be serverd)’다. 고령자가 되어서도 사회에 기여하고 본인 몫의 책임을 지면서 권리를 찾는다는 자세다. 반면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지 못하면 공짜를 바라고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기적이고 자녀 세대를 배려하지 않는 노인이라면 욕먹을 수밖에 없지요.” 그 예로 지하철 무임승차 논란을 들었다. “(무임승차를 주장하는 측은) 어차피 다니는 전철에 몇 명 더 탄다고 무슨 문제냐고 하지만 그게 다 비용이 발생합니다. 무임승차는 수혜 연령대를 높이고 차등화해야 합니다. 장애인 등은 무료, 고령자는 할인제로 단돈 얼마라도 내고 타야 하지요. 왜 이런 걸로 후배 세대에게 부담을 줍니까.”같은 이유로 회원들에게 ‘배벌사’를 권유하고 있다. “‘배우고 벌고 살자’를 줄인 말이죠. 뭐 대단한 일자리를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국민연금과 합쳐 월 150만원 정도 확보되는 일자리면 족하지요. 은퇴자들에게도 강조합니다. 큰돈 벌려고 욕심내지 말라, 절반은 봉사, 절반은 소일거리라고 생각하고 감사히 일하자고.” -주대표께서 너무 빨리 앞서나가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듭니다. 한국사회도 베이비붐 세대의 고령자 편입으로 노인의 색깔이 바뀌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거든요. “모쪼록 세상이 그렇게 바뀌어야죠. 후배들은 잘 할 거라고 봅니다.” “보람있고 의미있는 노후를 찾아서”그는 20대에 대한항공에 들어가 승무원에서 사무장까지 9년간 일했다. 30대에 미국 뉴욕 맨해튼에 정착했다. 일대에서 맥도널드 매장을 4개나 경영하며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미국에서 성공했는데 국내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지요.“어떻게 하면 보람있고 의미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AARP를 발견했죠.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4시간을 차로 오가며 AARP에 대해 공부했어요.1996년 뉴욕에 대한은퇴자협회를 설립해 교포들을 위한 번역 서비스 정도의 일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1997년말 한국에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터졌어요. 고령화와 경제 위기를 함께 맞은 한국에 도움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지요.”귀국 몇년 만에 미국 국적을 버렸다. ‘정치하려고 왔다’거나 ‘좀 하다 돌아갈 사람’이란 시선이 많자 아예 정리해버린 것이다. 그간 협회 활동에 사재 수십 억 원을 털어넣었다. 미국에서 가져오는 돈으로 안 되자 충남 아산에 있던 물려받은 땅을 야금야금 팔았다. 나중에는 선산마저 없애버렸다.“자식들은 모두 미국인이 돼 버렸고 제가 가고 나면 무덤이 있어도 올 사람이 없어요. 이 참에 정리했습니다.”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지내는 부인은 귀국 몇년 뒤 남편에게 “속았다”고 했다. 실상은 그도 같은 마음인 듯하다. 미국에서 하던대로 하면 뭐든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선의가 별로 먹히지 않았다. “협회 대표 찾습니다”그는 얼마 전부터 ‘협회를 대표할 인물을 찾는다’는 서류를 들고 다닌다. “떠날 때를 알아야지요. 그런데 여러 사람이 관심을 보이다가도 ‘돈이 안 된다, 오히려 본인 돈을 써야 할 거다’라는 말에 손사래를 칩니다.”요즘은 협회가 괜찮은 기업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후임자가 찾아질 때까지 힘닿는 한 하던 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사무실 사람들에게 얘기합니다. 어느 날 출근해보니 내가 쓰러져 있다 해도 놀라지 말라고. 하하.” 그가 고국에 돌아온 2000년대 초에 고령화율 7%를 갓 넘겼던 한국은 2025년 20%의 초고령사회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사회 환경은 이제야 그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꽃피울 환경이 돼 가고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가 조금이라도 준비된 상태로 고령사회를 맞이한 데는 그의 노고도 한몫 보탠 것 같다. 영예로운 인생후반을 꿈꿨던 그의 마지막 댄스는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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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서 노인은 왜 차별 받는가” 은퇴자협회 22년 대표의 답은…[서영아의 100세 카페]

    일찌감치 100세 카페에 모셔야 했던 분인데, 너무 늦었다. 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KARP) 대표(78) 얘기다. 2000년대 초 ‘노령 사회를 선도하는 NGO’를 내걸고 활동하던 그를 취재현장 여기저기서 마주친 적이 있다. 세상을 바꾸겠다던 ‘그때 그 NGO 관계자’ 중 상당수가 제도 정치권으로 진출했지만 오랜만에 들여다본 은퇴자협회는 여전했다. 과한 정치 색도 없고 정부 지원 없이 회비와 기부금만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반면 그의 사재가 마구 들어갔다는 게 함정이다). 13일 서울 광진구의 상가건물 지하에 자리한 KARP 사무실을 찾았다. 천장에서 물이 새기도 하고 화장실도 없는 90여 평 공간은 각종 책자와 서류가 빼곡한 사무실과 회의실, 강의 공간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장노년층 위한 다양한 제도 도입에 한몫대한은퇴자협회는 1월 15일 창립 21주년을 맞았다. 그사이 연령차별금지법, 주택연금, 정년 연장, 기초노령연금 등 시니어 관련 제도들이 도입된 데는 그가 기여한 몫이 적지 않다. ―가장 보람 있다고 꼽는 업적은 뭔지요. “주택연금이죠. 2003년 미국의 역(逆)모기지 제도를 도입하자고 당시 재정경제부에 제안서를 전달했는데, 감감무소식이더니 2006년 주택금융공사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며칠 뒤 미국에 출장 가려 하니 관련 섭외를 해달라고요.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연락을 취해 일정을 짜줬고, 대여섯 명이 출장을 다녀오더니 6개월 만에 법안을 만들어내더군요.” 2007년 7월 실시된 주택연금 제도는 사실 실수요자가 많아진 요즘 더 주목받고 있다. 주로 한국 사회에 생소한 미국 제도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다 보니 지금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에피소드가 넘쳐난다. 2002년 5월 협회에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방문해 연령 차별금지 권고문을 요청하자 담당자는 “나이 차별이 무슨 차별이냐”며 반려했다. 미국에서 1960년대에 제정된 고용상 연령차별금지법이 21세기 한국에서는 개념조차 이해할 수 없는 딴 세상 얘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2009년에야 ‘고령자고용촉진법’에 연령 차별금지 조항이 들어갔다. 7년을 싸운 셈이다. 이 밖에 협회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서울시의 중장년 생애 설계를 돕는 50+시스템을 만드는 기초를 제공했다. 정년 연장의 경우 창립 초기부터 줄기차게 65세를 주장해왔다. 한국 기업에서 은퇴 교육이 전무하다며 ‘타오름 아카데미’라는 자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기도 하다. 2003년 시작한 ‘YOU(Young Old United)’ 세대통합 운동은 장청 세대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것을 지향한다. ●한국에서 NGO활동을 한다는 것은 KARP는 초기에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2002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연 창립총회에는 김원길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 미국은퇴자협회(AARP) 테스 캔자 회장, 주한 미국대사관 공사, 문태준 한국사회복지협회장 등이 참석했다. 서울 마포에 월세 1000만 원이 넘는 남부럽지 않은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 18명을 뽑았다. ―배후에 대단한 스폰서가 있는가 했습니다. “스폰서가 저였어요. 사재를 투입했지요. 사무실에 전화기를 100대나 놓았습니다. 미국에서 본 은퇴자협회 느낌을 살리려고요(웃음). 몇 년 투자하면 잘 굴러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무모했지요.” 해마다 6억 원씩 적자가 났고, 3년쯤 지나자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큰일났구나….’ 결국 사무실을 현재의 광진구 상가건물 3층으로 옮겼고, 3년 전에는 지하층으로 내려왔다. ―지금 협회 살림은 어떻게 운영되나요. “저희 연회비가 10만 원입니다. 전국 회원 18만 명이라고 하고는 있는데…. 진성회원(회비내는 회원)이 1%인 1800명만 돼도 만세를 부르겠어요. 운영비 마련을 위해 과자공장이나 카페, 식당도 운영해봤지만 잘 안 됐어요.” ―모델로 삼은 미국은퇴자협회는 회원 3800만 명, 예산 2조 원 규모로 성업 중인데요. “가장 큰 차이는 수익 모델이죠. 1950년대 퇴직교사협회에서 시작됐던 미국 협회는 보험사가 끼면서 재정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요즘은 미국 언론이 AARP를 ‘세계에서 제일 큰 보험회사’라며 비판할 정도입니다. 저도 한국에서 보험 쪽을 알아봤는데 기존 보험회사의 지부 역할밖에 못 하게 돼 있더군요. 그걸 포기하고 나니 힘이 드는 거죠. 결국은 돈이 문제예요.”●한국 노인이 차별받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노인 차별, 노인 경시 문화가 만연했다고 지적하곤 합니다. 한국에서 노인은 왜 차별받는다고 보십니까. “차별받는다는 것은 약자라는 얘기입니다. 왜 약자가 되었을까요. 스스로 힘을 키우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차별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똑똑해져야 합니다. 다만 책임을 다하면서 권리를 주장해야 해요.” 여기에는 뉴욕한인회장으로 일하면서 미국 정가를 상대할 때의 경험이 깊이 녹아들어가 있다. “우리 노인들은 대접 받으려는 생각이 강한 반면에 스스로 기여하려는 생각은 못 하는 경향이 있어요. 민주시민 훈련이나 사회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시대를 살아온 거죠. 하지만 세상이 변했어요. 노인이 된 것을 벼슬처럼 여기려는 순간 무시당하게 되지요.” 그에 따르면 미국은퇴자협회의 모토는 ‘봉사받지 말고 봉사하라(Serve, not to be served)’다. 고령자가 되어서도 사회에 기여하고 본인 몫의 책임을 지면서 권리를 찾는다는 자세다. 반면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지 못하면 공짜를 바라고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기적이고 자녀 세대를 배려하지 않는 노인이라면 욕먹을 수밖에 없지요.” 그 예로 지하철 무임승차 논란을 들었다. “(무임승차를 주장하는 측은) 어차피 다니는 전철에 몇 명 더 탄다고 무슨 문제냐고 하지만 그게 다 비용이 발생합니다. 무임승차는 수혜 연령대를 높이고 차등화해야 합니다. 장애인 등은 무료, 고령자는 할인제로 단돈 얼마라도 내고 타야 하지요. 왜 이런 걸로 후배 세대에게 부담을 줍니까.” 같은 이유로 회원들에게 ‘배벌사’를 권유하고 있다. “‘배우고 벌고 살자’를 줄인 말이죠. 뭐 대단한 일자리를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국민연금과 합쳐 월 150만 원 정도 확보되는 일자리면 족하지요. 은퇴자들에게도 강조합니다. 큰돈 벌려고 욕심내지 말라, 절반은 봉사, 절반은 소일거리라고 생각하고 감사히 일하자고.” ―베이비붐 세대의 고령자 편입으로 노인의 색깔이 바뀌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습니다. “모쪼록 세상이 그렇게 바뀌어야죠. 후배들은 잘할 거라고 봅니다.” ●“협회 대표 찾습니다”20대에는 대한항공에 들어가 9년간 일했다. 30대에 미국 뉴욕 맨해튼에 정착했다. 맥도널드 매장을 4개나 경영하며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에서 성공했는데 국내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지요. “어떻게 하면 보람 있고 의미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AARP를 발견했죠. 1996년 뉴욕에 대한은퇴자협회를 설립했는데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졌어요. 고령화와 경제 위기를 함께 맞은 한국에 도움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지요.” 귀국 몇 년 만에 미국 국적을 버렸다. ‘정치하려고 왔다’거나 ‘좀 하다 돌아갈 사람’이란 시선이 많자 아예 정리해버린 것이다. 그간 협회 활동에 사재 수십억 원을 털어넣었다. 미국에서 가져오는 돈으로 안 되자 충남 아산에 있던 물려받은 땅을 야금야금 팔았다. 나중에는 선산마저 없애버렸다. 그는 얼마 전부터 ‘협회를 대표할 인물을 찾는다’는 서류를 들고 다닌다. “떠날 때를 알아야지요. 그런데 여러 사람이 관심을 보이다가도 ‘돈이 안 된다, 오히려 본인 돈을 써야 할 거다’라는 말에 손사래를 칩니다.” 요즘은 협회가 괜찮은 기업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후임자가 찾아질 때까지 힘 닿는 한 하던 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사무실 사람들에게 얘기합니다. 어느 날 출근해 보니 내가 쓰러져 있다고 해도 놀라지 말라고. 하하.” 그가 고국에 돌아온 2000년대 초에 고령화율 7%를 갓 넘겼던 한국은 2025년 20%의 초고령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사회 환경은 이제야 그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꽃피울 환경이 돼 가고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가 조금이라도 준비된 상태로 고령사회를 맞이한 데는 그의 노고도 한몫 보탠 것 같다. 영예로운 인생 후반을 꿈꿨던 그의 마지막 댄스는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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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부하는 노년, 강추합니다” 71세 김광성 씨가 13년째 대학생인 이유는[서영아의 100세 카페]

    71세 김광성 씨는 13년 차 대학생이다. 한국감정원(현 한국부동산원)에서 32년간 근무하고 58세에 정년퇴직했다. 그 이듬해 한국방송통신대(방송대) 문화교양학과 2011학번이 됐다. 4년 뒤 순조롭게 대학 졸업장을 받았지만 공부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다. 곧바로 국어국문학과 2학년에 편입했고, 같은 식으로 미디어영상학과를 거쳐 지금은 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공고를 나와 정년까지 일만 해온 그에게 ‘공부’는 평생 키워온 갈증이자 언젠가를 위해 아껴둔 달콤한 즐거움이었다. 70대에도 공부하는 청춘을 구가하는 그를 3일 서울 중구 수표로에 자리한 일터에서 만났다.공고 졸업생의 인문학에 대한 갈증방송대와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971년 한양공고를 졸업한 뒤 군입대를 앞둔 그에게 이듬해 서울대 부설 방송통신대가 개교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혹시 하는 마음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수많은 똑똑한 청년들이 비싼 등록금 탓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던 시절이었다. “방송대는 예나 지금이나 등록금이 파격적으로 싸니까요. 당시엔 2년제 초급대학 과정에 5개 과가 개설돼 경쟁이 엄청났습니다.”제대 뒤 중소기업에서 일하다 다시 대학 문을 두드리기 위해 야간학원에 다니고 예비고사까지 본 1979년, 그는 한국감정원 고졸공채에 덜컥 합격했다. 당시 한국감정원은 기업 평가, 즉 공장과 기계설비에 대한 감정 수요가 높아 공고 출신을 많이 뽑았다. 그의 손을 거쳐 간 기업이 약 1만 개는 된다. 결국 정년퇴직할 때까지 대학 문을 다시 두드릴 기회는 찾지 못했다.“퇴직할 즈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남아 있는 많은 시간, 뭘 하고 보낼지가 발등의 불이었어요. 주변을 둘러봐도 먹고사는 것은 웬만하면 해결되는데, 오히려 그 많은 시간 무엇을 할지가 심각한 고민이 됩니다. 사실 자식 농사 끝나고 나면 큰돈 쓸 일은 별로 없지요. 그때 생각해 낸 게 평생 공부입니다. 심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도 공부를 해야겠다… 가족도 적극 찬성해줬습니다.”은퇴자의 대학 도전이 쉽기만 했던 건 아니다.“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지요. 대학에 입학한 첫해부터 틈날 때마다 도보 대장정에 나섰습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였지요.” 전국의 해안선을 따라 약 1600km를 5년간 시간나는대로 혼자 걸었다. 한 번에 3~4일, 혹은 일주일씩. 총 40일 걸렸으니 하루 약 40km를 주파한 셈이다. “제게 도보여행은 수행과정이었습니다. 아슬아슬한 국도변을 끝없이 걷거나 조용한 산길을 하염없이 걸었죠. 추적추적 비 오는 거리를 흠뻑 젖어 걷거나 폭염 아래 수건 뒤집어쓰고 묵묵히 걷거나. 걷는다는 의식조차 없이 좀비처럼 걸었습니다. 발톱이 빠지고 물집이 너덜거렸죠. 나를 비우는 경험이자 의지와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었습니다.”이 도보여행 경험은 그에게 첫 대학 졸업장을 안겨준 문화교양학과 졸업논문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나이에 공부해서 남 주나”그는 노년의 공부는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찾고 꿈을 이루기 위해 하는, 인생을 위한 공부라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장점으로 젊어지는 효과를 꼽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탈(脫) 꼰대’ 효과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며 젊은 세대와 접촉하다 보면 시대의 조류를 알고 세상과 좋은 접점을 유지하게 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는 방송대 홍보단에 들어가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고 스터디나 동아리 활동, 신입생과 다문화 학우들의 멘토 역할 등에 적극 참여하며 뒤늦은 대학 생활을 만끽했다. 부동산 자산관리 강의나 글쓰기 강좌를 열어 재능기부를 하기도 했다.“방송대에서 공부하는 분들 각자 뭔가 사연들을 갖고 있지요. 저를 봐서라도 많은 학우들이 새로 공부를 시작할 용기를 내달라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방송대에 지원한 제 또래 친구들도 꽤 있어요.”방송대 1년 등록금은 약 75만 원(공대는 200여만 원). 성적 상위 7%까지는 전액, 20%까지는 반액 장학금을 수여한다. 그는 단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다. “국비가 지원되는 학교에서 너무 많이 누리다 보니 제 평생 처음으로 세금 내는 게 아깝지 않더군요. 장학금을 대놓고 받는 게 미안해서 몇 년 전 학교에 발전기금 1000만 원을 기부했습니다.”첫 졸업 논문인 ‘나는 문화교양을 학습하며 행복해졌는가’는 학과 우수논문으로 선정됐다. 이 논문에 따르면, 그에게 행복은 품격 있는 삶을 위해 지성과 품성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과정이고 문화 교양에 대해 공부하는 나는 행복하다. “행복은 결론이 아니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소소한 행복, 요즘 말로 ‘소확행’이소중하죠. 인간은 행복한 순간에 행복을 인식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불행이 닥쳐야 비로소 과거의 작은 행복을 되돌아보지요.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려면 이성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만들어야 해요. 아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공부 덕에 ‘탈(脫) 꼰대’… 70대에도 직장인 생활공부는 공부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7년 전 다시 상근직 일자리를 얻었다. 감정평가법인의 상임고문이자 자회사인 부동산중개법인의 대표를 맡아 9시 출근, 6시 퇴근 생활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다시 직장을 갖게 된 비결도 공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공부를 계속하니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따라갈 수 있었지요. 이 나이에도 다른 세대와 교감할 수 있고 새로운 정보화 문물을 잘 구사할 수 있고요. 제 나이에 컴퓨터 기기 제대로 못 만지는 분들 많잖아요. 취업해서 역할 하기엔 어려운 상황이지요.”그는 본래 전자기기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 ‘얼리 어댑터’ 계열이라고. 1988년 XT급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점차 스스로 컴퓨터를 조립해 사용했다. 무선전화, PDA, 스마트폰, 태블릿 등 디지털 첨단 기기가 나오면 맨 먼저 써봐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특히 성 역할이나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시각 교정은 그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었다. 여느 가장처럼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는 꼰대 스타일이었지만 요리와 살림을 도맡겠다고 나섰다. “마침 손주가 태어나 아내는 그 수발드느라 바빠진 탓도 있었지요. 30여 년간 아내가 해주는 밥을 받아먹기만 했는데, 그때부터 해도 다 갚지 못할 것 같더군요. ‘앞으로 밥은 내가 해준다’고 선언했습니다.”그래서 여성 동창들이 남편이 집안일을 안 한다고 푸념하면 그는 “(남편을) 얼른 방송대에 보내라”고 조언한다고.“공부를 통해 시대의 조류를 알고 저 스스로 과거의 잘못된 행동 양식을 깨닫고 깨우치는 겁니다. 나이 먹으면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배우는 거예요. 그렇게 배운 삶의 지혜는 바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요. 노년의 공부는 일상을 바꿉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굉장히 많이 바뀌었어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늦공부의 고민 해결법지금까지 방송대 홍보단 활동을 두차례 해서인지, 그의 화제는 자주 방송대 홍보로 가곤 한다. 이런 식이다. “나이 들어 공부할 때 가장 큰 고민이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나이 든 학생에게 가장 좋은 게 방송대 강의입니다. 오프라인 수업이라면 교수님 강의를 놓치면 다시는 못 듣죠. 하지만 저희 학교 강의는 본인이 부지런하다면 언제 어디서건 다시 듣기를 할 수 있어요. 요 작은 휴대전화 하나만 있으면 교수님을 불러낼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방송대 강의는 한 학기 평균 6과목을 듣는데 과목당 대략 15시간의 강의로 이뤄진다. 단순 계산으로는 한 학기 90시간을 듣는 셈이다. 그는 초기에는 모든 강의를 5번 씩, 요즘도 3번씩은 돌려보며 복습한다고 한다. “‘공부하는 노년’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제가 해온 여러 선택 중 가장 잘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타인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꼰대죠(웃음). 그냥 저는 그랬다는 거예요.”오전 3시에 시작하는 건강 생활 습관그의 하루는 오전 3시에 시작된다. 2시간 반 동안 공부하며 요리도 하고 5시 반이면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고 정시에 출근한다. 내년에 법학과를 졸업하면 경제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한다.―방송대에 대학원 과정도 있는데, 학력을 더 높일 생각은 없으신지요?“이 나이에 취업할 것도 아니고 인생을 알기 위해 공부하는 건데, 굳이 가방끈을 따질 필요가 있겠어요. 저는 넓게, 많이 공부하는 게 좋습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지식은 끊임없이 변하고 낡아간다. 그는 전공에 따라 8년에서 12년이면 지식반감기를 맞는다며 평생 공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현역에서는 언제쯤 명실상부하게 은퇴하게 됩니까. “글쎄요…자회사 대표는 3년 임기제인데 최근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어요. 최소한 임기는 채울 것이고 그 이후는 모르겠어요.” 노후를 대비해 공인중개사, 자산관리사 등의 자격증을 따뒀다. 부동산 관련 전문가라니 부동산 투자에는 성공했으려니 했지만 부부가 19평 아파트에 살며 부족한 노후 생활비를 위해 월세 나오는 오피스텔을 마련한 정도라고 했다. 그래도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 중에는 그가 가장 성공한 케이스라고. ―감정평가사라면 부동산 투자로 대박 난 분들이 무척 많을 것 같은데, 의외네요?“저희끼리도 모이면 그 얘기를 해요. 감정평가 전문가는 부동산 투자를 못합니다. 감정평가라는 게 물건의 하자를 찾아내는 일이거든요. 뭔가를 보면 단점, 문제점부터 빤히 보이는 거예요. 투자는 꿈이 있어야 하는 거죠. 문제점부터 보이니 선뜻 지를 수가 없어요. 하하.”다만 그는 노후 필요 자금에 대해 금융계나 미디어가 너무 공포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살림하며 보니 제 경우 부부 생활비는 월 200만원 정도면 충분하더군요. 연금에 약간의 추가 수입을 확보하면 되는 거죠. 또 하나, 노후에는 있는 재산에 맞춰 사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다 살길이 있어요. 4050 시절에 자산을 뻥튀기해두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공포감은 조성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그는 인터뷰 말미에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레프 톨스토이의 말을 꺼내 놓았다. “톨스토이의 유작 잠언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제가 얻는 성찰은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영혼에 대한 믿음, 끝없는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 몸을 겸손하게 낮추어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편안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생 별거 있나요. 하루 한 걸음씩 꾸준히 나아가는 거예요.”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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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는 정말 숫자일 뿐”…글쓰는 71세 환경미화원 할머니의 행복론[서영아의 100세 카페]

    ‘새벽에 일어나 정적을 깨기 위해, 더 솔직히 말하자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TV를 켠다. 귀가 아직 가지 않았다. TV 속 말소리, 음악소리 다 들린다. TV를 끄고 글을 쓴다. 손가락도 아직 가지 않았다. 혼자 피식거리며 때로는 눈물 찔끔거리며 노트 여백을 채워간다. 잘하고 있어, 연홍아! 셀프 칭찬도 하면서.’(‘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에서)1952년생 정연홍 씨는 현역 환경미화원이다. 매일 오전 8시 반까지 대구의 한 아파트 단지로 출근해 오후 3시 반까지 청소 일을 한다. 이곳에서만 10년 넘게 일했고 얼마 전 소속 용역업체로부터 10년 근속상과 상금도 받았다. 일은 생계를 위한 것이지만 일상의 기쁨과 감사의 원천이기도 하다.“내 손길과 발길로 깨끗해지는 아파트는 제 성역 같아요. 20층 넘는 건물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돈도 벌고 운동까지 하니 얼마나 좋아’라며 웃곤 하지요.”이뿐인가. 오가며 마주하는 동료, 동네 사람들과 건네는 가벼운 인사, 웃는 얼굴은 삶이 그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첫 책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대경북스)를 냈다. 갑자기 듣게 된 ‘작가’ 호칭이 쑥스럽지만 행복하다. 책 서두에 본인이 표현했듯 ‘71세 나이에 글 쓰고 일을 하니 제법 찬란한 삶을 살고 있는 할머니’다. 책은 소박한 분량과 내용의 에세이집인데, 묘하게 힐링과 격려를 전해준다. 정 씨의 인생 2막 스토리를 듣기 위해 17일 대구의 일터로 찾아갔다. e메일로 책 출간 소식을 알려준 딸 김현아 씨(46)가 인터뷰를 돕기 위해 경기 수원에서 달려왔다.55세 전업주부의 가출, 홀로서기정 씨의 인생 무대는 17년 전 그날 밤 전과 후로 나뉜다.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아왔던 삶을 내려놓고 오롯이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했다. 딸 김 씨의 회상이다. “새벽 2시쯤에 엄마가 좀 와달라고 연락을 했어요. 남편과 함께 가봤더니 집을 나가겠다고 하셔서 반대했어요. 이기적인 얘기로 들리겠지만 ‘지금껏 참아왔는데 조금만 더 참아 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설득했지요. 한편으로는 ‘잠시 이러다가 그만두시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결국 정 씨는 집을 나왔다. 처음 한달은 여관방에서, 그뒤 1년은 딸 내외의 18평 신혼집에서 지낸 뒤 월세방을 얻어 독립했다. ―그런데 왜 집을 나가신 건가요. 책 내용만으로는 도무지 모르겠던데요.‘그냥 부부간 성격이 맞지 않았다’며 넘기려는 정 씨 대신 딸 김 씨가 답한다.“집에서 엄마는 존중받지 못했어요. 옛날 분들 그런 경우 많잖아요. 가족을 위해 헌신만 하셨죠. 엄마는 늘 표정이 굳어 있었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9명 대식구의 살림을 해야 했으니 삶의 부담이 너무 심하셨죠. ” 가족에겐 갑작스러웠지만 정 씨로서는 오래 생각했던 거사였던 듯하다. “딸 시집도 보냈고 나머지 식구들도 모두 제 갈길 찾아갔어요. 남은 건 아들 둘인데 막내가 20대 중반이었으니 다 컸죠. 제가 할 일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어요.” 당초 엄마의 가출을 반대했던 딸은 이후 서서히 달라지는 엄마의 삶을 지켜보며 생각이 바뀌었다.“엄마가 10년 간 살았던 월세방은 곰팡내가 심했어요. 엄마가 안쓰러웠지만 그게 싫어서 자주 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가끔 보는 엄마 표정은 환했어요. 세상 편하고 자유롭고 좋다고요. ‘어, 엄마가 웃네….’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던 엄마가 자기 의견을 말하네….’ 다른 사람처럼 변한 엄마를 보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죠. 과거 대가족 속에서 자신을 지워버렸던 엄마였는데, 요즘은 친구 같아요. 한 인간으로서 생생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존재감을 경험하고 있어요.”나아가 김 씨는 “지금도 우리 엄마 연령대 분들 중에 자신을 지우고 사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며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좀 용기와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씨는 지금은 막내아들(42) 집에서 살고 있다. 다른 지방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막내 아들은 주말이면 집에 돌아와 엄마와 함께 지낸다. 무한 긍정의 힘정 씨의 일터는 947가구가 사는 아파트 단지다. 환경미화원 8명이 관리한다. 정 씨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은 뒤 남은 30분 남짓 동안 떠는 수다가 세상 제일 즐겁다고 한다. ‘안 되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는’ 이야기꽃이 핀다. 월급 받으면 1인당 1만 원씩 모아놓은 돈으로 피자도 시켜 먹고 찜닭도 시켜 먹는다. 일터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고, 울어도 예쁘고 똥을 싸도 예쁘고 떼를 써도 예쁜 꽃같은 아이들’과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도 그저 즐겁고 감사한 일이 넘친다. 책에서 한 대목을 뽑아 오자면 이런 식이다. ‘주민은 택배기사님께 드리고 기사님은 나에게 주시고 나는 택배 총각에게 주고/박카스 한 병이 돌고 돌아 서로에게 행복이 되어 주었다/조그마한 박카스 한 병이 사랑을 싣고 여기저기 다니는 것이 신기하다/행복이 뭐 별건가/이렇게 우리는, 박카스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행복 전도사가 된다.’ 정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글을 쓴다. 글을 잘 쓰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중요한 대목은 베껴 써보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100번 쓰면서 자기 암시와 다짐을 하는 100번 쓰기를 실천 중이다. 봄이 오면 아직도 설렌다. 인생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한다. “젊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너희들이 부러워. 그리고 부러운 것을 부럽다고 말할 수 있는 나는 행복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살면서 제대로 느끼고 있으니 이 또한 행복해.” 딸 김 씨의 얘기. “엄마의 장점은 무한 긍정이에요. 엄마랑 차 타고 가다가 누군가가 매너 없이 끼어들어 제가 화를 내면 엄마는 옆에서 ‘거, 똥 마려운가 보다’라고 해요. 풋 하고 웃게 되죠. 그 뒤로는 같은 상황에서 ‘하, 그 사람 똥 많이 마려운갑네’라고 생각하면 화가 안 나요.”(웃음) “딸아, 엄마는 이 나이에도 다시 시작할 거야”2019년 정 씨는 10년간 모은 돈으로 수원에 집을 샀다. 정확히는 전세를 끼고 딸과 공동명의로 샀고, 최근 자신의 지분을 딸에게 넘겨줬다. 수중의 돈을 박박 긁어모으다 못해 걸치고 있던 귀고리까지 빼서 팔았다.‘서울에서 한번 살아보는 게 로망’이라는 딸이 부동산 투자에 실패해 우울증을 앓던 시기였다. “엄마는 이제 가진 게 하나도 없어. 하지만 다시 시작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시작해 봐.” 김 씨가 독서 모임에서 이런 얘기를 하자 멤버들이 나이든 엄마가 딸에게 용기를 주고 목표에 다가서도록 돕는 모습이 좋다며 한번 모셔보자고 했다. 이렇게 만든 자리에서 몇 사람이 ‘책을 써서 젊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라’고 했는데, 정 씨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어느 틈엔가 2022년 신년 목표를 ‘책 쓰는 것’으로 잡았다.“2021년 12월초에 엄마랑 다음해의 목표에 대해 얘기했어요. ‘내년 엄마 목표는 뭐야?’했더니 ‘난 책 쓰기야. 책 쓸 거야’라며 빵 터지며 웃으세요. 엄마가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난 이걸 목표로 정했어. 너는?’ 하시길래 ‘난 이사가기’라고 답했죠. 그런데 2022년도에 두 사람 모두 목표를 이뤘어요. 허황된 목표라 생각했는데, 간절히 바라고 노력한 덕이겠죠.”(딸 김 씨)책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김 씨는 수소문을 통해 책 쓰기 코칭을 하는 백미정 작가를 정 씨에게 연결해 줬다. 백 작가는 매일 정 씨가 쓴 글을 사진 찍어 보내면 타이핑을 하고 책의 틀을 잡아줬다. 출판사는 마케팅에 불리하다는 백작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작업이 즐거울 것같다’며 흔쾌히 책을 내줬다. ―올해 목표는 뭐로 잡았나요.“직업 바꾸기. 노후를 위해 작년에 치매 예방 지도 자격증을 땄는데 그걸로는 생활비를 벌 수가 없더군요. 그냥 나중에 양로원 들어가 자원봉사할 때 쓰려고요. 마침 70세였던 환경미화원 일은 정년이 없어져 계속 일하고 있어요.”―조금 더 연세가 들면 몸이 힘들어질 수 있을 텐데요.“건강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일은 손을 놔야죠. 그 뒤 일을 생각은 해보지만 제 의지로 딱 부러지게 정할 수는 없잖아요. 다만 연명치료 거부 의사는 등록했어요. 내가 정신이 있을 때 등록해 놔야 애들이 나중에 마음 쓸 일도 없겠다 싶어서요.” “다시 그러고 싶다”명색이 100세 시대라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으로서는 처음 맞는 나이대가 낯설다. 70여 년 살아본 정 씨는 ‘뒤돌아보면 모든 길이 꽃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정 씨가 스스로 ‘평생 가장 잘한 일’로 꼽는 건 뭘까.“19세 때 아버지 환갑은 놓쳤지만 2년 뒤 어머니 환갑은 제대로 하고 싶어서 공장 다니며 적금을 들었어요. 이웃 어르신들을 불러 잔치 국수를 대접했는데, 잔치를 준비하는 어머니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죠. 시집간 언니는 간간이 눈물을 훔쳐가며 어르신들을 대접했고요. 아버지에게 손목시계를, 어머니에게는 3돈짜리 금반지를 끼워 드렸어요. 금반지는 생전 처음 끼어본다며 보고 또 보고 만져보는 엄마가 어린아이 같았죠. 그게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이에요. 잠시만이라도 부모님을 다시 뵐 수 있다면 더 반짝이는 시계, 더 큰 금반지 해드리고 싶어요. 그러고 싶어요.”묻히고 잊혀진 수많은 우리네 할머니들의 소박한 기억과 한(恨)을 엿본 느낌이 들었다.※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대구=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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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 71세에도 글쓰는 환경미화원 할머니의 ‘꽃길 인생’[서영아의 100세 카페]

    1952년생 정연홍 씨는 현역 환경미화원이다. 매일 오전 8시 반까지 대구의 한 아파트 단지로 출근해 오후 3시 반까지 청소 일을 한다. 이곳에서만 10년 넘게 일했다. 일은 생계를 위한 것이지만 일상의 기쁨과 감사의 원천이기도 하다. “내 손길과 발길로 깨끗해지는 아파트는 제 성역 같아요. 20층 넘는 건물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돈도 벌고 운동까지 하니 얼마나 좋아’라며 웃곤 하지요.” 이뿐인가. 오가며 마주하는 동료, 동네 사람들과 건네는 가벼운 인사, 웃는 얼굴은 삶이 그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첫 책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대경북스)를 냈다. 갑자기 듣게 된 ‘작가’ 호칭이 쑥스럽지만 행복하다. 책 서두에 본인이 표현했듯 ‘71세 나이에 글 쓰고 일을 하니 제법 찬란한 삶을 살고 있는 할머니’다. 책은 소박한 분량과 내용의 에세이집인데, 묘하게 힐링과 격려를 전해준다. 정 씨의 인생 2막 스토리를 듣기 위해 17일 그의 일터로 찾아갔다. e메일로 책 출간 소식을 알려준 딸 김현아 씨(46)가 인터뷰를 돕기 위해 경기 수원에서 달려왔다.●55세 전업주부의 가출, 홀로서기 정 씨의 인생 무대는 17년 전 그날 밤 전과 후로 나뉜다.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아왔던 삶을 내려놓고 오롯이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했다. 딸 김 씨의 회상이다. “새벽 2시쯤에 엄마가 좀 와달라고 연락을 했어요. 남편과 함께 가봤더니 집을 나가겠다고 하셔서 반대했어요. 이기적인 얘기로 들리겠지만 ‘지금껏 참아왔는데 조금만 더 참아 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설득했지요. 한편으로는 ‘잠시 이러다가 그만두시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결국 정 씨는 집을 나왔고 처음 한 달은 여관방에서, 그 뒤 1년은 딸 내외의 18평 신혼집에서 지낸 뒤 월세방을 얻어 독립했다. ―그런데 왜 집을 나가신 건가요. 책 내용만으로는 도무지 모르겠던데요. ‘그냥 부부간 성격이 맞지 않았다’며 넘기려는 정 씨 대신 딸 김 씨가 답한다. “집에서 엄마는 존중받지 못했어요. 옛날 분들 그런 경우 많잖아요. 엄마는 늘 표정이 굳어 있었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9명 대식구의 살림을 해야 했으니 삶의 부담이 너무 심하셨죠.” 가족에겐 갑작스러웠지만 정 씨로서는 오래 생각했던 거사였던 듯하다. “딸 시집도 보냈고 나머지 식구들도 모두 제 갈 길 찾아갔어요. 남은 건 아들 둘인데 막내가 20대 중반이었으니 다 컸죠. 제가 할 일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어요.” 당초 엄마의 가출을 반대했던 딸은 엄마의 삶을 지켜보며 서서히 생각이 바뀌었다. “엄마가 10년간 살았던 월세방은 곰팡내가 심했지만 엄마 표정은 환했어요. 세상 편하고 자유롭고 좋다고. 어, 엄마가 웃네….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던 엄마가 자기 의견을 말하네…. 다른 사람처럼 변한 엄마를 보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죠. 과거 대가족 속에서 자신을 지워 버렸던 엄마였는데, 요즘은 친구처럼, 한 인간으로서 생생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존재감을 경험하고 있어요.” 한술 더 떠 김 씨는 “지금도 우리 엄마 연령대 분들 중에 자신을 지우고 사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며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좀 용기와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씨는 지금은 막내아들(42) 집에서 살고 있다.●무한 긍정의 힘정 씨의 일터는 947가구가 사는 아파트 단지다. 환경미화원 8명이 관리한다. 정 씨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은 뒤 남은 30분 남짓 동안 떠는 수다가 세상 제일 즐겁다고 한다. 월급 받으면 1인당 1만 원씩 모아놓은 돈으로 피자도 시켜 먹고 찜닭도 시켜 먹는다. 이곳에서도 그저 즐겁고 감사한 일이 넘친다. 정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글을 쓴다. 글을 잘 쓰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중요한 대목은 베껴 써보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100번 쓰면서 자기 암시와 다짐을 하는 100번 쓰기를 실천 중이다. 봄이 오면 아직도 설렌다. 인생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한다. “젊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너희가 부러워. 그리고 부러운 것을 부럽다고 말할 수 있는 나는 행복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살면서 제대로 느끼고 있으니 이 또한 행복해.” 딸 김 씨의 얘기. “엄마의 장점은 무한 긍정이에요. 엄마랑 차 타고 가다가 누군가가 매너 없이 끼어들어 제가 화를 내면 엄마는 옆에서 ‘거, 똥 마려운가 보다’라고 해요. 풋 하고 웃게 되죠. 그 뒤로는 같은 상황에서 ‘하, 그 사람 똥 많이 마려운갑네’라고 생각하면 화가 안 나요.”(웃음)●“딸아, 엄마는 이 나이에도 다시 시작할 거야” 2019년 정 씨는 10년간 모은 돈으로 수원에 집을 샀다. 정확히는 전세를 끼고 딸과 공동명의로 샀고, 최근 자신의 지분을 딸에게 넘겨줬다. 수중의 돈을 박박 긁어모으다 못해 걸치고 있던 귀고리까지 빼서 팔았다. ‘서울에서 한번 살아보는 게 로망’이라는 딸이 부동산 투자에 실패해 우울증을 앓던 시기였다. “엄마는 이제 가진 게 하나도 없어. 하지만 다시 시작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시작해 봐.” 김 씨가 독서 모임에서 이런 얘기를 하자 멤버들이 나이 든 엄마가 딸에게 용기를 주고 목표에 다가서도록 돕는 모습이 좋다며 한번 모셔보자고 했다. 이렇게 만든 자리에서 몇 사람이 ‘책을 써서 젊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라’고 했는데, 정 씨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어느 틈엔가 2022년 신년 목표를 ‘책 쓰는 것’으로 잡았다. 책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김 씨는 수소문을 통해 책 쓰기 코칭을 하는 백미정 작가를 연결해 줬다. 백 작가는 매일 정 씨가 쓴 글을 사진 찍어 보내면 타이핑을 하고 책의 틀을 잡아줬다. 출판사는 마케팅에 불리하다는 백 작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작업이 즐거울 것 같다’며 흔쾌히 책을 내줬다. ―올해 목표는 뭐로 잡았나요. “직업 바꾸기. 노후를 위해 작년에 치매 예방 지도 자격증을 땄는데 그걸로는 생활비를 벌 수가 없더군요. 그냥 나중에 양로원 들어가 자원봉사할 때 쓰려고요. 마침 70세였던 환경미화원 일은 정년이 없어져 계속 일하고 있어요.” ―조금 더 연세가 들면 몸이 힘들어질 수 있을 텐데요. “건강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일은 손을 놔야죠. 그 뒤 일을 생각은 해보지만 제 의지로 딱 부러지게 정할 수는 없잖아요. 다만 연명치료 거부 의사는 등록했어요. 내가 정신이 있을 때 등록해 놔야 애들이 나중에 마음 쓸 일도 없겠다 싶어서요.”●“다시 그러고 싶다”명색이 100세 시대라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으로서는 처음 맞는 나이대가 낯설다. 70여 년 살아본 정 씨는 ‘뒤돌아보면 모든 길이 꽃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정 씨가 스스로 ‘평생 가장 잘한 일’로 꼽는 건 뭘까. “19세 때 아버지 환갑은 놓쳤지만 2년 뒤 어머니 환갑은 제대로 하고 싶어서 공장 다니며 적금을 들었어요. 이웃 어르신들을 불러 잔치 국수를 대접했는데, 잔치를 준비하는 어머니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죠. 시집간 언니는 간간이 눈물을 훔쳐 가며 어르신들을 대접했고요. 아버지에게 손목시계를, 어머니에게는 3돈짜리 금반지를 끼워 드렸어요. 금반지는 생전 처음 끼어본다며 보고 또 보고 만져보는 엄마가 어린아이 같았죠. 그게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이에요. 잠시만이라도 부모님을 다시 뵐 수 있다면 더 반짝이는 시계, 더 큰 금반지 해드리고 싶어요. 그러고 싶어요.” 묻히고 잊혀진 수많은 할머니들의 소박한 기억과 한(恨)을 엿본 느낌이 들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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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떠나 여유로운 귀촌타운서 웰 에이징 어떠세요?”[서영아의 100세 카페]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65)는 매주 이틀은 서울에서, 나머지는 전남 구례에서 지낸다. 이른바 ‘2도(都)5촌(村)’ 생활이다. 환갑을 맞은 2018년, 5년 뒤 정년퇴직에 대비해 서울 강남의 집을 팔고 구례로 이사했다. 그 뒤로는 매주 화·수요일에 수업을 몰아놓고 화요일 아침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가 수요일 오후 내려가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에 오면 결혼한 아들의 집에 묵는다.“때가 되면 적당히 자리를 내줘야 후세들이 자라날 수 있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평소 자식들에게 조기에 자산 일부를 물려줘서 30대 초부터 자립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환갑 때 실천했지요. 제 집을 팔아 자식들에게 증여해서 주택 구입의 길을 터 주었습니다. 그리고서 은퇴까지는 아들 집 한 칸을 활용하기로 하고 구례로 갔어요.”퇴직 뒤에는 굳이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부모 세대가 서울을 비워줘야 청년들이 도시에 정착해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투명한 미래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미래 생존에 자신이 없다는 거죠. 이건 나라의 미래가 없어지는 거나 매한가지입니다.”언젠가 기사를 보고 연락해온 그와 두차례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문제의식도 많았고 세대 간에 대결과 착취가 아닌 연결과 융합을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곤 했다. 서울로 올라온 정 교수를 7일 정식인터뷰를 위해 만났다. 얼마 전 그가 베이비부머 귀촌타운 구상안을 보내온 것이 계기였다. “베이비부머 가정에 ‘자가 전세’ 허용을” 1958년 개띠인 그는 경남 하동에서 학창 시절 상경해 수십 년을 산, 향도이촌(向都離村) 세대다. 700만 1차 베이비부머(1955년~1963년생) 중 상당수가 지방 출신으로 서울과 수도권에 집을 장만했다. 그는 이들의 집만 다음 세대에게 합리적으로 이전돼도 청년들이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업에서 은퇴한 베이비부머 아버지는 더 이상 복닥대는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지만 아이들은 서울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서울에 집을 한 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내 집을 가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게 현실이지요. 기성 세대가 모두 자기 집을 갖고 수도권에서 버티고 있으니 집값은 좀체 내리지 않고요. 하지만 기성세대 대다수는 전 재산의 70%가 집에 묶인 채로 노후자금 부족으로 쩔쩔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방 출신이라면 귀촌의 로망을 갖고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한 편이 아닙니다.”이 경우 귀촌을 하려면 집을 팔아 일부를 자녀들에게 나눠주고 본인도 일부 가지고 시골로 내려가야 한다. 여기에 각종 세금까지 내고 나면 가족 전체의 자산은 줄어들고 자녀들은 내집마련의 기회에서 영영 멀어진다.그래서 그는 2년 전 낸 책 ‘핏팅 코리아’에서 자가(自家) 전세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부모 세대가 집을 자녀에게 넘기고 자신들은 그 집 전체, 또는 일부에서 세를 사는 개념이다. 자금이 부족한 자녀 세대에게 내 집 장만의 길을 제공해주고 부모 세대는 얼마간 받은 돈으로 지방에 살 집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전세금은 사망한 뒤 상속 처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하면 ‘증여’라며 세무조사가 들어오기 십상이다. -말씀하시는 자가전세 제도라는 게 결국 증여세를 감면해 달라는 얘기가 되지 않을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라도 해서 한국의 중산층을 튼튼하게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대로라면 중산층은 은퇴와 동시에 하류층으로 편입되기 쉬워집니다. 그 자녀 세대는 안심하고 결혼출산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요. 악순환의 반복이지요. 전 세대가 불행합니다.”-부의 대물림, 빈부격차 심화라는 문제도 지적될 수 있겠는데요. “그건 또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하겠지요. 전 국민의 빈곤화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요.”“베이비부머의 귀촌으로 지방 소멸 막아보자”지방이 소멸된다고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인다. 지방에 미리 자리잡은 그로서는 피부로 느끼는 일상이다. 그가 자신뿐 아니라 또래 베이비부머들이 은퇴후 살 곳에 대한 여러 조건을 생각해본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구상은 기성세대의 귀촌으로 지방소멸을 막는 동시에 질 높은 노후를 살아갈 터전을 만들자는 것. 이 고민은 은퇴를 앞두고 인생 후반전을 생각하는 시기, 상당히 오래전부터 진행됐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베이비부머의 귀촌타운(그는 이를 ‘베부쉼·베이비부머 쉼터’라 부른다) 구상이다.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다.먼저 귀촌타운은 입지가 중요하다. KTX역과 병원이 15분 거리 내에는 있어야 한다. 주변에 놀 곳인 문화시설이 있고 쇼핑몰과 극장, 관광지와 숙박시설 등 남성과 여성이 수요가 다른 여러 조건이 부합돼야 한다. 그가 노후 거주지로 고향인 경남 하동 대신 전남 구례를 택한 이유도 KTX역이 있고 30분 거리에 종합병원이 있는 등 여기 딱 부합하는 구례의 조건 때문이다.단지 규모는 최소한 100가구 이상은 돼야 한다. 어느 정도의 익명성이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고 느껴지는 일상은 도시인에게는 매우 부담스럽다. 각 층 5가구씩 25평(방 2개) 정도의 주택을 5층 높이로, 4~5개의 주거동을 만든다. 고령자 주거시설이니만큼 엘리베이터는 필수다. 주거동 한 가운데에 공동식당과 복지관, 도서관, 문화시설, 편의점 등 커뮤니티 시설이 들어간 건물이 하나 들어간다. 이 건물 위로는 10층 정도로 청년 임대주택을 넣어주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100세대 이상 규모면 어느 정도 수요 창출이 되니 지역 분들에게 질은 높지 않더라도 약간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이밖에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보건소 지소를 주 1~2회 여는 등 생각해야 할 것은 많지요. 이곳에서 입주자들은 웰 에이징과 웰 다잉까지 추구할 수 있습니다.” 정 교수의 이 모든 플랜의 주인공은 철저히 베이비부머에 맞춰져 있다. “이런 일을 실현가능하게 해줄 세대가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베이비부머였습니다. 베이비부머는 한국 역사에서도 특별한 세대입니다. 전체의 10%가 대학 교육을 받은 첫 세대이자 1인당 GDP(국내총생산)를 1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이끈 중추 세대입니다. 대다수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세대이자 제대로 연금을 받는 첫 세대이기도 합니다. 대략 일 인당 150만 원 정도 되니 이 돈으로 시니어타운에서 생활이 가능하죠. 의식도 있고 돈도 있고 체력도 있고 사회 공헌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이분들이 지금 대거 은퇴중이잖아요.”“돈이 넘쳐나는 지방, 먼저 보는 자가 임자” -이런 타운을 무슨 돈으로 짓는지요? “민관합작 투자 형태로 해서 입주자들은 건축비를 내고 정부는 부지를 제공해주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입주자들은 영구 임대주택 개념이죠. 건축비는 다음 사람이 들어올 때는 보증금 역할을 하면 됩니다. 공용 부분인 상가와 청년임대 주택 부분은 지자체가 복지사업 개념으로 지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입주자들은 건축비 1억5000만 원 정도, 월 생활비로 1인당 100만 원 정도 지출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런 것을 지방에 있는 폐교 부지 같은 곳을 활용해 시범 운영을 해봤으면 하는 거지요.”서울 기준으로 보자면 토지 무료 제공에 복지 시설이 설치된다면 엄청난 특혜처럼 여겨지지만 지방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자체들이 가진 공공 부지가 많아요. 제가 아는 지역은 지금도 예산을 들여 청년 복지주택이라며 20호를 짓고 있는데, 20호로는 수요 창출이 안 되니 이미 실패가 예견되죠. 지방소멸방지기금이 전국에 해마다 1조 원씩 뿌려지지만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지방에 정착하는 도시민을 위한 인프라 마련에 지원하는 게 현실적이 아닐까요.”항간에서는 지방소멸 방지기금은 제안서 잘 쓰는 곳으로 몰린다고 한다. 그래서 제안서 예쁘게 써주는 홍보대행사들이 전부 지방으로 가 있다는 말까지 나도는 현실이다.“문제는 목적의식과 개념입니다. 지방에는 지금 돈이 철철 넘쳐요. 대부분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지요. 50m 도로 만드는데 3년간 지지고 볶고 하는 걸 보고 있자면 ‘도대체 왜? 누굴 위해?’라는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미래 세대에게 도움이 되는지, 지역 발전에 기여할지 여부보다 자신의 업적, 자리보전이 더 중요하죠. 온갖 토목사업을 보면서 ‘누군가의 이해관계가 작동했겠지’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예술인이 살지 않는 텅 빈 예술인촌, 아이들이 외면하는 테마파크, 관광단지라는 명목으로 90억 들여 지은 텅 빈 건물 등 지방에서 피 같은 예산을 투입했지만 흉물만 남기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업에 대한 예시는 끝없이 이어진다.안도 다다오의 ‘나오시마’처럼… 30년 프로젝트 각오정 교수는 중국경제 전문가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근무하던 2011년부터 2년 반, 주중 한국대사관 경제공사로 일한 이력을 갖고 있다.요즘 구례에서의 생활은 하루 2시간 천은사 둘레길을 산책하고 섬진강을 바라보며 그의 표현에 따르면 ‘멍때리기’를 한다고 한다. 부인과 함께 하는 활동이 갈수록 늘고 있다.“귀촌타운이 전국에 보편화돼 지방의 미관을 새롭게 바꾸고 ‘내가 살고 싶은 동네’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군 단위에 들어서는 흉물스런 고층 아파트 대신 야트막한 귀촌타운이 퍼지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한 군데부터 성공해야 하겠지요.”그는 일본의 지역재생 성공 사례를 예로 들었다. 20년 전 안도 다다오 등 건축가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를 통해 폐허였던 섬이 예술의 섬으로 재탄생한 일본 가가와현의 나오시마(直島)나 쓰러져가던 오지 온천마을이 일본 최고 관광지로 거듭난 구마모토의 구로카와(黑川) 사례가 그것이다. 그는 귀촌타운을 자신의 후반생 30년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성공한다면 자신도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사적인’ 욕심도 있다. 이런 계획을 말하면 주변 지인들 중 참가하겠다는 사람이 10여 명은 된다고 말한다. “제 눈에는 구례가 귀촌타운을 만들기엔 천혜의 후보지인데, 지자체에서는 관심이 없어 보이네요(웃음). 구례나 하동, 강원도의 한군데 더 해서 세군데쯤 선정해 모델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제 후반생을 바쳐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바꿀 수 있다면 인생 전체가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궁극적으로는 제 자신의 행복을 위한 거죠.”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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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년 앞둔 서울대 교수가 전남 구례에 집 산 까닭은[서영아의 100세 카페]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65)는 매주 이틀은 서울에서, 나머지는 전남 구례에서 지낸다. 이른바 ‘2도(都) 5촌(村)’ 생활이다. 환갑을 맞은 2018년에 그는 5년 뒤 정년 퇴직에 대비해 서울 강남 집을 팔고 구례로 이사했다. 그 뒤로는 매주 화·수요일에 수업을 몰아놓고 화요일 아침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가 수요일 오후 내려가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에 오면 아들 집에 묵는다. “평소 자식들에게 조기에 자산 일부를 물려줘 30대 초부터 자립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환갑 때 실천했죠. 제 집을 팔아 자식들에게 증여해 주택 구입의 길을 터 줬습니다. 그러고 나서 은퇴까지는 아들 집 한 칸을 활용하기로 하고 구례로 갔어요.” 퇴직 뒤에는 굳이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부모 세대가 서울을 비워줘야 청년들이 도시에 정착해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투명한 미래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미래 생존에 자신이 없다는 거죠. 이건 나라의 미래가 없어지는 거나 매한가지입니다.” 마침 서울로 올라온 정 교수를 7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얼마 전 그가 베이비부머 귀촌타운 제안서를 보내온 것이 계기였다.●“베이비부머 가정에 ‘자가 전세’ 허용을” 1958년생 개띠인 그는 경남 하동에서 학창 시절 상경해 수십 년을 산, 향도이촌(向都離村) 세대다. 700만 베이비부머(1차 1955∼1963년생) 중 상당수가 지방 출신으로 서울 및 수도권에 집을 장만했다. 그는 이들의 집만 다음 세대로 합리적으로 이전돼도 청년들이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업에서 은퇴한 베이비부머 아버지는 더 이상 복닥대는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지만 아이들은 서울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서울에 집을 한 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내 집을 가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게 현실이지요. 기성세대가 모두 자기 집을 갖고 수도권에서 버티고 있으니 집값은 좀체 내리지 않고요. 하지만 이들 대다수는 전 재산의 70%가 집에 묶인 채로 노후자금 부족으로 쩔쩔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방 출신이라면 귀촌의 로망을 갖고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한 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2년 전 낸 책 ‘핏팅 코리아’에서 자가(自家) 전세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부모 세대가 집을 자녀에게 넘기고 자신들은 그 집 전체, 또는 일부에서 세를 사는 개념이다. 자금이 부족한 자녀 세대에게 내 집 장만의 길을 제공해주고 부모 세대는 얼마간 받은 돈으로 지방에 살 집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전세금은 사망한 뒤 상속 처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하면 ‘증여’라며 세무조사가 들어오기 십상이다. ―말씀하시는 자가전세 제도라는 게 결국 증여세를 감면해 달라는 얘기가 되지 않을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라도 해서 한국의 중산층을 튼튼하게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대로라면 중산층은 은퇴와 동시에 하류층으로 편입되기 쉬워집니다. 그 자녀 세대는 안심하고 결혼, 출산을 할 엄두를 내기 어렵지요. 악순환의 반복이라고 할까요. 전 세대가 불행합니다.” ―부의 대물림, 빈부격차 심화라는 문제도 지적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또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겠지요. 전 국민의 빈곤화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요.”●베이비부머의 귀촌으로 지방 소멸 막아보자지방이 소멸된다고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자신뿐 아니라 또래 베이비부머들이 은퇴 후 살 곳에 대한 여러 조건을 생각해본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구상은 기성세대의 귀촌으로 지방 소멸을 막는 동시에 질 높은 노후를 살아갈 터전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 고민은 은퇴를 앞두고 인생 후반전을 생각하는 시기, 상당히 오래전부터 진행됐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베이비부머의 귀촌타운(그는 이를 ‘베부쉼·베이비부머 쉼터’라 부른다) 구상이다.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다. 먼저 귀촌타운은 입지가 중요하다. KTX 기차역과 병원이 15분 거리 내에 있어야 한다. 주변에 놀 곳인 문화시설이 있고, 단지 규모는 최소한 100가구 이상은 돼야 한다. 어느 정도의 익명성이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고향인 경남 하동 대신 구례에 정착한 이유도 이 같은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 각 층 5가구씩 25평(방 2개) 정도의 주택을 5층 높이로 4, 5개의 주거동을 만든다. 고령자 주거 시설이니만큼 엘리베이터는 필수다. 주거동 한가운데 공동 식당과 복지관, 도서관, 문화시설, 편의점 등 커뮤니티 시설이 들어간 건물이 하나 들어간다. 이 건물 위로는 10층 정도로 청년 임대주택을 넣어주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 “100가구 이상 규모면 어느 정도 수요 창출이 되니 약간의 일자리도 생겨납니다.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보건소 지소를 주 1, 2회 여는 등 생각해야 할 것은 많지요. 이곳에서 입주자들은 웰 에이징과 웰 다잉까지 추구할 수 있습니다.” 정 교수가 구상한 모든 플랜의 주인공은 철저히 베이비부머에게 맞춰져 있다. “이런 일을 실현 가능하게 해줄 세대가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베이비부머였습니다. 베이비부머는 한국 역사에서도 특별한 세대입니다. 전체의 10%가 대학 교육을 받은 첫 세대이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이끈 중추 세대입니다. 대다수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세대이자 제대로 연금을 받는 첫 세대이기도 합니다. 대략 1인당 150만 원 정도 되니 이 돈으로 시니어타운에서 생활이 가능하죠. 의식도 있고, 돈도 있고, 체력도 있고, 사회 공헌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이들이 대거 은퇴 중이잖아요.”●“돈이 넘쳐나는 지방, 먼저 보는 자가 임자” ―이런 타운을 무슨 돈으로 짓는지요? “민관 합작 투자 형태로 해서 입주자들은 건축비를 내고 정부는 부지를 제공해주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입주자들은 영구 임대주택 개념이죠. 건축비는 다음 사람이 들어올 때는 보증금 역할을 하면 됩니다. 공용 부분인 상가와 청년임대 주택 부분은 지자체가 복지사업 개념으로 지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입주자들은 건축비 1억5000만 원 정도, 월 생활비 1인당 100만 원 정도 지출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런 것을 지방에 있는 폐교 부지 같은 곳을 활용해 시범 운영을 해봤으면 하는 거지요.” 서울 기준으로 보자면 토지 무료 제공에 복지 시설이 설치된다면 엄청난 특혜처럼 여겨지지만 지방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자체들이 가진 공공 부지가 많아요. 제가 아는 지역은 지금도 예산을 들여 청년 복지주택이라며 20채를 짓고 있어요. 하지만 20채로는 수요 창출이 안 되지요. 지방소멸방지기금이 전국에 해마다 1조 원씩 뿌려지지만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차라리 지방에 정착하는 도시민을 위한 인프라 마련에 지원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항간에서는 지방소멸방지기금은 제안서 잘 쓰는 곳으로 몰린다고 한다. 그래서 제안서 잘 쓰는 홍보대행사들이 전부 지방으로 가 있다는 말까지 나도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목적의식과 개념입니다. 지방에는 지금 돈이 철철 넘쳐요. 대부분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지요. 50m 도로 만드는 데 3년간 지지고 볶고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도대체 왜? 누굴 위해?’라는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미래 세대에게 도움이 되는지, 지역 발전에 기여할지보다 자신의 업적, 자리 보전이 더 중요하죠. 온갖 토목사업을 보면서 ‘누군가의 이해 관계가 작동했겠지’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예술인이 살지 않는 텅 빈 예술인촌, 아이들이 외면하는 테마파크, 관광 단지에 90억 원이나 들여 지은 텅 빈 건물 등 지방에서 피 같은 예산을 투입했지만 흉물만 남기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업에 대한 예시는 끝없이 이어진다. ●안도 다다오의 ‘나오시마’처럼… 30년 프로젝트 각오정 교수는 중국경제 전문가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근무하던 2011년부터 2년 반, 주중 한국대사관 경제공사로 일한 이력을 갖고 있다. 요즘 구례에서의 생활은 하루 2시간 천은사 둘레길을 산책하고 섬진강을 바라보며 그의 표현에 따르면 ‘멍 때리기’를 한다고 한다. 부인과 함께하는 활동이 갈수록 늘고 있다. “귀촌타운이 전국에 보편화돼 지방의 미관을 새롭게 바꾸고 ‘내가 살고 싶은 동네’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군 단위에 들어서는 흉물스러운 고층 아파트 대신 야트막한 귀촌타운이 퍼지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한 군데부터 성공해야 하겠지요.” 그는 일본의 지역재생 성공 사례를 예로 들었다. 20년 전 안도 다다오 등 건축가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를 통해 폐허였던 섬이 예술의 섬으로 재탄생한 일본 가가와현의 나오시마(直島)나 쓰러져가던 오지 온천마을이 일본 최고 관광지로 거듭난 구마모토현의 구로카와(黑川) 사례가 그것이다. 그는 귀촌타운을 자신의 후반생 30년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성공한다면 자신도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사적인’ 욕심도 있다. 이런 계획을 말하면 주변 지인들 중 참여하겠다는 사람이 10여 명은 된다고 말한다. “제가 보기엔 구례가 천혜의 후보지인데, 지자체에서는 관심이 없어 보이네요(웃음). 제 후반생을 바쳐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바꿀 수 있다면 인생 전체가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거죠.”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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