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분지족[이준식의 한시 한 수]〈75〉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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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흉화복엔 다 이유가 있는 법,/그걸 잘 알고는 있으되 걱정할 건 없지.

불길이 고대광실을 태우는 건 봤지만/풍랑이 빈 배를 뒤엎는단 소린 듣지 못했네.

명예는 모두의 것이니 많이 가지려 말고/이익은 몸의 재앙이니 조금만 가져야지. 내걸린 표주박과 달리 안 먹을 순 없지만/대충 배부르면 멈추는 게 마땅하지.

(吉凶禍福有來由, 但要深知不要憂. 只見火光燒潤屋, 不聞風浪覆虛舟. 名爲公器無多取, 利是身災合少求. 雖異匏瓜難不食, 大都食足早宜休.)― ‘감흥(感興)’·백거이(白居易·772∼846)

‘길흉화복의 근원을 깊이 성찰하되 걱정하진 말라.’ 용렬한 욕망에 허덕이기 쉬운 필부필부(匹夫匹婦)를 향한 시인의 일갈이 마치 화두(話頭)처럼 다가온다. 고대광실은 때로 불타 없어질 수 있으나 빈 배는 풍랑을 걱정하지 않는다. 가득 채운 배는 뒤집히는 순간 침몰하지만 빈 배는 가벼운 만큼 풍랑에 적응하기도 쉽고 뒤집혀도 유연하게 원상을 회복한다. 명리(名利)는 피하기 어려운 인간의 생래적 욕구이니 멀리하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표주박의 비유는 ‘논어’에서 나왔다. 내가 감당할 수 있고 또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그냥 표주박처럼 높다랗게 걸려 있기만 하고 식용으로 쓰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공자는 말한다. 그러니 인재가 아예 뒷짐을 지고 세상을 외면하는 것도 온당한 처세랄 수는 없다. 다만 능력과 권한 밖의 일에 간여하면 재앙일 수 있으니 안분지족하는 게 상책이다.

시는 현실 참여에 적극성을 띤 유가적 사유의 틀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연의 이치에 순응한다는 노장(老莊) 사상도 아우르고 있다. 길흉화복, 명예, 이익, 재앙 등 시에 어울릴 성싶지 않은 관념적 용어 때문인지 시적 ‘감흥’보다는 시인의 통찰력이 한결 더 돋보인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길흉화복#안분지족#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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