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겨레의 얼 일깨운 동아마라톤

김재룡 한국전력 마라톤 감독의 말이다. 김 감독은 1992년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9분30초로 2연패를 달성하면서 국내 코스에서 최초로 2시간10분 벽을 깬 주인공이다. 한국 마라톤 사상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가장 높은 순위(4위·1993년)에 오른 이도 그다.
1991년 동아마라톤에서 황영조(4위)를 제치고 우승한 김 감독은 “마라톤 선수에게 동아마라톤은 봄과 동의어다. 3월에 열리는 동아마라톤이 있기에 모든 마라톤 선수가 겨울 훈련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늘 도전을 기다리는 동아마라톤이 없었다면 손기정 선생님이나 황영조, 이봉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동아마라톤은 한국 마라토너가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디딤대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은 1932년 열린 제2회 대회 때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고, 제3회 대회 우승으로 국내 최강자로 우뚝 섰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가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뛴 것도 1991년 동아마라톤이었다.

이봉주가 이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던 1995년에 달린 길은 서울이 아닌 천년 고도(古都) 경주였다. 동아마라톤은 대한육상경기연맹과 함께 국제 대회가 가능한 새로운 국내 코스를 발굴하기로 하고 1993년부터 7년 동안 경주에서 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2000년 서울로 돌아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마라톤 대회답게 서울 도심을 뛰는 게 상징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선체육회 탄생 이끌어… ‘100년 전국체전’ 뿌리가 되다▼
동아일보는 창간 후 열흘이 지난 1920년 4월 10일부터 사흘에 걸쳐 ‘체육 기관의 필요를 논함’이라는 칼럼을 내보냈다. 평파(平波)라는 필명으로 이 칼럼을 쓴 변봉현 기자는 일본 와세다대 재학 시절 야구부에서 활동했던 운동선수 출신이었다. 그는 이 시리즈를 통해 그해 8월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7회 여름 올림픽에 조선 선수를 내보내지 못하는 건 통합 체육 기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이후 전국 각지에 있던 동아일보 지국을 거점으로 체육 기관 결성 움직임이 일었고 그해 6월 16일 서울 인사동 명월관에서 전국 유지 50여 명이 모여 조선체육회 창립준비위원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변 기자뿐 아니라 인촌 김성수 선생, 장덕수 주간, 이상협 편집국장 등 당시 동아일보 관계자도 참석했다. 변 기자는 이 자리에서 창립준비위원을 맡았다.
이런 노력은 결국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 창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조선체육회는 ‘창립 취지서’를 통해 “조선 인민의 생명을 원숙(圓熟) 창달(暢達)하는 사회적 통일적 기관”을 목표로 삼는다고 밝혔다. 광복 이후 조선체육회는 대한체육회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대한체육회는 해마다 창립기념일에 “보라, 반공(半空·그리 높지 않은 공중)에 솟은 푸른 솔과 대지에 일어선 높은 산을!”로 시작하는 창립 취지서를 낭독한다. 이 글을 쓴 주인공이 바로 당시 동아일보 장 주간이었다. 장 주간은 조선체육회 초대 이사를 맡았고 조선체육회 초대 회장을 지낸 장두현 선생은 이듬해부터 1924년까지 3년 동안 동아일보 임원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체육회는 창설 후 첫 사업으로 1920년 11월 4일부터 사흘 동안 배재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개최했다. 동아일보는 이 대회 후원을 맡았다. 지난해 서울에서 100번째 대회를 치른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가 바로 이 대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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