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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Narrative Report]마지막 길… 누군가는 지켜봐야 하지 않겠소

입력 2014-02-20 03:00업데이트 2014-02-2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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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동 한마음장례실천나눔회 사무국장이 14일 경기 광명시 메모리얼파크 무연고 유골함 안치실에서 2012년 12월 27일 자신이 안치한 김모 씨의 유골함을 바라보고 있다. 김 씨는 살아서 아내와 자식들을 버린 업보로 죽은 뒤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무연고자로 남았다. 광명=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시신은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 위에 싸락눈이 쌓여 갔다. 장례식장은 시신 받기를 거부했다. 시신은 병원 주차장 바닥에 놓여 있었다. 간밤에 조선족 여성은 과부가 됐다. 시신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어깨가 떨렸다. 응급차 한 대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사단법인 한마음장례실천봉사회’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재동 씨(57)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이 씨가 다가가 말했다. “울지 마세요. 모시겠습니다.” 여성은 계속 고개를 묻고 흐느꼈다. 이 씨는 응급차 뒷문을 열고 시신을 들었다. 눈에 젖은 옷 탓에 시신은 무거웠다. 무게가 허리에 전해지자 끄응 신음이 나왔다. 그제야 여성은 천천히 일어났다. 이 씨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  

“수녀님, 자리 있어요? 갑니다.”
응급차가 병원을 빠져나갔다. 앞 유리 와이퍼가 내려앉는 눈을 밀어냈다.
‘개××들, 아무리 돈이 없다 해도 그렇지. 시신을….’
코끝이 아렸다. 2012년 1월. 이 씨는 경기 수원 성빈센트병원 장례식장으로 차를 몰았다.
○ 시작은 우연히 만난 ‘외로운 시신’ 한 구

8년을 거슬러 올라가 2006년. 지인에게 딱한 사연을 들었다.

“혼자 살던 할머니래. 돌아가신 지 사흘이 넘었는데 냉동고에 있다네. 자식들이 아주 없는 게 아니라 있는데 연(緣)을 끊고 살아서 구청도 어찌할 바를 모른대.”

어머니가 생각났다. 2001년 이 씨의 어머니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1980년부터 20년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권도 사범을 했던 이 씨는 한국에 돌아왔다. 길어야 한두 달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20년간 자리를 비운 불효가 이렇게 돌아오는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도 어머니는 멀쩡했다. 오히려 상태가 호전됐다. 3년 6개월이 지나자 암세포가 모두 자연적으로 소멸됐다. 의사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뻔한 그때가 생각났다. 냉동고 안의 시신도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내가 할게요. 할머니 제가 장례 치르겠습니다.” 비상금 480만 원을 털어 장례비용을 댔다. 경찰은 할머니처럼 냉동고에 장기 보관된 시신이 많다고 했다. 며칠간 냉동고 속의 시신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두려움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돕고 싶었다. 그렇다고 계속 돈을 쏟아 부을 사정이 안 됐다. 몸을 쓰는 법을 찾아야 했다. 보름 뒤, 장례지도사 자격증 과정을 시작했다. 염습(殮襲·시신을 닦고 수의를 갈아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부터 입관, 운구까지 배워 나갔다.

그때부터였다. 무연고 시신, 돈이 없어 냉동고에 방치된 시신들을 찾아나선 게. 뜻 맞는 이들도 모였다. 10여 명이 모여 시작한 장례봉사는 1년 만에 서울, 경기, 강원 등 전국 회원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럴 거면 번듯하게 사단법인을 만들자.’

2010년 10월. 이 씨의 뜻을 들은 보건복지부 사무관이 ‘한마음장례실천나눔회’라는 이름을 직접 제안했다. 성당 연령회(煉靈會·천주교에서 신도의 장례를 치러주는 봉사회)에서 30년간 잔뼈가 굵은 양정임 씨가 회장을 맡았다. 이 씨는 사무국장을 맡아 밖으로 뛰었다.
○ 봉사로 시작한 일, 목숨을 걸다

‘도와주세요.’

2012년 6월. 나눔회 인터넷 카페에 글이 올라왔다. 이 씨는 ‘연락 달라’며 전화번호를 남겼다. 1시간 뒤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성은 울며 필리핀에 간 아버지가 숨졌는데 ‘시신을 찾아가려면 돈을 내라’는 협박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전화를 건 자들은 e메일로 아버지의 시신 사진을 보냈다. 딸은 300만 원을 송금했지만 요구 액수는 1억 원으로 늘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 이혼해 집을 나갔다. 돈이 없었다.

“잘 들으세요. 모든 연락은 지금부터 저를 통해서 합니다.”

돈을 보내도 시신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필리핀에 가서 시신을 몰래 빼오는 것. 이사회를 소집했다. 격론이 오갔다. 이 씨가 납치되거나 죽을 수 있다고 이사들이 말렸다. 시신이 있다는 필리핀 민다나오는 내전지역이었다. 정부군도 치안을 통제하지 못했다. 외국인 관광객이 자주 납치 살해를 당했다. 한국인의 시신이 그곳 어딘가에 홀로 있었다.

“가야 한다”는 이 씨의 고집에 이사들은 흐느끼며 항공료를 각출했다. 이 씨는 가족에게 출국을 알리지 않았다. 출국날 인천국제공항. 이 씨는 전화를 건 최모 씨(30·여)를 처음 만났다. 최 씨는 혼자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이 씨의 등 뒤에 주저앉아 울었다.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한 이 씨는 라인을 총가동했다. 태권도 사범 시절 가르친 제자들과 친구들이 현지에 있었다. 마닐라에 숙소 2곳을 잡고 밤낮을 옮겨 다니며 묵었다. 총기를 소지한 현지 경호원을 고용했다. 수소문 끝에 민다나오의 한 병원 냉동고에 시신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트럭과 승용차를 빌려 민다나오로 달려갔다. 병원에 200달러(약 21만 원)를 주고 은밀하게 시신을 빼냈다. 병원 주변에 총 든 자들이 어슬렁거렸다. 이 씨는 시신을 마닐라로 옮겨 화장했다.

4일 뒤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딸 최 씨는 아버지와 재회했다. 걸어서 떠난 아버지는 유골함에 담겨 돌아왔다. 며칠 뒤 이 씨는 편지 1통을 받았다.

‘이재동 사무국장님께. 가슴을 치며 울던 두 달이 끝난 오늘에서야 짧은 단잠을 취하고 일어나 편지를 씁니다. 국장님께서 출국하시는 뒷모습을 보고 돌아서서 제가 흘렸던 눈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는 희망이 되어 아름다운 길을 가시길 소원합니다. 2012년 6월 22일. 최○○ 올림.’
○ 수많은 사연과 시신 앞에서

2012년 성탄절이 지난 12월 26일. 이 씨는 시체안치실에 서 있었다. 칠성판 위에 52세 남성의 시신이 올려졌다. 집에서 숨진 지 3일이 지나 발견됐고, 4일을 더 냉동고에 있었다고 경찰이 말했다. 시신의 생전 사연을 들었다. ‘이런 자도 내가 거둬야 하나.’ 증오가 일었다. 염습을 해야 할 손이 나가질 않았다.

숨진 김모 씨는 10년 전 딸과 아들을 버렸다. 각각 아홉 살과 일곱 살 때였다. 두들겨 맞던 아내는 집을 나갔다. 김 씨는 매일 술을 마셨다. 맨 정신일 때는 여자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남매는 그때마다 쫓겨났다. 여자가 돌아가길 기다리며 남매는 종일 동네를 하염없이 걸었다. 남매는 보육원으로 옮겨졌다.

이 씨는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시신의 셔츠와 추리닝 바지를 벗겼다. 얼어 푸른빛이 도는 전신이 드러났다. 탈지면에 알코올을 적셔 발가락부터 목까지 닦아나갔다. 시신을 뒤집었다. 뒤꿈치부터 뒷목까지 닦았다. 성기 주변에 분비물이 얼어 있었다. 닦았다. 옆으로 눕혀 하대(기저귀)를 채웠다. 버선, 속바지, 바지를 입혔다. 속저고리, 겉저고리, 두루마기, 도포도 입혔다. 탈지면으로 입안을 닦아냈다. 한지로 얼굴을 감싸 묶었다. 이 씨는 탈진했다.

염습을 마치고 김 씨의 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보육원을 수소문해 연락처를 알아냈다.

‘오늘 저녁 고 김○○ 님 염습과 입관을 했고 내일 오전 10시 세종시 화장장으로 갑니다. 힘드시겠지만 고인 가는 길에 동행할 수 있는지요. 장례비용은 다 처리됐으니 돈 걱정은 마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한마음장례실천나눔회 이재동.’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이 씨는 혼자 시신을 싣고 화장장으로 갔다. 화장(火葬) 소요시간은 1시간 15분. 캔커피를 조금 마셨다.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납골당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늘 더디 갔다. 화장을 마친 유골함을 응급차 조수석에 싣고 오는데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저와 제 동생은 마음을 정했습니다. 아버지 장례는 감사하지만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산길은 울퉁불퉁했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유골함도 들썩였다. 유골함에 잠든 김 씨가 몸을 뒤척이는 것 같았다. 아비가 자신을 빼닮은 딸과 아들을 세상에 낳고, 그 딸과 아들을 학대해 내쫓고, 딸과 아들이 장성해 죽은 아비를 버리는 참담한 천륜 앞에서 이 씨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유골함은 경기 광명 메모리얼파크 무연고 유골 안치실에 모셔졌다. 이 씨는 신청서류 신고인란에 ‘이재동’ 세 글자를 적었다.
○ 모든 사람은 죽어서도 고귀하다

해외를 오가며 무역업을 하는 이 씨는 매년 시신 40여 구씩을 수습했다. 조선족, 불법 체류자, 탈북자, 에이즈 감염자…. 이 씨는 “전국에 내 이름으로 안치된 유골함이 모두 몇 개인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14일 광명 메모리얼파크에서 만난 이 씨에게 물었다.

“왜 죽은 사람들을 찾아다니십니까. 산 사람에게 밥을 주거나 옷을 입히면 살아있는 한 보고 뿌듯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씨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아십니까. 노숙자 중에는 10만 원짜리 수표 1장을 속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래요. 오늘 굶거나 하루 이틀 길에서 자는 건 안 무섭다고. 그런데 죽으면 자기 시신이 어떻게 될지 몰라 무섭다고. 혹시 누가 이 수표를 발견하면 그걸로 자기 시신 장례 치러달라고 종이에 적어서 품에 넣고 다닌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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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가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사람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고귀하니까. 그런데 산 사람들한테 봉사할 사람은 많아도 죽은 사람한테는 드무니까. 무섭고 더러워 꺼리잖아요. 그럼 산 사람이 더 불쌍해요? 죽은 사람이 더 불쌍해요?”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잠시만” 하더니 납골당 휴게실을 나갔다. 양복 속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대 입에 물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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