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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Narrative Report]벽을 허무니, 情이 샘솟더라… 780채 이웃사촌

입력 2014-01-30 03:00업데이트 2014-01-3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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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 중계로 233 청구3차아파트 주민들이 관리사무소 2층 커뮤니티실에서 직접 만든 유용미생물(EM) 발효액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 EM발효액을 바탕으로 아파트 주민들은 마을기업인 ‘청구 EM환경 주식회사’를 세웠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안녕, 준호야. 11층 재원이야. 나는 6학년 12반인데 너는 몇 반이니? 안녕하세요? 만나면 우리 인사해요∼♡” 지난해 3월 서울 노원구 중계로 청구3차아파트 101동 엘리베이터 안에 연두색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삐뚤빼뚤 적은 편지가 붙었다. 도화지 빈 공간에 새 이웃을 환영하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안녕!”이라며 친구를 반기는 어린이의 인사부터 “몇 호세요? 알려주심 차 한 잔 대접할게요∼.” “새 이웃이 반가운 청구아파트입니다.” “환영합니다, 짝! 짝! 짝!” 하는 어른들의 초대까지. 도화지가 꽉 차자 주위에 포스트잇이 둘러쌌다. 준호네가 화답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새 이웃도 목소리를 냈다. “우리도 이사 왔어(12층), 가현.” 》  

고독사한 이웃 노인이 6개월이 지나서야 발견되기도 하는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낯선 풍경이다. 10집 중 6집이 아파트에 사는 시대, 편리함은 얻었지만 마당에서 뛰노는 즐거움이나 한여름 대문을 열어젖히고 이웃과 마주앉아 더위를 나던 골목길의 정겨움이 사라진 시대에는.

지금은 ‘공동체 아파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청구아파트. 공급면적 105m², 같은 크기의 780채 ‘상자’ 속에 따로따로 갇혀 살던 청구3차 주민들의 생활에 변화가 시작된 건 2007년 말이었다.

○ 소수를 위한 공간을 아이들 독서실로

강추위가 몰아친 2007년 12월. 101동 주민들이 화난 얼굴로 단지 한가운데 있는 관리사무소로 모여들었다. 그 전 한 달간 이른 저녁시간이면 온수가 끊겨 찬물이 나왔고 집안에는 한기가 돌았다. 부모들은 온수가 끊기기 전에 아이들을 씻기려고 발을 굴렀고, 가족들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원인은 101동 지하주차장을 개조해 만든 피트니스센터. 동 대표들의 모임인 입주자대표회가 외부업자에게 사업권을 줘 문을 연 곳이었다. 피트니스센터가 101동 수도 파이프를 끌어 쓰면서 온수를 빼가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

처음에는 주민들끼리 언성만 높였다. “센터 문을 닫아야 한다.” “입주자 대표회장이 물러나야 한다.” 목소리가 엇갈렸다. 수차례 회의 끝에 피트니스센터에 보일러를 별도로 설치하게 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입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부녀회 임원진이 새로 꾸려졌고 보일러 문제는 2008년 1월 해결됐다.

1년 뒤 새로 선출된 입주자대표회와 부녀회 임원진이 마주앉았다. 한바탕 분란을 겪었던 아파트 운영을 잘해 나가자는 자리였다. 변영수 입주자대표회장(59)이 “뭘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변 회장은 타운하우스를 관리하는 업체의 전무를 지낸 ‘아파트관리 전문가’였다. 심상숙 부녀회 부회장(49)은 관리사무소 3층에 있는 입주자대표 회의실을 아이들 독서실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입주자대표 회의실은 그때까지 동 대표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피트니스센터 문제가 한창일 때 주민들끼리 회의를 할 장소를 물색하다 입주자대표 회의실에 처음 가봤어요. 세상에, 그 넓은 공간에 대형 냉장고와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TV에다 동 대표들을 위한 9개 회전의자까지. 한 달에 한 번 열까 말까 한 입주자 대표들의 회의를 위한 공간으로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어요.” 심 부회장의 말이다.

주민들의 의견도 구했다. 84%가 찬성했다.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청구독서실 설립 추진위원’을 공모했다. 대원외고 교사인 주민을 위원장으로 엄마들이 책상, 의자, 스탠드 조명을 하나하나 골랐다.

독서실은 대성공이었다. 87석 정원으로 2009년 6월 27일에 문을 연 이곳은 한 달 사용료가 6만5000원(현재는 7만 원)으로 싸진 않았지만 30분 만에 전석이 마감됐다. 120명의 대기 접수자까지 받았다. 인근 아파트 5곳도 청구를 본떠서 독서실을 만들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청구독서실이 성공한 비결은 ‘엄마 총무’에게 있었다. 5명의 엄마 자원봉사자들로 총무팀이 꾸려졌다. 엄마 총무들은 독서실을 아이 방처럼 쓸고 닦았고, 등록자들을 자식처럼 돌봤다. 입실한 뒤 PC방으로 ‘새는’ 아이에겐 “○○는 얼굴이 잘생겨서 대학 가면 ‘인기 짱’일 텐데”라며 구슬렸다. 처음엔 슬슬 피하던 아이들이 나중엔 친엄마에게도 하지 못할 얘기까지 ‘엄마 총무’들에게 털어놓으며 고민 상담을 했다.

○ 회의실이 열리고 마음도 열린 주민들

서울 노원구 중계로 청구3차아파트 주민들은 행정 공간으로 쓰던 관리사무소 건물을 차례차례 독서실, 도서관, 문화센터 등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바꿨다. 관리사무소 건물은 주민들이 내 집처럼 찾는 동네 사랑방이 됐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동 대표들이 회의실을 내놓고 아이들이 관리사무소를 집처럼 편하게 오가자 주민들도 조금씩 달라졌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몇 달 앞두고는 중학생 엄마들이 “고3 수험생들에게 독서실 좌석을 우선 내주자”라는 의견을 냈다. 자정 넘어 독서실에서 나오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관리사무소 앞에서 기다리던 엄마, 아빠들 간에 말문이 트인 것이 이런 의견을 편하게 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다음 프로젝트는 도서관이었다. 청구독서실 ‘출신’ 대학생들이 아이디어를 냈다. 주민들이 각자 갖고 있는 책들을 돌려보는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2010년 6월 관리사무소 2층의 15m² 남짓한 부녀회 창고가 개방됐다. ‘북 카페’를 운영하던 주민이 책장을 기증했다. 주민들은 아이들이 읽은 전집을 내놓았다. 도서관 앞에서 ‘읽고 싶은 책’도 접수했다. 주문이 들어오면 연간 200만 원인 서울시의 ‘작은 도서관’ 지원금을 받아 책을 샀다. 지난해만 234만4460원어치 새 책을 채워 넣었다.

조정래의 ‘정글만리’ 같은 신간부터 영어 동화까지 책장에 5000여 권의 책이 들어찼다. 하교하는 초등학생들이 도서관에 들러 책을 골라 들고 집으로 가는 게 익숙한 풍경이 됐다.

아이가 독서실에서 공부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동안 기다릴 주민공간이 필요해졌다.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쓰던 2층 사무공간을 손보기로 했다. 소장을 포함해 3, 4명이 띄엄띄엄 책상을 놓고 쓰던 공간을 6분의 1로 줄였다. 145m² 정도의 나머지 공간을 ‘커뮤니티실’로 바꿨다. 주민들이 편안히 바닥에 앉을 수 있도록 온돌 바닥과 장판을 깔았다. 주방을 만들고, 커피 기계도 놨다. 1층과 2층을 잇는 인터폰도 설치했다. 어린이집이나 학원차가 관리사무소 앞에 서면 운전기사가 인터폰으로 연락해 “○○ 엄마 내려오세요”라고 연락한다.

주민공간이 마련되니 문화강좌를 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도자기 굽기, 바리스타 되기, 요가 배우기 등 주민들이 원하는 과정이 개설됐다. 바리스타 과정은 20명씩 두 반으로 운영될 만큼 인기가 좋았다. 주민이 강사가 되기도 하고, 뜻 맞는 이들이 모여 강좌를 열기도 했다.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번호가 공개된 변 회장의 휴대전화는 새벽에도 울린다. “윗집 소음 좀 해결해 달라” 같은 민원부터 아파트 공동생활을 위한 제안까지 다양한 내용이다. 강경석 관리소장은 “주민들의 불만이 늘어난 게 아니라 숨겨져 있던 민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음식물쓰레기로 퇴비 만드는 마을기업 일궈내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한 ‘공동체’는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업으로 확장됐다. 2011년 1월 23일 아침 출근길 주민들은 밤부터 내린 눈에 큰 불편을 겪었다. 발목까지 눈이 쌓였지만 아침에도 그칠 줄 몰랐고 경비원들이 쓸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던 주민들이 하나둘씩 쓰레받기, 삽을 들고 나와 힘을 보탰다. 눈을 치우는 인원은 금세 100여 명이 됐다. 어두워질 때쯤 눈이 그치고 드디어 맨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고생했다”며 인사를 나눴다.

다음 날 아침 차가 엉키면서 소동이 빚어진 인근 다른 아파트와 달리 청구 주민들은 ‘함께하는 것’이 가져다준 기쁨을 느끼며 뿌듯해했다. 마을기업인 ‘청구3차 EM환경 주식회사’는 이런 바탕 위에 세워졌다.

유용미생물(EM·Effective Microorganisms)을 아파트 음식물쓰레기에 적용해보자는 변 회장의 구상에 주민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단지에서 하루 1t의 음식물쓰레기가 나오고 처리에만 월 117만 원이 들었다. 직접 만든 EM을 활용해 음식물쓰레기를 발효시켜 이 비용을 아끼자는 생각이었다.

뜻이 맞는 주민 10여 명이 EM을 만들어 매달 한 차례 열리는 장터를 찾은 주민에게 한 병씩 무료로 안겼다. 빨래를 빨 때 넣거나 샴푸에 섞어 쓰면 좋다고 알렸다. 시큰둥하던 주민들이 써본 뒤에는 만드는 방법을 물어왔다. 쌀뜨물과 EM원균, 설탕, 소금만 있으면 된다고 비법도 전수했다.

본격적인 마을기업은 2011년 6월 출범했다. 처음엔 비용이 과해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마침 서울시가 공모하는 마을기업에 선정됐다. 5000만 원을 지원받아 관리사무소 지하에 EM발효액 제조기, 음식물쓰레기 건조분쇄기, EM과 음식물쓰레기를 섞는 교반기, 저장탱크를 마련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퇴비를 아파트 화단에 뿌리고 남은 건 외부에 팔았다. 노원구청이 중랑천 폐용지를 공원과 텃밭으로 가꾸기 위해 이 퇴비를 사간다. 지난해 생긴 순이익 1000여 만 원은 주민에게 돌려줬다. 제설장비를 사고, 가구당 20L짜리 종량제 봉투를 60장씩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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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아파트의 공동체 실험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이달 24일 오전 9시, 예비 중학생 예은 양(13)의 손을 이끌고 유항옥 씨(43)가 관리사무소를 찾았다. 2011년 7월 만들어진 ‘청구 나눔봉사단’ 안내문을 봤다고 했다. 변 회장이 “함께 복지시설도 찾기도 하고, 아파트 단지 안 나무에 물을 주거나 스스로 할 일을 정한다”고 설명하자 유 씨는 “짜여진 프로그램을 따라만 하는 줄 알았더니 스스로 고민해서 봉사할 거리를 찾는다고 하니 더 좋다”고 화답했다.

이런 ‘상담’이 이뤄지는 동안 초등학생들이 관리사무소 2층을 쉴 새 없이 들락거린다. 이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책이 들려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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