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대 남성 정모 씨도 서울에서 백신을 취급하는 이비인후과, 내과 10여 곳에 예약금 1만 원씩을 내고 석 달가량 기다렸지만 아직 주사를 맞지 못했다. 정 씨는 최근 병원에 들렀다 간호사들끼리 하는 말을 우연히 듣고 화가 치밀었다. 그는 “약이 귀하다 보니 병원 사람들이 가족, 친지들부터 맞게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돈 없고 백 없는 서민들은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하나”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해부터 국내에 공급되기 시작한 대상포진 예방백신이 품귀현상을 빚으면서 가격 폭등이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종합병원에서는 13만 원, 의원에서는 18만 원 정도면 맞을 수 있는 백신 접종비가 껑충 뛰어올랐다. 심지어 노인들 사이에서는 ‘병원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백신을 구할 수 없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다.
스트레스 관리, 영양 섭취 말고는 별다른 대비법이 없었지만 지난해부터 백신이 국내에 공급되면서 예방이 가능해졌다. 백신은 발병을 50% 이상 억제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신경통 발생 가능성도 60∼70% 줄인다. 대한감염학회는 60세 이상 노인에게 백신 접종을 권하고 있다. 대상포진을 앓은 경험이 있는 사람도 백신을 맞으면 재발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국내에 공급되는 백신은 한국엠에스디의 조스타박스주 단 한 종류다. 문제는 백신 공급이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난해 약 3만 도즈(1인에게 공급되는 양), 올해 약 7만 도즈가 공급됐지만 시중에 물량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정부는 백신 품귀사태를 사실상 방관하고 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품목이기 때문에 가격 관리를 할 수 없다는 태도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정부는 국가필수예방접종 15종을 제외하고는 관리 책임이 없다”고 밝혔다. 백신 허가와 유통 관리를 담당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면 시장논리에 따라 가격이 좌우된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환자 단체들은 반발하고 있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장은 “백신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도 일반 의약품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유통 관리에 나서 누구든지 백신을 맞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