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86>

  • 입력 2009년 9월 22일 13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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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한 번 더 재판이 열렸지만, 석범은 판세를 뒤집을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강 마이클 판사는 더 이상 논의 사항이 없다면 다음 재판에서 배심원의 판결을 듣겠다고 석범에게 통고했다. 석범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심리를 진행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이번 심리에서는 글라슈트를 직접 법정에 데리고 나오겠다며 허락을 구했다. 피고인 민선은 이미 승리를 낙관한 듯, 이번 기회를 글라슈트 팀원인 자신의 업적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홍보수단으로 삼으려는 듯, 글라슈트의 법정 출두에 동의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글라슈트가 나설 증인석과 배심원석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레이저 벽을 세웠다.

글라슈트가 등장하기 전, 석범이 비장한 목소리로 배심원들에게 배경 설명부터 했다.

"존경하는 배심원 여러분! 그리고 재판을 시청하고 계신 세계 시민 여러분! 오늘 저는 보안청에서 추진된 일급 비밀 하나를 공개할까 합니다."

"잠깐!"

강 판사가 석범의 진술을 끊었다.

"보안청 기밀사항을 드러내면, 은 검사는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법정에서는 어떠한 면책 특권도 없음을 분명히 해도 되겠습니까?"

석범이 이미 각오한 듯 담담하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재판장님! 저는 보안청 특별수사대 검시 3팀 소속입니다만, 검시 3팀은 대외적 팀명이고, 정식 명칭은 대뇌수사팀입니다. 대뇌수사팀은 '스티머스'라는, 피살자의 뇌에서 단기기억을 추출하여 영상으로 옮기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범인을 추적 체포하는 특별수사팀입니다. 제가 팀장이고, 남앨리스, 성창수, 지병식 이렇게 세 형사가 팀원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특징은 피살자들의 뇌가 모두 사라졌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스티머스'를 사용하여 살인범을 잡는 대뇌수사팀의 수사 방식을 무력화시키려는 범인의 시도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스티머스'라고 했습니까? 피살자의 마지막 단기기억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는 거지요? 놀라운 일이군요. 관련 자료를 보여줄 수 있습니까?"

석범이 준비한 동영상을 허공에 띄웠다.

"이것은 사건번호 35, 독사로 살인을 저지르는 클락을 체포할 때 스티머스에서 얻은 자료입니다. 잠깐 보시겠습니다."

먼저 피살자의 뇌를 스티머스에 넣는 과정이 다큐멘터리 식으로 간단히 소개되었다. 그리고 스티머스를 통해 영상으로 옮겨진 피살자의 마지막 기억이 등장했다.

석범이 설명을 이었다.

"연쇄살인범은 글라슈트라는 격투 로봇에 인간의 뇌를 얹어 가공할 힘을 뽑아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피살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꽃뇌, 도그맘, 변주민 선수는 '미성여자고등학교 동네 한 바퀴'라는 유료 사이트에서 박열매 씨를 죽음으로 내몬 축구만세, 여자싫어, 버터플라이입니다. 또 방문종 군은 그 세 사람을 추종하여 여러 번 사이버 폭력을 일삼은 고등학생입니다. 박보배 양의 경우는 방문종 군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반인반수족이 저지른 우발범죄였습니다. 노윤상 원장의 경우는 피살자들의 공통점을 들킬까 우려한 범인이 노 원장의 입을 영원히 막아버린 거겠지요."

강 판사가 핵심을 되짚었다.

"동네 한 바퀴 사건! 기억납니다.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도 실제 살인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사건이죠."

석범이 허공에 사진 한 장을 띄웠다. 흑백사진 속 여인을 본 배심원들이 놀란 눈으로 민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보시다시피 피고와 꼭 닮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이 사진 속 여인이 바로 피고의 친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바로 동네 한 바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박열매 씨입니다."

강 판사가 사실 확인을 위해 되물었다.

"이 여인이 박열매 씨고, 피고가 그녀의 딸이다 이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피고는 어머니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도 하고 글라슈트도 우승시키기 위해,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이루려고 연쇄 살인을 저지른 겁니다."

법정이 침묵에 휩싸였다. 그 침묵은 석범이 배심원들의 마음을 매우 강하게 흔들었다는 증거였다. 민선이 환한 미소와 함께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브라보! 참으로 멋진 소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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