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87>

  • 입력 2009년 9월 23일 14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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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은 석범의 탁자 앞까지 걸어와서 허리를 숙여 그와 눈을 맞췄다.

"은 검사님은 곧 소설가로 데뷔하셔도 되겠어요. 박열매 씨가 제 어머니인 건 사실입니다. 또 제가 어머니를 닮은 것도 사실이고요. 하나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물증이 전혀 없는 허튼 소립니다. 이 두 사실과 제가 연쇄 살인자라는 주장은 전혀 이어지지 않습니다."

석범이 탁자 위 그녀의 손등을 짚으며 일어섰다.

"피고의 연쇄살인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있습니다. 글라슈트를 본 법정에 세우고 싶습니다. 재판장님!"

강 판사가 허락하자, 글라슈트가 천천히 객석 중앙 통로로 걸어 들어왔다. 배심원들의 얼굴이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글라슈트가 피고석에 멈춰 서자, 석범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피고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보안청 특수대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셨으니, '스티머스'의 성능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지 말씀해주십시오."

민선이 자신 있게 답했다.

"피살자의 단기기억을 놀랄 만큼 생생하게 복원하는 장치입니다. 100퍼센트 신뢰해도 좋습니다. 조작은 전혀 없습니다."

석범이 글라슈트를 올려다보았다.

"결승전을 마친 뒤 글라슈트를 점검하면서 로봇의 머리 부위에서 변두리 격투가 변주민의 뇌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뇌를 손상 없이 보관하다가, 법정으로 오기 전 스티머스로 작동하기 쉽도록 처리를 마쳤습니다."

글라슈트가 입장한 길을 따라 스티머스가 장착된 간이탁자가 들어왔다. 앨리스가 그 앞에 섰다.

"변주민의 마지막 단기기억을 영상으로 보게 되는 겁니까?"

강 판사가 글라슈트와 스티머스를 번갈아 살피며 물었다. 민선은 어색하긴 해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조금 특별하게 변 선수가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였던, 그러니까 피살당하기 직전의 단기기억을 영상으로 복원하지 않고 글라슈트의 행동으로 재현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변 선수는 눈을 가린 채 살해당했던지, 마지막 단기기억을 복원한 영상에서는 검은 화면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시작할까요?"

앨리스가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글라슈트의 목이 가볍게 턱턱 두 번 꺾였다. 변 선수의 뇌가 글라슈트의 몸과 이어진 것이다. 글라슈트가 양팔을 앞으로 둥글게 모은 다음 펄쩍 펄쩍 제 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몸을 돌리면서 허리를 한껏 젖혔고 때론 두 발을 번갈아 놀며 외발을 뛰었다. 그 모양이 귀엽고 천진난만해서, 배심원 중에는 입을 가린 채 웃는 이도 있었다. 강 판사가 물었다.

"저게 정말 변 선수의 마지막 단기기억이 맞습니까?"

석범이 답했다.

"틀림없습니다. 지금 변 선수는 '죽음의 게임'을 강제로 즐기는 중입니다."

"죽음의 게임?"

"이번에는 게임 도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앨리스가 간이탁자 밑에서 검은 가방을 꺼내 거꾸로 뒤집었다. 이마에 날카로운 송곳을 단 작은 육족 로봇이 바퀴벌레처럼 쏟아졌다. 앨리스가 거대한 여자 고무인형을 글라슈트의 품에 끼워 넣었다. 육족 로봇은 글라슈트의 발목을 향해 달려들었고, 글라슈트가 20센티미터 이상 발을 들자 다음 목표를 찾아 움직였다. 글라슈트 품에 안긴 고무인형이 조금이라도 지상에 가까워지면 로봇들이 인형의 발목을 노렸으며, 그때마다 글라슈트는 허리를 젖혀 인형을 높이 들었다.

육족 로봇의 쉼 없는 공격에 글라슈트도 무릎을 꿇었다. 육족로봇들이 사정없이 글라슈트와 인형의 몸을 송곳으로 찔러댔다. 배심원 중 몇몇 여인은 눈물을 훔쳤다. 글라슈트가 완전히 쓰러져 움직이지 않자, 육족 로봇도 공격을 멈췄다.

"설명을 해보시오. 은 검사."

강 판사의 추궁을 받은 석범이 대답 대신 앨리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앨리스가 다시 버튼을 누르자,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민선의 두 무릎이 흔들리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노민선 박사가 특허출원을 낸 '악몽방지 뇌파 자동 작곡 시스템'입니다. 방금 글라슈트가, 아니 사랑하는 달링 4호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쓰러진 변주민 선수의 뇌파로 자동작곡된 것이 바로 지금 흐르는 음악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노민선 박사만이 이 시스템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노 박사는 이 시스템으로 변 선수의 분노를 극대화한 후 살해하였습니다. 노 박사! 어떻습니까? 제 설명 중 틀린 부분이 있습니까?"

고목이 쓰러지듯, 민선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연쇄 살인마를 위한 마지막 발라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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