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63>

  • 입력 2009년 8월 20일 13시 40분


최볼테르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건이지만,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한반도를 가장 떠들썩하게 했던 '배틀원 2049'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가 우승 축하 연회장 2층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은 전세계적인 핫 이슈였다. <보노보>는 '촉망 받는 젊은 과학자가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보도하면서, '배틀원 2049'에서 볼테르의 활약상과 함께 그의 일생에 대한 영상 스케치를 계속 내보냈다.

볼테르의 죽음은 글라슈트의 이상행동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로봇 격투 관계자들에게도 비상한 관심거리였다. 연회장 2층에서 벌어진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석범과 민선 정도인데다가, 글라슈트가 이상행동을 보이기 직전 복도의 CCD-TV 촬영 시스템에 방어벽을 용의주도하게 설치한 결과 촬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건 정황을 담은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날 연회장 2층에선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글라슈트는 무슨 행동을 한 걸까? 왜 4강전에 출전했던 로봇들이 모두 박살난 걸까? 그것이 최볼테르의 죽음과는 또 무슨 관련이 있을까? 질문이 쏟아졌지만 밝혀진 것은 없었다.

은석범의 스마트노트에 적힌 연쇄살인 용의자 리스트에서 최볼테르는 언제나 제일 윗자리를 차지했다. 석연치 않은 서사라의 실종, 글라슈트의 이상행동, 그리고 그날 밤에 나눈 마지막 대화들. 모든 것들이 흩어진 퍼즐처럼 혼란스러웠다.

석범은 일련의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해 최볼테르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에 가면 뭔가 작은 단서라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검사로서 숙련된 수사 과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볼테르의 집으로 들어서자, 정리되지 않은 옷가지와 설거짓거리부터 눈에 띄었다. '배틀원 2049' 기간 동안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짐작케 했다.

"도우미 로봇도 사용하지 않았군."

석범은 2층으로 올라가서 서재를 살폈다. 서재 책상 위에는 IEEE Transactions on Robotics 최근호가 한 가운데 펼쳐져 있었다. 최근까지 읽던 논문이었다. 로봇 공학 저널들이 그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우승을 하고도 논문을 읽고 있었다니……"

그의 서재는 여느 서재와는 달리 간단한 로봇 조립이 가능한 실험실을 겸했다. 휴머노이드 더미 로봇과 결승전 당시 글라슈트에게서 떨어져 나간 하체 부품들이 실험실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Unsupervised robot control』(자율학습형 로봇 조정)이라는 책도 눈에 들어왔다. 볼테르는 귀가해서도 '글라슈트가 왜 이상행동을 보였는지'를 연구한 것이다.

석범은 볼테르의 책상에 앉아 몸을 돌렸다.

"IBM 450!"

반응이 없었다.

"볼테르!"

서재는 여전히 조용했다.

"맥 9000!"

갑자기 천장에서 Mc9000 컴퓨터와 모니터가 내려왔다. 요즘 인기를 끄는 최신 모델이다. 컴퓨터가 켜지면서 볼테르가 최근까지 작업한 문서들이 모니터를 가득 메웠다.

"최근 문서!"

탐색기는 최근에 볼테르가 작업한 문서들을 '시작 문장'들과 함께 나열해 주었다. 석범은 문서 제목과 시작 문장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글라슈트와 나! 인간의 폭력성만큼 매혹적인 것도 없다?"

폭력이라는 단어가 확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글라슈트와 나'란 제목의 파일이었다. 이 파일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일기이거나 가벼운 에세이처럼 보였다. 거친 문장들이 속사포처럼 독백하듯 나열된 것으로 볼 때, 기고용으로 쓴 것 같지는 않았다. 혹은 무척 거친 '초고'일까.

<글라슈트와 나>

인간의 폭력성만큼 매혹적인 것도 없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 이런 극적인 상황에서 인간은 가장 정교한 몸동작을 보인다. 상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제압의 눈. 본능적 죽음 공포가 아로새겨진 근육의 긴장. 쉴 새 없이 건들거리듯 움직이는 다리와 순식간에 이동하는 무게 중심. 온 체중을 주먹에 싣는 충격량. 동물처럼 원초적인 어깨 밀치기의 긴장감. 나는 이런 순간을 즐긴다.

열 네 살 여름, 마산 로봇랜드로 떠난 사이언스 캠프에서 깡패들의 살벌한 싸움을 목격했다. 고등학교 형들과 함께 떠난 이 사이언스 캠프는 무선으로 조종되는 헬리콥터를 개발하는 영재 캠프였다. 영재학교 생활이 지겨울 무렵이라, 나는 '공부'가 아니라 '땡땡이'처럼 이 캠프에 참가하였다. 오전에는 로봇랜드 전시관을 둘러보고, '로봇태권 V 다리'를 건너 창의학습관에 있는 실습실에서 오후부터 '레고 마인드 스톰 헬리콥터'를 만들었다. 그땐 정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밤 11시쯤 됐을까. 출출해서 컵라면과 콜라를 사먹으려고 은혁이 형과 매점에 가는 길에 놀이공원 공터에서 살벌하게 싸우고 있는 형들을 보았다. 키가 작은 두 명이 여섯 명의 덩치 큰 패거리들과 맞붙은 상황.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두 명 중에서도 더 작아 보이는 형이 '페리오'라는 마산 지역의 '전설적인 주먹짱'이었다.

그날 페리오가 보여준 현란한 발 솜씨는 충격적이었다. 오랫동안 킥복싱으로 단련되었기 때문일까. 날아오는 주먹을 빤히 쳐다보며 정확히 피했고, 벽을 타며 상대를 걷어차는, 영화속에서나 보던 현란한 발차기를 미친 듯이 보여주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몸동작이 또 있을까.

나는 그날 페리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무언가 억눌린 분노가 그대로 서린 눈빛은 6명이 아니라 60명과 싸워도 이길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다. 분노는 힘을 모은다. 폭력은 가장 아름다운 몸동작이다.

왜 나는 격투로봇에 매혹되었을까. 과학기술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의 대학에 자연스레 입학하였고, 로봇공학 외엔 특별히 흥미로운 전공이 없어 선택한 것 같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날의 기억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로봇이 인간을 따라오는 날, 로봇이 인간의 수준에 이르게 되는 날.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 날은 우리 작고 날렵한 글라슈트가 페리오가 되는 날이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회전.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무게 중심과 펀치 파워. 상대의 공격을 빤히 바라보면서 피하는 순발력. 조금만 계산이 틀려도 머리가 돌아가고 허리가 잘리고 죽음신호를 내보낼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보이는 정교한 움직임. 나는 그런 로봇을 만들고 싶다. 그런 로봇은 발레나 피겨 스케이팅 로봇만큼 아름답다!

나는 글라슈트의 순발력이 좋다.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짜여 0.0001초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정교한 움직임이 사랑스럽다. 내가 시킨 모든 계산을 순식간에 해내는 우직함이 좋다. 황금색 다리, 네이비 블루빛이 서려있는 티타늄 III 가슴, 그리고 붉은 빛의 턱선. 세련된 윤곽선과 움직임의 곡선이 좋다. 마치 오래된 수공 시계처럼. 천공의 운행과 엔트로피의 흐름을 정교하게 추적하는 수공 시계를 만드는 장인처럼, 나도 '걸작'을 탄생시키기 위해 평생을 쏟아붓고 싶다.

글라슈트에게 페리오의 폭력성을 부여하고 싶다.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안에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폭력성을 흐르게 해주고 싶다. 내가 열 네 살 여름에 본, 페리오 형의 바로 그 폭력성 말이다. 노민선 박사가 처음 우리 팀에 합류한 날. 나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물었다. 인간의 폭력성은 어디에서 오냐고. 우리 글라슈트에게 잠재적인 힘까지 끌어낼 수 있는 폭력성을 주입하려면 인간 뇌의 어느 부위를 알고리즘화 해야 하냐고. 내가 일러준 대로 행동하는 로봇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모아야만 하는 글라슈트를 어떻게 만들 수 있냐고.

노민선은 내게 말했다. 가장 폭력적인 사람은 가장 끔찍한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폭력은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공포를 이기려는 안간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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