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ving칼럼]개성사람 최순성의 봉사정신

  • 입력 2001년 1월 17일 11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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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끝 무렵 개성에 한 부자가 살았다. 그의 이름 최순성(崔舜星). 당시 개성에는 인삼장사로 재산을 모은 부자들이 많이 살았는데 최순성은 이들과 달랐다.

그는 재산의 일부를 떼어 별도로 저축하였다. 이를테면 구휼을 위한 재단 기금이었다. 이를 급박한 사람들에게 주는 돈이라는 뜻으로 급인전(急人錢)이라 불렀다.

그는 개성 주변 사람들로 먹거리가 없어서 굶은 사람이나 가난해서 부모 초상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사람을 알아내 곡식을 보내 주기도 하고 장례비를 대주기도 하였다. 그는 알고 지내거나 모르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으며 신분이 천하거나 귀한 이를 구분하지 않고 이런 구호를 한결같이 벌였다.

그의 벗이 젊은 나이로 죽자 벗의 어린 아들을 데려가 길러주고, 장성하자 살 밑천을 마련해 주었다.

또 임규라는 사람이 가난한 속에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는 임규에게 달마다 양식을 보내 격려하였다. 임규는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는데도 양식이 떨어져 몇 끼 밥을 지어 주지 못하였다. 두 부부는 비관하여 "우리들이 어찌 삶을 탐내 최군에게 누를 끼치랴"라고 한탄하고는 문을 닫아걸고 죽기로 작정하였다.

며칠 뒤에 최순성이 이를 알아차리고 담을 넘어 들어가 "군자는 예전부터 빈궁하게 살아간 이가 많소. 그대가 굶어죽는다면 이 순성이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겠소?"라고 설득하였다. 임규는 이에 감동하여 문을 열어주었고 최순성은 죽을 끓여 대접하였다.

그는 의로운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내면서 인색한 부자를 미워하였다. 개성출신의 독립투사요 역사학자인 김택영은 "그의 손길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났으나 그는 덕을 베풀었다고 자랑한 적이 없었다"고 기록하면서 "천하의 장자"라고 기렸다.

개성 사람들은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최순성이 재산을 흩어줄 줄 아는 사람이라고 기렸다. 그가 죽자 혜택을 받았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부모의 초상을 치르듯 슬퍼하였다 한다.

그의 아들 최진관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급인전을 마련해 두었다. 그는 흉년이 들거나 춘궁기에는 조석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 마을을 바라보았다. 밥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집에 몰래 돈과 곡식을 보내 주었다. 그의 집에는 서울의 몰락한 양반출신 명사들이 몰려들어 식객이 되었다.

그의 아들이 진사라는 직함을 얻었으나 당시 벼슬을 사는 풍조를 외면하고 이웃 돕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김택영은 "개성에는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번 부자들이 많았으나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두 부자(父子)야말로 손상익하(損上益下)의 귀감"이라고 기록하였다. 손상익하는 넉넉함을 덜어 가난한 이를 돕는 정신을 말한다.

이이화(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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