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하종대]자존심 굽힐 줄 아는 中이 무섭다

  • 입력 2008년 6월 19일 02시 56분


지난달 12일 발생한 쓰촨(四川) 성 원촨(汶川) 대지진 때 중국은 내키지는 않지만 좀 더 해상도가 높은 재난지역 위성사진을 얻기 위해 미국에 여러 차례 손을 벌려야 했다.

산사태로 형성된 언색호(堰塞湖)의 붕괴를 막기 위해 호수의 숫자와 크기를 파악해야 했지만 중국의 위성사진으로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당초 언색호 수를 18개로 발표했다가 뒤늦게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34개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중국은 장기간 일본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다퉈 온 동중국해 가스전 공동개발에 최근 합의했다.

이는 중국으로서는 크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이번에 합의한 춘샤오(春曉) 등 2개 가스전은 일본 주장에 따르더라도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EEZ) 가장자리에 걸쳐 있을 뿐 대부분 중국의 EEZ 안에 들어 있다. 중국은 그동안 이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주권의 문제’라고 강조해 왔다.

일본 언론이 일제히 공동개발 합의를 타전한 16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협상에)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있다. 또 중국은 지난해 9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접견한 이후 중단했던 독일과의 인권대화를 복원하기로 최근 합의했다.

인권문제는 중국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다. 서방국가가 중국의 인권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내정 간섭’이라며 강력 반발해 왔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중국인에게 ‘인권’은 중국에 굴레를 씌우기 위한 핑계로 여겨진다.

‘중국이 세계 중심’이라는 중화주의로 똘똘 뭉친 중국이 이처럼 자존심을 굽혀가며 미국 일본 독일 등과 협력하는 이유는 자국의 실력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난해 11월 말 도쿄(東京) 하루미(晴海) 항에 입항한 중국의 미사일 구축함 선전(深(수,천))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미사일 구축함치고는 장비와 시설이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지난해 자체 개발했다는 제3세대 전투기 ‘젠(殲)-10’은 100대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미국의 차세대 전투기 ‘F-22’ 한 대를 당하기 어렵다고 한다.

세계 3위의 국내총생산(GDP)을 자랑하지만 중국의 1인당 GDP는 아직도 209개 국가 중 129위(2006년 기준)에 불과하다.

한국은 최근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사건을 잇달아 겪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 지난달 27일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미군사동맹은 냉전시대의 유물”이라며 한국의 안보기조를 폄훼했다.

한국 정부는 “친 대변인의 발언은 군사동맹에 관한 일반론”이라며 평가절하하다 뒤늦게 진상 파악에 나섰지만 아직 제대로 해명조차 듣지 못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촉발된 대규모 촛불시위도 광우병의 실질적 위험보다는 협상안이 중국 일본 대만 등 주변국보다 지나치게 양보한 것 아니냐는 민족적 자존심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개인뿐 아니라 민족, 국가의 자존심이 말로 소리친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자존심이 훼손당했을 때 이를 바로잡고 응징할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 뒷받침돼야 한다.

한국은 불과 반세기 만에 높은 경제성장과 민주발전을 이뤘지만 총체적 국력에선 아직 주변 강대국들에 미치지 못한다.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다면 감정적으로 대응할 게 아니라 더욱 단합해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한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데 자존심만으로 우리의 국위를 지킬 수는 없는 일이다.

하종대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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