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국민을 탄핵하고 싶은가

  • 입력 2007년 12월 23일 19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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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안 좋다며 약속을 미루자고 했다. 선거 막판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해 전략기획위원장을 맡았던 박선숙 전 청와대 대변인의 전화였다. 위로도 할 겸, 이런저런 얘기도 들을 겸 점심 약속을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는 얘기였다. 가냘파 보이지만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선거도 너끈히 치러낸 사람이다. 겨우 보름 남짓의 선거운동에 탈진해 약속을 미루자고 할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냥….” 그러고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애를 쓰셨는데…”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알 것 같았다. 지리멸렬하는 상황을 보다 못해 뛰어들었지만 못 볼 걸 너무 많이 본 탓에 마음의 병이 난 것이다. 그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DJ의 처지가 새삼 서러워 병증(病症)이 더 깊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선거는 ‘이명박의 승리’ 이전에 박순천 정일형 김대중으로 이어져 내려온 ‘50년 정통야당’의 멸문지화(滅門之禍)라고 할 만하다. 거의 하프스코어에 가까운 패배는 1952년 이승만 대 조봉암의 선거 이후 처음이고, 서울에서의 완패도 처음이다. 풍비박산(風飛雹散)은 아마도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신당은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실감을 못하는 듯하다. 공동선대위원장이자 당의 원로인 정대철 고문은 선대위 해단식에서 기자들에게 “우리는 아니야”라며 웃었다. 국민에게 버림을 받은 건 노무현 정권이지, 정동영 신당이 아니라고 귀띔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 기가 막힐 뿐이다. 그는 한때 DJ 다음으로 ‘50년 정통야당’의 적자(嫡子)임을 자부하던 인물이다. 정일형 박사가 부친이기도 하지만, 그는 DJ 앞에서 직접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다. 박선숙 씨가 자리를 깔고 누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싶다.

신당 사람들은 ‘아직 BBK 특검이 남아 있으니 완전히 망한 건 아냐’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노름으로 집안을 거덜 내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망나니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국민이 그러면 못쓴다고 말리자 이번엔 “민도(民度)가 낮은 게 문제”라고 삿대질을 한다. 망나니도 모자라 부모의 뺨을 때리는 패륜(悖倫)도 서슴지 않겠다는 투다. 탄핵사태로 태어난 ‘탄돌이’ ‘탄순이’들이라 수틀리면 국민 탄핵이라도 해 보겠다는 것인가.

이런 사념(思念)들에 빠져 있는데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자기기인(自欺欺人)’을 선정했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정말 신당에 해 주고 싶은 말이다. 김경준 같은 사기꾼이야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일 수 있다고 치자. 그건 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사기꾼의 말 한마디로 자기를 속이고, 국민과 세상을 속인 죄는?

이미 스스로를 속인 뒤라 아마 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BBK 특검 수사를 해도 ‘거짓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정동영 후보와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정대철 이해찬 한명숙 손학규 김근태 정세균 김한길 추미애 천정배 문희상 씨는 정계은퇴를 하든지, 이민을 가야 하지 않겠는가. 거짓된 세상에서 오욕(汚辱)을 참고 사느니 그 편이 훨씬 떳떳하지 않겠는가.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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