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옥자]그는 임금노릇을 즐기지 않았다

  • 입력 2007년 9월 27일 02시 59분


우리는 옛 임금들이 절대 권력을 휘둘렀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아마도 서양 근세 군주들의 모습에서 생겨난 허상일 터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대에는 절대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탁월한 영도력을 발휘해 국가 사회에 기여한 일이 많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절대 왕권의 폐단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책과 장치들이 생겨났다.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왕권과 신권(臣權)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했다. 그 이상이 실현된 조선 후기에는 붕당이라 일컬어지는 정파가 생겨나서 왕권을 압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른바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평가 절하되는 붕당정치는 오늘날의 정당 정치에 비견된다. 각 붕당이 일진일퇴하면서 입헌군주제와 유사한 정치 형태를 띠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며 왕권의 절대 권력화를 막았다.

그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17세기 후반 붕당정치가 가열되면서 신권이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이른바 18세기 탕평정치의 시대가 왔다. 숙종 후반기부터 영조를 거쳐 정조대까지다. 이들은 이른바 ‘군사(君師)’를 자처한 임금들이다. ‘임금이자 스승을 겸한다’는 것이니 17세기에 붕당의 대표이자 학계의 영수인 산림(山林)의 역할까지 떠맡고 나선 것이다. 산림은 국가의 큰 스승을 자처하며 세도(世道·세상을 다스리는 올바른 도리)를 담당했다. 이제 왕이 그 역할까지 맡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정조대왕, 수상록서 심경 토로

조선 왕조가 지도자 교육에 힘썼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세자나 세제(世弟), 세손이 동궁에 있을 때는 서연(書筵)을 열어 차세대 지도자로 교육했다. 왕이 되고 나서도 하루에 세 번 신하들에게서 경연(經筵) 강의를 들어야 했다. 이런 전통이 쌓이면서 학문적으로도 신하들을 능가하는 임금들이 출현했던 것이다. 탕평책은 국왕들이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 모든 이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주겠다는 정책이었다.

‘군사’는 동양의 이상 사회로 일컬어지는 요순 삼대에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이 했던 역할로 동양 전통사회의 정치적 역할모델이었다. 요순시대의 재현을 꿈꾸었던 유교 사회에서 요순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이들 세 임금의 시대는 결국 조선의 문예부흥기가 되었고 진경(眞景) 문화의 시대가 되었다.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24년간 재위했던 정조 대왕은 왕위에 오른 지 20여 년이 가까워진 어느 날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나는 남면(南面)을 즐기지 않았다. 오늘날 조정 신하들은 반드시 내 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즉위한 처음부터 하루가 지나면 마음속으로 스스로 말하길 ‘이날이 지났구나’ 했고 이틀이 지나면 또 그렇게 했다. 하루 이틀 하여 드디어 지금 이십여 년에 이르렀다. …날마다 정돈하고 수습함으로써 마음을 삼을 따름이다.”

정조의 수상록이라 할 수 있는 ‘일득록(日得錄)’ 훈어조(訓語條)에 나오는 대목이다. 여기서 남면이란 임금이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니 ‘임금 노릇’이라 번역할 수 있다. 정조가 왕위에 올라 하루하루를 얼마나 열심히 진지하게 임금 노릇을 하였는지 느껴지면서, 임금 노릇을 즐기지 않았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왕조 시대의 지도자인 왕의 이런 언행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는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린다. 얼마나 자신 있고 헌신적일 수 있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그들의 자만과 만용이 놀랍다.

대선 출마자들에게 경종 울려

그들에게 ‘왜 대통령이 되려 하고,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정치 에세이를 직접 써 보게 하면 어떨까? 정책이랍시고 참모들이 만들어 내어 입력해 준 것을 앵무새처럼 외워대다가, 선거가 끝나면 금방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지금의 행태보다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거기에는 대통령 노릇을 즐기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도 반드시 쓰게 할 일이다. 유권자들도 내가 찍은 사람이 안 되면 패배감을 느낄 것이므로 당선될 것 같은 사람에게 표를 준다는 대세론에 현혹되지 말고, 꼭 되어야 할 사람을 찍어야 할 것이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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